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을 봅니다.
1절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절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절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내 속에 있는 고통보다는 아직 내 말이 가볍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로서 이를 다 어떻게 표현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 없으시죠?
내 평생 아들 딸 때문에 아니면 남편 때문에 고생한 것 어떻게 표현하겠느냐?
이런 생각 말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내가 33년 동안 교회를 위해서 목사님을
위해서 아픔 당하고 고통당한 것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겠느냐?’고 하더군요.
흡사 욥과 같습니다. 지금 욥이 이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하는 신앙이 아니고 내가 신앙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들에게
아픔 당하고 찔린 거 어찌 다 표현하겠느냐? 이런 식의 표현인 겁니다.
여하튼 우리는 욥6장에서 어정거리지 마시고, 빨리 42장으로 가셔야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빨리 티끌과 재로 내려가야 됩니다. 그렇지만 욥은 계속해서
입을 높이고 있습니다. 입을 높이면서도 속에 있는 것에 비해서는 아직 내가 제대로
입을 다 높이고는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할 말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욥의 말에 의하면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속이 더 상한다는 겁니다.
이거 참 위험해요. 저도 욥처럼 속이 상해서 한 마디씩 뱉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선교지에 와서 고생이 되고 아픔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나를 인정치 않고 딴 소리를 할 때에 '안 그래도 속이
상해 있는데 당신의 말을 듣고 나니 더 열 받는구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한 것에 대해 공짜가 없는 것이 욥입니다. '네가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시는데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은
절대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지 않은 한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해요. 내 것을 줬기 때문에 20년, 30년 지나도
그게 기억이 되는 겁니다.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기억하고 챙긴다는 얘깁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이게 쌓이고 쌓여서 결국 우리 마음이
높아지고 우리 입이 높아져서 그만 자기는 겸손을 보이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교만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쓰며들 틈이 없는 겁니다. 그 심령은
점점 바짝 말라져갑니다. 만약 평생 하나님 앞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만
기도할 수 있다면 복된 사람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쉬자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언급하기가 민망하지만 우리 한국 교회에
은퇴한 목사나 장로들 중에 말년이 왜 비참해 집니까? 그 원인은 지금까지 할 만큼
했으니 이제부터 대접 받고 살자 이것 때문이 아닙니까? 90살이라도 주님 앞에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백 살이라도 주님, 끝까지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내가 자랑할 것은 티끌과 같은 흙집에 사는 짐승 같은 것뿐이오니 제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다만 남은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주께서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일 지금 형편이 너무 억울하십니까? 억울하시면 얼른 42장으로 가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억울한 짐입니다. 지금 욥은 억울하다는 겁니다.
원통하다는 겁니다.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겁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욥의 병에
걸립니다. 욥은 우리 속에 있는 다른 한 지체의 법입니다. 우리 속에 늘 있습니다.
성경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욥 한 사람에게만 아닙니다. 욥기 앞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다가 욥기에 와서 한 사람의 개인 역사를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가 왜 그리 삐거덕거리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은 것은 욥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란 본성이 속에 있어서 자기가 행하고 자기가 보상 받고
자기가 인정받고 자기가 찾아먹고 자기가 높아지려는 욥이란 본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고 성전을 주고 그 자비와 긍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셔도
결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설려고 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지적한 인간의 죄가 뭡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렘2:13)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렇게 하고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또 안 되더라 이 말입니다. 결국 예언서는 '도저히 안 돼 그 분이 오셔야 된다'는 겁니다.
욥 같은 인생은 폐기처분시켜 버리고 새로운 자화상과 새로운 자아로 재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된다는 내용이 이사야서부터 말라기까지의 예언서 입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내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어떻게 처리 하셨는가? 그래서 신앙의 단계를
보면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듣는 겁니다. 그래서 듣고입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듣고 입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 듣고 나서 아차 내가
진정으로 회개해야 되는구나 하게 됩니다. 회개는 반드시 세례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입니다(막16:16) 세례는 나를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세례는 한 짝입니다. 한 세트입니다.
행2:38은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세례란 몽땅 끝났다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비로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 전에는 자연인으로서 항상 선악 간에 장군 멍군 하게 됩니다.
내 양심에 의하여 송사와 변명을 하는 반듯한 종교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마음 밖에다 내다 버립니다. 자연인으로서
선약의 양심으로 장군 멍군 하던 나의 존재는 도저히 스스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의 동선에 나를 포기하고 얹습니다.
믿음으로 맡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의로 옮겼구나 하는 사실을 그대로 여겨버리는(count)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나 개인과 예수를 생각하지 말고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통째로 넘어간 걸 생각하세요. 바로 그 죄를 간과하셨다
십자가로 넘겨버리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롬3장 말씀입니다.
나 개인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저 십자가는 아담 안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 사심으로 몽땅 생명의 동네로 옮겨 버리고
그 사실을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할 때 그 사실을 믿는 믿음에 의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한 것이 없어요. 일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롬4:7) 이게 다윗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 나의 의가 누더기임을 고백하고 지금까지 잘했던
못했던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그대로 시인하고
자신이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음으로 시인하고 '내가 그곳에 가겠나이다.
나를 받아주소서' 라고 하면서 세례로 퐁당 빠진 후 그 분을 따라 올라가는 겁니다.
그때에 성령이 선물로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처리해 버리고 나는 없습니다.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최고입니다. 아내 분들은 남편한테 그렇게 해 보세요.
나는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친정도 없습니다. 나는 성도 없습니다.
나는 이름도 없습니다. 나의 존재는 오직 당신으로 인하여 있습니다.
그때부터 남자들은 아내를 자신의 몸의 일부로 삼을 겁니다. 남자 분들 그렇지요?
그렇게만 한다면 남자들이 말은 안 해도 '나는 이 여자를 위해서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
사생결단을 하더라도 내가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 이런 마음이 들겠지요.
그런데 여자들이 맨 날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내가 친정에 있을
때에 자정교육을 이렇게 안 받았는데' 하면 이 사람은 아직 시집을 오지 않은 겁니다.
주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엉엉 울고 사정한다고
주님이 기뻐하는 거 아닙니다. 주님 앞에 와서 나는 없습니다. 저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 아래 어디에서나 주 밖에 믿을 이가 없습니다.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내가 질그릇임을 흙덩어리임을 알았습니다. 티끌임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주여 나를 주 안에서 새로 빚어주시옵소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걸 감사합니다.
그렇게 징징거리는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잘 났습니까? 잘 난 척 했습니까?
다윗이 물맷돌을 골리앗에게 던졌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제가
이런 실력이 있습니다 하고 잘 보세요 짠하고 던졌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짱돌 솜씨를 보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던졌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는 납짝 엎드립니다.
'제게는 주 밖에는 없습니다. 당신만이 나의 피난처요 당신만이 나의 방패이십니다.
당신만이 나의 힘이기 때문에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대적을 물리친 것은 나의
칼 솜씨가 아니고 내 짱돌 실력도 아닙니다. 오직 당신입니다' 이것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에게 자신의 신 곧 성령을 한없이 주십니다.
저도 이 비밀을 조금 배웠어요.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 못 배웠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 제가 믿고 있는 것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자랑과 나의 면류관도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 고백이 진심일 때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무기는 그것 밖에 없습니다.
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부끄러움도 주시고
아픔도 환란도 주시면서 수많은 세월 동안 주님은 우리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은 아주 쉽습니다. 다만 욥을 설득하는 과정이 있듯이 우리를
설득시켜서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아니고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니고 진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과정이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이 제일 잘 된 부분이 빌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이게 하셨느니라” 인데 주님 날 도와주세요. 내게 부족한 것 좀 보태주세요.
힘을 주세요. 은혜를 주세요' 그게 아닙니다. 그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당신의 위대한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당신의 거룩, 영광과 전능하심, 그 사랑 그 긍휼 온유 겸손
앞에 내가 무릎을 꿇었나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합니다' 하는 것이 진짜 경배와 찬양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경배와
찬양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우리 심령 속에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6절을 보겠습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욥은 끝까지 우깁니다. 자신의 형편에 대해 분명히 어떤 곡절이 있고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만큼 하나님 앞에 장군 멍군 하는 인간의 기질이 질기고도 질깁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기름부으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