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성지
어농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鄭? , 1804-1866년)의 묘가 모셔진
단내 성지와도 지름길을 통하면 채 6km 남짓의 거리밖에 안 되므로
두 성지를 한데 묶어 순례하는 코스가 괜찮을 듯하다.
윤유일 바오로를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 중 하나인 윤필용 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 안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그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尹有五, ?-1801년)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그의 숙부 윤현 · 윤관수, 사촌 누이동생인
윤점혜 아가타(尹点惠, ?-1801년)와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1801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와
그의 입국과 사목을 돕다 순교한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최인길 마티아(崔仁吉, 1765-1795년),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1761-1801년) 등의
의묘(擬墓)를 만들었고, 1987년 6월 28일 수원 교구장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했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가 바로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직자를 영입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윤유일은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 암브로시오(權哲身, 1736~1801년)의 제자였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북경에 들어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1784년 한국 교회가 창설됐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평신도가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는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스스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승훈, 권일신 등 교회 지도자들은
1789년 10월 예비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의 북당(北堂) 천주교회로 파견,
북경 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청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까지 받고 돌아왔다.
평신도의 성무 집행은 안 된다는 회답을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1790년 9월 재차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해 성사를 집전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고 그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든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과 함께 북경으로 길을 떠나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 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문모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 : 지금의 계동) 최인길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고,
최인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포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위장이 밝혀지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면서
그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 지황 · 최인길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그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고,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결국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후 비밀리에 그 시신을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윤유일의 나이는 35세, 최인길은 30세, 지황은 28세였다.
이처럼 사제가 없어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한국 교회에
신부를 처음으로 모셔와 완전한 교회로 만들었던 윤유일과 지황
그리고 최인길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한편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되어
신안 앞바다의 먼 섬인 임자도(荏子島)로,
그의 숙부인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 안드레아와 동생 윤유오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는 양근에서,
윤운혜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윤운혜의 남편인 정광수 바르나바(鄭光受, ?-1802년) 역시 이듬해 참수되었다.
이처럼 윤유일과 그 일가족이 모두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고
그중에서 윤유일 · 윤유오 · 윤점혜 · 윤운혜 · 정광수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1987년 고 김남수 주교에 의해 축복된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순교자 묘역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강당)을 마련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聖召)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다.
어농 성지가 자신을 불살라 신앙의 여명을 밝힌 순교자들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성직자를 영입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의 삶이
사제성소의 고귀함을 알려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