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고 박용식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닮아 5공시절 방송출연 정지를 당해야만 했던 배우’로 더 유명한 박용식씨는 정통극보다는 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풍자한 코미디나 꽁트에서 전두환을 연상케하는 캐릭터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었고, 말년에는 ‘6시 내고향’의 단골 리포터로 마치 시골 어딘가에서 볼수 있을법한 푸근한 아저씨나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남겨주다가 향년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전두환 닮은 배우’ 박용식씨를 떠나보내는 시점에서 한번 현대사 드라마에서 역대 대통령을 맡았던 연기자들을 쭉 회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극과 달리 근,현대사를 다루는 드라마를 제작할때는 실존인물의 생전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고 자료사진이나 화면도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실존인물과 분위기가 비슷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향이 많았죠. 특히 ‘현대사’를 다룬 정치드라마일 경우 더더욱 그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구한말 이후나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들은 사극(史劇)이라고 하지 않고, 시대극이라 하던가 근,현대사 드라마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정치사를 다룬 드라마는 대체로 ‘정치드라마’로 불리곤 하였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다룬 ‘정통 정치드라마’라 할수있는 작품으로는 일단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제O 공화국’ 시리즈로 유명한 MBC의 공화국 시리즈가 있습니다. 대체로 각 시대별로 ‘제1공화국’, ‘제2공화국’ 같은 식으로 제목이 붙여져 2005년 ‘제5공화국’ 편까지 방송이 되었지요. 그리고 SBS에서 제작한 ‘코리아게이트(1995)’와 ‘삼김시대(1998)’가 있고 KBS의 경우엔 대한민국 정치사라기 보다는 대체로 해방이후의 정국을 다룬 이야기들을 1TV 주말 ‘대하드라마’ 시간에 두어번 방영한 일이 있습니다. 1985년 제작,방영된 ‘새벽’과 2006년 방영된 ‘서울 1945’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 박정희,김일성에 대한 묘사로인한 논란에 휩싸였다가 조기종영된 1990년작 ‘여명의 그날’도 있습니다.
우선 초대대통령 이승만 역으로는 80년대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열연한 최불암씨가 대표적입니다. 사실 최불암씨의 경우엔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겼을까 고개가 다소 갸웃거려지기도 합니다. 물론 최불암씨가 워낙 ‘국민배우’로 불리는 대 배우고 그만한 연기내공을 갖춘 분이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거의 닮지 않았음에도 적어도 80년대 방영된 공화국 시리즈를 기억하는 시청자 대다수에게는 ‘이승만 대통령 역 = 최불암’ 이라는 인식을 강렬하게 박아놓기는 했었지만요.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2003년 ‘야인시대’와 2006년 ‘서울 1945’에서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은 권성덕씨가 ‘이승만역 단골배우’로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듯 합니다. 그 외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은 배우로는 KBS ‘새벽’과 ‘여명의 세월’의 신구 그리고 전설의 고향 같은데서 주로 순박한 시골총각 역을 맡곤 하던 하대경씨란 배우도 ‘무풍지대(1989)’에서 이승만 역을 맡았었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역은 요즘도 이런저런 사극과 현대물은 물론 시트콤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며 노익장을 과시하는 원로 탤런트 이순재씨가 ‘제1공화국’에서 ‘제3공화국’까지 세차례 윤보선 역을 맡은 ‘윤보선 단골배우’라 할 수 있겠네요. 그 외에는 ‘제4공화국’에서 공교롭게도 이순재씨와 이름이 비슷한 또다른 원로배우 이신재씨, ‘제5공화국’에선 이종구란 단역배우가 윤보선 역을 맡았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은 너무나 유명한 두분이 있죠. 원래는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서 그때까지는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동했던 이진수씨란 중견배우가 박정희 역을 맡았었습니다. 이진수씨는 그에 앞서 ‘욕망의 문’이란 경제드라마에서 까메오급으로 박정희역을 맡아 출연했었는데, 그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너무 닮았다는 평을 들으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 연달아 캐스팅되며 박정희 전문 연기자로 자리잡았었는데, 당시 정작 이진수씨는 배우로서 너무 한 캐릭터로만 자리잡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박정희역 전문 연기자로만 알려지는것을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그 이진수씨는 1998년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또다른 박정희역 단골 배우로 지금까지 출연해오고 있는 배우가 이창환씨입니다. 이창환씨는 본래 MBC ‘전원일기’에서 이계인,박윤배씨등과 함께 농촌총각으로 출연하던 조연급 배우였죠. 하지만 90년대에 KBS의 다큐 드라마에서 처음 박정희역을 맡은 이후 ‘제4공화국’,‘3김시대’ 그리고 ‘제5공화국’까지 박정희 역을 맡았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다큐나 현대사 소재 드라마에서 박정희가 필요한 장면에는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을 맡았던 또다른 배우로는 ‘코리아게이트’와 ‘영웅시대’에서 박정희 역을 맡았던 독고영재씨가 있습니다.
최규하 전 대통령 역은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서 배역을 맡았던 김성겸씨의 느낌이 가장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듯 하네요.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10.26 직후의 어수선한 정국에서 신군부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캐릭터를 아주 실감나게 소화해냈던 것 같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역은 이미 언급했던바와 같이 정작 ‘정통 정치사극’에서 ‘전두환 닮은 배우’ 박용식씨가 전두환을 연기한것은 ‘제4공화국’ 단 한차례입니다. ‘제3공화국’ 초반부에서 육사생도들의 혁명 지지시위를 벌이겠다고 나서는 젊은 전두환 역을 맡았던것은 아무래도 ‘까메오 출연’의 성격이 강했다고 봐야할것 같고, 박용식씨는 그보다는 대체로 풍자영화나 코미디에서 전두환을 연상케하는 캐릭터를 단골로 맡아왔었죠.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연기한 그 외의 배우로는 ‘코리아 게이트’의 정종준, ‘삼김시대’의 장광 그리고 ‘제5공화국’에서 너무나 강렬한 전두환 인상을 남긴 이덕화씨 등이 있습니다. 장광씨의 경우엔 ‘26년’이란 영화에서도 전두환 역을 맡았었는데, 그러고보면 정작 전두환 전 대통령 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던 배우들은 따로 있었던것 같네요.
노태우 대통령 역은 딱히 단골배우가 없이 매 드라마마다 배우가 바뀌었습니다. ‘제4공화국’에선 김기섭, ‘코리아 게이트’에선 김성원, ‘삼김시대’에선 임채무, ‘제5공화국’에선 서인석씨가 배역을 맡았죠. 그러고보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인상이 대체로 무난하고 익숙한 편이라고 봐야하는걸까요. 노태우 역을 맡았던 배우들은 각기 다 달랐어도 분위기는 대체로 다들 비슷했던것 같으니까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서 길용우씨가 배역을 맡았을때 ‘젊은시절 YS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 IMF의 책임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이미지가 안 좋아진 탓인지 길용우씨의 경우엔 김영삼 전 대통령 역을 계속 맡는것에 난색을 표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김시대’가 길용우씨가 김영삼 역을 연기한 마지막 작품이었고, 그 외 ‘제4공화국’에선 임동진, ‘코리아게이트’에선 이영하, ‘제5공화국’에선 김용건씨가 김영삼 역을 맡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딱히 단골 배우는 없었고, 매 작품마다 다른 배우가 DJ 역을 맡았었네요. ‘제3공화국’에선 백윤식씨가 젊은시절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맡아 열연했었고, ‘제4공화국’에선 최민식, ‘코리아게이트’에선 민욱, ‘삼김시대’에선 유인촌, ‘제5공화국’에선 임동진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 역을 맡았습니다. 헌데 임동진씨는 바로 ‘제4공화국’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역을 맡았었는데, 그러고보면 ‘제4공화국’에선 YS를 ‘제5공화국’에선 DJ를 연기하는 진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네요.
비록 대통령은 되지는 못했지만 삼김이 우리나라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던 시절 빼놓을수 없는 또다른 인물 김종필씨의 경우엔 이정길씨가 단골배우였죠. ‘제2공화국’,‘제3공화국’,‘코리아 게이트’ 그리고 ‘제5공화국’까지 네차례나 이정길씨가 김종필씨 역을 맡았습니다. 그 외엔 ‘제4공화국’에서 한인수, ‘삼김시대’에선 정동환씨가 JP 역을 맡아 열연했었습니다.
현대사 드라마에 여러차례 출연한바 있는 한 중견배우가 10년전쯤 한 토크쇼에 나와서 이런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우리가 그저 (현대사를 다룬 정치드라마에서) 실존했던 정치인들의 ‘흉내’만 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연기’를 하는것이지 ‘흉내’를 내는것이 아니다.” 라고요.
그렇습니다. ‘흉내’와 ‘연기’는 분명히 다른것이죠.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의 경우 사극과 달리 실존인물의 사진이나 방송화면 자료가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또 실존인물이 아직까지 살아있거나 또는 사망했더라도 그 실존인물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가급적 실존했던 정치인과 분위기가 비슷한 연기자를 캐스팅하려고 하는것이지, ‘정통 정치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것과 아이돌이나 신인 개그맨이 예능프로에서 주목을 받아보기 위해 유명 정치인 ‘성대모사’를 하는것은 분명히 다른 성격의 일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앞에서 언급했던것과 같이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맡았던 최불암씨는 ‘이승만을 전혀 닮지 않은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최불암씨는 두 차례 이승만 역을 맡았던 드라마에서 펼친 열연으로 적어도 80년대 시청자들에겐 ‘이승만 대통령 전문배우’로 한동안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종필 단골 배우였던 이정길씨도 사실 실제 JP와는 그다지 흡사한 외모는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 ‘현대사 드라마’에서 김종필 역으로 열연을 펼친결과 ‘김종필 전문 배우’로 자리잡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도 ‘전두환 닮은 배우’로 알려진 사람은 박용식씨였지만, 정작 ‘제5공화국’에선 이덕화씨가 펼친 전두환 연기가 보다 강렬한 느낌으로 시청자들의 인상에 남았었습니다. ‘연기’와 ‘흉내’의 차이. 굳이 말하자면 흉내는 그저 단순히 실존 정치인의 ‘성대모사’를 하는것이고 ‘연기’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연기자가 맡은 배역에서 자연스럽게 실존했던 그 정치인이 느껴질때 비로소 ‘정통 정치드라마’에서 실존인물의 연기를 제대로 해낸것이라 평가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TV 방송의 역사가 KBS와 MBC의 개국에서부터 시작하면 이제 대략 반세기를 넘겼고, 현대 정치사를 드라마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것은 80년대 이후였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지금까지 KBS는 40년대 후반 해방정국을 두어차례 드라마로 다룬적이 있고, MBC가 저 유명한 ‘공화국’ 시리즈를 ‘제1공화국’편에서부터 ‘제5공화국’편 까지를 방송해오면서 정통 현대사 드라마를 제작해온 방송사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그리고 SBS도 ‘삼김시대’라던가 ‘코리아 게이트’ 같은 현대사물을 간간이 다뤄왔습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형태의 현대사 드라마가 나오게 될까요 ? 일단 공화국 시리즈를 지금까지 방영한 MBC에서 이후에도 ‘제6공화국’등의 후속작을 제작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해볼수 있지만 아직까지 MBC 측에서 ‘제6공화국’등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은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너무 최근의 현대사를 자주 드라마로 다루는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일부분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일본만 해도 메이지유신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사극이라면 모를까 현대사를 다룬 정치사는 드라마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사회분위기가 있다고 하니, 그런면에선 우리가 그래도 일본보다는 훨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드라마’로 만들만한 이야기거리가 너무 많을 정도로 우리 현대사가 너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언젠가는 제6공화국 이후의 시대도 한번쯤은 드라마로 다루어보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은 바램을 담아보며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 그런데 사족으로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 역은 어떤 배우가 맡는게 적합할것 같나요 ?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게 5공청문회때부터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제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 시대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다룬다 하더라도 그때부터도 ‘정치인 노무현’을 어느정도 비중있게 다뤄야 할것 같은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