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사들일 목자’가 나온다.
“양을 사들일 자들은 손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을 도살할 것이다.” (11:4, 메시지성경)
명색은 목자다.
수려한 말과 그럴듯한 명분으로
자신이 양을 위한다고 떠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의 하나님은
그 마음을 적나라하게 아신다.
그들은 양을 위한 목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한 목자라는 것을.
그래서 결국 양을 ‘도살’한다.
사랑한다던 양들은
돈과 권력과 욕망을 위해
그저 소비되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고는 다시 말한다.
“운도 좋지!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다!
나는 부자가 되었다!
그들의 목자들도 양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11:5, 메시지성경)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게 된다.
그들이 타인을 모멸하는 것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을 모멸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돈과 권력, 유명세와 쾌락을 얻는 것이
자신을 가장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 인간을
그런 것에서 가장 큰 만족을 얻는
그 정도의 존재로 만드셨는가?
아니다.
인간은 그보다 훨씬 존귀하고
더 깊은 가치를 가진 존재다.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그 정도의 존재로 낮게 규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쉽게 낮추고,
이용하고, 소비하는 것인지 모른다.
거짓 목자들은 양을 도살하면서
자신은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인간됨이었다.
그리고 14장에 이르면
시야가 훨씬 넓어진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했던 민족들까지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
여기서 문득 이런 질문이 든다.
그들은 정말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조차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7:11~12)
말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듣지 않았던 것이다.
거짓 목자도 그랬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도 그랬다.
자기 욕망에 눈을 빼앗겨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모든 자기기만이 끝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14:9)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내가 잘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옳다는 증거는 아니다.
어쩌면 내가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얻었느냐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애써 보지 않고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