정당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후보자를 정식으로 추천하는 것을 공천(公薦)이라고 한다. 정당에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이 공천이다. 공천은 해방 후에 나온 용어가 아니고 문헌상으로는 고려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제도다. 왕조 국가의 공천은 여러 사람이 일정한 규칙에 의해서 학식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공천은 크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을 천거해 첫 공직에 나아가게 하는 것과 이미 공직에 진출한 사람을 승진시키는 두 가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의 공천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태학(太學), 곧 성균관의 공천이었다. 성균관은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과거 급제를 위해 공부하는 곳이었으므로 서로 먼저 관직에 진출하려고 하기 때문에 추천 받기가 쉽지 않았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성균관 명륜당의 동쪽에 있는 동재(東齋)나 서쪽에 있던 서재(西齋)에서 숙식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인 도기(到記)에 서명해서 출석을 알렸다. 이를 원점(圓點)이라고 하는데 아침·저녁 두 번 서명해야 1점을 받을 수 있었다. 300점 이상의 원점을 취득한 유생만 성균관 유생들만 응시할 수 있는 관시(館試)에 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학문도 뛰어나고 행실도 뛰어나지만 과거 급제운이 없어서 여러번 낙방하는 유생들이 있었다. 이런 유생들을 같은 성균관 태학생들이 추천하는 것이 공천이었다. 태학을 비롯해서 여러 기관에서 공천된 인물들은 각 관서의 종9품 말직인 참봉(參奉)에 서용했다가 능력을 입증하면 승진시켰는데, 가기 어려운 자리 중의 하나가 사헌부 정6품 감찰(監察)이었다.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이나 감사원처럼 백관의 불법과 비리를 수사하거나 탄핵하는 자리이므로 일체의 흠이 없는 사람들이 공천에 의해서 보임되었다.
승진에도 공천이 적용되었는데, 그 절차가 아주 까다로웠다. 일정한 권점(圈點)을 획득해야 하는데, 여러 관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추천 대상자들의 이름 위에 ○표를 하는 것이 권점이었다. 일정 점수 이상의 권점을 받은 후보자를 이조에 공천했다. 권점이 가장 엄격했던 부서가 홍문관과 예문관 등의 문한(文翰) 기관이었다. 홍문관은 1차 권점과 2차 권점을 거치는데 1차 권점은 홍문관 부제학 이하의 홍문관 관원들이 실시했고 2차 권점은 의정부와 이조의 당상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1차 권점의 득점 기록을 적은 문서가 홍문록(弘文錄)이고 2차 권점의 득점 기록을 적은 문서가 도당록(都堂錄)이다. 1차 권점에서 많은 득표를 했지만 2차 권점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단 홍문관에 임용되면 부제학까지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홍문관의 장관인 대제학을 뽑을 때는 다시 권점을 실시했다. 이때는 전임 대제학들이 모두 참여해서 권점을 행했는데 이를 모여서 추천한다는 뜻에서 회천(會薦)이라고 했다.
선조 24년(1591) 이덕형(李德馨)이 31세의 나이로 대제학에 초탁(超擢:순서를 뛰어 넘어 발탁됨)되었는데 인망이 높아서 권점을 통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회천 결과 권점이 한 점 부족했다. 모두가 놀랐는데 김귀영(金貴榮)이 “이 늙은이가 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귀영이 “젊은 나이에 지위가 너무 이르니 덕이 익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자 이덕형이 듣고 기뻐했다. 당시 선비들이 두 사람 모두 아름답다고 여겼다.
이때 공론에 의하지 않고 사익(私益)에 따라 추천하는 것이 사천(私薦)인데 학식과 행실이 없는데도 사천했을 경우 추천하는 사람이나 추천 받은 사람 모두 공론(公論)에 저촉된 것으로 여겼다. 비루한 인물들로 치부되고 선비 반열에서 탈락되었으므로 누구나 사천을 꺼리게 되었다.
조선이 그나마 500년 유지된 것은 인재 선발과 승진에 투명하고 철저한 공천제도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무늬만 공천이지 실제는 사천이 횡행하는 현 풍토에 경종이 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