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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제2공화국과 제2제국 (2) 샤를 루이 나폴레옹
제헌의회가 6개월의 작업 끝에 마련한 새 헌법은 노동권의 보장이 없었고 삼권분립의 원칙에 의하기는 했으나 권력 사이의 조화를 결여하고 있었다. 예컨대 입법부도 대통령도 둘 다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데, 광범한 집행권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만일 입법부와 충돌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길이 없었다. 그리고 공화국의 운영상 어려운 일들이 발견되면 헌법을 수정해야 하는데, 단원제 의회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헌법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은, 수정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헌법이란, 그 자체가 아무리 이상적으로 제정되어 있더라도 잘 준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프랑스 국민은 뼈저린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헌법이란, 이론상 다소 문제가 있고 미비점이 있더라도 실제 운영에서 그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별 어려움이 생긱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제2공화국 헌법에, 일찍이 약속한 노동권의 보장이 없다든지 권력 구조에 이론상 모순이 있더라도, 그 헌법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운영만 잘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대통령 선거는 12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지난 10개월간 눈부시게 활약한 카베냐크, 라마르틴, 르드뤼 롤랭이 각각 공화주의의 강온파를 대표하여 서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모두 어이없이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난데없는 제4의 후보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었다. 앞에서 우리는 그가 7월왕정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실에 언급한 바 있는데, 그는 영국에 망명해 있다가 2월혁명 후 파리로 돌아와서 정치적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6월 4일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자격 심사에서 떨어졌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6월 폭동이 프랑스 국민을 갈기갈기 분열시키고 노동자들 마음에 공화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놓은 사실에 주목하였다. 거기서 9월 17일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폭동 후의 의회는 그 이전의 의회와는 전혀 달랐다. 팔루 일파의 왕당파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무력한 의회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의원 자격을 따지지 않았다. 9월 26일 의회는 그의 당선을 유효로 인정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독일어 악센트로 말하고, 교양이 없고 우유부단했으며, 외모도 인상도 좋지 않았다. 대의원으로 나서서 한 처녀 연설도 낙제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를 주목하고 있었던 원로 정치가들은 그를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제쳐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이 어떤 위인인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때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하게 만들었을까?
첫째는, 영웅 나폴레옹의 전설과 이름의 힘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설이 어떻게 형성되어 그럴 듯하게 유포되었는가는 이미 앞서 살펴보았다. 나폴레옹의 이름은 농민과 군인에게는 질서와 영광을 의미하였고, 상공업자에게는 경제적 번영을 의미하였다. 또한 많은 노동자에게는 사회주의와 대혁명의 계승자로 보였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1844년에 <빈곤의 절멸(L’extinction du pauperisme)>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사회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에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선전 재료로서는 훌륭하였다. 게다가 샤를 루이 나폴레옹 이외의 다른 후보자들의 이름은 파리나 대도시에는 갑자기 알려졌지만 농촌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둘째로, 이들의 이름이 설사 알려질 기회가 있었더라도 선거민의 앞도적 다수인 농민은 이들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후보자들은 공화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농민과 대다수 국민에게 공화정이란 무질서와 불안정과 중세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슴은 질서와 영광과 번영을 의미하였다.
셋째로, 6월 폭동 후 프랑스의 공업 노동자도 공화주의자를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카베냐크를 ‘사람 백정’이라고 매도하였고, 라마르틴도 결국은 카베냐크의 한 부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빈곤의 절멸>의 저자를 골랐다.
넷째로, 정통파와 오를레앙파의 경우 보나파르티슴은 변종이기는 하나 군주주의라는 점에서 공화주의보다는 자신들에게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에 앉혀놓고 시간을 벌어서 왕정을 회복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폴레옹의 조카 샤를 루이는 이제 이름뿐만인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백부가 쿠데타로 껍데기 공화국의 제1통령이 되었다가 공화국의 간판마저 내리고 황제가 되었듯이 그 조카도 이제 공화국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황제가 될 길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됨됨이 자체가 범상했지만, 자기는 보나파르트 황실을 재흥시킬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만은 매우 강하였다. 그는 측근들과 함께 은밀히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었는데, 되어가는 일들이 대체로 그에게 유리하게 펼쳐졌다.
때마침 1849년 5월에는 제헌의회의 1년의 임기가 끝나고 임기 3년의 새 입법부의 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는 제헌의회보다도 더 공화정에 대한 불신을 나타냈다. 총 의석의 3분의 2에 가까운 수가 오를레앙파와 정통파였다. 온건 공화파는 80석밖에 되지 않았다. 공화국 의회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주주의자들에 의해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지 합헌적으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왕정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왕정파 다수의 공화국을 수호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르드뤼 롤랭 등의 공화파가 6월에 반의회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쉽게 진압되었다. 르드뤼 롤랭은 1년 전의 루이 블랑을 뒤따라 영국으로 도망하였다. 이 폭동은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언론통제를 더 강화하고 정치적 성격의 집회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하여 왕정파의 힘을 빌리지 않고 가톨릭교회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하였다. 왜냐하면 정통파와 오를레앙파는 둘 다 왕정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으나 그들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정통파는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보르도 공)이고 오를레앙파는 루이 필리프의 장손 파리 백작이었다. 그러므로 양 파의 눈에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자기들의 목적에 이르는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그들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가 가톨릭의 힘을 빌리려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티슴은 무신론이었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가톨릭은 보나파르티슴을 항상 의심하거나 적대시해 왔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가톨릭을 자기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서게 하려면 가톨릭에 대하여 스스로 적극적인 호의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1849년 3월에 그런 기회를 포착하였다.
2월혁명은 유럽 일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불을 붙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각 3월혁명을 낳았고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공화파는 그 혁명운동들을 돕기 위한 파병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도 교회령에 혁명이 일어났다. 마치니(Giuseppe Mazzini)가 로마 공화국을 수립하자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의 가에타로 도망하였다. 이때 3월혁명을 분쇄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문제에 간섭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의회는 이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배제하고 마치니의 로마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파병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대통령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군대를 로마에 파견했는데, 그는 그 군대를 의회의 결의와는 반대로 마치니의 공화국을 타도하고 교황을 로마로 귀임시키는 데 역용하였다. 그는 프랑스이 가톨릭 교회와 신도들이 교황령의 회복을 원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이 엄청난 불법적 처사는 프랑스의 가톨릭교회를 그의 지지자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대외 정책에서만이 아니라 대내 정책에서도 가톨릭교회의 환심을 얻는 데 부심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803년 이래 반교권주의가 유력하여 교육의 세속화 즉 교육의 국가 독점이 크게 성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가톨릭교회는 교육 활동의 영역이 축소되었다. 교회는 이것을 불만으로 여겨 교육의 국가 독점을 늘 반대해 왔는데, 1850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팔루의 입안에 따르는 팔루법(Loi Falloux)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면, 군, 도와 국가가 설립하여 경영하는 공립학교와 개인이나 민간단체가 설립하여 경영하는 사립학교의 두 가지 종류의 학교를 공인한 것으로서 얼핏 볼 때 너무나 당연한 규정인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법의 근본 동기는 가톨릭교회에 광범한 교육 활동을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제반 사정에서 가톨릭 교회 이외에는 어느 개인도 민간 기관도 학교를 경영할 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팔루법은 공화파의 눈에는 교권주의의 새로운 반동적 징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공화파는 반격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그해 파리의 세 보궐선거에서 공화파가 압승하였다. 공화파의 승리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과 보수 진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들은 서둘러 노동자의 투표권을 대폭 감축시키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같은 선거구에 3년 이상 거주한 자에게만 투표권을 주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자주 이사하는 약점을 악용한 것이다. 여기서 약 300만 명의 노동자가 투표권을 잃었다. 팔루법과 선거법 개악은 가톨릭교회와 보수파를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지지자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자기의 정치 기반을 가톨릭교회에 굳히는 한편, 자신이 의회의 도구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보이기 시작하였다.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할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늘면 늘수록 그는 입법부와 충돌하였다. 1851년 2월에는 대통령실 예산의 증액안이 의회에 제안되었으나 부결되었고, 7월에는 대통령의 임기 4년 담임제를 고쳐서 재선으로의 길을 열려는 개헌안이 역시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300만 명의 투표권을 박탈한 개악 선거법을 다시 환원하여 노동자의 인기를 회복하려는 계획도 묵살되고 말았다.
그런데 1852년은 정치적으로 중대한 해였다. 5월에는 입법부의 총선거가 있고 12월에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때였다. 5월 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가 다수를 얻는다면 새 의회를 통하여 대통령의 재선 개헌을 시도해 볼 수 있으련만 그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백부의 예를 따라 쿠데타의 방법으로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로 하였다.
1851년 12월 1일과 2일 사이의 야음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군대가 의사당을 점령하고 정당 지도자들을 체포 감금하고 국가 변란을 음모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의회 해산을 선언하면서 “나의 의무는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의 숭고한 판단에 따라 공화국을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국민주권을 믿지도 않았고 더구나 공화국을 수호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는 헌법을 대폭 수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고 선거법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고치고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도로 회복시켜주었다. 새 헌법은 공화국도 민주주의도 부정한 대통령 독재의 권위주의체제(Authoritarian Regime)를 규정한 것으로서 1년 뒤의 제정을 실질적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빈틈없이 수행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무서운 저항이 지방과 파리에서 일어났다. 이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진압이 용이했던 중요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별로 저항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소극적 태도는 그들의 공화주의 정신이 약화되어서가 아니라 제2의 6월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쿠데타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섰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근 2만 7,000 명이 체포되고 그중 1만 5,000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9,000명이 알제리아로 유형되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새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국민의 찬성을 얻도록 되어 있었다. 그는 국민에게 “헌법은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는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원수는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에 호소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국가원수에 대한 신임을 계속할 수도 있고 철회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논리로 그는 국민투표라는 방식을 이용하여, 국민대표 기관인 의회를 누르고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게 하여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민투표란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색인 간접민주주의를 짓밟는 제도로서, 이것은 보나파르티슴의 창작 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1851년 12월 국민투표는 찬성이 748만 1,000표였고 반대가 64만 7,000표였다. 프랑스의 주권자인 국민은 압도적으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승인하였다. 그의 쿠데타와 권위주의 체제는 합법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과 60여 만 명의 반대자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12월 2일 놈”이라고 부르면서 헌법 유린의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정예분자들이었다. 사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가장 큰 약점이 헌법 유린이라는 범죄였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의 유지가 자기 의무라고 선언했지만 공화국은 이름뿐이고 그 이름마저도 앞으로 1년밖에 더 연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의 나폴레옹 제국의 부활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1851년 12월 2일의 쿠데타는 비틀거리는 제2공화국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제2공화국의 실험은 심각한 환상으로 끝났다. 새 사회와 새 역사의 탄생에 대한 국민의 부푼 희망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사람들은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 및 내란을 모두 공화정이라는 정치제도의 탓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의 그러한 착각을 악용하여, 자기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주기만 하면 정치적 안정도 경제적 번영도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선동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이듬해 12월 2일 다시 쿠데타로 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프랑스 제국을 선포했을 때 국민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2일 새벽 일찍이 공장으로 출근하던 한 노동자가 제국을 선포하는 플래카드를 보고 “나폴레옹의 조카가 틀림없군”이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프랑스인에게 각인된 보나파르트 가문의 근본 정서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샤를 루이의 어머니가 행실이 정숙하지 못했다면서, 샤를 루이가 나폴레옹의 진짜 조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샤를 루이가 나폴레옹의 진짜 조카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1789년 이래 갈기갈기 찢어진 프랑스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가장 성공한 통치자가 ‘나폴레옹’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였다. 이제 그의 조카라는 사람이 과연 삼촌의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