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가 된 후 김시습은 9년간 전국 방방 곡곡을 방황하였다. 그 방황의 결과로 그는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한편, 김시습은 생육신으로, 선비된 자로서 세조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승려로서는 잠시 세조의 일을 도운 적이 있다. 세조 9년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불경을 한글로 풀이하는 일)을 도와 내불당에서 10일간 교정을 보기도 하였고, 역시 효령대군의 청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을 뿐 김시습은 서울을 등지고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烏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금오신화]를 쓰다
 금오산실에서 칩거하면서 김시습은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 [금오신화]는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서 현재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남아 있는데, 현전하는 책의 구성으로 보아 이보다 더 많은 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인물들로, 모두 현실 세상을 등지고 몽유적 세계 속에서 기이한 일을 겪는다. 이전의 한문 창작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은 우리나라 사람이며, 배경 또한 우리나라로 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풍속과 사상, 감정이 잘 녹아 있다. [금오신화]는 중국 명나라 때의 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추측되는데, 작품 속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에 반해 인간을 압박하는 것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을 하고 있어 자유와 초월을 갈구하는 작가만의 개성적인 세계관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한문소설의 기준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이후 많은 한문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금오신화]는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소설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이 발견하여 잡지 [계명(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에 국내에 소개하였다. 이때 발견된 목판본에 현전하는 5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52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였던 정병욱이 필사본을 발견하였다.
금오산실에 머무는 동안 김시습은 소설뿐만 아니라 많은 한시들을 썼는데 이들은 [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아 있다.
[금오신화]를 쓰고 난 뒤 김시습은 경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와 수락산 등지에서 승려로 10여 년을 산다. 그러다가 40대 후반 문득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으며 안씨 성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는 등 환속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성종대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이 흉흉해지자 다시 길을 떠나 강원도 일대를 유람하였다. 김시습은 방랑생활 동안 지방의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여행지마다 시를 써서 남기기도 하였다. 말년에 김시습은 부여의 무량사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교식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하였고, 유골은 부도에 안장되었다.
김시습은 죽은 뒤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시집이 편찬되고 그의 사상을 재평가하고 높이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김시습은 그가 유학자와 승려의 삶을 넘나든 것처럼 유교와 불교가 함께 어우러진 폭넓고 자유분방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후세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