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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휴가로 한주를 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기에 너덜너덜한 메모지를 이리저리 뒤지며 스마트폰으로 시간 있을때마다
사흘에 걸쳐 초고를 완성하였습습니다.
읽어 보면서 다듬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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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일날마다 교회입구에서 안내를 봅니다. 부교역자가 안 계신 후로 말뚝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안내를 하다보면 교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늘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교회상황을 모르는 새 신자나 가끔 나오는 교인이 그 자리를 앉았을때 원래 그 자리의 주인은 별로 유쾌한 얼굴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쾌한 얼굴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분이 왔을 때 옆에 앉아서 예배를 도와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다. 누가 나의 옆에 앉아있나 확인하고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멋진 얼굴로 인사를 합시다.
요즘 내가 믿는 하나님, 즉 기독교를 생각할 때 한숨이 절로 납니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전횡적 목회활동과 교회세습 그리고 납세의무 거부등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 위에 그분들이 서있지 않나 착각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분들이..
평신도 한사람이 잘못하면 소총정도의 피해를 입지만 이런 분들이 한번 마음을 잘못 먹으면 완전 핵폭탄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작년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19.4%가 입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종교로 카톨릭이 29% 불교가 28% 그리고 기독교가 21%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어떻게 될까 걱정이 앞서는 오늘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지하철에서 두 사람이 싸움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걸 보던 노인이 다가가서 한마디 합니다.
" 야이노무 새끼들아 왜 싸우고 지랄이야. 여기가 교횐 줄 알어"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는 성경을 많이 모르는 저로서 성경을 해석하여 드리는 설교라기 보다는, 간증아닌 간증이라고 할까요.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며 요즘 생각하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할 겁니다.
은혜는 목사님 설교에서 받으시고 이 시간에는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요즘 장로로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장로는 모든 교인의 모범이 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될 텐데 겨우 주일예배만 드리고 점심도 못 먹고 내빼기 일쑤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일본에 온지 26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힘들기는 처음입니다.
은행에서 더 이상 돈을 안 빌려준다고 하여 더욱 힘든 생활을 하고 있고 조건변경을 해서 원금상환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어느 날 전진숙 집사님께서
"장로님 요즘 많이 말랐어요?" 하길래"
다이어트를 너무 열심히 했나 봅니다" 라고 답하기는 했으나 작년 이맘때보다 5키로나 빠졌습니다.
다이어트가 아니라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체중이 줄더라구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저희 회사는 조그만 식품점과 삼겹살 전문집을 하고 있고 크지 않게 광고 쪽 일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회사가 너무 힘들어 작년 9월부로 음식점과 식품점을 한곳으로 묶었고 사무실도 매장 윗 층에 꾸몄습니다.
그러니까 한 달에 80만엔 정도의 임대료가 절감이 되더라구요.
인건비도 대폭 줄여서 월100만엔이나 줄였습니다.
고스란히 그 일들을 나나 아내인 도권사가 해야되니 아침 10시에 출근하여 밤 12시나 되어야 퇴근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힘든 생활을 하는게 저뿐이 아니겠지요?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내 한국 분들이 힘들어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정리해 보면
1. 3.11동일본대진재 이후 경기침체와 방사능의 공포 때문에 일본을 떠나게 되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기회의 나라가 아니라 기피의 나라로 되었다는 것과
2. 환율저하로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일하는 게 낫다는 정서가 퍼져가고 있으며
3. 이명박 정권시절의 독도방문과 천황사과요구로 한류가 시들어 가고 일본의 우익정서가 구심력을 얻음과 동시에
4. 양국 정치지도자들의 극단적인 이념화와 외교력 무능의 결과로 양국간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명박 정권때의 독도방문은 표면상 가장 두두러지는 것이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천황에 대하여 건들인 것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방면에 대하여는 우리 교회에 더 잘 아시는 분에게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짧은 지식의 힘을 빌리자면 일본은 약2500년동안 천황의 계보가 흔들린 적이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입니다.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도 이름뿐인 천황이었지만 그들을 등에 업고 정권을 창출하는 것이 대의명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언제 기회가 되면 전여옥이가 쓴 '일본은 있다인지 없다'인지는 쓰레기 통에 버려 버리고,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대통령에게 '사과하라. 중간평가 한다. 대통령직을 내려놔라'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만 일본의 경우 천황에 대하여 불가침의 성역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사과하세요"라는 말과 비슷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한 두 달 전인가 어느 중학생이 천황부부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사단이 난일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히로히토 천황 때의 일입니다.
누군가 자식의 이름을 '히로히토'라고 지었다가 아들과 함께 자결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모든 일본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버티다가 천황이 입을 열자 전쟁이 끝났다고 합니다.
천황의 목소리가 방송되기 전에는 궁성주위에 비상선을 치고 정전을 저지하려고 했었는데, 일단 방송을 하고 난 뒤 한마디 토를 달지 않고 승복했다고 합니다. 만주나 자바의 현지 사령관도 일본에 있던 1급 전범 도죠 히데키도 누구하나 그것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황관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 외국 기자가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소총을 겨냥하고 착륙했지만 점심때는 총을 치워버렸고, 저녁때는 장신구를 사러 외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동아시아 관계는 참 묘한 방정식 속에 빠져 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왕따 당하던 일본은 중국의 팽창화의 견제 도구로 헌법을 바꾸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려 하고 있고, 미국과 가까운척하던 한국은 오히려 중국과 손잡고 일본을 압박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것은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26년 전에 일본에 왔는데 그 당시의 상식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 상식이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집에서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주여 주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을 수만 있겠습니까?
내가 소망하고 여러분이 소망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제가 앞을 보는 능력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다 나누어 드릴텐데 나나 여러분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23세 실직
23세 주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
24세 사업실패
27세 신경통 환자
39세 국회의원 지명전 탈락
40세 국회의원 재지명전 탈락
45세 상원의원 입후보 낙선
47세 부통령지명 탈락
47세 상원의원 낙선
52세 미국 16대 대통령이 됨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링컨에 대하여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아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오늘 제가 함께 나누려고 하는 인물은 바로 알라스카에서는 링컨보다 더 영웅대접을 받는 윌리엄 스워드입니다.
저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알라스카에 가면 '스워드'라는 이름이 가끔 눈에 뛴다고 합니다 스워드라는 항구도시가 있고, 스워드라는 고속도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알라스카 사람들에게 스워드라는 이름에 고개를 숙이고, 그이름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까지 알려주고 싶을까요?
바로 1867년 미국정부가 알라스카 땅을 러시아로부터 사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라스카를 러시아로부터 당시에는 쓸모없는 불모지라 판단하여 싼값으로 산 것만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 재정러시아는 그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당시의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867년에 공산주의의 근간이 된 칼막스의 자본론 1권이 출간했습니다. 또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불탄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국민을 대상으로 대 사기극을 벌이게 되는데 종래 거래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소재가치는 5ㅡ6배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액면가 100배 되는 고액권을 발행하게 되는데 이른바 당백전입니다. 결국 이 당백전은 1년도 되지않아 폐전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일본은 이 해에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250년간 일본을 지배해 오던 토쿠가와 가가 모든 권력을 메이지 천황에게 바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란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른바 사무라이계급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미국에 헐값에 팔게 된 배경에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사 나이팅게일에 대하여 알고 있지요?
"간호란 질병을 간호하는 것이 아니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간호사들은 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 나이팅게일이 활약했던 전쟁이 크림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 때문에 러시아는 알라스카를 팔게 됩니다.
지난달 말레이시아 민항기가 폭격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있었고, 비난 봄에 우크나이아 영토에서 러시아측 영토로 바뀐 크레미아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크림전쟁입니다. 크레미아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이 전쟁은 종교문제도 섞여 있는데요. 당시 러시아군과 영국,프랑스를 위시한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러시아는 연합군에게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에 압력을 넣게 되고 재정적 압박과 알라스카에 대한 영국의 간섭에 의한 불안감으로 이 영토가 미국에 팔리게 되죠.
팔린 값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당시 돈으로 720만불 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평수로 환산해보면 1200평당 한국 돈 2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그러나 약 150년 전의 달러 가치로 환산했을 때 미국정부가 부담하기엔 이 돈도 녹녹치 않은 거액 이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래스카의 매입을 주도한 인물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웰리엄 스워드입니다.
당시에는 미국이 남북전쟁 직후에 남부의 산업화와 서부개발이 우선순위여서 거액을 지불하고 알래스카를 매입하겠다는 스워드의 제의에 대하여 미국의회와 언론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먼 미래를 내다보며 알래스카의 전략적 가치를 예견했던 스워드장관은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매입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의회와 언론은 스워드가 사들인 알래스카를 '스워드의 무용지물'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매입한 후 몇십년을 지나고 보니 금, 석유, 석탄, 아연등 지하자원이 어마어마하게 매장되었고, 석탄은 세계1위의 매장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드러시 당시 한해에 채굴된 금의 량이 720만불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노다지땅을 사게 된 것이지요.
창세 이후로 최고의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자원을 공급하는 원료공급기지로 부각되고, 냉전시대의 핵무기나 잠수함기지가 되면서 미국인들은 알래스카가 단순한 하나의 주를 넘어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태평양을 미국인들의 앞바다처럼 군림하게 됩니다. 그래서 1949년 미국의 49번째 주로 승격되게 됩니다.
알래스카를 매입할 장시 스워드는 핵무기나 핵잠수함시대를 예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알라스카를 매입한 덕분에 1세기 후엔 태평양을 자국의 영해처럼 사용하며 '팍스 아메리카에'바탕을 둔 세계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스워드국무장관의 해안이 없었더라면 알래스카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 냉전시대에 수천기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배치되었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알래스카사람들에게 스워드는 미국역사상의 인물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스워드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들에게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해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측면에서 스워드에게 매료되었습니다.
스워드는 17대 앤드류 죤슨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으로 알래스카 매입을 추진했지만 그를 처음으로 국무장관에 임명한 사람은 바로 16대 링컨대통령이었습니다.
스워드와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지명전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경쟁자였습니다.
스워드는 사실 링컨보다 훨씬 화려한 경력을 지닌 정치인이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뉴욕주지사와 연방상원의원에 각각 두번씩이나 당선되었고 젊은 변호사시절부터 급진적일만큼 흑인 인권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앞서 살펴 봤드시 링컨은 실패의 연속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스워드에게 링컨이 도전장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경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스워드는 링컨에게 패하고 맙니다.
패배당시 스워드가 느꼈던 상실감은 어땠을까요?
그러나 경선에서 패한 스워드는 패배를 깨끝이 인정하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경쟁상대였던 링컨의 지원유세에 나갑니다. 그리고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 이후 인간 됨되미를 알아차린 링컨이 스워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합니다.
16대와 17대 대통령이 그를 국무장관에 기용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남에게 믿음을 주는 인물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패하고도 공의를 위해서 합력을 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이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요즘 제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교인들과 점심을 같이 못 하는 것입니다.
성도간의 교재가 밥을 먹으면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맛있는 비빔밥을 못 먹는 것에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참 아름다운 전통인 교인이 반찬을 하나씩 해 와서 같이 비벼 먹는 것입니다. 제가 음식점을 하고 있지만 우리 식당보다도 더 맛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식사를 다른 교회 교인들에게 자랑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비빔밥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인한사람 한사람이 정성껏 가져온 것을 모아서 비비니 그 맛이 오죽하겠습니까?
알라스카의 위대한 인물 스워드나 우리교회의 반찬 하나를 해 오는 교인들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각각 은사를 가졌고 그 열매가 모아져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전교인 앞에서 설교할 기회가 생겼으니 우리 교회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좋은 점은 우리끼리니까 얼굴 뜨거우니 생략하기로 하고, 단점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1. 정체되어 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처음에 김경아집사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2003년 초의 일입니다. 그때 데이터를 보니까요 한 달에 올린 글이 몇 건인 줄 아십니까? 2003년 6월을 보니까 77건입니다. 댓글도 왕성하게 달았습니다. 교회 생활에 재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 한 달에 몇 건이게요? 한건도 없습니다.
제가 주일날 교인들의 출석체크를 하는데요. 교인들 출석율이 비교적 좋은 편입니다. 설교시간에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것은 설교를 듣는 만큼 들은 설교를 흘려보낸 적이 있습니까?
여기서 흘려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감동되어 외적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너무 감동되어 회사의 동료에게 "어제 말씀 너무 좋았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 듣고만 있다면 정체되었다는 것인데 고인물이 썩듯이 신앙도 어떤 방법을 통해서 흘려보내야지 들어 온대로 간직만 하면 그게 바로 썩는 것입니다.
2. 자기 배 채우느라 남을 볼 여유가 없다.
여기에는 교인들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저를 포함한 중직자들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올해로 교회가 창립한지 21년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20세가 되면 성인인데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자기 배 채우느라 늘 배만 고픕니다. 이런 습관에 틀이 박힌 공동체는 배가 불러도 나누어 줄 줄을 모릅니다. 맨 날 배가 고프다하고 베풀 줄을 모르는데 하나님이 축복을 주겠습니까? 배고플 때도 베풀 줄 아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예산에 몇%는 아무리 힘들어도 교회 밖을 위해서 쓴다' '몇 년 이내에 개척교회 하나를 세운다' 등의 계획과 실천이 중요합니다.
3.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한사랑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 교회를 굳건하게 하기위해서 많은 힘을 쏟은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이 없는데서 이름을 거론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신쥬쿠에서 한국광장 즉 장터를 경영하고 있는 김근희 사장입니다.
그분이 교회 창립때부터 10년 가까이 봉사를 했는데 교회 예산의 1/3을 혼자 책임을 졌습니다. 교회가 힘들어지자 신쥬쿠에 자기 건물을 사면서 두 개층을 무상으로 빌려주면서 "임대료대신에 그 돈을 모아서 교회 건물을 하나 삽시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어느 분은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겠지 하고 치부해 버렸습니다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들은 편하게 교회 건물을 사용하는데서 그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고, 표현을 했어야 합니다.
저는 일본 분들에게 이것은 정말 배워야겠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하나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하게 되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꼭 무엇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고 나서 그 열기가 식기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여러분이 일본에 살면서 여러 번 경험한 일이 있는 것 예를 한번 들겠습니다.
한국에서 가끔 손님이 오시죠?
저도 수도 없이 옵니다.
그러면 정성을 다해서 안내를 해 주거나 식사대접을 하거나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면 함흥차사입니다.
아. 헤어지기 전에 그들이 꼭 하는 말 있죠?
"언제 한국에 오십니까? 한국에 오면 꼭 연락을 주십시요"
그런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한국에 가서 실제로 연락을 하면 낭패를 봅니다. 이것이 대부분 한국 사람들의 인사법 입니다.
크리스쳔들은 '감사. 감사 '가 입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감사를 표현해야 할 때에는 인색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 오는지 아십니까?
사람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암암리에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요즘 한국사회에 키워드중의 하나가 '소통'인데 인사하나 때문에 애써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까지 소원해 집니다.
사람에게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지 저는 의문입니다.
내가 작년까지 2년간 한달에 한번 중고등부 설교를 해 봤습니다.
나름 꿈을 심어주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준비하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요. 설교를 하다보니까 사물이 달라 보여요. 평소에 듣는 설교가 그냥 넘어가질 않아요. 책을 봐도 밑줄을 치며 보게 되더라구요. 이것 정리해서 애들 설교할 때 자료로 사용해야지 하는 욕심에요.
사물을 그냥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그냥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을 그냥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생각의 힘이 키워집니다.
생각의 힘이 키워지면 사람이 변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적용되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고, 삶에 적용되면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두편의 글을 씁니다.
제목이 없는 글 이예요.
그 글을 쓰면서 성경에서 나오는 얘기들과 늘 대조합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반드시 메모를 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겨 써보세요.
책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그냥 수동적으로 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로 옮기게 되면 축적된 것을 발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역동적 인간이 되려면 이 운동, 축적과 발산운동이 활발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은 눈빛이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이 다릅니다.
이것이 왜 글을 쓰고 듣고 읽는 것 뿐이겠습니까? 삶의 순간순간마다 부디치는 것이 수많은 사건들인데요.
제 스마트폰의 카톡화면에 盡人事待天命이란 글을 써 놓고 있습니다.
풀이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게 약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바는 제대로 안하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이루워 주실 줄 믿씁니다" 하거든요
어떻게 하든 자기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해 놓고 "주님 나는 이정도 해 봤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자세 아닙니까?
길을 가다보면 차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차 뒤에 물고기그림의 헬라어로 '익투스'라고 쓴 마크를 달고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전도하고 가장 기분 좋은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인데 우리 직원한테 물었답니다. "여기 사장님 교회 다니세요?"
저한테 연결을 해 주어 얘기하는 도중 "사장님이 다니는 교회라면 한번 가보고 싶어요" 해서 교회에 온 교인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는데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마이클 센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입니다. 너무 책 내용이 좋아서 좀 두꺼웠지만 의미를 새기면서 한 달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그 중에 내용중에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론에 대해 나오는데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그 동기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보고 있습니다.
자동차 안의 십자가도 보고 있고, 물고기모양의 크리스챤이란 표기도 봅니다.
대형교회나 소형교회나 목회자들의 행동도 다 봅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을 다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판단합니다.
"이노무새끼들 왜 싸우고 지랄이야? 여기가 교횐 줄 알아?"라는 노인의 말에는 모두가 교회 밖에서 교회를 다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차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면 않되'라는 것은 결과에 초점을 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상징인 십자가를 가까운데에 두고 싶어'하는 마음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말을 할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말은 다 잘해!"라고 합니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 사장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가보고 싶어, 김과장 같은 사람이라면 나도 예수를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내 주위에서 여러분들의 주위에서 있기를 바랍니다.
한사랑교회의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놓고 볼 때 정말 좋은 달란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달란트를 대부분 썩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을 때 거두어 간다는 말을 예전에 듣긴 했습니다만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좋은 은사를 써야 합니다.
아무쪼록 여기에 계신 우리 한사랑교회 교인들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신앙인을 부러워하는 그리스도인, 그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이야'하고 평가 받는 사회인,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 사용함으로 에너지가 철철 넘쳐서 그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