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게 웃고 있는 두 흑인 소녀, 소년이 있다. 윌리엄스 자매를 보고 영감을 얻어 테니스를 좋아하게 됐다는 아이들. 비너스와 세레나는 미래의 테니스 스타들에게 몸소 보여주고 있다.
스포츠만큼 만인에게 평등한 건 없다는 것을.
흑인 테니스에 새 희망 불어넣는 윌리엄스 자매의 인생 스토리를 엮어 보았다. /편집자 주
“16살이 될 때까지 완전한 프로진출은 막겠다”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
테니스 스타에서 의류 브랜드 디자이너까지 ‘팔방미인’ 비너스.
챔피언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비너스 윌리엄스(미국)에게는 왠지 어울리는 말이다.
12살이 되던 해, 이미 천재적인 플레이로 하늘을 찌를듯한 인기를 얻었던 비너스.
불치의 병에 걸린 어느 소녀가 한번이라도 윌리엄스 자매의 플레이를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현재까지 비너스에 대한 사랑이 계속되고 있다.
프로 운동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부상과 인종차별로 꿈을 성취하지 못했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는 비너스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테니스 선수를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비너스는 아버지의 뜻대로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고 ‘친절한 비너스’로 불리며 훌륭한 인격도 갖추었다고 평가 받는다. 최근에는 ‘일레븐(eleven)’이라는 브랜드를 내 놓으며 디자이너로서의 사업도 시작했으니 ‘팔방미인’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색깔로 따라가는 비너스의 인생 스토리, 무슨 색으로 시작해 볼까?
흑인 테니스의 신데렐라항상 비너스라는 이름 앞에는 ‘흑진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어떤 사람은 인종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제발 그 흑진주라는 말 좀 쓰지마라며 당부하기도 한다. 어찌 됐건 비너스는 동생 세레나와 함께 흑인 테니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94년에 프로에 데뷔한 비너스는 그 해 웨스트 뱅크 클래식대회(총상금 45만달러) 1회전에서 랭킹 59위의 션 스태포드(미국)를 꺾었고 다음 랭킹 18위의 에이미 프레이저(미국)를 꺾어 프로에 데뷔하자 마자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7세가 되던 1997년, US오픈 단식 결승에 진출하며 랭킹 20위권에 진입했고 흑인 테니스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하게 된다.
비너스는 2002년 2월 25일, 처음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르며 ‘비너스 시대’를 열었고 ATP와 WTA를 통틀어 컴퓨터 집계 방식의 랭킹이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1위에 오른 흑인선수로 기록되기도 했다(흑인 선수였던 알시아 깁슨이나 아서 애쉬가 현역시절 최고의 선수로 꼽히기도 했지만).
비너스의 아버지는 인종 차별로 인해 꿈을 버려야 했지만 비너스는 스포츠 선수로서 성공한 삶을 살며, 인종차별에도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너스에게 더 이상 피부 색은 중요하지 않다.
비너스가 윔블던을 사랑하게 된 재미난 사연잔디코트에서 흰색 유니폼을 입고 뛰어다니는 비너스. 4대 그랜드슬램 가운데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비너스는 윔블던에서만 4번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차지했다.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 윔블던 정상에 올랐던 비너스는 2005년, 4년 만에 ‘윔블던 여왕’에 복귀했고 코트에서 펄쩍펄쩍 뛰며 어느 때보다 흥분하고 감격스러운 모습으로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올해도 우승 쟁반을 들고
어쩔 줄 몰라했다.
비너스가 윔블던을 좋아하게 된 사연은 참 재미있다.
어렸을 때 비너스의 아버지는 세레나와 비너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우승하고 싶은 대회를 선택해라. 지금까지 해왔던 사람들만큼 한다면 너희들도 우승할 수 있다”라고.
그래서 비너스는 윔블던을 선택했고 항상 비너스가 하는 것이면 뭐든지 따라했던 동생 세레나도 윔블던을 골랐다.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된다. 다른 대회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때서야 세레나는 US오픈을 우승의 목표로 잡았다. 그리고 99년 US오픈에서 언니보다 먼저 우승을 차지했다. 비너스는 “그때부터 윔블던은 네 테니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대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 “당신이 있어 내가 존재합니다”기독교에서 자주색은 아버지로서의 신, 진실, 겸허함 등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비너스에게 있어 아버지는 신과 같은 존재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가족의 힘’은 비너스가 1994년 프로에 데뷔한 이후 10년이 넘게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버지 리차드는 총각 시절에 결혼상대를 고를 때도 신중했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훌륭한 아내’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 것. 신장 1m73cm 이상의 대졸여성을 찾던 리차드는 오랜 탐색(?) 끝에 미모의 흑인여성 오라신을 만나 결혼했다.
비너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테니스 잡지와 비디오를 사서 독학으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한 리차드는 세레나와 비너스의 코치를 맡으며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밟아 나갔다.
사실 비너스는 가지고 있는 기량에 비해 뒤늦게 성적을 올렸다고 평가 받기도 했다.
여기에는 비너스를 아끼는 아버지, 리차드의 철저한 보호가 숨어있었다.
90년 대 말, 마르티나 힝기스(스위스), 안나 쿠르니코바(러시아) 등의 10대들이 시니어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킬 때 리차드는 딸의 대회 출전을 자제했다.
일찍 프로 세계에 뛰어든 스포츠 신동들이 일찍 그만둔다는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던 리차드는 비너스가 스포츠 업계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91년, “우리 식구 중 아무도 우리 딸을 도박성이 심한 곳으로 내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돈 때문에 어린 나이의 딸을 프로 세계로 내 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비너스의 프로 무대 전격 진출 시기를 16세로 정해놓기도 하며 너무 어린 나이에 프로로 몰아넣어 정신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던 아버지가 있었기에 ‘인격적으로 바르고 최고의 실력’을 갖춘 스타가 탄생된 것이 아닐까.
비록 비너스가 자신의 재능에 비해 16살이란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WTA 대회 풀 타임을 소화했지만 비너스가 10년 넘게 장수할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이 되었다.
의류 브랜드 ‘일레븐’ 출시, 디자이너로 성공평소 윌리엄스 자매가 얼마나 패션에 관심이 있는지는 테니스 팬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비너스는 휴식 기간 동안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 있는 디자인 학교에서 패션 디자인과 관련한 수업을 들었고 연말에는 학위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스타일과 색조, 디자인 역사 등을 체계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바 있다. 지난 슈퍼매치 때도 자신이 디자인한 보라색 의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2년, V Starr Interiors(V Starr 는 비너스의 풀 네임)라는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를 차리고 인테리어 시장에 뛰어들었던 비너스는 틈나는 대로 친지나 친구들의 실내 디자인을 해주기도 했고 인테리어 장식가 자격증까지 취득하며 CEO로서의 첫걸음을 했다. 그리고 올해 8월 23일, 뉴욕에서
런칭 행사를 가지고 숫자 11을 뜻하는 ‘일레븐’이라는 독자 의류 브랜드를 출시했다.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이룬 순간이었다.
비너스는 지난해 US오픈을 통해 자신이 디자인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나와 브랜드 ‘일레븐’을 알렸다.
특히 US오픈에서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나오며 자신이 디자인한 의류를 알리는데도 힘썼고 숫자 11과 Venus의 ‘V’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로고는 US오픈에서 비너스가 좋은 성적을 내며 더 빛을 발했다.
열정, 에너지 그리고 파워비너스는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테니스에 있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말이다.
“테니스는 내 꿈 중의 하나일 뿐”이라며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비너스의 열정을 보고 있으면
비너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이 붉은 색이 아닐까 생각된다.
코트에서 보여주는 에너지와 파워도 대단한데 비너스와 서브 속도는 떼 놓고 말하기 힘들다.
95년, 바쉬 앤 롬 챔피언십에서 시속 172.8km의 서브 에이스를 기록해 이미 강서버의 출현을 세계에 알렸고 지난해 프랑스오픈에서는 206km의 강력한 서브를 터뜨리며 여자 선수 가운데 가장 빠른 서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m85cm의 키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은 비너스 서브의 원동력. 중요한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서브 에이스는 비너스가 세계 톱이 되기까지 큰 도움이 되었다.
밝은 표정, 친절한 그녀비너스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이 떠오른다. 비너스가 가장 좋아하는 색도 블루, 파란색이란다. 비너스가 2년전 슈퍼매치 행사 차 한국에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보여준 밝은 미소는 팬들에게도 기자들에게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계 톱 선수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함을 비너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는 팬들 옆에 자연스럽게 서서 포즈를 취하는 비너스. 정말 친절하고도 고맙다.
2005년 슈퍼매치 출전 차 방문한 비너스는 주니어를 상대로 한 클리닉에서도 선수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는 능력, 돈, 명예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인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비너스 스스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비너스의 이런 ‘겸손한’ 성격에는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 80년에 비너스, 81년 세레나가 태어나자 리차드는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콤프턴의 빈민가로 이주했다.
중산층인 윌리엄스가 슬럼가에 들어가 살았던 이유는 어려운 환경에서 생존 경쟁의 원리를 익히게 하기 위한 ‘스타 교육’의 일환이었고 어려운 생활을 몸소 체험하며 인격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깊은 뜻이었다.
“세계 넘버원 선수가 되더라도 교양이 부족하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비너스가 존재했다.
월간 테니스코리아 2007년 10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