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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2 - 게르만족이 갈리아 등 로마 영내로 침입해 로마를 약탈하다!
로마는 켈트족을 "갈리아인" 이라 불렀는데 포에니전쟁에 승리하면서 프랑스 남부 프로빈키아를
속주로 만들었고, 게르만족의 압박을 받던 스위스의 켈트족인 헬베티아인들은 BC 58년 4월에
제네바에 집결한 후 프랑스 서부로 이주하니.... 카이사르는 저들을 저지하면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되어 7년만에 승리하니 기원전 52년에 프랑스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라틴화" 가 진행됩니다.
그 이전 부터 게르만 몇 부족은 프랑스 땅으로 침입하여 켈트족인 프랑스인들에게서 공물을 받기도
했는데, 카이사르 덕분에 전선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정해졌으니, 세월이 흐르고 5현제시대
마지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인 169년에 게르만족은 국경을 넘어오니 황제가 친히
출진하는데..... 170년에 마르코마니족은 도나우강을 건너 이탈리아 동북 아퀼레이아를 습격합니다.
코스트보치족은 다키아를 지나 다뉴브강을 넘어 그리스를 약탈했으니 라메스(방벽)가 뚫린 것인데 먼
야만족인 사르마티아족, 랑고바르드족, 반달족, 고트족, 프랑크족 및 삭슨족이 남서쪽으로 이동하니
가까운 야만족이 러마 영토를 침범했던 것이라, 마르쿠스황제는 179년에 반격을 하니 기병대의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가 대활약을 했지만 황제는 180년 3월 빈 근처 전선에서 죽고 콤모두스 황제
는 마르코마니족 및 콰디족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250년에는 고트족과 반달족이 국경을 침범합니다.
서기 395년 군인 황제들이 난립한 로마를 재통일해 4개의 나라로 나누어 통치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13년에 죽은후 내란에 빠진 나라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통일해 수도를 동쪽 콘스탄티노플
(비잔틴)로 옮겼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5년에 죽으면서 스틸리코장군
을 후견인으로 임명했지만 분열하니 동로마는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는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됩니다.
395년 서고트족 알라리크는 스틸리코 로마군 주력부대가 있는 서방을 피해 동방을 노렸으니 도나우강
을 건너 트라키아(불가리아)를 지나 그리스 에디르네로 침공해 하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니, 반달족
출신의 로마군 총사령관 스틸리코는 병력의 반은 갈리아를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로 동방으로 쫓아
가서 아드리아해 살로나에서 서고트족을 격파했지만 소심한 동로마 황제는 마무리 전투를 중지시킵니다.
396년 알라리크는 남하해 마케도니아를 지나서 아테네를 공략하고 코론트를 함락시켰으며
아르고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등 그리스 전역을 약탈하니, 서로마로 돌아갔던 스틸리코
는 다시 그리스 북서부에 상륙해 전투에서 승리하자 알라리크는 산악지대로 도주
하는데, 동로마궁정에서 비난이 나오자 정나미가 떨어진 장군은 서로마로 돌아가고
알라리크가 재기하니... 궁정은 두려워서 "알라리크를 일리리쿰 군사령관" 으로 임명합니다.
일리리쿰(크로아티아)에서 서고트조그이 알라리크는 동로마군사령관 지위를 이용해 군수품
창고를 열어 서고트족을 무장시키는데... 한편으로는 동로마에서는 야만인 배척
광풍이 불어 고트족 출신으로 군총사령관인 가이나스를 죽이는데, 서로마군
총사령관 스틸리코도 아버지는 게르만 반달족이고 어머니는 로마인이니 반은 야만인 입니다.
401년 도나우강 상류에 살던 게르만족이 스위스 지방인 라이티아주로 쳐들어 오자 서로마 스틸리코
는 출진해 격퇴했는데, 11월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인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은 서진해 이탈리아
동북 아킬레이아를 공격하다가 북이탈리아로 침입하니... 서로마의 수도 밀라노에 있던
황제 호노리우스는 기겁하는지라 스틸리코가 황급히 달려와 겁에 질린 황제를 로마로 피신시킵니다.
도나우전선에는 훈족에게 밀려난 수에비족과 알란족이 쳐들어온지라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은 내버려
두고 알프스를 넘어 1차 반격에 성공한후 평화협정을 맺어 정착할 땅을 내어준후 병사를 거느리고
베로나로 내려온 다음, 286년 부터 서로마의 수도인 밀라노 외곽에서 숙영하던 서고트족 퇴로를
차단한 후에 공격하니 알라리크는 토리노로 향하다가 402년 4월 6일 폴렌티아에서 격전을 벌입니다.
패배한 알라리크는 동쪽 베로나로 후퇴했고 또 다시 패배해 발칸반도로 달아나자 스틸리코는 지난
100여년간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이탈리아 내에서 군인을 모병하는 법률을 원로원에서
통과시킨후, 서방 로마군의 총사령부를 독일의 트리어에서 프랑스 남부 아를로 옮긴 다음에
갈리아(프랑스) 북부와 중부를 카이사르 이래 450년만에 포기하고 갈리아 남부 방어를 강화합니다.
갈리아 북부와 중부 방어를 포기하면서 아울러 브리타니아(잉글랜드)도 당연히 버리는데.... 갈리아
인이나 브리타니아인은 이미 오래전에 로마에 속해 라틴화가 진행된지라 로마 시민이라 굳게
믿었으니 그만 황당하고 충격에 빠졌을 것으로 보지만, 오랫동안 국방을 로마군에 의존한지라
스스로를 지킬 군대를 만드는 시도 조차 하기 어려우니 결국 게르만 부족들에게 점령당하게 됩니다.
스틸리코 혼자서 서에 번쩍, 동에 번쩍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라 현실을 받아들인 것인
데, 프로빈키아(프로방스)는 카이사르 보다 150년 전인 한니발 전쟁시 로마 속주가 된 땅이니 로마
본토와 다를바 없는지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옛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 고향이기도
하니 지중해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페인과 연결되는 이 지방의 방어는 필수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원로원 의우너들은 자신들 농장의 일꾼을 군대에 징집하는 것도 불만인데다가 당시 로마의
능력도 모른채 분수도 모르면서 북부와 중부 갈리아(프랑스)를 포기한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니
더욱 야만인인 스틸리코 장군이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다니.... 하여튼 개선식을 거행한후
서로마제국의 수도 밀라노는 위험한지라 방어가 용이한 동북 이탈리아 요새 도시 라벤나로 옮깁니다.
로마군 병력은 전성기에는 60만에 이르렀으나 이 당시는 동서 로마 합쳐서 20만 정도였지만
스틸리코 장군이 지휘해 게르만족과 싸울때는 겨우 1~ 2만 정도를 거느리는게 보통
이었는데, 405년 훈족에 밀려 게르만장벽을 넘어 스위스지방인 라이티아로 쳐들어온
동고트, 수에비, 알란 및 부르군트족등 야만족의 대표는 동고트족 라다가이소 였는데.....
서고트족은 기독교 이단인 아리우스파였지만 이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아예 이교도 였습니다.
게르만족의 땅 라이프치히가 고향인 바그너가 작곡한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및 신들
의 황혼으로 이루어진 4부작 니벨룽의 반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위 야만인 중에 부르군트
족인데 비해,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와 베토벤이 태어난 본은 이 당시 로마인들의
영토 였는데...... 로마군은 4세기 초기 내전 당시의 1/20도 안되는 규모로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406년 봄에 갈리아로 가는줄 알았던 야만인 수십만은 돌연 방향을 바꾸어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스틸리코는 전년도에 모든 속주에 병력을 보내라고 말했지만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및 북아프리카는 자기들 땅을 지키기에도 급급한지라 이탈리아로 보내준 병력은 없었으니,
갈리아에서 로마편에 군무중이던 소수의 야만족 알라니족과 사로의 서고트족에 우르딘이 지휘하는
훈족 뿐이었는데 훈족과 고트족은 동고트족인 라다가이수스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동참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대농장주들이 모병에 협조하지 않으니.... 406년 5월 스틸리코는 노예도 군대에
소집할수 있다는 법률을 황제 칙령으로 발표하는데, 전쟁이 끝나면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금화
두닢은 준다는 조건이니 초여름에 간신히 3만명 정도 병력을 편성하는데 6월 10~ 40만 야만인들
은 북이탈리아를 초토화 시킨후 중부 이탈리아로 남하해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쇄도합니다.
스틸리코는 피렌체를 포위한 고트족을 역포위했으니 피렌체는 아르노강을 통해 보급을 받을수
있었지만, 고트족은 굶주리기 시작했고 포위망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자 절망적인 돌격을
시도한 라다가이수스를 격파하고 참수했는데... 피렌체 전투에서 스틸리코가 포로로 잡은
동고트족 사람들 중 로마 군대에 자원한 10,00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노예로 팔렸으니 수가
많아서 임진왜란 때 마카오 노예 시장에 쏟아진 조선인들 처럼 노예 시세가 폭락했다고 합니다.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스틸리코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 듯 했지만 뒤이어 407년 브리타니아
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를 자칭한 황제가 나타났다가 갈리아에서 살해되었는데, 거듭된 전란
으로 로마 제국이 피폐해졌으며 속주 통치가 방기되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 반란
이 빈발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고트족에 손을 벌리면서 스틸리코에 대한 여론이 악화 됩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스틸리코와 서고트족 알라리크의 비밀 협상은 서기 404년부터 은밀히 시작됐다는
데, 폴렌티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알라리크의 가족들을 돌려보내면서 협상이 진전된 것으로
보이니 4번이나 싸웠던 알라리크와 협상한 것은 그가 4번이나 이겼으니 언제든지 이길수 있는
지라 알라리크를 혼란에 빠진 갈리아로 보낼 생각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니 이른바 이이제이 입니다.
동로마 황제가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를 남기고 죽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동로마를 욕심냈는데,
테오도시우스 2세 승계가 끝난지라 스틸리코는 황제가 가는데 반대하니 관계가 악화된데다가
호노리우스에게 시집간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가 숨지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 갈라 플라키
디아와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 간의 혼담이 진행되자 호노리우스 황제는 스틸리코를 의심합니다.
스틸리코에게 불만을 품었던 호노리우스 측근들에 의해 408년 8월 13일에 티키눔(파비아)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스틸리코파 군인과 관료들이 살육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군대는 그를 위해서 호노리우스와 대적하는 것도 감수하며 스틸리코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지만.....
스틸리코는 거부하고는 호노리우스 황제가 있던 라벤나에 자진 출두하여 408년 8월에 처형 당합니다.
스틸리코가 처형당하자 로마군의 정예병 태반이 서고트족 알라리크에게로 망명해버렸으며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로마에서 살해당했고, 스틸리코의 둘째 딸이자
호노리우스 황제 두번째 황후였던 테르만티아는 수녀원에 유폐되어 죽었으며, 스틸리코
의 아내 세레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로 며느리가 될뻔했던 갈라 플라키디아의 모략
에 휘말려 알라리크와의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원로원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다뉴브강 하류 출신인 알라리크는 로마군의 보조병이었다가 394년에 서고트족의 왕이 되어 그리스
와 이탈리아를 침공했었는데, 스틸리코 장군에게 연전연패해 일리리쿰으로 도피했다가
스틸리코와의 동맹을 구실로.... 스틸리코와 부인 세레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이탈리아 침공을
단행해 로마로 진격해서는 겹겹이 에워싸고 물자를 차단해 로마는 식량난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평화 교섭차 찾아온 원로원 의원 바실리우스에게 알라리크는 로마에서 물러나는 대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로마 안에 있는 모든 금과 은, 모든 값지고 귀중한 동산, 그리고 야만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모든 노예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니, 의원들이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을 남겨 주시
렵니까?" 라고 호소하자 서고트족 알라리크는 조소하듯이 "목숨은 남겨주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얼마뒤 금 5천 파운드와 은 3만 파운드, 비단옷 4천벌, 주홍색 옷감 3천필, 후추 3천 파운드를 받고
서고트족 알라리크는 로마 포위 해제에 동의하고서, 투스카니에 겨울 막사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알라리크의 휘하로 야만족 노예 4만여명이 모여들었고 처남 아타울푸스가 고트족
과 훈족에서 온 증원군을 이끌고는 도나우 강변에서 테베레 강변 까지 로마군을 뚫고 찾아옵니다.
알라리크는 원로원 의원 세명을 사절로 라벤나에 보내 인질 교환과 조약 체결을 건의했는데 알라리크
의 서로마 군대 총사령관 지위와 로마에서 해마다 곡물과 현금을 보조금으로 지급, 이탈리아와
도나우 강 사이에 있던 다르마티아와 노리쿰, 베네치아의 속주를 자신에게 할양이 그의 요구 사항
이었는데 로마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노리쿰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의향도 설쩍 비춥니다.
그러나 서로마 황제의 신하 올림피우스는 거꾸로 비밀리에 알라리크를 치려고 그에게 보내는 사절에
수반해서 달마티아인 병사 6천명을 로마로 보냈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눈에 띄는 모습으로 행군
하던 그들은 서고트족 병사들의 포위 공격으로 궤멸되었지만 알라리크는 이에 분개하지도 않고
능청스레 화평 제안을 다시 내놓았으니 야만족이지만 감정을 조절할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입니다?
하지만 원로원의 무례한 서간과 황제와 신하들의 배신에 알라리크는 분노했고 410년 8월 24일 서고트군
은 내통자가 있었는지 살라리아 성문을 열고 드어가서 로마를 함락하고 사흘간에 걸쳐 약탈했으니,
게르만 족장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는데 아리우스파 기독교인 서고트왕 알라리크는 자신들은 예수님
을 믿는 기독교도라면서.... 저항하지 않는자는 죽이지 않고 교회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의 검탈은 닷새만에 끝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안전 지대인 교회로 피신해서 무사했으니 이교와
이단에 대해 동로마가 제일 엄격한데 비해, 이단으로 불리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는 좀 관대했던
것인데... 그래도 수녀를 포함한 부녀자들이 당한 능욕에 대해 북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는 저서 “신의나라”에서 강제로 동의없이 맺은 “섬관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면죄부” 를 주었습니다.
엿새째 되는 날 알라리크와 서고트족 10만 병사와 가족들은 약탈품에 인질들을 데리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곡창인 아프리카로 떠나는데.... 몸값을 낼만한 원로원 의원과
부자들에다가 황제 호노리우스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으니, 그녀는
393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해 대제로 불리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 이었습니다.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는 414년 알라리크의 처남으로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와 결혼했는데,
아타울프는 바르셀로나의 궁전에서 목욕하던 중 수하 시게리크에게 암살당하니....
시게리크는 과부가 된 갈라 플라키디아를 모욕하려고 그녀에게 포로들과 함께 12마일
을 걸어갈 것을 강요했으나... 시게리크를 제거하고 서고트의 왕으로 등극한 왈리아가
서로마 제국과의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그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로 귀환합니다.
그녀는 417년 서로마 호노리우스 황제 휘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우스와 혼인하였으니 이듬해에 딸인
호노리아를 낳았고 419년에는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았는데, 421년 장군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와 더불어 서로마의 공동 황제로 되니 그녀도 황후가 되었는데, 콘스탄티우스는 9월에
사망하자 호노리우스는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의심을 품으니 자녀들과 동로마로 망명 합니다.
그로 부터 2년이 지난 423년 8월, 호노리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할 가장 적법한 후계자는
조카이자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였지만, 서로마
의 집정관이었던 카스티누스는 로마의 치안장관인 요하네스를 황제로 옹립합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하네스의 황제 참칭을 인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해 격전 끝에 425년에는 요하네스는 라벤나에서 포위당한 끝에 패하여 사망하였고,
조카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당시 7세라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
는 나이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425~ 437년에 걸쳐 12년간 섭정으로서 서로마를 통치합니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내부적으로는 요안네스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자신을 후원했던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키우스 장군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적으로는
반달족과 고트족, 훈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침공에 시달렸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마의 실권은 아에티우스의 수중에 넘어가는 가운데, 437년에는 발렌티니아
누스 황제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친정하니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보좌 합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 호노리아가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당했을 때 처형
당할 수 있었으나 콘스탄티노플에 유폐된 것은 갈라 플라키디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큰데,
450년 11월에 죽으니 라벤나에 위치한 묘에 안치되었으니 이 무덤은 오늘날에는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라고 불리는데..... 내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미술의 걸작이자 정수로 손꼽힙니다.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남진하던 중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코센차에서 죽는데
사망 직전까지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주지 못해 괴로워했으며, 그의 유해는 콘센티아 성벽
아래로 흐르는 부센티누스강의 물길을 바꾼 다음 드러난 마른 강바닥 위에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고,
장례를 치르느라 바꾸어놓았던 물길을 원래대로 되돌린뒤 공사에 동원된 전쟁포로를 살해했다고 합니다.
서고트족의 왕위는 처남인 아타울프가 이었는데 로마와 교섭이 있었던지 서고트족은 다시
돌아서서 남프랑스로 이동했으며, 그 중에 포로들은 대개는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는데
공주 갈라 플라디키아 만큼은 데려가서는 결혼했으니 아타 울프는 로마식 토가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는데... 서고트족은 중남부 프랑스와 스페인에 서고트왕국을 세웁니다.
야만인인 서고트족의 로마의 검탈 후에는 로마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중에 로마의 최고
행정책임직인 수도장관을 지낸 나마티아누스는 416년에 피사와 제노바를 거쳐 고향인
갈리아로 가면서 오스티아에서 배를 타고 멀어지는 로마를 보며 “귀향” 이라는 시를 짓습니다.
“ 오오 로마여, 그대는 오랫동안 세게의 여왕이었다. 신들의 어머니이고, 그대의 숭고함은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사막도 꽁꽁 얼어붙은 북쪽 바다도 그대가 비추는 빛은 가리지 못했다. .....
적은 로마를 폐허로 만들었다고 생각 하겠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로마가 태어날 것이다”
갈라 플라디키아가 라벤나에서 죽은 1년후인 서기 451년 봄에 훈족은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
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프랑스)로 진격해 메츠를 공격했고 파리와 트루아를 거쳐 아우렐리아눔
(오를레앙) 에 포위 공격을 가하자..... 서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의 로마군과 서고트족의
연합군은 샬롱(Chalons) 부근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갈리아의 운명을 걸고 훈족과 격전을 치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