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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산, 원주보다는 제천에서의 풍광이 더 좋았던 감악산
1. 일자: 2018. 9. 25 (추석)
2. 산: 감악산(945m)
3. 행로와 시간
[피재(09:21) ~ 피재점(09:48, 784m, 감악산 6km) ~ 석기암봉(10:38, 906m) ~ 헬기장/문바위갈림(10:57) ~ 재사동갈림(11:12, 감악산 1.3km) ~ (점심) ~ 제천 감악산(12:16, 945m) ~ 바위 안부(12:23) ~ 원주 감악산(12:37, 930m) ~ 바위 안부(12:48) ~ 백련사 갈림(13:03) ~ 백련사(13:12) ~ 감악고개(13:24) ~ (감바위골) ~ 창촌마을(14:12) / 11.5km]
< 감악산 산행을 준비하며 >
한남정맥을 마무리하고 벌초도 다녀오고 나니 먼 산행을 가고파 몸이 근질거린다.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한 곳을 찾다가 원주 감악산을 발견한다. 몇 달 전 월간 산 코스 안내를 유심히 보았던 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신청했다.
잡지에서 특별부록으로 제공하는 지도를 들여다 보다 무심코 옆에 있는 편집 후기를 읽는다.“후배 기자가 오기 전 나는 섬 같다는 생각을 했다. 편집부는 소수 인원인데다 선배들과 연배 차이가 많이 나서였다. 소주 한잔 기울이며 같이 투덜거리거나 상사 흉을 볼 동지가 내겐 없었다. 무인도 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후배가 오면서부터였다. 서로 많이 달랐지만 늘 한마음이었다. 죽어라 노를 젖는 노예들의 동질감. 참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은 이였는데, 점점 평범한 어른이 되어갔다. 안타까우면서도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미안했다. 함께 더 좋은 잡지를 만들 거라 얘기했는데,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전통은 개인의 힘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에, 누구 한 명 나가고, 한 명 있음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알고 있다. 어찌되었든 고생 많았다.”잡지사 신입이 회사를 그만 두었나 보다. 공감되는 글이다. 선배의 안타까움이 진솔하게 느껴졌다. 등산 잡지를 비롯한 월간지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 컴퓨터나 핸드폰 자판 몇 번 두드리는 수고로, 공짜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정보들이 쏟아지는 세상이니 돈 들여 굳이 구독할 필요가 있겠냐는 세태가 안타갑다. 잡지를 넘기며 손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과 바스락거리며 스르르 넘어가는 소리를 컴퓨터 화면에선 느낄 수 없어 난 아직도 잡지를 사 보곤 한다.
개나 소나 100대 명산을 들먹이는 세상, 이 산도 그 한 귀퉁이를 차지한단다. 내겐 명산 따위보다는 신입사원 시절 교육 받던 가나안농군학교 위 산이고, 원주 귀례면에 살던 친구 집 인근 산이라는 사실이 더 와 닿는다.
산악회에서 제시하는 코스는 두 개다. 창촌리~감악산~창촌리 원점회귀 단축코스와 피재~석기암봉~감악산~창촌리 긴코스 중 일단 단축코스를 염두에 둔다. 시작 고도가 450m , 정상이 956m 이니 비고 500m 수준이다. 월출봉 북릉으로 올라 감바위골로 내려오려 한다. 7km 내외 쉬엄쉬엄 가도 3시간 반이면 될 듯하다. 원주와 제천의 경계로 향하는 길, 모처럼 버스 타고 가는 산행이 기다려진다.
< 희망사항 >
미투리산악회 최대장님이 등장하는 월간 산 감악산 안내편에 게재된, 백련사에서 올려다 본 일출봉, 월출봉으로 대표되는 정상 모습이 인상적이다. 석축 위에 올라 앉은 단아한 백련사와 펑퍼짐한 능선 위에 솟은 바위들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다. 사진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하고 있다. 바뀐 계절, 감악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을까 마음이 설렌다. 넉넉한 쉼이 있는 소풍 같은 산행이 되기를 바래본다.
추석 명절이다. 지난 추석 때 멋모르고 정동진 괘방산에 갔다가 귀경 길이 정체되어 새벽에 귀가한 악몽이 생생하다. 길 막힘이 덜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신림 가는 길에 >
사당으로 향하는 텅 빈 도로 위, 새벽 공기가 제법 차다. 불과 며칠 만에 가을 문턱에 성큼 다가선 기분이다.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일찍 집을 나선 날은 희한하게도 버스도 금세 온다. 여유라 하기엔 긴 기다림의 시간…. 좀 더 자다 올 껄.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은 시간, 편의점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버스에 오른다. 다신 편의점 커피는 사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고속도로도 텅 비었다. 명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길이 잘 뚫린다. 순식간에 여주를 지나 문막으로 향한다. 이러다 9시가 되기 전 산행을 시작하겠다.
기대는 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웬일인지 버스는 신림이 아닌 제천 IC를 지나 한참을 돌아 들머리 피재로 향한다. 기사가 길을 착각했거나,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나 보다. 들머리 고도는 500미터를 훌쩍 넘어선다.
< 피재에서 석기암봉 >
9시 20분, 고개마루에서 거친 비탈을 치고 오른다. 겨우 고도 100미터를 올라섰는데 숨이 가쁘다.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이정표는 제천의 명산 용두산을 안내한다. 감악산은 뒷전이다. 피재점이라는 특이한 지명을 가진 지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용두산과 감악산이 갈린다. 감악산까지는 6km. 등로가 순해진다. 오래된 참나무 군락이 호위하는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우리네 산이 외국 산과 다른 점은이 이런 소박한 그러나 아기자기한 분위기일 게다. 바람도 살랑살랑, 산행하기 최적의 날씨다. 빛이 바래지기 시작하는 숲에서 곧 찾아올 가을을 읽는다.
석기암봉으로 향한다. 낯선 지방의 처음 발길 닿는 곳을 걸을 때면 드는 긴장감이 이곳에선 느껴지지 않아 좋다. 내 발이 풀숲을 스치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깨운다. 높낮이가 없는 편안한 길을 한참 걸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역사의 역사’속 한 문구가 떠오른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추고 만다. 도전이 가혹하면 응전하는 힘도 커진다. 지나치게 가혹하지만 않으면 도전은 문명의 성장에 큰 자극을 준다.’에키스모의 지금이 안주에 기인한다 말인가? 지극히 서양인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생각이지만, 도전과 응전, 새겨볼 만한 말이다.
< 제천 감악사 / 피재점 / 햇살 받은 전나무 숲 >
평탄한 길에 갈림이 나타난다. 직진하면 우회하여 석기암봉에 닿고, 좌틀하면 바로 정상에 오른다. N지도 상으로는 길이 있다. 과감히 좌틀한다. 샛길로 가는 나를 보고도 사함들은 직진한다. 왠지 느낌이 낯설다.
길이 희미해지더니 첫 암릉이 나타난다. 네 발로 기어오른다. 평소 안 쓰던 근육들이 뻐근하게 느껴진다. 연이어 나타나는 난이도가 더 높은 놈, 어찌 올라서긴 했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한다. 내 실력은 내가 간다. 돌아 나온다. 오를 땐 몰랐는데 내려서려니 꽤 높다. 뛰어내리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내일 아침 삭신이 쑤실 듯…. 다시 삼거리에 선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탈을 치고 올리니, 앞선 이들이 반긴다. 배낭을 두고 석기암봉에 오른다. 포기한 암봉 밑을 내려다 본다. 한 고비만 넘겼으먼 되는데 ㅋㅋ. 그래도 물러서길 잘했다.
< 석기암봉에서 본 풍경 >
어렵게 오른 석기암봉에서의 풍경은 눈을 멀리로 향하게 한다. 치악산 능선이 도도히 흐르고 그 위로 구름이 두둥실, 초가을 산에서 본 풍경은 여유롭고 푸르다. 잠깐 돌아왔으면 어떠하리, 봉우리에 올라 좋은 풍경 감상했으면 그만이다.
< 석기암봉에서 제천/원주 감악산 >
다시 길은 편해진다. 지도에는 다른 석기암봉 표식이 있으나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다. 녹음이 짙어 숲이 어두워진다. 길도 좁아진다. 표지기와 지도를 살피며 천천히 나아간다. 특색 없는 길에 변화가 감지된다. 헬기장이 묵어 억새밭으로 변해 있고, 문바위 갈림을 알리는 이정이 나타난다. 시간이 11시를 향해 간다. 산길을 걷는 행위에 서서히 녹아든다.
길은 작은 굽이는 있어도 평탄하다. 재사동 갈림을 지난다. 이제 감악산까지는 1.3km 거리다. 잠시 쉬어간다. 송편에 곶감, 어울리지 않을 궁합이 입 속을 즐겁게 한다. 여기까지는 석기암봉을 제외하고는 별 특색 없는 길을 걸었다. 명색이 100대 명산인데 이리 싱겁지는 않을거야, 라는 생각으로 길을 이어간다.
< 제천 감악산 오름 길에 본 풍경 >
작은 바위 난간에 서니 하늘이 열린다. 열린 하늘 밑으로 치악산이 굽이친다. 큰 산이다. 산은 겹겹이 쌓여 저마다의 골격미를 드러낸다. 짙은 숲, 나뭇가지가 열린 틈으로 감악산의 웅장한 모습이 실체를 보인다. 웅장하다. 발 길이 빨라진다. 나무 계단이 나타난다. 올라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다. 우회로를 따라 거친 돌 비탈을 치고 오른다. 마침내 더 오를 곳이 없다. 감악산 정상이다.
소나무가 있는 암릉을 올라서자,‘대박’풍경이 펼쳐진다. 고사목, 반석, 골짜기 사이로 형성된 마을, 일망무제의 풍광, 감악산을 대표하는 풍경의 일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농담을 달리하며 멀리를 향해 내닿는 능선의 질주다. 암청색에서 밝은 회색으로 변해가는 색의 조화가 최고다. 산 능선의 결이 하도 많아 이제는 치악산을 찾아 내지 못한다. 좋은 구경한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반석 위에 올라 더 멀리를 굽어본다.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의 조화가 그만이다. 멋진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 제천 감악산에서 >
제천 감악산이 이 정도라면 원주 감악산은 어떨까, 북녘으로 고개를 삐죽 내민 암봉이 원주 감악산이란다. 암릉이 여럿이다. 일출봉, 월충봉, 1봉, 2봉으로 명명된 바위들이다. 근사하다. 목표가 정해지니 앞뒤 가리지 않고 발길을 옮긴다. 바위를 딛고 내려선다. 쉼터에는 산악회 일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평탄한 안부, 길이 헷갈린다. 대장에게 물어 일단 원주 감악산 방향으로 간다. 세월을 이겨낸 흔적이 켜켜이 쌓인 길가 바위를 지나 밧줄 잡고 어렵사리 봉우리에 오른다. 기대만 못한 작은 터에 ‘원주 감악산’이란 글귀가 새겨진 정상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바라보는 풍경도 제천의 그것만 못하다. 더 맛난 음식을 맛본 후 나온 음식에 선뜻 손이 가지 않듯,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린다.
< 원주 감악산 원경 / 흐르는 산 능선과 구름 >
< 감악산에서 백련사 그리고 창촌마을 >
다시 안부 갈림에 선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정적이 감돈다. 지도와 이정에 표시된 백련사의 방향이 다르다. 몇 번이나 등로를 찾아 나서다 되돌아 오곤 한다. 트랭글 궤적의 붉은 표시가 갈지자로 뒤엉킨다. 지도를 두고도 까막눈이 되다니…. 뒤늦게 포기하고 백련사에서 산책 온 이들을 따라 나선다. 길은 제천 감악산에서 올라 올 때 있었던 갈림에서 우측으로 간다. 돌이켜 보니 원주 감악산을 어서 가자는 흥분에 이정을 놓친 게다.
10분 간의 발품 끝에 백련사에 닿는다. 축대 위에 자리잡은 아담한 절 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크진 않지만 품격이 느껴진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돌로된 무지개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선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다. 사천왕이 만든 액자 사이로 석탑과 석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막힌 구도다
< 백련사 풍경 1 >
절 집 앞마당에 선다. 석축 위에 올라선 마당에서 펼쳐지는 풍경의 파노라마는 장관이다.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풍경처럼 확 트인 전경이 그만이다. 산들은 암청색의 조화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 백련사 풍경 2 >
절집을 돌아나온다.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으려고 트랭글 지도를 확대한다. 차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걷다 뒤돌아 본 백련사 풍경에 넋을 잃는다. 절 집 뒤편으로 앙증맞게 솟아 있는 일출봉과 월출봉. 누가 누군지 구분은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앉음새의 자리매김이 기막힐 뿐이다. 잡지에서 본 풍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쩌면 이 모습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길을 잃고도 백련사 행을 포기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석축 위에 절, 절 위에 바위, 그 위에 푸른 하늘…. 오늘 본 풍경 중 단연 최고다.
< 백련사 풍경 3 >
백련사를 본 흥분에 발길이 가벼워진다. 도로는 오솔길로 바뀌고 머지 않아 암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감악산 계곡 길은 초입은 가팔랐으나 이내 순해진다. 계곡 물 길따라 등로가 이어진다. 비교적 완만하고 걷기에 편하다. 계곡물에 세수를 하고 쉬어 간다. 천천히 가도 약속된 3시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시원한 계곡 물이 얼굴에 닿자 또다른 행복이 찾아든다.
< 에필로그 >
감악은 미스터리의 산이다. 거대한 암괴를 품은 산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능선은 평탄했으며, 듣던 바와 다르게 원주가 아닌 제천의 정상이 더 멋졌으며, 백련사 가는 길은 절의 명성에 비하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감악은 실제와 듣던 바가 다른 산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산행을 했다. 야산으로 둘러 쌓인 한남정맥과 근교 산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피재를 들머리로 해서 석기암봉 지나 감악봉으로 향하는 긴 코스를 변경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석기암봉에서 바라보는 치악산의 기막힌 풍광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제천 감악봉은 그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원주 감악산에서 발길을 돌렸을 게다. 5시간의 알차 산행이었다. 게다가 홀로 산 구석 구석을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산악회 일행 대부분이 찾지 않은 백련사를 둘려 본 일은 특히 잘 했다.
제천 감악산에서의 풍광이 원주 감악산 정상보다 훨씬 더 시원했다. 앞으로는 감악산 하면 제천이 더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자고 일어나 아침, 온 몸이 나른하다. PC 위에 앉는다. 백련사 절 집 위 능선 위에 공깃돌을 얹은 듯 자리매김한 일출봉, 월출봉의 사진이 어제 산행을 다시 소환한다. 행복한 경험이었다.
< 감악산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