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매일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작]
자화상의 오후
김정애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매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소감] 김정애
가을해는 노루꼬리보다 짧다고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릴 만큼 분주하게 가을걷이하시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따뜻한 볕이 머무는 밭담 벼락에 기댄 예닐곱 살의 내가 있습니다.
나는 쌀쌀해지는 갈바람에 자꾸만 몸을 움츠리며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휘청이는 두 개의 등허리를 보며 들판에 너울대는 억새꽃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아져 가는 그림자를 흙 묻은 손으로 따라 그리며 온기가 베인 담장에 등을 댄 내가 맨 처음 배운 감정은 '기다림'으로 기억됩니다.
쌓이는 원고만큼이나 짓눌리던 빈칸의 무게와 하얗게 바랜 여백으로 맞던 새해. 그렇게 열병을 앓을 만큼 앓아야 12월과 겨울을 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움츠러든 거울 속 자화상 앞에 다시, 펜을 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글. '밤은 검지만 검은색이 아니야.'
밤하늘은 파란색에 노란빛이 섞이고 검은색을 혼합했지. 빨강, 노랑, 파랑 기본색에 흰색과 검은색을 조금씩 섞어야만 조화로운 색채가 뿜어져 나오듯 시어를 고르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제주시조시인협회' 선생님들은 저의 스승이자 내 시조의 산실입니다. 김정숙 회장님과 더불어 모든 회원과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이런 날도 이서사 살주' 따뜻한 포옹으로 안아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표현이 서툰 무뚝뚝한 남편과 아이들에게, 오랜 벗들과 지인들께도 당선 소감으로 고마움과 안부를 전합니다.
오늘도 스스로에 거는 주문으로 응원합니다. '그래그래 괜찮아! 잘하고 있어.'
기다림을 담보한 따뜻한 감성으로 위로가 되는 글 오래 쓰겠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의 꿈을 이루게 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시인 강현덕 선생님께 감사의 절 올립니다.
약력
-1968년 제주 생.
- 2017 제주시조지상백일장 입선.
- 2019년 8월, 2021년 8월, 2022년 4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 사 ) 제주어보전회 제주어 강사.
[202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심사평] 강현덕 시조시인
시조로 해설하는 그림
신춘문예만큼 문학도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신춘문예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최고의 작가 등용문인데도 연령 등 그 어떤 것과도 관계없는 응모 자격이 이 제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번에 응모한 투고자들만 봐도 주소는 전국적이었고 연령은 20대에서 80대에 걸쳐져 있었다. 별처럼 아득하지만 누군가는 '당선'이라는 그 별 같은 것을 손에 쥐게 된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문학도들은 기꺼이 이 병에 드는 것이다.
올해는 김정애의 '자화상의 오후'가 그 별을 안게 되었다. 그가 보내온 작품들은 모두 완성도가 높아 믿음이 갔다. 그중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제재로 한 이 당선작은 시조의 정형 미학을 제대로 보여주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였다. 자칫 실수하기 쉬운 음보와 음보, 구와 구의 운용이 매우 자연스럽고 안정감 있어 신뢰를 높였다. 색채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 첫 수와 둘째 수는 그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다. 미술관 도슨트처럼 고흐의 일생뿐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와 작품 세계를 압축하고 정제해 한 편의 시조로 해설하였다. 시조를 많이 공부한 사람 같아 이후가 기대된다.
끝까지 함께 겨룬 작품은 오시내의 '억새는 억세다'와 심순정의 '플라스틱 말'이었다. '억새는 억세다'는 언어유희를 잘 살린 점과 주제를 향해 밀고 가는 힘은 좋았으나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과 편차가 있어 내려놓았으며, '플라스틱 말'은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몇몇 시어의 선택에서 아쉽게 밀렸음을 밝힌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함께 시조단의 중심이 되어 활동해 주기를 바라며, 낙선자에게는 큰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강현덕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