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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Pray or Nothing’ - 6. 거절과 무응답에 익숙해지기!
본문 : 시편 88편 14절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새번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우리는 이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라!”
우리는 야고보서 1장 6절 말씀을 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이 없다면 그 누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산 속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 소리로 끝이 나는 게 기도라면, 마음의 호소로 끝이 나는 게 기도라면,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응답’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시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응답’과 관련되어서, 우리 모두는, 조금 삐뚤어진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철저히 나의 주관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내가 드린 기도대로, 내가 받고 싶은 응답대로, 딱 그대로만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무응답이나 거절이라는 응답이 오더라도 그 것을 응답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무응답이라는 거절도, 거절이라는 거절도 도무지 거절로 받아들일만한 믿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새 성경 구절에 내 생각을 한 움큼 집어넣은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수많은 영화와 책을 보며, 마치 하나님도 그래야 할 것처럼, ‘소원’과 ‘기도’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응답은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방향과 완전히 정반대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응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응답이라는 거절을 이미 응답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절이라는 응답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마치 상사가 원하는 보고서의 형식대로 맞추어 가기 위한 인턴사원의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 되는 순간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기도’라는 거대한 방법을 습득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상사가 시키는 대로 보고서의 제목부터 타이핑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상사에게 가지고 가서 또 다시 처음부터 작성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상사가 다시 작성해 오라고 해서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하는 사원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 거절이 있어야만 그 회사의 방법을 배우고,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인턴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정말 열려 있는 특정 회사를 제외하면 많은 회사가 인턴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곳은 없습니다. 정해진 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룰에 어긋날 때에는 당연히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룰에 얼마나 가까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냐에 따라 상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히말라야’ 등반과도 같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등반입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완등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여정입니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하고, 아무리 좋은 장비를 사용하고,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한다고 해도, 날씨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결코 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응답해 주어야 완등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많은 거절을 경험해야만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긴 채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하늘이 거절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받아들이고 하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 이라는 환경 속에서 가장 먼저 이 기도의 세계를 맛 볼 수가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때는 결코 유지될 수가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칭찬과 사랑과 격려는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서로의 무응답과 거절 속에서, 서로가 원하는 방법에 몸과 마음을 맞추어가며 하나가 되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부터 거절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당하고 건강한 거절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자녀는 그 거절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가장 작은 사회로부터 ‘거절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하나님의 거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한가?’ 라는 질문을 해 오신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아멘’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아가 최대한 하나님의 무응답과 거절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무응답과 거절을 겪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 중 너무도 중요한 기도에 대한, 그리고 더 중요한 기도 응답에 대한, 체질 개선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무응답과 거절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응답과 거절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자만이 허락이든 거절이든, 무응답이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이라면 허락하실 것이고, 필요하지 않는 것이라면 거절하실 것을 점점 믿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 가득한 안개를 걷히게 만드는데 하나님의 거절만큼 좋은 와이퍼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과 무응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절과 무응답이라는 거절에 익숙해지기 위해 다음 3가지를 반드시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응답’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이지만 허락이든, 거절이든, 무응답이란 거절이든, 무응답이란 기다림의 시작이든, 어떠한 응답이든 응답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관계적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기도를 완전히 폐기시키셔도 상관없는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있을 때에, 내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따질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드리고 나면 계주에서 ‘바통터치’를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알려 드리곤 합니다. 열심히 저의 순서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다음 사람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순간은 우리의 시간이지만, 기도 응답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대단했던 믿음의 선배 다니엘도 자신이 드렸던 기도에 대한 응답을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니엘마저도 이런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나는, 듣기는 하였으나,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천사님, 이 모든 일의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그가 말하였다. "다니엘아, 가거라. 이 말씀은 마지막이 올 때까지 은밀하게 간직되고 감추어질 것이다. <다니엘 12장 8~9절, 새번역>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드리는 제자들의 질문에도 대답은 동일합니다.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사도행전 1장 6~7절, 새번역>
둘째, 무응답과 거절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응답이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 것을 인정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 다니엘아, 너는 끝까지 신실하여라. 너는 죽겠지만, 끝 날에는 네가 일어나서, 네게 돌아올 보상을 받을 것이다." <다니엘 12장 13절, 새번역>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 우리는 절대적 믿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이기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끝까지 신실함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에 대한 깊은 뜻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끝까지 신실하게 유지해 갈 수 있는 힘이 바로 ‘믿음’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태복음 7장 9~11절, 새번역>
이런 절대적 믿음을 소유해야만 다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절으로 인해 찾아오는 부담감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기도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위한 거절임을 아는 이들은 더욱 더 기도하게 되어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은 결코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거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우리의 방향성이 더욱 더 선명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고 보고서를 집어 던져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이 거절에 익숙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사실 거절이 만들어낸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거절은 믿음과 늘 동행하는 것입니다.
셋째, 거절도, 특별히 무응답도 ‘응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응답에도 거절에도 익숙해져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 역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했지만 아무런 음성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오랜 시간동안 아무 응답도 없으십니까? 같은 기도 제목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허락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으십니까? 이미 거절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단정적으로 거절이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사실 대부분은 이미 무응답이라는 거절로, 단호한 거절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허락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솔직히 거절이야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하더라도 특별히 무응답이란 녀석 때문에 답답해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무응답을 보며 언제쯤 응답하실까 고민합니다.
아닙니다. 무응답으로 이미 응답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무응답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무응답도 하나님의 고유권한의 영역이기에 감히 무엇이라고 코멘트를 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믿음으로 말씀 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결코 무응답이 우리를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저의 경험으로도, 무응답은 대부분 지금은 때가 아니기에 그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순간이 올 때까지, 스스로 인내를 배워야 할 시간이라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묘하고 신비하게도 그 때는 거절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다른 때에는 허락이 될 때도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초대교회는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원하는 시기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하신 명령을 통해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기는 했지만 언제, 어떻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저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무응답 속에서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것이 무엇입니까?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사도행전 2장 1~2절, 공동번역>
바로, ‘마침내’의 시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무응답 속에서도 계속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실 그 날을 비로소! 마침내!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래서 무응답도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응답일 때에도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때까지, 온전히 허락이든 거절이든 분명해 질 때까지, 오히려 이어지는 기도의 줄다리기 타임을 통해 하나님과 신나는 놀이 한 판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현장으로 받아들이시길 축복합니다.
바로, 오늘 함께 나눈 본문 시편 88편이 거절에 익숙한, 특별히 무응답에 익숙한 한 신앙인의 기도 중 대표라고 저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을 보면 익숙함은커녕 답답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지만 도무지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녹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시편 88편 14절, 새번역>
오직 어둠만이 자신의 친구라고 표현하는 이 시편 기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묵상을 해야 할까요? 왜 하나님은 이 시편 기자에게 응답하시지 않을까 원망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해도 응답하시지 않는 분이구나 실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오늘 이 막막한 구절들로 빽빽한 시편 88편을 보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이 시편 88편의 제목입니다.
이 시편 88편의 제목은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입니다. 고라 자손, 에스라인 헤만이라는 이름에 눈길을 뺏기지 마십시오. 중요한 두 단어는 바로, ‘찬송 시’라는 것과 ‘마스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시편 88편이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망 가득해 보이고, 실망 가득해 보이는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노래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50편 중 한 편의 시편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찬송 시입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마음껏 토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하는 모습으로 한 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그저 원망이라면, 답답함의 토로로 끝날 말들이었다면, 절대 시편에 수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스길’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스길은 시편 32편을 시작으로 총 13편이 있습니다. 마스길은 오랜 묵상 후에, 즉 계속해서 반복하여 기억하고 묵상한 후, 경험하게 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깊이 깨달은 것을 후대와 함께 나누기 위한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원망과 눈물, 안타까움이 가득한 시편 88편이 후대에 어떤 교훈이 될 수 있었을까요? 너무도 중요해서 이미 1절에서 등장한 고백입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낮이나 밤이나, 내가 주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시편 88편 1절, 새번역>
이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편 88편 저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거절과 무응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처럼 보이는 수많은 글귀들도 모두 오히려 찬송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 시편 88편과 같은 고백을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 한 구절 한 구절이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찬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흔들림 없이 드려야 할 진심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거절이고, 무응답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상황에 익숙함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절대적 믿음이 존재했습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소유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이 찾아와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고, 도무지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마저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시편 88편처럼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교훈을 시편 88편 저자는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거절이고, 무응답이지만, 그 것에 익숙해짐으로 말미암아 그 익숙함이 오히려 찬송이 되고, 기도가 되고, 믿음이 되도록!
응답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무응답과 거절까지 모든 응답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소유합시다. 그렇기에 우리 거절 속에서도, 무응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스스로에게 선포하며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내 견고한 바위이시요, 나의 피난처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시편 62편 5~8절, 새번역>
결단찬양 - 하나님이시여 + 주 품에 후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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