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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한국교회에게 주는 이야기 |
[나두산 목사(서울 극동방송국 [남과북이 하나되어]에서 [아름답고 은혜로운 한국교회이야기]에 이여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아름답고 은혜로운 한국교회이야기), 목사님 집사님 제발 인터넷 좀 배우세요저자] 군산남성교회 100년사 지곡교회 100년사공저 기독넷 운영자, 국제옥수수제단 사무국장.국제신학대학원, 총회 디지탈 신학교에서 강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강의 아름답고 은혜로운교회 목사
통계청이 2006년 5월 25일 보도 자료를 통하여 밝힌 통계에 의하면 2005년 11월 1일 현재 한국교회 교인 수는 약 862만 명이라고 발표하였다.
2005년에는 한미준이 갤럽과 공동으로 조사하여 발간한 『한국교회 미래리포트』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 수는 약 1,300만 명에 달한다라고 발표한적이 있는데 이 둘의 통계상의 차이가 큼에 따른 허세의 논란도 만만치 않다.
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통계청의 발표에 대하여 무시 할 수는 없다.
다만 1년에 불과 1~2회 정도 불교 절이나 천주교 성당이나 개신교 교회에 나가면서 신도라고 응답한 수는 총 신도수의 각각 불교가 33,1%, 천주교가 7,2%, 그리고 기독교는 2,8%라 하며, 아예 1년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종교 란에 기록한 경우가 각각 불교는 32,1%, 천주교는 26,1%, 기독교가 11,7%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각 종교 신도들은 지금은 구체적인 종교에 입문하고 있지는 않으나 전통적으로 내려 오는 가정의 종교적 의식에 의하여 자신의 종교도 그럴 것이다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수가 불교의 경우 33,1%, 가톨릭은 26,1%, 그리고 개신교는 11,7% 정도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지속적으로 시키는 패턴을 가지고 있음으로 명목상 신도가 적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되지만 1992년에 일어났던 시한부 종말론 문제와 만민교회 MBC점령 사건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벌어지면서 기독교인구의 증가는 거의 멈추어 섰고 수평이동으로 인한 대 교회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된 이유에 대하여 1997년 갤럽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좋은 일 보다는 나쁜 측면에서 영향을 더 주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교파분열이 많고, 사이비 종교성이 심각하고, 헌금의 강조와 재산다툼을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여 문화를 리더하고 나가기 보다는 세속적인 마인드에 편승하여 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확장에 앞섰고, 지나치게 헌금을 강요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지도 않으면서도 지켜야 할 규율을 너무 엄격히 강조만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조사는 1907년에 일어 났던 평양 대 부흥운동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게 하는 내용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의 관점
평양부흥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왔고, 따라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평양부흥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된 이유는 그것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대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특히 영적인 면과 양적인 성장에 있어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평양부흥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사적 반성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베이컨이 ‘역사는 우리를 현명하게 한다’고 말했듯이 과거의 평양부흥을 통해서 현재를 점검하는 가운데 그것이 한국교회를 현명하게 한다면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 평양 대부흥 사건이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의 전형으로 서 지금 우리세대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라는 관점으로 기술하려 한다.
부흥운동의 환경적 요인
평양부흥이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찍이 백낙준 박사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897년부터 1906년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발흥기였다.……국내 정치사상 대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전국에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宣敎史의 입장에서 볼 때 이 9년간의 한국문제는 정치와 선교의 범주에 속한다.
정치문제들은 선교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실정을 파악하려면 정치문제에 대한 개관이 필요하다.
정치문제는 한국을 지배하려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치열한 경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평양부흥을 살펴보는 이유는 역사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이 한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총체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시대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1) 종교적 상황
당시의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이전에 한국사회를 주도해왔던 불교,유교 및 도교 등 어떠한 종교도 한국을 구원해 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이유는 조선조 500년이란 세월 속에 삶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러한 종교들이 도리어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리게 하고 외부의 세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러한 종교들을 한국에 전해주었던 중국이 기독교를 자국의 종교로 표방하는 서구의 세력 앞에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종이호랑이’ 사실로 판명되자 한국인의 정신적 상황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중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전해준 종교가 허무한 것을 보면서 정신적 종교적 공황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면서,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복음”에 의하여 새 혼이 생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이 기독교 복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평양부흥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길선주이다.
생(生)의 회한과 선도(仙道) 입문
. 1885년, 선주의 나이 17세 무렵,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집으로 난입한 모리배들의 폭행에 선주가 거의 죽다시피 할 정도로 상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선주의 부친은 복수의 일념으로 평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한에 사무친 앙갚음의 칼을 갈아오는데, 그 모리배 일당이 예기치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었다.
이 무렵 선주는 우주 공리의 엄연히 살아있음과, 선과 공의가 인생사의 주초가 되고 있음을 느껴가고 있었으나, 워낙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은 터라 세상은 허무하고 인생은 무상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한 염세적인 생각들은 선주로 하여금 장차 영계(靈界)를 더듬게 했고, 영원 세계에의 탐구로 몰아 갔는지도 모른다.
인생사에 대한 환멸과 병약한 몸으로 심신이 기울던 19세 무렵, 선주는 관우 장군을 섬기는 관성교의 제문 몇 가지를 정성 들여 외우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관우와 어느 중이 논쟁하고 있길래, "승속(僧俗)이 유별하거늘 어찌 감히 관공을 희롱하는가?" 했더니, 곁에 있던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보정대사(保精大師)를 몰라 뵈는가?" 하더란다. 선주는 깜짝 놀라면서, "만일 그 대사님이라면, 관공과도 논쟁할 자격이 있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동강변의 을밀대로 가거라" 하더란다. 이윽고 꿈이 깨었다.
을밀대의 경치에 취해 오르던 그 이튿날의 산행에서, 선주는 우연히도 창일(倉日) 선생이라는 도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얻게 된 그는 며칠 뒤 대성산 두타사에서 밤낮으로 주문을 송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정신을 주문에 집중하자, 마음에 서려 있던 잡념이 점차 사라지고 무아경에 이르게 되면서, 삼일 째에 이르자 접신이 되면서 몸이 떨리고 기력이 되살아나며 힘이 솟기 시작하였다.
선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창일 선생이 일러 준대로 7일의 정성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몸에 힘이 났다. 입맛이 되살아나고, 소화력이 왕성해 졌으며, 그 동안의 중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삶의 비결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쁨이 솟아올랐다. 이로써 선주는 선도(仙道)를 수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입산수도(入山修道)
길선주는 그 이후 장 선생이란 도인으로부터 구령삼정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얻어 심산 유암에 들어가 몇십만 번을 외우고 또 외웠다.
몇 해 동안 육경신일(六庚申日)마다 밤을 새워 송독하였다. 선주는 19세 무렵부터의 관성교 연구에 이어서, 21세 무렵부터는 이처럼 입산 수련에 정력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번씩 심산 유벽 깊고 외진 산사에 가서 옥경(玉經)을 연구하고 주송하기를 21일, 혹은 49일, 혹은 백일을 지새웠다. 대성산의 두타사, 상원의 백운암 등이 그의 치성 제단이 세워지던 곳이었다.
선도의 수련 기도라는 것은 묵상과 송독을 겸한 것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행이었다. 이 기도는 신통력을 얻고 신통(神通)이 되어야 하므로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며, 사(邪)가 단 한 순간의 틈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예정한 기일 동안에 집중된 정신을 적은 틈이라도 해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과 낮을 불구하고 기도를 쉴 사이 없이 계속하며, 심신의 피로로 잠이 올 때는 삼동 대한을 가리지 않고, 반석 위에 서서 얼음물로 목욕하여 잠을 깨우기도 하고, 밀 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사이를 지지기도 하며 공부에 진력하였다. 이처럼 진력하는데, 방안에서 진동하는 옥 피리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며, 간혹 옆에서 총소리처럼 폭발하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도 공부가 무르익으며, 선주는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다.
예수교로의 개종
"삼령신군(三靈神君)이시여! 현 세계를 움직이는 예수교가 참 도(道)이오니까? 거짓이오니까? 밝히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교 전도지를 내미는 평양 거리에서 예수교인과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 있은 후, 이렇게 기도하기를 몇 날이 지나자, 자신이 신봉하던 선도를 영생불사 도리로 알고 있던 선주의 마음에 점차로 의심이 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환영이 보였다.
"아래로는 만경창파요, 위로는 층암절벽이 솟았는데, 이편과 저편에 각기 동아줄이 드리워 있는지라, 내가 이편 줄을 잡고 오르는데 보아하니 위가 썩은 줄이로고. 하여서, 잡았던 줄을 놓고 저편의 것으로 옮겨가려 하니, 이제는 그 줄마저 튼튼한 것인가 의심이 먼저 나는지라..."
이제 다시 선주는 번민에 휩싸였다.
10여 년을 매진해 온 선도(仙道)에의 회의와 아울러, 예수교에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다시 그를 병고의 길로 내 몰았다. 이내 심신은 다시 쇠약해 갔다. 선주는 전도자가 주고 간 천로역정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그 책 중 인물의 역정에 자신의 지난 생이 투영되어 눈물이 책장을 적시었다. 그러나, 하나님에의 깨달음은 물론, 예수에 대한 조그마한 신뢰감마저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전도자가 다시 일러 준대로 선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천부(天父)를 상제(上帝)라 부르며, 깊은 밤이며 이른 새벽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상제님이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여러 해 정성을 다한 선도(仙道)는 이제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확신치 못하고 있사오니, 저는 실로 민망하여 죽을 지경이오니이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심령에 안식을 주시옵소서!"
이 같은 내용의 기도가 수삼일 지속되던 어느 날 밤, 오고가는 인적은 끊기고 사방은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선주는 홀로 꿇어 엎드려 간곡히, 예수가 과연 인류의 참 구주인지를 기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방안에서 예의 그 청아한 옥 피리 소리가 진동하며, 요란한 총소리가 사방을 뒤흔드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공중에서 "선주야, 선주야, 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음성에 놀라 두려움에 몸을 떨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엎드린 그 자세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입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 대곡하였다. 몸은 불덩이 마냥 펄펄 끓었고, 선주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해가 1897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비록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당시 평양 대 부흥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길선주가 정신적 종교적 공황 상태에서 헤어 나오는 이야기로서 개항기 때 조선 말기에 처해 있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과 국민들의 심리적 요소와도 관련될 수 있다.
(2) 문화적 상황
문화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국민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민족의 성격(personality)이다.
평양부흥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의 성격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의 한국인의 성격이 평양부흥 후의 첫 번째 국제적인 선교회의였던 1910년의 에딘버러 보고서에서 잘 밝혀져 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한국인의 성격과 한국교회의 성장을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성격에서 한국인은 조용하고, 부드럽고, 유순한 민족이다. 특히 손님대접하기를 잘하는 환대하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 인내, 충성심 그리고 믿음의 단순성들이다. 이러한 자질들 때문에 복음의 영향하에서 한국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할 만한 추종자들이 되었다.”20) 즉 한국인의 열린 마음과 단순한 믿음이 기독교에 즉시적인 반응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도 한국인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보다 “순하고 감정적”(docile and emotional)인 것도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매우 빨리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21)
이런 한국인의 특성과 기독교의 관계가 평양부흥에서도 잘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평양부흥 기간 동안 성도들이 통성기도를 하면서 공적으로 죄를 고백을 하는 것과 그것을 듣는 자들도 또한 함께 자기들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면서 같이 죄를 고백하는 현상이 있었다.
1907년1월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 첫날 저녁 상황을 목격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월요일 밤 성령의 은혜가 임하였다. 성령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현시하였다.
간단한 예배가 있은 후 온 회중이 일치 단결하여 드리는 통성 기도는 마치 파도 처럼 그 열정과 강도가 올라 갔다. 줄어 들었다 했다 그런 후 곧 간증이 시작 되었다.
그들의 언어 그들의 표정 그들의 눈물 울부짖음이 그 이야기를 말해 주기 시작 했다.
…..그들은 간증차례가 시작 되면 펄쩍 뛰고는 자신의 죄를 통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며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가장 소림 끼치는 일련의 죄에 대한 고백들이 방해 받지 않은 가운데 있었다.
수치스러운 모든 죄들이 아주 깊은 죄 의식 하에 고백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마치 가장 무시무시한 고통에 처한 것 처럼 갑자기 무섭게 통회하고 애통하기 시작 했다.
때로는 마치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들 처럼 자기 가슴을 치기도 했다.
때로 그들 중에는 갑자기 마룻바닥에 엎어져서 몹시도 통회하는 가운데 손으로 바닥을 연타하기도 하였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서북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지역적 성격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타 지역 사람들에 비해서 좀더 감정적이고 다혈질이었던 평양사람에게 종교적인 현상도 더 감정적이고 강렬하게 나타났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은 그 당시 한국 전체가 다 어려운 가운데 평양이 겪은 경제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3) 경제적 상황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1905)을 겪으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는데, 특히 청일전쟁의 결정적인 전투가 평양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평양은 크게 파괴되었다.
그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은 환경적 불결함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보고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1884년에 방문했던 미국 해군 군의관 조지 우즈(George W. Woods)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의 좁아터진 먼지투성이 길은 온통 사람과 짐승의 오물로 뒤덮여 더러운데다가. 누더기에 가까운 헐렁한 옷차림의 사람들, 벌거벗은 아이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개들, 그리고 짐을 실어 나르는 소와 말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도로 양 옆의 시궁창에는 온갖 오물이 흐르면서 표현할 수 없이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고 한다.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서울의 형편이 이러했다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던 평양의 형편은 말할 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자발적” 또 “선의의” 봉사자로 민중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 한국인들이 겪고 있던 지독한 경제적 어려움이 그 당시에 “쌀 신자” 및 “설탕 신자”를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선교사들로부터 구호를 받고 질병을 치료받는 가운데서 기독교와 접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신자가 된 경우도 많았다.
이런 극심한 가난이 나라를 잃게 되는 충격, 슬픔과 상승효과를 일으켜 평양부흥에서 폭발적인 역사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4) 정치적 상황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정치적 상황은 한마디로 한국에게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였다.
그 시대만큼 민족과 교회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1907년 평양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러일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한 후에 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는 ‘을사조약’, 고종의 폐위 그리고 군대해산 등이 이어졌다. 러일전쟁이 8월에 끝나자 이내 ‘을사조약’을 통해 국가의 중요한 권한이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고, 고종 황제는 더 이상 그가 스스로 만들었던 국호인 대한제국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은 한국인들에게 종교적 위안처를 찾게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점은 인간 삶의 보편성 가운데서도 쉽게 감지 될 수 있는 신앙적 경험이라 하겠다.
즉 개인 및 교회의 영적 부흥이 평소의 평범한 삶에서 나타나기보다는 고난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기도를 시작했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던 상황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순수한 신앙적 경험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평양부흥도 정치적 환경이 평양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다가 그것이 종교적인 차원으로 반전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간과되어질 수 없는 것은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필리핀을 점령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을 미국이 허용하는 가운데서 생긴 미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라 하겠다.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한국정부가 기대했던 미국의 한국 문제 개입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국 주재 미국선교사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 그로 인해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05년 1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외교사상에 가장 주목을 끄는 이례적인 협약을 하게 되는데 그 협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수 있도록 허락한 내용이었다.
고종이 비밀리에 미국에 파송한 특사 헐버트의 노력이 실패한 데다 한국정부와 전혀 상의도 하지 않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을 “배신”한 것이다.
오랫동안 친구관계로 생각해 왔던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서둘러 승인하자 국내 곳곳에서는 미국인들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한국인들에게 반미 감정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의 위치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격렬한 반 외국인 감정, 특히 반미감정이 폭풍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불행한 상황에 대해 일본보다 미국인들이 더 책임이 있다고 장황하게 말하곤 하였다. 어떤 때는 폭도들이 일어나서 선교사들의 모임들을 해산 시켰다.
사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미국을 특별한 친구로 생각해 왔다. 우리의 외교관 알렌박사는 국왕과 모든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영국의 예를 따라, 한국에 대한 일본 지배를 미국이 서둘러 승인하자 모든 곳에서 실망은 컸다. 격렬한 반 외국인, 특히 반 미국인 폭풍이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그 동안 한국선교에 공들였던 많은 사역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염려가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게 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대한 선교사들의 염려는 1907년에 있었던 겨울 사경회를 통해서 이러한 한국의 절망적인 정치적 상황들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반미감정에 대해 선교사들이 걱정하는 가운데 평양부흥이 발발하게 되었던 상황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캔들러는 미국 남부 감리교회의 주교(Bishop)로서 ‘을사조약’ 후 1906년경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여러 자료들을 모았고 그것에 기초해서 “그는 상처 입은 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한 민족”(An Broken Hearted Nation Turning to Christ)이라는 제목하에서 이 글을〈아틀란타 저널〉(Atlanta Journal)에 기고했다
그 글에서 캔들러는 ‘을사조약’으로 절망적인 그 당시 한국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러분은 마음이 깨진, 상처 입은 나라를 본 일이 있습니까? 보지 못하였다면 한국만큼 상처 입은 나라를 여러분들이 정말 보지 못했을 것이 확실합니다.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모든 희망의 광선이 희미해져가는 가운데서 비참한 삶들로부터 마음 아파하는 남녀를 본 일은 있습니다만 한국처럼 온 나라 전체가 좌절한 모습을 결코 본적은 없었습니다. 한국은 내가 보기에 이제 땅위의 희망이 없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중략)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의 왕실에서 힘을 잃고 무기력한 반면에 이토 통감이 실제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오랜 세기를 두고 추구한 일본의 야망이 성취되고 한국은 그 마지막 독립의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
3. 영적 요인 1903과 1905년의 원산부흥이 1907년의 평양부흥에 개입된 정황은 많이 있다..
그러나 두 부흥운동의 성격과 상황은 엄연한 차이점이 있다.
원산부흥이 감리교 의료선교사였던 하디(Hardie)의 개인적인 심경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났다,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Dr.R.A. Hardie]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에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 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즉 회개의 긍극적인 내용은 의료 선교사라는 점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보다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회개하게 되면서 시작 되었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Rev.A.F. Robb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있던 전계은(全啓恩)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 했고,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평양의 부흥은 위에서 밝힌대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런 연속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원산부흥과 평양부흥 사이에는 불연속성 즉 차이점이 존재했다. 이 불연속성의 본질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사건을 일으킨 환경적 요인 즉 역사적 상황이 달랐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종교외적 상황은 평양부흥이 일어나게 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원인인 기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1)기도 선교사의 정오기도회
교회역사에서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도였다고 부흥과 기도의 상관성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
평양부흥에서도 기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많은 자료들이 증명한다.
1907년 평양부흥의 목격자이기도 했던 중국선교사 조나단 고포드(Jonathan Goforth)는 그의 책《성령의 불길이 한국을 휩쓸 때》(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에서 평양부흥의 중요한 원인을 열정적 및 지속적 기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풀러 신학교의 대표적 교회성장학자인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도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교회성장의 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에서 부흥운동과 기도의 상관관계를 언급하면서 그것의 대표적인 예를 1907년의 평양부흥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평양부흥에서 나타났던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성도들의 기도가 부흥의 영적 요인 중에서 결정적인 것임을 지적했다.
또 평양부흥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도들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의 기도, 통성기도 그리고 공중 회개기도들이었고 이러한 기도들이 부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가운데 주목해서 살펴볼 것은 평양부흥이 있기 직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정오 기도회였다.
먼저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의 배경을 살펴보면 평양 거주 선교사들은 1906년 8월 기간 동안 “자신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체험하고 싶은 감동이 일어나 이 목적으로 8일간의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열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영적 부흥을 위한 선교사들의 기도는 1905~7년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정치적 위기는 밖으로는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것에 이어 1907년의 정미 7조약, 그리고 군대해산 등에 대한 위기이고 안으로는 의식 있는 애국 청년들이 교회를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샤프(C. E. Sharp)의 지적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적 동기를 잘 설명해 준다. 샤프는 한국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다양한 동기를 설명하면서 “가장 주요한 동기가 보호 및 힘에 대한 동기”였고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이다. 선교사 게일(Gale)도 이러한 교회의 정치적 도구화에 대한 염려를 우려하였다
따라서 교회 밖으로는 ‘을사조약’으로 나타난 미국의 “배신”과 교회 안으로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교 분리와 정치 불간섭의 원칙에 입각한 “민족정치적 중립표방”으로 하여금 반미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교회가 정치적 위기 가운데서 순수하도록 기도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을 블레어는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이 혼란스럽고 그 마음에 압제자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며, 지도자들이나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에 대해서 점차 냉담해지고 그것을 거부하게” 되었으며 “악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선교 현장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고 이런 상황 가운데 1906년 8월에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모두 다 “그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함께 모였다.”
강사는 원산의 하디였다. 이 기도회에서 중요한 기도 제목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평양에서 열리는 겨울 남자 사경회를 위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간절하면서도 끈기 있는 기도의 결과로 “확실히 1906년 말 한국, 특히 평양지역의 영적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성숙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선교사들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갖던 친목 모임을 중단하고 감리교 및 장로교 선교사들이 다시 연합하여 곧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인의 남자 사경회와 그 후에 개최될 감리교인의 사경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1907년 1월 2일 장로교 사경회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이 하던 매일 정오 기도 모임은 대부분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지방에 가야하고 참석할 수 있는 선교사들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으로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는 중단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기도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은 너무나 강렬하였고 사경회 기간동안 매일 정오기도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43) 따라서 평양지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오기도모임은 사경회 기간에도 열려 일 주일간 계속되었다.
평양 주재 장로교 선교사 그레함 리(Gramham Lee)가 “이 정오 기도회는 우리들에게 바로 벧엘이었다”고 말할 만큼 이 기도회는 선교사 자신들에게 대단한 영적 각성의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평양부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의 오순절 첫째 날(1907년 1월 14일) 월요일 정오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 모두가 더욱 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들은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 당신께서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다고 한(창세기 32 : 26) 그런 심정으로 그들은 끈질기게 기도했다고 한다.
이 기도는 강렬하고도 끈질긴 기도가 그 특징이었고 이것이 평양부흥의 불씨가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통성기도
평양대부흥은 선교사의 정오기도회와 함께 “통성기도”(united audible prayer)가 부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많은 선교 보고서가 보여주고 있다. 모인 회중이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전심을 다해 드리는 이와 같은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운동을 특징짓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본래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운동 이전에는 보기 힘든 매우 낯선 기도 방식이었다.
그것이 한국교회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06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하우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 박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1906년 웨일즈 부흥운동 소식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웨일즈 부흥회에서는 공적기도를 인도하는 인도자만 기도하지 않고, 각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큰 소리로 통성기도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웨일즈 부흥운동의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은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도 발흥하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통성기도를 그대로 한국교회에 도입했다.
“기도의 대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 전날 주일은 영적인 놀라운 특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모임은 죽은 것 같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떠난 것 같았다”고 한다.
길 선주 장로의 능력 있는 설교 후 그래함 리 선교사가 기도를 요청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기도하기를 원치 않는 분위기였다
스왈론는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주일 저녁 집회때 대단한 기대를 했으나 놀라운 축복을 받는 대신 상당히 독특한 경험을 했다.
그 집회는 죽은 시체 같았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들을 떠나 버린 것 같았다…”
따라서 월요일 오전에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더욱 더 그날 저녁 모임을 위해서 이전보다 더 갑절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특히 하나님만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줄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였고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이날 저녁 짤막한 설교 후에 리 선교사가 모임을 맡아 기도회를 시작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자 리 박사는 “만일 여러분들이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모두 기도합시다”라고 통성기도를 제안했다. 이 통성기도의 결과로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든 회중이 다함께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표현할 수 없었다. 무질서가 아니라 영혼과 소리의 거대한 조화였다. 저항할 수 없는 기도의 충동에 영들이 함께 어우러져 움직였다. 그것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한 성령에게서 난 하나로서의 위에 계신 한 분 아버지께 올려졌다.
그것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철저한 회개,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염원, 이 민족의 장래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민족적 신앙애가 한데 어우러진 간절한 기도였다. 또한 여러 가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대격변기에 “한 맺힌 심정”으로 오직 절대자에게만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음을 고백한 가운데서 나온 기도였다.”
이것이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영국의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 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그래함 리)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자 비상한 힘이 밖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온 회중을 사로잡았다.” 이 통성기도는 평양부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그 이후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기도로서 한국교회의 토착화된 기도의 형태가 되었다.
공중 회개기도
평양부흥을 촉발케 했던 중요한 기도의 요인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공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 예를 들면 자기 아내가 바로 옆에서 듣는 가운데 다른 여인과의 간음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한 여인은 청일전쟁 때 피난 가는 도중에 자기의 아이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자 그 아이를 나무에 쳐서 죽이고 도망 간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이 고백적인 기도가 다른 사람들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악을 토로하게 하고 이러한 회개의 연쇄 반응들이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고백함으로서 그들의 영혼을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폭발적인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중 앞에서 회개 기도를 그 당시의 참석자 였던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인간이 정말 자행할 수 있는 모든 죄가 공적으로 그날 고백 되어졌다.……하나님의 성령이 영혼들에게 잠잠히 임할 때 지상의 어떤 세력도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라고 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의 둘째날 (화요일저녁) 집회에서 길 선주가 “회개와 고백”을 촉구하자 “시내산의 섬광”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그곳에 모인 이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수 없었다. 전에 경험 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에게 임하였다. 그것을 어떻게 벗어 버리고 피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 였다” 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스와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다음날 성령의 역사는 전날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만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날 장로들과 목사들 사이에 큰 죄악들이 들어 났는데 모두가 죄를 고백하지 않을수 없었다. 마치 이제 까지 자신이 범한 그 그악한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역사 하시는 성령에 놀라운 힘에 압도 된 것 처럼 건장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 통회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 었다.
……..진실로 그 장면은 마지막 심판을 보는 것 처럼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한가지 툭기 할 만한 사항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죄가 비록 큰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죄만큼이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요인인 듯 했다…..”
마지막 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 장로의 회개였다.
이때까지 소개만 숙인 채로 강단 뒤에 다른 장로들과 있던 김장로가 앞으로 나오더니 절규하기 시작 하였다.
“나는 하나님과 거슬러 싸운 죄인입니다. 교회 장로인 나는 강 유문 집사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방위량 선교사도 미워 했습니다.”하며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방위량선교사를 도와 사역하고 있던 동평양교회 강 유문을 시기심이 발동하여 미워하고 강유문을 지지하는 방선교사까지 미워 했던 미움과 증오를 토해 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발작하는 사람과 같았다라고 한다.
이때 강 유문이 일어 나서는 고뇌 가운데 기도하다가 마치 자신의 심장이 터질 것 처럼 완전히 나자빠져 흐느껴 울부짖었다.
그런 후 강 유문을 김 장로에게 다가가서 두팔을 벌리고 안으면서 울기 시작하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실내는 환희와 기쁨의 흐느낌이 천장을 날려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는 두명은 방위랑 선교사에게 다가가서”나를 용서 해주실수 있습니까?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자 방위량 선교사는 ”아버지 아버지’’ 할뿐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평양 대 부흥운동 중에 있었던 이야기 중에 극히 일부분 이야기다.
질적 변화
평양부흥에서 질적 변화란 무엇보다도 영적 변화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907년 평양부흥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 지식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함께 가는데 그것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평양부흥은 한국 기독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죄에 대한 심각성과 의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부족했다. 그러나 부흥 후에 이러한 인식이 더욱 더 깊어졌다는 것이다.66)
셋째, 부흥회를 통해서 경험한 회개와 그 후에 찾아오는 죄용서의 기쁨과 평화가 넘쳤다.
평양부흥의 둘째 날인 1월 15일 화요일 길선주 장로의 설교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한 후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넷째, 평양부흥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경험한 것 가운데 한 가지 특징적 현상은 인간관계의 회복 가운데서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하나됨이었다.
참다운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시작되어 자연히 인간관계의 회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평양대부흥을 통해 그런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평양부흥은 한국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올 때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동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경제적 이유로 쌀과 설탕 및 약을 얻기 위해서,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 당시의 애국 민족 청년들이 일본의 침략을 제어하는데 미국의 세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교회를 출석하는 등 순수하지 못한 동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비종교적인 이유로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던 교회가 이 부흥을 통해서 여러 가지 불순한 동기들로부터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좀 더 순결하고 달콤하고 새롭게 되었다.”
. 여섯째,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도덕적 및 윤리적 변화 또한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부흥회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높은 윤리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부흥은 참된 회개운동이었기 때문에 삶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어떠 한 기독교인은 중국인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끼쳤고 부흥 후 그 사람에게 경제적인 차액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양부흥으로 나타난 변화 중의 하나는 사회적 변화였다.
진정한 부흥은 개인과 교회의 내적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특히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찼던 도시, 정령숭배 및 악들 중에서도 가장 악들이 무성했던 도시, 한국에서 가장 희망 없는 지역으로 여겨졌던 그 도시가 평양부흥 후 어디에서나 기도하며 우는 소리 및 찬양소리가 들려졌다”고 한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폐허가 되었던 그 도시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양적 변화
평양부흥의 결과를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 격렬하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맛본 이런 종교적 경험은 한국교회의 영성이 크게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 변화 및 양적 성장에도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경이적인 교회성장은 부흥운동의 결과 영혼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전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 열심이 “날 연보”(Day Offering) 및 선교사업과 연결되었다. 평양부흥운동 때 일어났던 한 가지 현상인 날 연보는 영적 부흥에 전도가 동반되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전도는 평양부흥의 현상만이 아니라 모든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연보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날 연보라는 전도 운동의 독특한 면은 경제적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칠 수 없는 어려움에 놓여있는 은혜 받은 성도들이 돈이나 물질 대신 시간을 바치는 헌신 제도로서, 바친 날(시간)에는 세속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로서 전도에 봉사하고, 전도를 하되 일상적인 전도와 구별하기 위해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다른 동네에 가서 전도하는 독특한 전도 방법이었다.
전도하기 위해서 돈을 연보하듯이 날을 연보하여 전도에 헌신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착화된 독특한 전도방법이 1905년 선천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부흥을 거치면서 다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10년 백만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전도의 열기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보내고 그 외 여러 지역 특히 중국 및 사할린 연해주 하와이 등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4. 결론
평양대부흥 당시 정치, 문화,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깊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 신앙을 내적으로 심화시키고 교회를 외적으로 성장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므로 영적, 신학적,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의 성격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건이었던 평양대부흥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 함으로서 오늘날의 상황을 극복하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기독교인의 감소에 대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통감하여야 한다.
왜 감소 될까?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많다.
간단한 예로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57%가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은 사회적 정의가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때로는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14, 15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특권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모든 일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과 똑같이, 믿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과 같이,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과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이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이 사랑을 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근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실행하는 신앙의 정신을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가져야 한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반성을 통해 오늘날의 총체적 난국을 극복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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