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泰安郡]
청남도 서부의 태안반도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서산시, 서·남·북쪽은 가로림만·적돌만·천수만 등과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5°32'∼126°26', 북위 36°23'∼36°58'이다. 면적은 516.13㎢이고, 인구는 6만 348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6개 면, 186개 행정리(65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안반도의 서쪽에 자리 잡은 이 군에는 동쪽 서산시 일대의 가야산지(伽倻山地)에서 서쪽으로 전개되는 구릉성 산지가 있으며, 그 가운데 백화산(白華山, 284m)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산지가 사방으로 뻗치면서 침식되어 많은 만입(灣入)과 반도, 대소의 섬들을 형성하고 있는데, 남쪽으로 남면반도와 안면도, 서쪽으로 소원반도와 근흥반도, 북쪽으로 이원반도 등으로 갈라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100∼300m 높이의 저산성 산지들이 곳곳에 분포해 완사면 및 구릉지들이 점철하고 있을 뿐, 하천과 퇴적평야의 발달은 미약하다. 해안지형은 해안선이 길고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연안의 수심이 얕고 조차가 커서 간석지가 넓게 발달하였다. 기반암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서산군층에 속하는 편암, 경기편마암콤플렉스에 속하는 화강암질편마암의 변성암류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군의 지형은 대체로 이들 암석의 분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 군 일대의 지형은 화강암류로 구성된 지역 중 해안 일대의 일부 지역, 화강암질편마암으로 구성된 소원 일대의 지역이 산지 내지 구릉성 산지를 나타낼 뿐 나머지 전 지역은 높이가 낮고 평탄한 지형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120m 이하의 기복량을 나타내고, 5° 이하의 완경사 지형이기 때문에 규모가 큰 하천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산악지와 산사면 등 지형적으로 취락이 발달하기에 부적당한 곳을 제외한 저기복 구릉지의 토양은 강한 산성 내지는 약한 산성을 띠는 적황색토가 대부분이다. 연평균 기온 12.4℃, 1월 평균기온 0.2℃, 8월 평균기온 25.3℃이며, 연 강수량은 1,471.10㎜이다.
역사
우리나라 남한 각지에서 산재해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태안읍 장산리 등지에서 7기가 발견된 바 있다. 태안 일원에서는 많은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백제시대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삼한의 마한 50여 개 국 중 신소도국(臣蘇塗國)에 해당되며, 현 태안읍 동문리, 즉 백화산 산기슭의 남향 저지대(일명 샘골)의 전답지대가 그 중심지대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에 천군(天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었던 소도(蘇塗)의 칭호가 전해온 것으로 보아, 이 고장은 당시 제천의식의 중심이 된 부족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마한권을 정복해 명실공히 백제가 고대국가로 크게 발전하게 된 근초고왕 때 태안은 백제권에 들어갔고 성대혜현(省大兮縣)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757년(경덕왕 16) 기군(基郡)이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쳐질 무렵 성대혜현은 소태현(蘇泰縣, 또는 蘇州)이 되었다. 이 무렵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태안의 백화산 중턱에 위치한 거암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1018년(현종 9) 지금의 태안인 소태현은 부성군의 속현에서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에 속하게 되었다. 충렬왕 때에 이르러 소태현 출신인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이 원나라의 은총을 입어 지금의 이름인 태안으로 고쳐져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처음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수령을 겸임하다 뒤에 부사(副使)가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고 병마(兵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던 향·소·부곡이 고려 때에도 지방행정구역의 하나로 군현의 하부조직에 속해 있었는데, 이 군에도 복평향(福平鄕)·오산소(吳山所)·양골소(梁骨所)·안면소(安眠所) 등이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삼남(三南)의 조곡(租穀)을 모두 서해를 통해 개경의 서강(예성강 하류)에 집중시켰던 바, 태안반도의 일각인 안흥정(安興亭) 부근의 심한 암초와 풍랑으로 멀리 우회하는 수로를 택하게 되자, 인종과 의종 때 태안의 동쪽 지협인 굴포에 운하를 개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난공사로 10여 리밖에 굴착하지 못하고 그 뒤 조선시대까지 여러 번 완공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이 혹심해질 때 이 군은 서산 지방과 같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따라서 한동안 행정이 마비되어 당시 수령이 겨우 두 명의 아전을 데리고 서산군에 속했다가 다시 예산군으로 옮겼다고 한다. 1413년(태종 13) 대폭 개편된 군현제도로 충청도는 4목(牧) 14군(郡) 34현(縣)이 되었는데, 이 군은 고려 말과 같이 태안군으로 소근포(所斤浦)와 더불어 충청도 서쪽의 변두리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해미(海美)가 서산군에서 승격, 분리해 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군과 함께 다시 서산군에 통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안면읍 승언리 출신인 이종헌(李鍾憲)이 독립투사로서 일제에 항거해 큰 공을 세웠다. 1950년 6·25전쟁 때 북의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내려와 간척사업을 벌이고 인삼 재배 등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1972년 9월 1일 안면면에 고남(古南)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에는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이북면 청산리·마산리가 원북면에, 안면면 간월도리가 부석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보령군 오천면 삽시도리 일부가 안면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4월 10일안면읍의 고남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 이북면을 이원면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89년 1월 1일에는 태안읍·안면읍 등 2개 읍, 6개 면이 서산군에서 분군(分郡)되어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8-3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