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날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를 해서 아직은 부처가 못 됐으니까 부처를 증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렇더라도 이론적으로 먼저 본래시불을 이해해야 공부가 잘되고 진척도 훨씬 빠릅니다. 나한테 원래 갖추고 있는 것을 내가 스스로 발견만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끼리 본다고 생각할 때는 증명해서 부처가 못 됐으니까 다 같은 범부가 되겠습니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근원에서 보니까 도둑이나 누구나 똑같이 다 부처로 보인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재만 보지마는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잘나나 누구나 나쁜짓을 많이 하나 결국은 다 부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나 공자나 위대한 성인들이 원수를 원수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원수라고 생각이 안 되니까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런 분들은 근본을 보니까 아무리 못 나고 죄가 많다고 하더라도 다 하느님같이 보이고 부처로 보인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본래시불이란 것이 그렇게 우리 공부를 썩 빠르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미혹된 상태로 하나씩 하나씩 닦아가야 부처가 된다고 하면 답답하지만 아직 내가 완전한 부처는 못되었지만 나한테 다 갖추고 있고 만공덕이 나한테 본래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마음도 비워지고요.
* 질문
「초선정에 들어가려면 일단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돼야 초선정까지 들 수 있습니까?」
- 예 온전히 증명하려면 그러지요. 저번에 말한 사선근 즉 사가행을
거치지 않고서는 초선정에 못들어갑니다. 초선정 들면 증상이 있어요.『금강심론金剛心論』에 보면 사선근 풀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금타金陀스님을 다시 한 번 재차 괄목하고 그 어른을 참고할 것은 뭣인가 하면 지금까지 근래의 선법禪法들은 모두가 수행 방법을 거의 다 무시했습니다. 이른바 수행과정을 무시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성불이지마는 어떤 방법으로 성불할 것인가 이 과정을 무시해 놓으니까, 자기 공부가 얼마만치 갔는지를 모릅니다. 망상이 나오든가 또 쾌적하고 기분 좋으면 그때는 한 소식 봤다 하고 인가認可해 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법문에 없으면 모르거니와 방법론이 불경佛經에 다 있는 거거든요. 그것이 번쇄하고 귀찮으니까 아까 말처럼 방법 계제를 무시한 것인데 계단을 무시해 버리면 자기 스스로 점검할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계실 때는 성자가 보고 “너 얼마만치 공부했다” 하고 비평도 해주고 점검해줄 수 있지마는 그런 분들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저마다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 껌껌하다 말입니다.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모두 다 있어요. 사선근四善根을 거쳐야 이른바 사선정四禪定에 들어가는데 초선初禪에 들어갈 때 벌써 그런 증상이 나와요. 몸에서 팔촉八觸이 생기고 마음에서 십공덕十功德이라 말입니다. 팔촉, 십공덕이 발휘가 돼야 초선정에 들어갔다는 하나의 증좌證左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세계 종교가 지금 다 그래요, 불교가 아니더라도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비약적으로 막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계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도 기도하면 금방 하느님 곁에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도해서 그야말로 신비직관이라, 신비적으로 경지에 이르러야 되겠지요. 그런 방법이 없으면 캄캄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선근과 사선정이 꼭 필요하고 또 성불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구경지究竟地 아닙니까? 언제 가더라도 윤회를 벗어나서 간다고 생각해도 벗어나야 가는 것이지 그냥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은 좋아도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 올라가는 방법 계제라든가 그때그때 단계에서 나오는 그런 증상 같은 것이 참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금강심론』의 사선근ㆍ사선정을 꼭 보시도록 하십시오. 선정에 들어가서 사선정四禪定ㆍ사공정四空定ㆍ멸진정滅盡定이니까 이것이 이른바 아홉 구[九] 아닙니까? 그것 보고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그래요. 불경 가운데서도『아함경阿含經』은 부처님 육성 같은 즉 말하자면 부처님 금구친설金口親說로 네 편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네 편을 다 조사해 보니까 사선정ㆍ 사공정ㆍ 멸진정을 말씀한 데가 마흔 한 군데여요. 『중아함경中阿含經』에 사선정ㆍ사공정ㆍ멸진정을 찬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른바 “구차제정 이것이 최제일이라!” 가장 으뜸이고 가장 높고 크고 가장 수승하고 가장 묘한 법이란 말이지요. 그렇게 찬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가르침을 지금 전혀 사용도 않고 참고도 안하니까 얼마나 큰 손해가 되겠습니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아직은 사선근이나 사가행위 밖에 못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아는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도 편하고 훨씬 더 능률도 빠를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전혀 모르면 암중모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할 때에 꼭 본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불성공덕이기 때문에 또 불성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뿐이다. 부처님뿐이다 부처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염불이라는 것도 사실은 모두가 부처님뿐이라는 그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도 어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나 내 몸 가운데나 공기 가운데나 하나의 곤충 가운데도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 바로 보면 모두가 부처님 아미타불의 광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름이 아미타불인 셈이지요. 근래 한국불교에서 가장 섭섭한 점이 뭣인가 하면 보조(普照,1158~1210) 국사나 서산(西山,1520~1604)대사 나옹(懶翁,1320~1376) 스님 등 그렇게 위대한 도인들은 다 같이 염불을 말했었는데 근래 한국 스님들만 염불을 딱 빼버렸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도 일반 성불의 길이라면 팔정도八正道인데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正見이 맨 처음입니다. 다른 일곱 가지는 정견에 따라가요. 정견 바른 견해가 가장 중요한데 그러면 정견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 가지라 말입니다. 먼저 아견我見이라, 쉽게 말하면 아상我相이라 말입니다. 그 아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쉬운 것 같지마는 원리를 모르면 아상을 안 낼라 해도 자연적으로 우리 습기 따라서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아상의 ‘아[我]’라는 것이 대체로 뭣인가? 불교를 공부할 때에는 근원적인 것을 모르면 그때그때 막히고 또 번뇌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럽니다. ‘아我’는 이것은 결국 ‘아’가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아상도 안낼라 하지만 저절로 아상이 나오는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하지 않겠습니까? ‘아’의 반대는 ‘무아無我’ 아닙니까. 무아ㆍ무소유가 돼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말입니다. 어째서 ‘아,가 없는 것인가? 불교라는 것이 통틀어서 ‘무아’가 대전제가 돼서 풀려나가게 됩니다만 어째서 ‘무아’ 인 것인가?
연기법을 모르면 불교는 참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연기법에서 나온다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두가 그때그때 모여 있습니다. 인연 따라서 다 모여 있으면 그것이 그대로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인연 따라서 생긴 것은 원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이른바 항상恒常이 없다는 무상無常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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