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기록을 가능하게 한 종이,
이러한 기록을 전파할 수 있게 한 인쇄술,
불로장생의 단약을 발명하는 데서 파생한 화약,
항해술로 동서문명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 나침반은
고대 중국의 4대 발명이자 과학기술의 성과이다. 4
대 발명은 세계문명의 일대 변혁을 가져올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1) 종이
종이는 기록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이상적인 재료이다.
종이를 발명하기 전, 중국의 문자 기록 역사를 살펴보면
약 3,500년전 상商(은殷)나라 때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甲骨文)과
청동기에 글자를 새긴 종정문(鐘鼎文)이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죽간(竹简)이나 목판에다 글자를 기록하였고,
전한(前漢) 시기 궁정 귀족들은
비단이나 부드럽고 얇은 천에 글을 적었다.
죽간이나 비단 위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은 갑골에 비해서는 쉬웠지만, 죽간은 무거워 운반하기 불편했고 비단은 값이 비싸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가볍고 편리한 필기재료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리하여 초보적인 형태의 종이가 등장했는데, 전한 시대에 대마(大麻)와 모시로 만든 파교지(灞橋紙)와 한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종이 지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조잡하고 재질이 매끄럽지 못해 필사에 부적합하였다. 이에 궁정 기물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채륜(蔡倫)이 이전 제지술의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종이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함과 동시에 필사에 적합한 식물섬유의 종이를 제조해 냈다.
그의 제지술은 기본적으로 원료를 분리하고 세척하여 펄프 형태로 빻아 편편한 판에다 고르게 펴서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치는데, 현재종이 제조법의 원시형태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지술은 끊임없이 개선되어 대나무 발을 이용해 펄프를 채취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여, 종이의 질이 더욱 좋아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효율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중국의 제지술은 대략 수당(隋唐) 시기에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고, 8세기 중엽에 아랍을 거쳐 12세기에는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2) 화약
고대 화약의 발명은 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과 깊은 관계가 있다. 초석(硝石, 질산칼륨), 유황, 숯 세 가지 물질을 혼합하여 불로장생의 단약(丹藥)을 만들고자 했던 위진(魏晉)시대의 연단술사들은 그 과정에서 폭발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 가지 물질을 병을 치료하는 약물로 여겨 '불이 붙는 약'이라는 의미로 '화약(火藥)'이라 불렀다. 당나라 초기 의술가인 손사막(孫思邈)은 『단경내복유황법(丹經內伏硫黃法)』이라는 책에서 초석과 유황 그리고 숯을 적당히 혼합하여 점화하면 강력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약을 제조하고자 했을 뿐, 이것이 화약 제조의 배합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과 송의 교체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화약 제조의 배합 방법이 병기를 제조하는 장인의 손으로 넘어가 군사적으로 응용되기 시작하였고, 북송(北宋) 때에는 군사장비를 만드는 국영 수공업장에 화약을 제조하는 작업실이 생겼다. 화약이 무기로 처음 응용된 형식은 주로 화약의 연소 기능이었다. 1044년에 편찬된 증공량(曾公亮)의 군사병법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서는 화약 무기의 제조및 배합 방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북송 시기 화약은 초석의 함량이 아주 낮아 주로 적진을 연소시키거나 연막을 치는데 사용한 것에서 볼 때, 당시에는 전통 화공전술 가운데 방화 병기 범주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약 병기의 출현은 군사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약의 연소 기능에서 폭발 기능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화약의 성능이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이용한 무기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병기로는 강력한 폭발성 화기인 벽력포(霹靂炮), 무쇠로 덮개를 만든 진천뢰(震天雷) 등이 있다. 아울러 손에 지니고 사용할 수 있는 화통(火筒)으로는 대나무 통에 화약을 장전해서 발사할 수 있었던 돌화창(突火槍)이 있다. 화약과 화포는 13세기 때 원나라의 서아시아 정벌을 통해 그 기술이 아랍의 여러 나라로 전해졌고 그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다.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유럽 국가 간의 전쟁에서 화약과 화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3) 나침반
중국 4대 발명 가운데 하나인 지남침(指南針, 나침반)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전설 시기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의 벌판에서 전쟁을 벌일 때, 당시 안갯속에서도 사방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치우를 무찔렀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실제로는 후한(後漢)의 장형(張衡), 조위(曹魏)의 마균(馬鈞), 남제(南齊)의 조충지(祖衝之) 등이 지남차를 제작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제작방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 북송 때 연숙(燕肅)이 지남차의 형태를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그 대략의 면모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기록에 따르면 지남차는 복잡한 톱니바퀴 장치를 이용하여 수레의 목상이 항상 남쪽을 가리키게 만들었는데, 이는 자석이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음에 착안하여 제작한 지남침과 그 원리에서 다르지 않다.
전국 말기 서적인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사남(司南)'이라는 지남 기구를 언급하고 있다. 천연 자석을 갈아 국자 모양으로 만든 사남은 남북을 가리키는 자침의 성질을 이용하여 점을 치거나 풍수지형을 살필 때 사용하였으므로 최초의 지남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남은 수평을 이루는 지반(地盤)에서만 사용되었고, 또 쉽게 자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항해에는 사용될 수 없었다.
북송 시기 『무경총요』에서는 지남침의 제작과 사용방법을 소개하고 있고, 심괄(沈括)은 자신의 과학서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지남침의 유형과 원리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지남침이 전적으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 있음도 밝혀냈다. 이것이 바로 자편각(磁偏角)인데, 이로 인해 지남침의 방향을 더욱 정확하게 하였다. 지남침의 발명은 군사, 일상생활, 지형 측량뿐만 아니라 항해에도 응용되었다. 주욱(朱彧)의 『평주가담(萍州可談)』에서는 "야간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면서 항해했고, 흐린 날에는 지남침으로 항해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지남침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아울러 북송 선화(宣和) 5년(1123)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徐兢)은 자신이 편찬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당시 사신들이 탄 배가 고려를 향하고 있을 때 나침반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나라 때에 이르러 나침반은 항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으며, 이러한 항해 기술의 발전은 명나라 정화(鄭和)의 원양항해 개척의 큰 디딤돌이 되었다.
[참고] 정화의 원양항해
정화는 1492년 콜럼버스(Columbus)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1497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서해안에 도착한 것보다 반세기 앞서 서양으로 항해하였다. 그의 원양항해는 7차례나 되었는데, 그 조직과 인원이 28,000여 명에 달했고 선박의 건조와 항해 기술은 매우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4) 인쇄술
중국이 세계에 공헌한 또 다른 발명으로 종이와 묵의 발명에 기초하여 발전한 인쇄술을 들 수 있다. 고대 인쇄술은 크게 조판인쇄술과 활자인쇄술로 나누어 발전을 거듭하였다. 수당 시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 조판인쇄술은 고대 돌이나 도장에 글을 새기는 석각(石刻) 방식에 기원을 둔다. 이것은 목판에 좌우가 뒤바뀐 문자를 양각(陽刻)하여 그 위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덮어 탁본하는 방법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판인쇄물은 당나라 함통(咸通) 9년(868)에 인쇄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으로, 글자의 조각기술이나 인쇄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아 당나라 때 이러한 조판인쇄가 이미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판인쇄는 너무 번잡하고 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에 활자인쇄로 점차 대치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조판인쇄술이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우리나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6~751경)은 이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있다.
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평민 출신인 필승(畢昇)이 조판인쇄술의 불편함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활자인쇄를 발명했다. 그가 발명한 활자인쇄 원리는 먼저 점토 위에 활자를 반대로 새긴 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다음 활자판을 만들어 그 위에 배열하고, 활자판 위로 접착 성분의 밀랍을 발라 고정해 인쇄하는 것이다. 다른 내용을 인쇄할 때는 기존 활자판의 활자를 떼어내어 재배치하여 활용할 수 있어 그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이후 활자인쇄술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목판활자가 발명되었다. 원나라 때 왕정(王禎)은 운(韻)에 따라 목판활자를 체계적으로 배열해 필요한 활자를 아주 편리하게 찾아낼 수 있게 한 '회전자판법'을 발명함으로써 인쇄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건륭(乾隆) 38년에 가장 큰 규모의 목판활자 인쇄물인 2,300여 권의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叢書)』를 인쇄한 것에서 목판활자 인쇄술이 대청 왕조에 이르러 더욱 성행했었음을 알 수 있다. 활자인쇄술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또 실크로드를 거쳐 이란과 이집트를 비롯한 유럽에 전파되었다.
목판활자 이후에 주석, 구리, 납을 이용한 금속활자가 발명되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우리나라의 『직지』(1377)이며, 그로부터 약 78년이나 뒤인 1456년에 이르러서야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유럽 최초의 금속활자본(납활자)으로 『성경』을 인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