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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에 대한 이해
-러시아 형식주의를 중심으로
역사(歷史)
제1장. 선구자들
포테브니야는 언어 연구와 문학 연구간에 밀접한 협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시창작의 본질을 언어학적인 면에서 기술하려 했다. 그는 시를 “언어의 기능을 통해서” 현실을 이해하고 또 지식을 획득하는 근본적인 두 가지 형태 중의 하나로 보았다. 이는 시적 창조를 언어의 해방과 언어의 다양한 잠재 능력의 발산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형식주의자들의 근본 주장 중의 하나, 특히 ‘시는 기호의 상태를 지향하는 언어적 행동이다’ 라는 논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젤로프스키의 시학과 형식주의 문학 이론간의 유사점은 특별한 정의들이나 분류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강조점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보다는 그의 시 작품을, 문학 작품의 심저에 놓여 있는 심리학적 과정보다는 문학 작품의 객관적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는 베젤로프스키의 주장은 초기 형식주의의 반심리주의적인 경향에서 그 결실을 찾아볼 수 있다.
포테브니야와 베젤로프스키의 개척자적인 노력은 19세기 후반기의 러시아 문학연구의 방향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형식적 고찰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적으로 작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그늘에 가려졌다. 1910년대 러시아에서는 문학 기법의 문제점들이 갑자기 비평가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버렸다. 시학 분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동요는, 매우 제한된 정도이기는 하지만, 학구적인 문학자 또는 문헌학자의 노력들에 기인하였다. 시학이론에 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게 된 것은 상징주의의 출현으로 발생한, 러시아 시문학의 새로운 개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2장. 형식주의로의 접근
상징주의 운동의 출현은 러시아의 시적 숙련도를 현저하게 향상시켰다. 19세기 중반기 이후부터 산문소설의 그늘에 가려졌던 시의 창작이 성공적인 복귀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부활과 함께, 시적 기교의 문제점들을 상징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탐구해 보려는 집중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시학 연구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 상징주의자들이 집단적으로 시학 연구를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예술적 신조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대표하는 운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철학적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상징주의가 추구하였던 세계관의 중요한 면은 그것의 언어에 대한 태도였다. 또한 상징주의 시학은 형식과 내용간의 기계적 이분법을 없애려고 신중한 노력을 기울였다. 상징주의 이론가들에게는 시란 궁극적 진실의 현실이고, 인식의 최고 형식이며, 경험적 현실과 미지의 간격을 메워 주는 마법인 것이다. 그들은 시적 언어를 신비스런 로고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징주의 시속에는 기호가 대상과 어우러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역도 또한 참이다. 즉 대상은 “단지 하나의 기호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견지에서 볼 때, 기표와 기의 사이의 상관관계는 더 이상 임의적이거나 인습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밀하고 유기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는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나, 확인할 수 있는 사고 내용을 단순히 언급하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적한다기보다는 암시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소리들의 독특하고 적절한 결합, 즉 언어의 마술에 의해 환기시킨다.
이런 상징주의에 대한 공격은 미래파 운동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래주의자들은 사회의 모든 우상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미래주의의 선언문을 작성한 작가들은 러시아 문학 유산에 가한 그들의 광범한 고발을 최근의 문학에도 적용하고자 한다는 의도를 밝혔다. 상징주의를 공격하고 나선 미래파 운동은 형식주의 운동이란 새로운 비평 학파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미래주의가 문학 이론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것은, 이 운동이 광범하게 심어놓은 방법론적 씨앗에 비해 중요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론적인 저서들의 빈약성과 경박성으로 인해 미래주의자들의 예술적 신조는 완전히 성숙한 미학으로 발전하기 못한 것이다. 미래주의 운동은 유능한 시인이며 동시에 학자이기도 한 사람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유한계급보다는 평민 인텔리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학식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학을 전개시키는 일은 새로운 시에 정통하고 또 그것에 동조적인 전문적인 문학자의 노력을 요하는 임무였다. 그러한 비평적인 운동이 정말로 발생하였다.
제3장. 형식주의 학파의 출현
20세기 초기에 들어서서,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격심한 방법론적 위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실증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반동은 비합리적 경향들을 부활시키게 되었다. 철학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자연적으로 문화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언어학자들도 역시 실증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싫증을 느끼는 풍조의 충격을 감지하였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법으로 시적 형태의 문제점들을 연구할 적절한 방법론적 도구가 없었다. 무엇에 몰두해야 할 것인가를 찾던 그들은 포테브니야가 이미 주장했던, 상상력의 문학은 언어예술이다라는 전제를 지침으로 삼았다. 그 결과 러시아 언어학자들은 곧 시적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시적 언어가 목적 지향의 언어학자들에게 그렇게 매력이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의 특수한 본질에 있었다. 거기엔 모든 요소들이 동일한 구성적 원리에 종속되는 탁월한 담론의 기능적 유형, 즉 의도된 미학적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조직된 담화가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 선구자들이 새로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매혹과 학구적 연구의 진부한 절차들에 대한 반발들이 1910년대에 조직적 운동으로 구체화된 지적 동요의 중요한 조짐이었고, 그 결과 러시아 형식주의가 탄생하였다.
제4장. 투쟁과 논쟁의 시대
형식주의자들의 초기 출판물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때까지 러시아 문학 연구에 널리 퍼져 있던 경향들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였다. 이 새로운 비평학파의 대변인들은 한결같은 정열을 가지고 공리주의적 방법, 상징주의적 형이상학, 그리고 절충주의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특히 상징주의에 집중 사격을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과의 유사성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던 상징주의에 반발한 것은 단순하게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진정한 반동 즉 초기 형식주의자들의 선언문들의 특징이었던 과학적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형식주의 대변인들의 호전적인 경험주의는 미래주의적 방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주의가 초기 단계에서 시끄럽게 과장된 것은, 아마도 거의가 다, 어떻게 해서든지 선조들과 분리를 하고자 하는 신생 비평학파의 근본적인 호전성에 기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초기 슈클로브스키와 야콥슨의 조직적이지 못한 과장들은 속물들에게 충격을 주려는 미래파 전통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형식주의의 경우 문학의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몰두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는 일부의 경우에는 견고한 이념적 참여나, 또는 좀 더 특별하게 말해서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명백하게 찬성하는 것으로부터 은신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엄격한 연대기적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 형식주의는 혁명의 산물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형식주의 학파는 좋건 싫건 간에 혁명 시대의, 다소 절충적이기는 하지만 적자이며 그것의 특이한 지적 환경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1917년의 혁명은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의 완전한 분해수리에만 그 범위를 국한시키지 않고, 정착된 행동 형태, 공인된 도덕적 관례, 그리고 철학적 체계까지도 뒤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의 충격은 초기 형식주의 발간 논문들의 요지뿐만 아니라 표현 방식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내란기간의 열광적인 분위기와 고난은 계속적인 연구나 대규모적인 출판활동을 불가능하게 하고, 경구적인 간결성과 구호와 같은 강렬함을 필요로 하였다. 초기 형식주의자들의 저술들은 이 두 가지 필요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내란이 있던 시대에 형식에의 집착은 1922년까지 중심적인 문학 장르였던 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체계화된 저항이 실제로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비평 운동은 빨리 진전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발생한 지 5년 후 형식주의 학파는 비평계에서 널리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믹한 문학 연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확보해 놓았다. 그러한 위치는 1920년 페트로그라드 주립 예술사 연구소에 설치된 “문학사 분과”로 발전 되었다.
그것을 토대로 몇몇 학자들은 슈클로브스키와 야콥슨이 전개한 형식주의 이론 체계를 주로 받아 들여서, 나중에는 그것을 발전시키고 수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비노그라도프 같은 사름들은 형식주의 운됴 의 주변에서 곧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였다. 형식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확장을 하게 되자, 그들의 위치와 운용 방법도 다소 수정되었고, 그로 인해 초기 형성기의 소란과 분노는 다소 잠잠해졌으며, 성년에 달하게 되었다.
제5장. 떠들썩한 성장
형식주의 학파의 성숙은 그것의 연구 범위를 현저하게 확장함으로써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시적 유포니에의 단순한 집착은 문학적 형식의 좀 더 포괄적인 개념에 자리를 양보하였다.소설의 문제들도 형식주의 문학 연구에서 점차로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예술적 산문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지만, 시는 형식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학자들의 주요 관심사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 연구의 영역 안에서 강조점의 중요한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시 형식에 대한 수정된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제 2기를 풍미하였으며, 시에 있어서 소리와 의미간의 밀접한 상관 관계를 확립하려는 수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운율과 문맥간의 밀접한 관계와 그것들의 상호 의존에 대한 강조가 1920년대 중반기 형식주의적 시 연구의 주제가 된 것이다.
진화의 자연적인 부산물은 불가피한 분화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법칙은 사상사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형식주의 학파 또한 초기 개척 단계에서 자랑으로 삼았을 동질성을 손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주의의 초기 시대에는 완전히 내부적 논쟁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형식주의 학파의 성장은 그것에 필적하는 비평 학파의 주의를 끌고,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포야즈 이론의 ‘날카로운 점들’을 내부 논쟁에서 논의하는 반면, 형식주의 방법론의 정수는 소비에트 문학 비평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학파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제6장. 마르크스주의 대 형식주의
형식주의자들의 예술을 사회적 삶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극단적인 경향은 문학적 현상의 ‘사회학적 등가물’을 결정하려고 노력하는 비평가들의 측에 열렬한 반발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형식주의자들의 거칠은 태도는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을 더욱 성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쉬운 공격 대상을 제공해 주었다.
혁명의 초기에 대부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자들은 형식주의의 위협을 무시하거나 극소화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형식주의의 도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반박이 요청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두 운동의 주위에서 일부 문학 이론가들은 공통되는 바탕, 즉 형식주의의 예술적 기법에 대한 강조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형식주의와의 대결은 형식주의 운동의 후속적 진화에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대부분이 너무 서투르고 무분별하게 적대적이었거나 또는 너무 기계적이어서 아무런 긍정적인 해결책을 산출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학적 고립주의라는 맹렬한 비난과 끈질긴 고발은 ‘문학 대 사회’라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 최초의 입장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제7장. 위기와 퇴각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식주의 대표자들은 그들의 최초의 입장을 수정하게 되었으며, 비평과 창작 분야에서 일어난 최근의 발전이 그것의 한계점을 드러내게 되자, 더욱 그렇게 되었다. 사회주의로 향한 형식주의의 점차적인 경향의 최초의 징후들 중의 하나를 『제 3 공장』이란 슈클로브스키의 자서전에서 볼 수 있다. 방법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 자서전은 순수한 형식주의를 초월해서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와 좀 더 조화를 이루고 좀 더 포괄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명백한 시도였다. 이것으로 대표되는 1927∼1929년 사이의 형식주의적 사고 방식의 임시 변통적 성격과, 목적들과 방법론들의 점증적 불확실성이 이때에 외부 압력에 쉴새없이 공격을 받고 내부적 불충분성에 의해 괴로움을 겪고 있던 러시아 형식주의의 명백한 위기를 입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비평적 사고 체계로서의 러시아 형식주의를 매장시키는 데 너무 성급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직된 운동으로, 그리고 러시아 문학 연구계에서 하나의 뚜렷한 학파로서, 형식주의는 모든 면에서 역사가 되었다.
제8장. 반향
형식주의 학파가 붕괴했다고 해서, 그것의 주요 대변인들이 문학적 현장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독점적 영역이 된 문학 이론화 작업을 포기하고 좀 더 안전한 표현 양식에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형식주의 이론이 공식적으로 제명당하고 그 대표자들이 잠정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서 자포자기하였다 하더라도, 소비에트 문학 연구에서 형식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였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진정, 형식주의 시학의 일부 용어들, 특히 운율학과 관계된 것들은 소비에트 비평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소비에트 비평가의 논쟁에서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시 언어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어떤 마르크스주의 문학 연구가도 그가 아무리 형식주의에 비판적일지라도, 이 분야에서 형식주의자들이 이룩한 선구적인 업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켜 주는 듯하다.
제9장. 새롭게 정립된 형식주의
소비에트 연방내에선 형식주의가 즉시 정지당해서 그 약점을 극복할 기호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부 형식주의 이론은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이웃 국가에 피난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중반기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언어학과 문학 연구의 활발한 중심지가 되었다.
체코의 언어학자들로 하여금 러시아 형식주의의 방법론과 업적에 익숙해지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사람은 야콥슨이었다. 그는 특정한 언어에서 리듬의 근거를 잘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운율적 요소들은 대체적으로 음소론적으로 유효한 것, 즉 단어의 의미를 구별지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콥슨을 중심으로 프라그 언어학회란 단체가 생겨나게 되고, 여기에는 형식주의나 형식주의와 유사한 신조를 가진 러시아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눈부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프라그 학회는 러시아 형식주의 학파의 출발점과 매우 유사하다. 두 운동의 방법론적 태도는 발생학적이기보다는 기능적인, 또는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인 언어에의 접근 방법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언어에 대한 기능적 관점이 언어학자들과 언어학적 경향을 가진 문학자들에게 공통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문학 연구가 넓은 적용 범위를 가진 개념 속에서 정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에는 프라그 학파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것보다 더욱 광범한 체제를 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론(理論)
제10장. 기본개념들
러시아 형식주의는 자주 19세기 말엽의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예술 지상주의를 단순하게 다시 다듬은 이론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술의 본질이나 목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형식주의 이론의 발언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지에 대한 문제였다. 형식주의자들이 문학을 잠재적인 심리학적 과정의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을 거부했다면, 그들은 문학 작품 속에 구체화된 경험의 차원 또는 양식 속에서 문학성의 근거를 찾으려는 태도도 마찬가지로 반대하였다.
슈클로브스키는 이미지의 사용을 문학 예술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광범하며 또 동시에 너무 편협한 근거의 틀을 취하는 것이라고 슈클로브스키는 주장했다. 계속해서 그는, 시적 화법과 이미저리는 동연의 개념이 아니라고 말했다. 슈클로브스키의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낯설게 하기’를 들 수 있다. 묘사된 대상을 ‘낯설게 만든다’는 슈클로브스키의 이론은 이미지의 시적 사용으로부터 시적 예술의 기능으로 그 강조점을 바꾸어 놓았다. 비유는 여기서 시, 더 나아가서 모든 예술의 일반적인 경향을 예시해 주는, 시인이 임의로 사용하는 기법들 중의 하나로 단순하게 생각되었다. 대상을 새로운 인식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 즉 비유가 가져다 주는 독자적 의미론적 전환은 시의 근본적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고 주장되었다. 예술가가 대항해서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일상과 습관이 냉혹하게 끌어당기는 힘이다. 대상을 습관적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을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대상들과 그것들의 감각적인 것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한다.
현대 언어학 그리고 기호학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짐으로써 문학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형식주의자들의 노력이 가장 간명한 표현을 얻은 것은 로만 야콥슨의 연구들에서이다. 많은 형식주의 이론가들과 함께, 야콥슨은 시인이 그의 매개체를 사용하는 바로 그 방법 속에 문학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문학의 변별점의 소재지를 찾아내는 임무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식의 담화들과 시적 담론 사이의 경계를 짓는 문제가 되었다.
형식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에는 ‘재료’와 ‘기법’이 있다. ‘재료’라는 개념이 형식주의의 언어학적이거나 또는 기호학적인 경향을 밝혀 주는 증거라면, 상관적 용어인 ‘기법’은 더욱 더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형식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으로는 규약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에 널리 스며든 것이었다. 문학이 지각할 수 있도록 조직된 기호들의 체계라면 각 시대나 각 문학 양식에 맞는 조직 원칙, 미학적 운용 방법, 즉 재료에 부과될 관습들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였다. 실로 새로운 문학적 대상에 직면했을 때,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왜, 또는 누가 그것을 창조했는가 하는 사실아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만들어졌나 하는 점을 알고자 했다. 즉, 특정한 문학의 유형에 내재하며 작가에게 부과된 미학적 규범들을 연구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제11장. 문학과 삶 :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의 관점
기법의 동기화, 이것은 형식주의 비평의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이었다. 이 개념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소설의 연구와 관계해서, 동기화는 슈클로브스키의 말에 의하면, 플롯구조를 실제 풍속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기법에 전심으로 몰두하는 바람에 형식주의자들을 동기화를 낮게 평가하였다. 경험적으로 볼 때, 동기화에 관한 초기 형식주의의 개념은 포함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었다.
초기 형식주의 입장에 깔려 있는 오류는 이중적인 본질, 즉 미학적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형식주의는 그 최선의 상태에서는 구조주의였거나 또는 구조주의가 되려는 경향을 가졌다는 말이 타당하다면, 여러 중요한 면들에서, 프라그 언어학회는 형식주의적 통찰들을 단순히 부연, 상술하였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옳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폴란드의 통합적 방법뿐만 아니라 체코의 구조주의도 우리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서 고려할 수 있다는 데에 하등 미흡한 점이 없는 것이다.
시와 현실의 영원한 문제, 즉 시와 현실사이의 상관관계도 흡사한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정통 형식주의 입장은 아카데믹한 전기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작용이었다. 구조주의 비평가라면 인과론적 관계란 표현에 직접적이란 형용사를 첨가해서 이 진술을 한정하였을 것이다. 작품과 경험과의 유대를 부정한다기보다, 그는 이 관계의 완곡하고 미세한 특성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명백하게 문학과 개성간에는 일대일 대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형식주의자들은 주장하였다. 개인적인 자기 표현에 해당되는 사실을 문학 속의 사회반영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서정시를 믿을 수 없는 심리학적 기록으로 만드는 것과 동일한 요인들이 소설 작품을 사회학적이거나 또는 인류학적 증거의 한 부분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방해한다.
제12장. 시의 구조 : 소리와 의미
형식주의의 개념들이 매우 유리하게 활용되었던 영역은 의심할 바도 없이 작시법이었다. 작시법에 대한 형식주의의 접근은 시 언어의 유기적 통일성에 대한 주장과 우성인의 개념, 즉 우세하거나 또는 조직화하는 자질이라는 두 기본 주장들로 요약된다. 시란 단순히 일상 언어에 음부, 각운 또는 두운과 같은 외적 장식물들을 부가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형식주의자들은 주장했다. 그것은 질적으로 산문과 다르며 그 자체의 내적 법칙들과 구성요소들의 위계 질서가 있는 통합된 담화의 형태, 즉 그것의 전체적인 음운의 결속에서 조직된 담론이다.
형식주의자들이 리듬 요소로서 단어 경계들을 주장하고 음소론적 운율학을 시도하는 태도를 지녔다. 이는 시 언어의 음성적인 면과 의미론적 면간의 상호 의존성에 관한 인식으로 비평적 분석의 여러 면들에 효과가 있었다. 음소론적 운율학과 같은 것들은 전통적 음보론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형식주의 입장은 청각적 반응과 감정적 반응간의 조응의 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적 의미론에서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데 더욱 중요한 점은 시 언어의 조직적 인자로서의 리듬이 의미를 수식하고 변형시킨다는 가정이었다. 또한 시문학 연구가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후자 형태의 각운으로, 각운은 결코 순전한 조화의 문제이거나 일률적인 동질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시의 구조에 대한 형식주의의 접근은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리듬학의 방법들을 능가하는 뚜렷한 향상이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야콥슨을 들 수 있는데 야콥슨이 작성한 업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와 의미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중대한 통찰은 많은 연구와 논문들에, 그 중에서도 특히 후기 구조주의 시대에 씌어진 논문들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제13장. 문체와 구성
통합적인 미학 원리를 모색하려는 형식주의의 추구는 시적 ‘문체’의 본질과 영역의 문제를 전체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형식주의 대변인들의 대부분은 그것보다 다소 구체적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아이헨바움이 아흐마토바의 『시학』을 자세히 연구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문체를 연구하는 일부 형식주의 또는 준형식주의자들은 아이헨바움의 참조 사항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광범하다고 느꼈다.
러시아의 문학 언어는 혼성적 창조물이다. 그것은 러시아 자국어와 슬라브계 교회어의 특정한 요소들의 결합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아주 유사하면서 상이한 이 두 언어학적 요소들은 담화의 두 뚜렷한 영역들과 대략 부합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러시아 어휘에서 동의어의 풍부함에 공헌하고 있지만, 이 양분법이 동시대의 러시아어에 확대되어 크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희곡과, 헨리 제임스가 ‘무대적 방법’ 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한, 이야기체 소설 작품들은 예외고 하더라도, 독백은 문학에서 주요한 발언의 형태이다. 러시아 문학이론에서 스카즈라고 알려진 서술방식은, 형식주의의 문체 연구가들이 문학에서 소리의 사용에 몰두하고 문체화의 모든 기법들에 빈틈없이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슈클로프스키의 ‘플롯’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다소 달랐다. 이 형식주의의 이론가에게 ‘플롯’은 정확하게 ‘사건들의 구조’가 아니었다. 단편소설들과 중편소설들에서, 미학적 효과는 자주 여러 가지 형태의 대조와 부조화를 치밀하게 이용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들의 범위는 서술 구조에 입각한 동음이의어의 실현으로부터 오해의 모티브를 거쳐 두 개의 도덕률간의 충돌에까지 걸쳐있다.
구성적 패턴들에 대한 강조는 프로프의 간결한 연구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방법은 ‘형태론적 분석’이었다. 그의 목적은 “옛날 이야기 플롯들의 표면적 다양성을 제한된 숫자의 기본적 형태들로 줄이는 것” 이었다. 프로프는 옛날 이야기의 기본 단위는 ‘인물’ 이 아니고 인물이 플롯 내에서 행하는 역할, 즉 그의 ‘기능’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로프는 교차하는 형태들과 하위 형태들의 혼돈을 놀랄 만한 통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모든 옛날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동질적이다라고 프로프는 결론지었다.
제14장. 문학의 역학
프로프가 사용한 형태학적 분석의 방법은 전형적인 형식주의적 전술이었다. 그러나 본질을 기술하는 것 그 자체가 정태적인 절차라고 해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연구 대상에 정태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초기에 위험스럽게도 이 오류에 가까이 갔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아주 이른 단계에서 그들 방법론의 틀을 수정하였다. 이것은 구성요소들의 위계 질서 내에서의 주기적인 자리 이동, 즉 미학적 기능 내에서의 문학적 기법들의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했다.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는 변화들이 체계 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만 하며, 기술주의자는 체계가 항상 변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형식주의 이론가들은 주장하였다. 변화의 “전범화”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서구 형식주의자들의 경우보다 더욱 더 역사를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문학은 다른 인류의 행위들과 밀접하게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진화를 순수하게 문학적 견지에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지르문스키는 주장하였다. 문학은 시대정신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술과 철학간의 관계는 이상적인 조화의 문제도, 또는 일대일 대응의 문제도 아니다. 더욱이, 지르문스키가 그랬듯이 문학이 그 자신의 특정한 내부적 역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술 내에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그 해결책을 항상 외부로부터 차용해야 한다고 추정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러한 모든 사실로부터 유도해낼 수 있는 일반적인 결론은 문학의 진화는 일직선적인 과정이 아니고 우회로와 꾸불꾸불한 길이 가득한 뒤틀어진 길이며, 모든 문학적 경향은 전통과 혁신의 요소들간에 교차하는 복잡한 상호 작용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문학적 배경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문학적 역학에 관한 형식주의의 개념은 전통적 개념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하였으며, 역사적 시각에 많은 중요한 변화들을 유발하였다. 푸시킨이 고전주의의 유산을 다소 수정하거나 또는 초월했다는 사실을 형식주의자들은 거리낌없이 인정하였다. 푸시킨과 그의 시대에 관한 티니야노프의 학문적 연구에서 그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양분법을 러시아 문학적 배경에 적용 가능한가를 문제시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티니야노프에 의하면, 19세기초 러시아의 문학적 논쟁들은 순수하게 러시아적이며, 그리고 좀 더 특별하게 문학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제15장. 평가
러시아 문화 사조의 한 장면으로 볼 때 형식주의는 극히 러시아적 현상이었으며, 또는 그렇게 평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 형식주의는 필연적으로 과거의 것만은 아니다. 넓은 견지에서 볼 때, 러시아 형식주의는 문학과 예술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하는 최근 경향의 가장 활발한 표명들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형식주의자들은 비평적 평가를 확인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확고한 기반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분별력이 있었다. 역사적 평가는 전체적인 비평적 판단의 필수 불가결한 국면이지만, 그 전체의 대체물은 아니다. 얼마나 성공적으로 역사적 과제를 수행했는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인 반면, 어떤 과제들은 다른 것들보다 미학적으로 더욱 가치가 있거나 또는 더욱 강요적이라는 것도 합당한 주장이 될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판단을 내리면서, 우리는 솔직하게 같은 당파인 변호자들이나 떠들썩한 비방자들로부터 단서를 얻을 필요는 없다. 짧고 떠들썩한 경력을 거치는 동안에, 형식주의자들은 많은 비난들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화가 치밀 정도로 경솔하거나 불필요하게 난해하였으며, 또 그들은 때때로 부당하고 견강부회적이고, 지나치게 정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무디거나 파행적이지 않았으며, 부적당하거나 구태의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문학에의 진지한 헌신과 예술적 전망의 고결함에 대한 뿌리깊은 존경심에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