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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의 복
본문 : 시 84:1-7절
84: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84: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설교 작성노트
본문에는 “복이 있나이다”하는 말이 3번(4, 5, 12) 등장한다. 불신자들은 물로 모든 성도들도 “복”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궁극적인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축복이다. 이를 증언하려는 것이 내용목적이다. 그런데 6절에서는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라 하고 7절에서는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라고 말씀한다. 여기에 적용목적이 있다 하겠다.
강론
84편은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일종의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4절과 8절에 “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분기점으로 84편의 구조(構造)는 세 절(1-4절, 5-8절, 9-12절)로 된 찬송가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좀 더 관찰해보면 “복(福)이 있나이다”고 말하는 것도 3번 등장하는데 각 절마다 있습니다.
㉠ 4절에서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 5절에서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 그리고 결론적으로 12절에서는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3가지 “복” 중 어느 “복”이 84편의 중심적인 “복”으로 여겨지십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3가지 복 중에서 어느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4)한 첫째 복을 받기를 사모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주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2)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7절에서는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계시록 7:9-10절을 보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하고 찬양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84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사모하며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차적으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얼마나 사모했으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衰弱)함이여”라고 말하겠습니까?
얼마나 그리워하고 사모하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하고 성전 추녀 끝에 살고 있는 “참새, 제비”를 부러워하겠습니까!
㉠ 그러면 4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합니다. 그러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달려가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5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올라가고 싶으나 올라갈 수가 없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라야 올라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이점에서 주목할 점은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는 자”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마음, 마음”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심주제는 더 이상 육적인 문제가 아닌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84편을 통해서 말씀하려는 중심주제는 모형으로 주어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본질적인 주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그런데 “시온의 대로”(大路)가 개통이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원죄 하에 있는 자들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인식해야 할 점은 구약시대, 그러니까 84편을 기록할 당시는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히 9:8)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셨겠지요. “첫 장막”이란 “성막”(聖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막”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은 휘장으로 굳게 닫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한 것입니다.
② 그런데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하는 문제(問題)만으로 끝이고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해답”(解答)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解答)이 5절인데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게 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가를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휘장”이 누구의 무엇으로 말미암아 언제 열려졌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복음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 이점을 히브리서 10:20절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해설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첫째는, 막혔던 휘장은 주님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열려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 두 번째 요점은 휘장이 찢어짐으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 즉 “시온의 대로”가 개통(開通)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어찌하여 “살 길”이라 하는가? 생명으로 인도한 길이기에 “살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새로운” 길이라 하는가? 구약시대에는 없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이제 형제에게 묻고 싶습니다. 구약교회에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일과, 신약교회에 휘장을 찢어주셔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신 일 중 어느 것이 크고도 중요한 일입니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말씀만으로 가능해졌으나 휘장을 열어주심은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③ 모세로부터 1500년간이나 막혔던 휘장이 열리고 길이 개통이 되자 제1차로 들어가신 분이 누구시며, 어디로 들어가셨는지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9:2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즉 주님이 제1차로 들어가셔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씀합니다.
㉠ 제1차로 들어가신 주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즉 함께 사는 날을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고 탄원했으나 신약의 성도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7) 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④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만이 나아갈 수가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우리교회 성도들 마음에,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그냥 “길”이라 하지 않고 “시온의 대로”라고 “시온”이라 말씀하는 까닭을 알아야만합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첫째로 시온에 가야만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2:6)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시온에 가야만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14:7)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개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다는 십자가복음을 믿는 자만이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온의 대로”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에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어찌하여 그냥 “시온의 길”이라 하지 않고 “대로”(大路)라고 말씀할까요? “대로”라는 원어는 오늘의 고속도로라는 뜻입니다. 이점에서 옛날 옛적 우리 조상들이 살던 시절,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에 “길”이 생기기까지 얼마의 세월이 걸렸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 번 지나가고 두 번 지나가고--몇 번이나 지나가야만 비로소 오솔길이 생겼을까요? 오솔길이 생겼다가도 얼마간 지나가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없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를 보로 가던 박달재 고개 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4:3절에서는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심령이 “묵은 땅, 가시덤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심령이 “길바닥, 돌밭, 가시떨기”와 같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은 황무지와 같아서 희미한 “소로”(小路)가 생겼다가도 어느 순간 없어져서 방황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심령에 “시온의 대로”가 뚫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참으면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겨우 오솔길이 생겼는가 싶다가도 한 번 시험의 바람이 불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또다시 애타게 권면하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가 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게 될 것 같습니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한 그런 복이 있는 자로 여러분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⑤ 그러면 성도들의 마음에 확고부동한 “시온의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비결도 분명합니다. “내가 길이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히 10:20) 십자가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말씀보다도 우선적으로, 어느 말씀보다도 더 많이, 어느 말씀보다도 더욱 자주자주 들어야만 오솔길이 소로가 되고 급기야 “시온의 대로”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가 무슨 말씀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십시오. 6절에서는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라고 말씀하고, 7절에서는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개통이 되기까지는 “눈물 골짜기”도 통과해야 하고, 넘어지고 주저앉았다가도 “힘을 얻고 더 얻어” 벌떡 일어나는 연단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입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하고 시작한 84편은,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라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5)가 있게 되는 것도 “주를 의지함으로”만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요,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힘을 얻고 더 얻을 수” 있는 것도 “주를 의지하기”때문이요,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게”(7)되는 것도, “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만이 가능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공자 같은 분도 “조문도면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즉 아침에 길(道)을 깨닫게 되면 저녁 때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대로”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깨달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목적지(目的地)가 분명하고, 소망이 확고하다는 점을 말씀해줍니다. 또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히 4:16)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새해 목표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다. 뜻을 생각하면서 다 함께 249장 찬양을 하시겠습니다.
1,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3, 저 하늘 황금길 나 올라갈 때에
시온 성 언덕 위에서 시온 성 언덕 위에서
수많은 천사들 날 인도하리라
후렴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첫댓글 아멘 ~♡
목사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