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 평양 대부흥 100주년 맞아 우리는 제2의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100년전, 당시를 돌이켜볼 때, 그때 우리 선조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몸부림치던 회개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메시지가 선포될 때마다,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 모든 성도가 회개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기대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일방적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삼아 주셨고, 그 증거로 회개의 물결이 전 한반도로 번져갔습니다. 그 회개의 물결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고,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은 가문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몰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이 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생명을 포기하면서도 그들은 ‘오직 예수’를 외치며 형장의 이슬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쁨과 감사로 죽음을 담대하게 맞았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 가신 길을 걸어가는 그들을 꺾을 무기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제 아버지 주기철목사님이나 이기풍목사님, 손양원목사님 그리고, 세상에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수많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곧 성도들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그들앞에 당한 경주를 최선을 다해 경주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천국에서 받을 영광 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히 12;1,2) 그것이 한국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6월 호국의 달과 특별히 순교자 기념주일을 맞아 ‘ 주기철목사님의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935년 5월. 전국 목회자 하계수양회가 금강산 온정리 장로교 수양관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마산 문창교회 담임목사이자 경남 노회장이셨던 주기철목사님이 강사로 초청받아, 그날 250여명의 목회자들에게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이 시대의 목사가 곧 선지자요 예언자라고 전제하고, 오늘의 선지자, 예언자들의 상징을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세례요한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습니다.
1. 선지자 엘리야의 눈에는 바알신도 아합와과 이세벨 여왕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 있었다. 여러분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다면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권능과 권위가 있을텐데, 오늘의 목사는 왜 바알앞에서 떨며 아합왕 앞에서 몸만 사리고 침묵하는가!
2. 선지자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할 것을 예언하면서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들은 현세의 권력에 아부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 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는가!
3. 세례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음한 헤롯왕 앞일찌라도 그 잘못을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손에 잡고 있는 임금앞에서 그의 죄를 책망하는 세례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했으며,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목사들은 왜 강단에서 하고자하는 말을 못하는가? 몰라서 못하는가? 알고도 모르는체 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되어 떨고만 있는가?
주목사는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강단에서 끌려내려와 설교를 마무리 짓지 못했고, 그날 모인 목회자들은 모두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설교로 인해, 주기철목사님은 전국적으로 항일투사로 지목받게 되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1938년 9월. 주기철목사님은 2차 구속중에 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찬성결의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옥중에서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새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나가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우리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느냐? 나는 그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리이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도 드리리라.’
주기철목사님은 농우회사건으로 의성경찰서에서 7개월간 3차 구속을 당하셨습니다. 손톱,발톱이 뽑히고, 온 몸이 찢기며, 배고픔과 추위와 싸우며 죽음의 고비를 하루에도 몇 번씩 넘기며 견뎌야 하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무협의로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째 주일 아침에 평양에 돌아온 주목사님은 ‘오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에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지금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이 다 죽음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내 주님을 배신하고 이 죽음을 면하려고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게 붙들어 주소서.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옵소서
칼로 베이고 불로 지지는 형벌도 한두번이라면 참을 수 있겠으나, 한달,두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이라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야 어쩔수 없이 당해야겠지만, 말 한마디만 타협하거나 내 고개 한번 까딱하면 이 무서운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가야 70생애요, 장차 받을 영광은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생불사의 몸이 될 것이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보고 나아가오니 이 고난에서 이기게 하소서.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에게는 80이 가까운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이 넷이나 있습니다.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체이고 매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은 얼마나 가슴 아프시겠습니까?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쳤거늘, 나는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다하지 못했고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돌봐야 하는 의무마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야할 이 마음 끝없이 괴롭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드리오니 인정의 줄이 나를 얽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순교의 초월적 의지와 초인적인 용기를 주옵소서.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우리 선조들은 나라사랑과 임금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인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몸이 어려서 주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하였으니 어떤 환난이라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오직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5.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옥주에서든 사형장에서든 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때 내 영혼을 받아 주옵시고,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내 영혼을 내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아멘.
1939년 12월, 주목사님은 4차 구속된 중에 평양노회에서 목사직을 파면당하였고, 산정현교회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목사님의 가족들은 사택에서 쫓겨나 일본 경찰의 감시속에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1940년 4월...잠시 석방되어서 작은 단칸 셋방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교회도 문을 닫았고, 당신은 목사직에서 파면되었으니 당신이 설 강단도 없어졌다. 그러니 떠들어 댈 수도 없지 않나? - 당신 혼자는 신사참배하지 않아도 좋다. 그게 죄라고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고향에 가 편안하게 살게 해주마.”
그러나, 주목사님은 이 제의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집으로 찾아온 교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 나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더 시들기전에 더 늙기전에 주님 제단에 드리워지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당신의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가슴에 걸림돌이 된 것은 어쩔수 없는 인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서는 자 또한 허다합니다. 이 육신의 얽힌 정에서부터 나를 풀어주소서’
주기철목사님께서 네 번째 구속되시던 날 아침, 동쪽 마루로 가셔서 기둥을 붙잡고 떨며 울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뒤에서 감싸주시면서 함께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반복되는 투옥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하셨던 주목사님은 또 다시 잡혀가 그 무서운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두렵고 겁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의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울며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위협앞에서 그는 분명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범인에 불과하셨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다섯 번째로 연행되어 갈때는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 예감했던지 할머니에게 큰 절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놨습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예배드리려 찾아오셨던 20여명의 교인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옥살이 7년. 마침내 욥의 고난과 인내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면회는 1944년 4월 21일 평양 형무소에서 였습니다. 면회 직전, 형무 소장은 주목사님을 병보석으로 풀어주겠다고 허락했지만, 간수 등에 업혀나온 주목사님을 뵌 어머니 오정모사모님은 “목사님!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곧 조선교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시면서, 고난을 이겨내도록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살아서는, 눈 뜨고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이 붉은 벽돌문을 나가지 않을 것이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병감으로 돌아서 가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해방을 1년 4개월 앞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주기철목사님은 평양형무소에서 기나긴 7년여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는데, 그 때 그분의 연세가 48세셨습니다.
야고보서 5장 10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의 선지자들에게서 전수받아야할 것은 그들의 고난받음과 오래참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상속자인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믿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도 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로마서 8장 16~18절)
성경에 나오는 옛 선지자들이 아니더라도, 불과 60여년전만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우리의 선배들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못지않게 살아갔습니다. 확신컨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으로 양식삼고, 인내로 거처삼아, 결국 죽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생명이었고 고난은 삶이었습니다. 늙으신 노부모를 뒤로하고, 병약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뒤로하고, 홀로 죽음의 길로 걸어간 그들의 믿음은 곧 순교였습니다. 제 아버님이신 주기철목사님이 그러셨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성도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죽음도 거부하지 못한 채, 그분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일제의 칼보다 강했고, 공산당의 총보다 강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 순교자들의 피값위에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 고난도 십자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오로지 축복과 은혜만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편함이나 인내는 참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에게는 욥의 어떤 고난이나 인내, 신앙을 위한 손해를 감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술은 쉼없이 부흥을 말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갈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채, 솔로몬의 영광만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들에 핀 백합보다 더 곱고 아름다웠던 솔로몬의 옷자락과 창고마다 넘쳐났던 그의 부귀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부흥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부흥은 곧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일 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가 살아날 때, 그리고 그 고난에 인내할때 진정한 축복과 부흥의 시작이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 주기철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세월이 어느덧 6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어제 일인양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평양 형무소의 묵중한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뵌 푸른 죄수복에 짧은 머리, 그리고 깊게 패인 아버님의 두 눈은 어느 누구의 눈빛보다도 강렬했고, 아버님의 잔잔한 미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애로우셨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아버님의 믿음과 선택, 그리고 순교를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용납할 수도 없었지만, 그러나, 아버님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분명 아버님의 순교는 저와 저희 가정, 그리고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