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 가면
최 지 안
봄이 오는 춘천, 소양강에 가리라. 4월 어느 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달리리라. 가지마다 탐스런 소양강댐 벚꽃을 보러. 봄바람에 꽃잎은 흩날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가리라.
겨울이 오면 소양강에 가리라. 물보다 찬 공기가 습기를 머금은 나무에 입김을 불면 하얗게 꽃이 피는 상고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점점 커나가는 얼음꽃. 겨울 아침, 전설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상고대를 보러 새벽잠 털고 졸린 눈 비벼가며 가리라.
강을 낀 조그만 마을. 그런 마을이 보인다면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리라. 강변 어디쯤에 낡은 나룻배가 있는지, 바위가 모여 있는 곳에 다닥다닥 고둥이 살고 있는지 찾아 볼 것이다. 마을은 강을 허리에 끼고 낮은 언덕과 교회를 껴안고 있을 것이다. 그 언덕 밑 골목으로 난 길에 아직도 ‘라면땅’이며 ‘쫀디기’를 파는 구멍가게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보리라. 가만히 둘러보면 분명 심심한 골목을 배경으로 낮게 엎드린 가게가 보일 듯 말 듯 있을 것이다.
그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가리라. 격자무늬 유리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가면 설탕을 뿌린 젤리며 커다란 눈깔사탕이 유리상자 안에 있고 벽에는 먼지 쌓인 과자 봉지가 있으며 한쪽 모퉁이 나무의자엔 파리채 들고 깜박 고개를 숙인 고모가 간간이 졸고 있는 풍경 하나가 있을 것이다. 게으른 오후 햇살이 구멍가게 유리문을 지나 젊은 고모의 꽃무늬 원피스 자락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동네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던 그 시간이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그곳. 젤리나 사탕이 조금씩 없어져도 내게 가져 갔냐고 묻지 않던 고모. 그 고모가 하던, 먼지 알갱이 하나까지도 투명해 보였던 가게를 찾아 볼 것이다.
좁고 기다란 통나무 의자. 거기에 걸터앉아 바나나 우유도 마셔보리라. 물어물어 골목길에 숨은 초라한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채 말리지 못한 젖은 머리를 털며 작은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를 살 것이다. 고모를 따라, 고종사촌 영순이 언니를 따라 갔던, 쌀을 둥그런 가마니에 쏟아 놓고 팔던 ‘싸전’을 지나 유리 진열장에서 ‘쓰봉’에 ‘우와기’를 입은 마네킹이 쳐다보는 양장점을 지나 들어간 목욕탕. 내 몸에 들러붙은 눈치를 미느라 어지간히 애쓴 고모가 사 준 바나나 우유. 처음으로 맛본 노랗고 부드러운 음료. 시간을 거슬러 먼 공간 속에서 온 다디단 기억을 마셔보리라.
춘천시 근화동. 고모 집을 찾아가리라.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젊은 고모 대신 이제는 다 늙은 고모가 그곳에 계실 것이다. 오 남매를 키우고 더 얹어서 조카까지 키웠던 춘천 고모 최금순. 찾아가서 말라비틀어진 고모의 젖을 만져보리라. 막내였던 고종사촌 영순 언니가 무시로 주무르곤 했던, 차마 만지지 못했던 젖. 그곳에 가면 내게도 만져보라고 제 것인 듯 인심 쓰던 영순 언니 목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아마도 고모는 그새 바싹 늙어버렸으리라. 손에 힘이 없어서 물을 마시려면 앞자락에 어느 정도는 흘려야 드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낭랑하고 우아하게 울리던 말씨는 더욱 느리고 탁해졌을지 모른다. 어쩌면 뚱뚱해졌을지도 모른다. 삶을 버텨주던 관절도 닳아 앉고 일어설 때 무언가를 붙들지 않으면 기력 달리는 몸이 그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잊었을지 모른다. 고만고만한 자식들 건사로 허리가 휘어질 때 친정 조카까지 키워야 했던 짜디짠 시간을 그만 까마득하게.
낯선 동네를 거닐다가 문득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잊었던 기억에 몸이 흔들릴 것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잃었던 기억을 찾아낸 기 롤랑, 아니 페드로처럼. 아리고 서러운 시간 한 조각이 불현듯 떠오를지도. 그러면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책 속의 문장을 곰곰이 생각하겠지. 고모네 가게에서 훔친 젤리를 아무도 모르게 입안에 넣고 씹을 때의 느낌처럼, 어떤 덩어리들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께를 뻐근하게 누르던, 조금은 서글펐던 기억이 근화동에 가면 질겅질겅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
좁디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유년의 나와 마주칠지 모른다. 골목 어디쯤에서 일찌감치 마음 숨기는 법을 터득했던 아이가 불쑥 튀어나올지도. 누군가 물으면 식구들 누구도 보고 싶지 않다던.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던 아이가 생각날지 모르겠다. 그러면 ‘니네 집에 가.’라고 했던 사촌 오빠의 목소리가 후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뒤따라 올 지도 모르겠다.
춘천을 떠나는 날 고모는 내게 감색 ‘판타롱’ 바지를 사 입혔다. 목욕탕 가는 길에 보았던 양장점에서 사 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넓은 밑단에 꽃으로 수를 놓은 감색 바지. 나팔바지가 복사뼈 위로 올라오도록, 쑥 자란 몸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될 때까지 입었다.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새 바지를 입고 떠나던 날 보았던 고모의 눈빛이었다. 그 축축했던 눈빛.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남아 언제 어느 때 춘천으로 날 떠다밀지도 모를 그 눈빛.
만약 어느 날, 소양강에 가게 된다면 기억을 통째로 쏟아버리고 올지 모른다. 만질 수도 없는 과거가 울컥 현재를 걸고넘어지던 일을 강에다 던져버리리라. 하얗게 비우고 강변 카페에서 커피로 속을 채우며 휴대폰 카메라로 주변 풍경이나 한가롭게 찍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어차피 내일이 되면 또 과거가 될 것이므로. 오래되어 구석으로 밀린 기억이 망각으로 흐르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 희미한 기억은 안타깝다가 결국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겠지.
고모의 깊은 눈가가 잘게 주름지고 맥없이 짓무르는 동안 서서히 가벼워졌을 기억은 둥둥 떠다니다가 공지천의 물안개처럼 어느 날 증발해버리고 말 것이다. 꽃잎처럼, 혹은 상고대처럼. 그래서 춘천에 갔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춘천은 그런 곳일지 모른다. 안개처럼 신기루 같은 도시이므로 벚꽃 지는 걸 보러 왔다가, 상고대를 보러 왔다가 닭갈비에 막국수나 후루룩 먹고 슬쩍 해 저문 강변에나 가서 <소양강 처녀> 한 소절을 싱겁게 불러보다 오는 그런 곳일지 모른다. 가슴 먹먹한 유년의 기억으로 가는 아름답고 슬픈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