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사람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이 땅을 오랫동안 지켜온 큰 나무를 만나러 떠난 원주 답사. 돌아와 오래 되돌아보며 그리워 하게 된 나무가 있습니다. 문화재도 보호수도 아닌 그냥 오래 된 나무 한 그루입니다. 얼마 전에 호남의 군산시에서도 그런 나무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살이를 지켜왔으나 이제는 사람의 발길이 잦아든 빈 들에 홀로 서서 외로이 숨을 이어가는 융융한 느티나무입니다. 수명을 다해 보호를 위한 명분까지 잃고 쓸쓸히, 그래서 더 오래 그리워 하게 될 나무입니다.
원주시의 서남쪽 부론면에는 옛 절터가 있습니다. 한창 때에는 무척 큰 절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그 터만 휑뎅그렁하니 남았습니다. 그나마 폐허가 된 절터 한쪽에 옛 스님의 탑비가 버티고 있는 게 다행스럽습니다. 탑비는 국보 제59호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입니다. 이 절집에 주석하신 지광(智光, 984 ? 1067)스님이 입적하시자 스님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이 자리에 세우고, 그 앞에 스님의 삶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현묘탑은 일제 식민지 시대 때에 일본인들이 가져갔던 것을 되찾아 지금은 경복궁 안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절집의 이름은 법천사法泉寺입니다. 불법의 진리가 솟아오르는 샘이라는 이름의 절집입니다. 절집의 흔적은 없지만, 절터로 짐작되는 자리를 정리하고 발굴 조사 중인 이 절터는 적막이 감돕니다. 폐허의 땅입니다. 아직 별다른 것을 드러내지 못한 이 절터는 굉장히 넓습니다. 한창 때에는 근처 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합니다. 법천리라는 마을 이름도 절집을 따라 지은 이름이고요. 이 법천리 마을 입구에 법천사 당간지주가 서 있는 걸로 봐서도 절집의 규모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천사라는 절은 통일신라시대인 성덕왕 24년(725)에 법고사法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오래된 절집입니다. 언제 법천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의 지광 스님은 당대에 영향력도 크고 많은 불자들의 존경을 받은 스님으로 국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분입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무려 열두 번에 걸쳐 법호와 법계를 받았다고 하고, 그 분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부처님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법천사는 그 지광스님이 처음 출가한 절집입니다. 법천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아마도 법천사와 관련한 최고의 인물이 지광스님이지 싶습니다.
그 오래 된 절집 법천사는 이제 탑비 하나만 남기고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폐사지를 찾을 때마다 떠올리는 느낌이지만, 사람살이의 들고남은 참으로 허무하고 허무합니다. 사람도 사람살이의 자취도 모두 사라진 허무의 절터 한쪽에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리는 사진들이 바로 그 느티나무입니다. 보호수도 문화재도 아닙니다. 그냥 폐허가 된 절터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일 뿐입니다.
바로 곁에는 젊은 느티나무가 늙은 느티나무의 도반이 되어 함께 서 있습니다. 지난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렸던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의 풍경과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작은 느티나무가 함께 서 있는 것인데요. 역시 어린 느티나무가 큰 느티나무의 자람을 방해하는 정도는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싶고요. 오히려 사이좋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는 모습이 다정해 보입니다. 이 휑뎅그렁한 너른 터에 늙은 느티나무 홀로 서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아 보입니다.
늙은 느티나무를 가까이 다가서서 살펴보면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이 느껴집니다. 켜켜이 쌓이며 오랜 세월의 풍진을 기록했을 나이테 부분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줄기 안쪽이 텅 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바라볼수록 텅빈 그의 안쪽이 안타깝고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 자리에 버티고 서서 들고나는 사람살이를 바라보며 그가 나이테와 함께 허공으로 날려 보낸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나무 앞에 서서 숨을 멈추고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에 이 나무 그늘 아래에 들어서서 나무와 숨결을 나누었던 옛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었습니다. 나무 줄기 껍질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사람의 세월 감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리저리 톺아보지 않아도 한눈에 그를 스쳐간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텅빈 나무 줄기 안쪽을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안쪽을 텅 비워낸 채 살아야 했던 나무의 질긴 생명력이 안쓰럽습니다.
나무 앞에 세워진 돌 비석에는 ‘서원’이라는 두 글자의 한글이 정갈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오래 된 절집과는 관계 없는 비석입니다. 아마도 마을 이름을 적어 세운 것이겠지요. 이 느티나무가 한때 마을 어귀에 서서 마을의 랜드마크와 같은 상징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또 어쩌면 이 나무가 마을의 당산나무 구실을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때 이 나무 앞에 마을 이름을 새겨 세워둔 것 아닌가 싶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서 근처 마을을 돌아보며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나무가 필경 법천사라는 큰 절집이 융성하던 시절에 절집의 중심이었으리라 하는 점입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절터를 바탕으로 보나, 지광스님의 현묘탑비가 세워진 위치를 기준으로 보나 나무의 위치 부근에는 필경 큰법당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느티나무는 그 큰법당 근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법당 앞 넓은 마당에 서서 절집을 들고나는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 사람살이를 품어 안고 살아온 나무였으리라는 거죠.
그러나 이제 나무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되풀이해 말씀드리듯, 문화재도 보호수도 아닙니다. 새로 보호수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기에도 너무 늙었습니다. 나무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절터를 지키고 서 있을지 안타까움만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동안 수명을 마치고 창졸간에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나무마저 이 절터에서 사라진다면, 그때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으로 사람살이의 향기를 탐색할 수 있을지요.
그렇게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습니다. 기록에는 법천사에서 향나무를 많이 심었고, 그 향나무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고 하는데, 지금 이 절터에 향나무는커녕 느티나무 두 그루 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니 사람의 눈으로는 지금 옛 사람살이의 흔적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너른 절터에 홀로 서 있는 폐사지의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는 오래도록 기억에 그리움의 이름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날도 아닌데, 갑자기 글월 올리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한 평생을 살아왔고, 사람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사람살이의 자취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향한 그리움이 못내 아쉬워 《나무편지》에 담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다시 이곳에는 생명의 숨결이 약동하는 봄이 다가옵니다. 땅의 흙빛이 봄빛으로 바뀌자 어느 틈에 언땅을 뚫고 솟아나오는 작은 싹들이 웅성거립니다. 엊그제 《나무편지》를 띄우고 돌아본 숲에서 만난 튤립의 작은 싹들입니다. 새 생명의 아우성과 함께 주중 한낮의 《나무편지》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