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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제도의 주민에 의해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
그러나 문학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영국문학도 뚜렷한 지리적 경계를 긋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뿐만 아니라
미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 등
영연방 내외의 문학적 주류까지 포함하는 문화적 총체라고 해야 옳다.
지리적으로는 섬나라이지만 영국문학은 편협함이 없다.
중세에는 정복당한 색슨인들이 이룬 고대영문학에 정복자들의 앵글로노르만어 저술
또는 교회관계자들의 라틴어 저술이 이미 스며들었고,
그 바탕 위에 중세문학의 대표적 문인인 제프리 초서가 활용하고
16세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꽃피운,
유연성과 미묘함을 아울러 가진 문학언어로서의 영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영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세기의 문학적 절제에 대한 관념이나
19세기의 고대유물에 대한 다소 막연한 경의가 영문학 형성에 계속 이바지했다.
지중해 연안지방에서 유래한 이런 자극과
이후에 영문학에서 일어난 여러 움직임은
다른 유럽제국과 상호연관을 가지면서 영문학의 특징이랄 수 있는
잡종교배(雜種交配)의 뚜렷한 증거를 보여준다.
고대 영어시대의 영국문학
초기의 영국역사가 가경자(可敬者) 비드가 쓴
〈영국인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에 의하면,
영어로 된 최초의 시는
7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쓴 캐드먼은
일자무식의 목동이었으나,
꿈에서 영감을 얻어 '천지창조'를 찬송하는 짧은 시를 지었다.
그뒤에는 성서를 바탕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영국의 토착적 시형식을 정착시킨 효시라고 한다.
고대영어로 씌어진 시는
사실상 전부 두운시(頭韻詩)인 것이 특색이다.
한 행에 4개의 강세가 있고,
2번째와 3번째 강세 사이에 휴지부가 있으며,
앞부분과 뒷부분이 두운으로 연결되는 것이 이 형식이다.
형식 위주에다
상투적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뛰어난 시의 경우에는 이러한 정형성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시의 배경을 이루는 문화적 토양의 풍요로움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밖의 표현방식으로는
케닝(kenning)이 있는데,
사물을 비유적인 복합명사(예컨대 '바다'를 '백조길'·'고래길' 등)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밖에도 한 가지 뜻을 다른 말로 반복표현하는 방식이 있으며,
반복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중첩된다.
이러한 시의 기교가
4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이어져온 사실은
앵글로색슨 문화의 극단적인 보수성을 드러내준다.
고대영시의 대부분은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반에 씌어진 4편의 필사본(筆寫本)에 보존되어 있다.
엑서터서,
베르첼리 사본 등이 그것이다.
연대를 확정지을 수는 없으나,
〈베오울프 Beowulf〉 사본에 실린 〈방랑자 The Wanderer〉를 비롯해,
초기 시로 간주되었던 그밖의 작품들을 9~10세기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작가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시는 더욱 드물다.
그중 많은 작품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시인은
키너울프이다.
고대영시 가운데 세속적 재물이나
영광 또는 우애의 상실을 한탄하는 시를 통틀어 애가(哀歌)라고 한다.
이 부류의 전형적 예로서
유명한 〈베오울프〉가 있다.
이 작품은
용사 베오울프가
괴물인 그렌델 일당과 싸워서 이기는 무용담을 그린 것이나,
승리는 언제나 잠시뿐이고
싸움은 다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작가의 역사의식 때문에 작품 전체에 애가의 분위기가 깔려 있다.
가장 오랜 산문문학은
9세기 후반 앨프레드 왕이
영국의 문물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서적을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도
그의 치세 때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에설레드 1세 때부터 노르만 정복(1066)에 이르는 시기 동안에도
뛰어난 문장들이 남아 있다.
10세기 중엽의 베네딕투스파 개혁은
문학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문필가는
앨프릭이다.
그가 라틴어로 쓴 〈대화 Colloquy〉는
앵글로색슨 시대 영국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앨프릭은
문장이 유려하며 라틴 문학의 수사법을 잘 활용했고,
각종 법조문과 설교집을 쓴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턴과 더불어
당시 가장 인기있는 저술가였다.
이 시기가 끝나갈 무렵
영어는 문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 각국의 토착어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기 중세영어 시대의 영국문학
12세기말까지 영국 시는
프랑스 시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중기영문학).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난 시는
〈부엉이와 나이팅게일 The Owl and the Nightingale〉(1189년 이후 씌어짐)로서,
당시 유행하던 논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목에 나오는 2마리 새가
위생습관, 용모, 결혼노래, 예견, 신앙양태 등 다양한 화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데,
나이팅게일은 삶의 즐거움을,
부엉이는 삶의 어두운 측면을 대변한다.
13세기에 이르러 성서이야기,
성자의 생애,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도덕교훈 등을 담은 교훈시가
대두하게 되었다(교훈문학).
중세시대 내내 유행한 로맨스 시가 처음 나타난 것도 13세기이며,
짐승을 등장시킨 해학풍 장시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이다.
중세 영어로 쓰인 세속 서정시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주제는
봄철과 낭만적 사랑이며,
대개가 노래로 불려지기 위해 씌어진 듯하다.
종교적 서정시를 지배한 것은
열정적 분위기이며,
사랑의 시에서 표현을 빌린 경우가 많다.
고대영어로 씌어진 산문작품은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100년 이상 계속 복제되었다.
영어는 앵글로노르만어(프랑스어의 방언)와 라틴어의 거센 도전을 받았고,
그런 까닭에 영어 산문은 양적인 면에서 점점 쇠퇴해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 산문작품들은
영어만 해득하는 사람,
특히 여성을 위해 씌어진 것이었다.
고대영어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수녀의 계율 Ancrene Riwle〉은
수녀원 밖에서 계율생활을 하는 수녀를 위한 지침서이다.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16세기까지 인기를 누리던
작자 미상의 이 작품은
그 현실적 도움과 더불어
인간의 성정에 대한 인간미 넘치는 통찰도 뛰어나지만,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문체가 더욱 돋보인다.
후기 중세 및 초기 르네상스 시대 영국문학
1350~1550년에
영문학의 본질과 발전을 규정한 가장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이 시대 초기에 영국이 처해 있던 특수한 언어적 상황이었다.
전체 인구 가운데 문자를 해독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보통 2개 국어 심지어 3개 국어를 사용했다.
문학적 언어매체의 측면에서
영어는 라틴어나 당시 영국에서 널리 사용된 프랑스어의 앵글로노르만 방언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어 내에서도
방언마다 차이가 심한 것이
토착어 문학의 유통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문화는 흑사병의 창궐(1347~51),
백년전쟁 및 장미전쟁과 같은 국내외의 고질적인 군사적 충돌,
사회적·정치적·종교적 불안정 등의 강력한 저해요인에 직면하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또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그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운을 밟지 않는 두운시가 14세기 중엽에 다시 나타났다.
14세기 말엽의 두운시는
고대영어 시대의 전통을 극히 표면적으로만 이어받았거나
자체의 형식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두운시 운동은
지금 볼 때 다소 기이해 보일 뿐
별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한 사소한 문학적 현상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느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4편의 시만은 예외이다.
〈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Sir Gawayne and the Grene Knight〉,
2편의 설교시 〈인내 Patience〉·〈순결 Purity〉,
그리고 〈진주 Pearl〉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애가체 꿈 우화가 그것이며,
모두 1400년경의 단일 필사본 안에 들어 있다.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
윌리엄 랭런드의 길고 난해하며 아름다운 두운시
〈농부 피어스 Piers Plowman〉가 있다.
이 두운시 운동은
대체로 15세기초에 끝났지만
궁정시가는 더 오래 그 맥이 이어졌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궁정과 귀족사회에서 영어가 앵글로노르만 프랑스어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러한 언어의 자국어화 과정은
제프리 초서와 같은 기질이나 관심을 지닌 작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또한 영어를 문어로서 확립한 초서의 천재성이
이 과정을 촉진시키고 그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초서는
부르주아 출신의 런던인으로서
궁정인·외교관·공무원 등 여러 경력을 거쳤다.
그의 초기 시는 '궁정풍'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견해나 가치관을 담고 있으며,
아주 초기의 시는 당시의 프랑스 연애시에서 형식과 내용을 빌려온 것이었다(궁정연애).
그러나 그가 새로운 문학적 시도로서
결국 10음절, 즉 약강 5보격의 시행을 터득한 것은
영시에 있어 극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닦은 기량은
처음에 7행시 등 연시가(聯詩歌) 형식으로,
뒤에 가서는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의 대부분을 이루는
10음절 2행연구체(聯句體)로 나타나게 되었다.
초서의 주요업적은
이야기체 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초기에 보인 프랑스 궁정연애시(특히 그가 번역한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의
영향에서
차츰 이탈리아 문학, 특히 단테·페트라르카·보카치오 등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최고로 발휘했는데,
이 장시는 런던을 출발해 성(聖) 토머스 베킷의 사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순례자 일행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담은 미완성 작품이다.
시인 자신이 아니라 순례자 개개인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가상의 구조는
작가의 입장을 매우 자유롭게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서는 여러 장르를 섭렵할 수 있었다.
예컨데 경건한 전설, 파블리오(fabliaux:익살조의 우화시), 기사 로맨스, 통속 로맨스,
동물우화 등이 그것이다.
15세기에는
여러 종류의 본격 저작물에 영어 산문이 사용되는 추세가 굳어졌다.
후기 중세 영어의 산문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아서의 죽음 Le Morte d;arthur〉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스스로를 기사출신 죄수라고 설명한 맬로리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있다.
이 작품에 스며 있는 기사도에 대한 향수와
비극적 감정의 독특한 혼합은
아서왕을 주제로 한 여러 작품에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중세영어의 희곡은
주로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의 공연대본이었기 때문에,
당시 방대한 분량이었을 극작품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남아 있다.
14세기 후반 이후 주류를 이룬 연극 장르는 2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신비극 또는 성체극이고
신비극은
성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타락, 속죄 등을 다룬 긴 연작극이며,
동업조합이 돈을 대고 공연하는 형식으로
마을의 거리나 광장에서 4륜마차를 이동무대로 사용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극본은 요크·체스터·웨이크필드
도덕극은
인류를 대표하는 한 인물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때로는 죽음 이후까지의 인생살이를 그린 우화극을 말한다.
주인공 이외에 악덕·미덕·죽음·회개·자비 등의 의인화된 추상적 인물이 등장한다.
도덕극을 재미있고 다양하게 모아놓은 것으로
'매크로 희곡집'(Macro Plays)으로 알려진
〈인내의 성 The Castle of Perseverance〉·
〈예지 Wisdom〉·
〈인류 Mankind〉 등이 있으나,
단일작품으로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
만인 Everyman〉이다.
이것은 죽음의 도래를 주제로 한
네덜란드의 극을 영어로 옮긴 뛰어난 작품이다.
15세기는
세속문학이 성장한 중요한 시기이며,
그 과정은 1476년
윌리엄 캑스턴이 영국에 인쇄술을 도입함으로써 급속히 촉진되었다.
그가 맬러리의 아서왕 전설을 펴낸 해(1485)는
바로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등극한 때이며
이때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는
영문학사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과도기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산문과 희곡에서 다같이
교육과 선정(善政)이라는 2가지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영국 인본주의의 걸작인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1516)는
원래 라틴어로 씌어졌다가 155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시기의 시에서 가장 뚜렷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존 스켈턴이다.
16세기 전반에는 음악성을 바탕으로 좀더 엄격한 의미의 시로 볼 수 있는
궁정 서정시가 출현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문학
낭만주의의 본질
낭만주의 시의 뚜렷한 특징은
개인의 감정과 사고가 새롭게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시학의 주된 경향이
일반적인 것을 찬양하고
시인을 사회의 대변자로 보았던 반면,
낭만주의자들은
특수하고 독특한 경험에서 시의 근원을 찾았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정신활동을 시의 기본 소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지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개인이라고 여겨졌다.
시는 자체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며
성실성이야말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였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곧 가장 강렬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 최고의 시임을 뜻했고,
따라서 서정시가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낭만주의 이론은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상상력에 상대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새뮤얼 존슨은
시의 구성요소를 '고안·상상·판단'이라고 보았지만,
판단이나 의식적 통제는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당대 시인들은
무의식적 정신작용, 꿈과 환상, 초자연적 세계, 순수하고 원시적인 세계관을 크게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자연발생적이고 진지하고 강렬한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최초의 낭만주의자들인 윌리엄 블레이크,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윌리엄 위즈워스는
당시의 지적 풍토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순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1789)에서
그의 예언자적 생각을 처음 드러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0~93)·
〈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1794) 같은 작품에서는
그 시대의 위선과 분석적 이성이 당대의 사고를 지배함으로써 야기된
비정한 잔혹성을 공격했다.
그뒤 블레이크는
시의 목표를 한번 더 바꾸었다.
그는 〈실락원〉을 본떠
이야기체 서사시를 쓰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어,
그보다 구성이 느슨한 상상의 이야기시 〈밀턴 Milton〉(1804~08)·
〈예루살렘 Jerusalem〉(1804~20)을 썼다.
여기서도 그는 여전히 신화적 인물들을 등장시켜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을 사회의 영웅으로,
또 용서를 가장 위대한 미덕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혁명의 의미를 좀더 복잡하게 탐색하고 있었다.
워즈워스는 일생 동안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지닌 의미를 심사숙고했으며,
인간 개개인의 서글픈 운명과 전체 인류의 실현되지 못한 잠재성이라는
그의 이중적 관점에 부응할 만한 인간관을 전개하려고 애썼다.
자연과 인간정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탐색은
자전적인 장시
〈서곡 The Prelude〉(1805, 계속 개정되어 사후출판 1850)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시기 동안 콜리지의 시도
워즈워스와 비슷한 발전단계를 거쳤다.
당대 정치에 곧 환멸을 느낀 콜리지 역시
자연과 인간정신의 관계를 탐구했다.
몽상 중에 떠올랐다고 하는 시 〈쿠빌라이 칸 Kubla khan〉(1797, 출판 1816)은
이국적인 작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콜리지는 더 나아가 〈노수부의 노래 The Ancient Mariner〉와
미완성작인 〈크리스타벨 Christabel〉의 초자연주의에서도 이 분위기를 이용했다.
선배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공유했던 다음 세대의 시인들은
선배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퍼시 비셰 셸리는
인간해방의 열의와 시적 정열을 소유한 열렬한 혁명주의자였다.
초기 시 〈매브 여왕 Queen Mab〉(1813),
장시 〈레온과 시스나 Laon and Cythna〉
(1818년에 〈이슬람의 반란 The Revolt of Islam〉으로 개칭),
서정적 분위기의 극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Unbound〉(1820)에는
이러한 열기가 불타고 있다.
〈서풍에 부치는 송시 Ode to the West Wind〉(1819)에서 뚜렷이 알 수 있듯이,
셸리는 자신을 시인이자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존 키츠는
감각이 매우 예민한 시인이어서
〈엔디미온 Endymion〉(1818) 같은 초기 시는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성(聖) 아그네스 전야 The Eve of St. Agnes〉·
〈나이팅게일에게 To a Nightingale〉·
〈그리스 항아리에 부쳐 On a Grecian Urn〉·
〈가을에 To Autumn〉 등의 송시
및 〈히페리온 Hyperion〉(최종 형태로 출판 결정 1856년) 같은 후기 작품들은
절정에 달한 키츠의 기량을 보여주며,
복잡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드러낸다.
바이런은
주제와 양식면에서 볼 때
셸리나 키츠와는 구별된다.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Childe Harold's Pilgrimage〉(1812~18)과
걸작 〈돈 주안 Don Juan〉(1819~24)은
바이런에게 대리자아를 제공했던 시들로,
그의 작품 중 가장 길다.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에서는
유럽의 사적지를 돌아다니는 냉혹하고 우수에 찬 유배자가,
〈돈 주안〉에서는 연애사건을 잇따라 일으키는 탕아가 등장한다.
바이런은 〈맨프레드 Manfred〉(1817)·
〈카인 Cain〉(1821) 등의 극적인 시들을 발표해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오늘날에는
재치있고 역설적이며 덜 과장된 작품을 쓴 작가로 주로 기억된다.
오스틴과 스콧,
그외 18세기말의 작가들은
공포를 일으키면서도 감각에 호소하는 고딕 양식을 표방했는데,
앤 래드클리프의 〈우돌포의 신비 Mysteries of Udolpho〉(1794),
매슈 그레고리 루이스의 선정적인 〈수도승 The Monk〉(1796)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인간 심리를 다루는 기량이
시인들보다 훨씬 뒤졌으며,
제인 오스틴과 비교해서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 Northanger Abbey〉(1817)은
복잡한 아이러니를 동원해서 고딕 소설을 풍자하고 있다.
〈분별과 다감(多感) Sense and Sensibility〉(1811)은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1813)은
건전한 정신과 지성이 어떻게 사회관습의 우둔함을 헤쳐나가는가를 보여준다.
생활 반경이 매우 좁았던 그녀는
인간관계의 미묘함을 세세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점차 해체되고 국제화되는 사회에서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 도덕적 원칙에 호소했다.
〈맨스필드 공원 Mansfield Park〉(1814)·
〈에마 Emma〉(1815)·
〈설득 Persuasion〉(1817)에서
그녀의 이러한 기량이 가장 원숙하게 꽃피었다.
대화체의 대가였던 그녀는 극도로 절제된 문체로 글을 썼다.
사회의 본질에 대한 기초적인 논쟁은
월터 스콧 경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이야기체 역사 로맨스에서
시인으로서의 성공을 거둔 후
그는 산문으로 방향을 바꾸어 20권 이상의 소설을 썼다.
〈웨이벌리 Waverley〉(1814)·
〈묘지기 노인 Old Mortality〉(1816)·
〈미들로시언의 중앙부 The Heart of Midlothian〉(1818) 같은 최고 걸작에서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요소들을 모아
조국인 스코틀랜드의 과거를 재구성했다.
새로운 과학의 발견이 가져올지도 모를 끔찍한 결과를 탐색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1818)으로까지
고딕 양식이 발전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문학
화려한 업적을 남긴 문학사 가운데서도
엘리자베스 시대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는
가장 화려한 시대를 대변한다(튜더 왕가).
동시에 이 시기는
모든 면에서 영국 사회를 변모시킨 광범위한 분열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지적 혁명이 수반되어,
새로운 과학, 새 종교, 새로운 인본주의 앞에 중세적 통합은 붕괴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세기를 대변한 철학자는
실험의 꾸준한 축적을 통한 과학의 점진적 발전을 옹호한
프랜시스 베이컨이었고,
지식의 일반원칙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회의주의자
미셸 드 몽테뉴였다.
인본주의와 청교도주의는
무지몽매와 민간전통에 대해 반대했으나,
다행히 그 어느 쪽도 건강한 대중의 취향을 오래 외면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장르의 교배(交配) 작용이 계속 이루어져 많은 성과를 낳았다.
귀족풍 목가에 대중적 설화가 끼어들고,
서정시에는 발라드,
희극에는 로맨스,
비극에는 풍자,
시에는 산문이 섞이게 되었다.
언어 역시 급격한 팽창을 계속하여,
고급문학작품이 거리낌없이 구어표현을 빌려왔다.
여러 층의 청중을 대상으로 동시에 말을 걸 줄 알고,
상충하는 경험과 세계관을 한 곳에 연결지을 줄 알았던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은
문학작품에도 복합성과 힘을 부여했다.
영국의 시와 산문은
1570년대 후반에 갑작스럽게 꽃피기 시작했다.
우아함과 세련미를 과시하는 유려한 예술성 쪽으로 취향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에드먼드 스펜서와
스펜서의 〈요정여왕 The Faerie Queene〉(1590~1609)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표적인 시로,
형식은 중세의 우화시에다 이탈리아풍의 낭만적 서사시를 융합시킨 것이다.
스펜서는 원래 엘리자베스 여왕을 상징하는
요정의 여왕 글로리아나의 궁정에서 온 12명의 기사가
12개의 미덕을 찾아다니는 것을 12편으로 나누어 그리려고 구상했으나
실제로는 6편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글로리아나의 사랑을 추구하는 아서는
매편마다 나오며,
완벽한 인간인 '장엄'(magnificence)의 모범으로 나타난다.
여유롭게 서서히 진행되는 9행시련(詩聯)과 고아한 언어는
자주 뛰어나게 감각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1591년 발표된 시드니의 〈아스트로펠과 스텔라 Astrophel and Stella〉 역시
소네트(14행시) 연작형식을 크게 유행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시가 교만한 미녀와 실연당한 애인의 이야기를
재기발랄한 솜씨로 다룬 페트라르카풍의 재현인 데 비해,
1609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집은
그 전통을 뒤엎어놓은 듯 전혀 다른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네트와 서정시는
엘리자베스 시대 운문의 일부 전통을 나타낼 뿐이다.
이와는 달리 엘리자베스 시대 특유의 우아함을 외면한 형식으로
풍자시(satire)가 있다.
풍자시는
원래 한탄과 연관된 것이지만,
당대인들은 그 용어가 그리스의 사티로스(Satyros),
즉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잘못 해석해
형식과 내용을 합치시킨 나머지 욕설과 매도에 치중하는 시를 썼다.
풍자시 작가들은 '불평객'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유행시켰다.
이 시대에는 연극이 예술의 중심이었다.
연극은 대중의 생활 속에 침투해 있었고,
다른 어느 형식보다도 사회의 총체적 경험을 반영했다.
연극의 관람료가 싸서
극장 안마당은 서민들로 가득 찼지만,
오후에 그들에게 선보인 작품이
밤에는 궁중에서 다시 공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단순한 문제나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촉발시킬 수 있는 연극의 힘은
바로 편견과 공감을 아울러 표시하는 관객의 다양한 정신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의 연극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지닌 극적 에너지를 과시하는 화극(話劇:spoken drama)이었다.
그리고 무대는 경제적 보상을 약속하는 유일한 문학 장르였기 때문에
가장 실력있는 작가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1576년 런던에 전용극장이 생긴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그뒤 70년간 약 20개의 극장이 문을 연 것으로 전해진다(연극무대기술).
당시 런던의 극장은
인본주의와 서민취향이 맞닿는 곳이었다.
이들 전문극단은 궁정·대학·법학원 등에서 유행한 인본주의 극의 전통을 이어받는 한편,
지방을 순회하면서 민속놀이·민중오락·축제 등에 바탕을 둔
자신들의 뿌리와 단절되는 일이 없었다.
또다른 전통은 궁중 및 귀족의 향연과 가면극인데,
이것은 유럽 전역에 걸친 것이었으며 영국에서도 다양하게 보존되었다.
대학재사(University Wits)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이 별명은 그들의 사회적 자부심을 나타내주지만,
실제로 그들이 쓴 희곡은 주로 중산층을 겨냥한 애국적·낭만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들이 선호한 것은
역사 또는 의사(擬似) 역사적 소재에 어릿광대·음악·사랑이야기를 섞어놓은 것이었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작가는
크리스토퍼 말로로서,
그는 호언장담조의 통속적 양식 가운데 내재해 있는 비극적 잠재력을 살려낸 유일한 작가이다.
그가 그린 주인공들은 대단한 야심가로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고양된 무운시로 대사를 읊는다.
〈탬벌레인대왕 Tamburlaine the Great〉(1590)·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591경)에서
나약한 왕들이 내세우는 정통성을 묵살해버리는 정복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기존의 정치질서는 압살되고 만다.
〈몰타의 유대인 The Jew of Malta〉(1589경, 출판 1633)은
경제적 통찰력과 술수를 통해 얻은 권력을 절제없이 휘두르는 상인을 그리고 있다.
대표작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The Tragical History of Dr. Faustus〉(1593경, 출판 1604)은
뛰어난 학식과 무신론을 내세워 신까지도 위협한 한 인간의 파멸을 보여준다.
그의 극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묵살해버릴 수도 없는 딜레마를 느끼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의 분열된 의식을 명시해주는 것이다.
비슷한 효과는
토머스 키드의 〈스페인 비극 The Spanish Tragedy〉(1591경)에도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초기의 '복수비극'으로서,
주인공은 아들을 잃은데 대한 정당한 보복을 하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그것은 오직 법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야만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이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천재성을 간단하게 특징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작가로서의 포용력이 커서
어느 태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의 작품 어디에선가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는 이것을 비극 속에 어릿광대를 등장시키고
희극 속에 왕을 등장시킴으로써,
공(公)과 사(私)를 병치함으로써,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섞음으로써 달성할 수 있었다.
그의 취향이 갖는 확실성과 높은 인기에 힘입어
영국의 문예부흥을 이끌면서도
다양한 여러 측면 중 어느 하나를 특별히 부각시키거나 배척하지 않았다(르네상스).
그리고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극단의 공동소유주로서
모든 차원에서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에 관여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연극인으로서 활동한 기간(1589~1613)은
문학이 가장 화려하게 꽃핀 시기와 정확하게 같았으며,
문예부흥의 전체적인 가능성은 그의 작품 속에서만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극은 주로 역사극과 희극이다.
역사극은
그가 독자적으로 개척하여
리처드 2세에서 헨리 7세까지의 영국사 전체를
두 줄기의 4부작으로 극화해 큰 성공을 거둔 장르이다.
헨리 6세를 다룬 3편과
리처드 3세를 다룬 1편으로 구성된
첫 4부작(1589~92)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영국의 용맹에 대한 애국적 찬양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은 이내 정치세계에 관한 성숙된 인식과 환멸로 대체되고
결국 리처드 3세라는 흉칙한 인물의 묘사로 끝난다.
〈리처드 2세 Richard Ⅱ〉(1595)·
〈헨리 4세 Henry Ⅳ〉(제1·2부, 1596~98)·
〈헨리 5세 Henry Ⅴ〉(1599)로 구성된 2번째 4부작은
악하지만 정통성을 지닌 왕을 폐위시키는 데서 시작해
그 사건이 몰고온 결과를 2세대에 걸쳐 다루면서
그 과정에서 생겨난 왕권·복종·질서라는 어려운 문제를 가차없이 파헤치고 있다.
특히 〈헨리 4세〉는
폴스타프라는 덩치 큰 인물이 등장하며
그가 장바닥에서 보이는 난폭한 행동이 두드러진 극이나,
작가는 통치자들의 장면 사이사이에 통치받는 자들의 세계를 끼워넣어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국민생활을 만화경(萬華鏡)처럼 비춰주고 있다.
초기 희극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중 한 부류인 〈실수연발 The Comedy of Errors〉(1589~94경)·
〈말광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1590~94경)·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The Merry Wives of Windsor〉(1597~1601경)·〈
십이야(十二夜) Twelfth Night〉(1601) 등은
계략희극(計略喜劇)으로서
진행이 빠르고 때로는 소극적(笑劇的)이며 기지를 높이 평가한다.
〈베로나의 두 신사 The Two Gentlemen of Verona〉(1592~93경)·
〈사랑의 헛수고 Love's Labour's Lost〉(1595경)·
〈한여름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1595~96경)·
〈뜻대로 하세요 As you Like It〉(1599) 등이 속한 2번째 부류는
숲이나 공원 같은 자연으로의 여행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그곳에서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규제에서 풀려나
사회적 관습의 사슬을 벗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중 어느 한 작품도 삶의 건강을 부여하는 이 희극적인 공간에 침범해오는
인생무상의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희비극(喜悲劇)에 가까운 4편의 작품,
즉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1596~97경)·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1598~99)·
〈끝이 좋으면 다 좋아 All's Well That Ends Well〉(1602~03)·
〈법에는 법으로 Measure for Measure〉(1604) 등에서
축제는 정상적인 상태가 부과하는 규제·시간·사업·법률, 인간적 무관심, 배신·이기심 등과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1590년대에 유행한 낙관적 사회관의 퇴조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혼란과 모순이 최고로 잘 표현된 것은
그의 비극이다.
이 독보적인 작품들 속에서는
모든 가치, 위계질서, 형식 등이 시험대에 올라 결함을 드러내고,
사회 전체에 잠재해 있던 알력이 분출된다.
셰익스피어는
남편과 아내를, 어버이와 자식을, 개인과 사회를 맞서도록 하고,
왕에게서 왕관을 빼앗으며, 귀족과 거지를 동일시하고, 신들을 심문한다.
그는 최초의 실험비극인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Titus Andronicus〉(1592~94경)에서
대규모의 폭력을 다룸으로써,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595경)에서
사춘기 사랑의 희극과 낭만적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이미 비극에 대한 재래식 이해와 결별했다.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1599)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종래의 역사극을
세속적·연대적 비극으로 바꾸어,
사적인 판단착오가 몰고온 연이은 공공사건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인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 뒤 이어 나온 주요비극들은
각자 독자적인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햄릿 Hamlet〉(1600)은 복수비극,
〈오셀로 Othello〉(1603~04경)는 가정비극,
〈리어왕 King Lear〉(1605)은 사회비극,
〈맥베스 Macbeth〉(1606)는 정치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1607)는 영웅비극이다.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각 유형의 모범을 제시해준다.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이 속한 세계는
그들 주위에서 무너져가며
그것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그들의 존재를 합리화·정당화해주었던 체제의 부적합성을 드러낼 뿐이다.
문예부흥의 인본주의는
최대의 단일성과인 비극이 성립되는 순간에 구멍뚫린 것이나 다름없었다(제임스 1세 시대 문학).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은 극작가들은
대부분 현실적·풍자적·반(反)낭만적인 양태를 나타냈고,
그들의 희극과 비극은 도시와 궁정이라는 두 상징적 장소를 무대로 삼아
주로 부와 권력의 추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부 작가들은 힘차게 발전하는 상업도시에 대한 기대를 한껏 드러냈지만,
그 반면에 벤 존슨,
조지 채프먼,
존 마스턴,
토머스 미들턴 등은
당대의 근면성을 침략과 탐욕 및 무질서의 표징으로 보는 관점을 취했다.
풍자희극의 발전을 주도한 작가는
벤 존슨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친구이자 맞수로서,
훗날 현대 희극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장르의 원조이다.
그의 뛰어난 풍자극은 점차 대중희극적 요소를 수용하고
작품에 내재된 도덕적 판단을 외면화시키려 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볼포네 Volpone〉(1606)·
〈에피코이네 Epicoene〉(1609)·
〈연금술사 The Alchemist〉(1610)·
〈바솔로뮤의 장날 Bartholomew Fair〉(1614) 등의 작품에서
바보와 악당들은 끝도 없이 무모한 행동에 탐닉하면서
관객의 비판과 찬양을 동시에 강요한다.
도시희극에서 존슨의 뒤를 따른 작가인
프랜시스 보몬트,
존 마스턴,
토머스 미들턴 가운데
존슨과 비슷한 사회적 관심을 지녔던 사람은 미들턴뿐이다.
그의 대표적 극 형식은 계략희극이지만,
〈여자는 여자 조심 Women Beware Women〉(1612경)·
〈교환 The Changeling〉(1622) 같은 비극 역시 사회적 관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고전적 국사(國事) 비극을 쓴 작가로는
음울한 이탈리아 궁정을 무대로 계략·음모·염탐꾼·불평분자·밀고자 등을 등장시킨
존 웹스터가 있다.
그의 〈흰 악마 White Devil〉(1612)는
분열되고 모호한 극으로,
사악한 여주인공마저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부패가 극에 달한 사회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몰피의 공작부인 The Duchess of Malfi〉(1623)의 여주인공은
그녀가 사는 세계 속에서 품위와 용기를 잃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녀의 고귀한 죽음조차도 뒤따라 일어난 아무 쓸모도 없는 우발적인 대학살을 막을 수 없다.
제임스 왕조시대의 연극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남성이 지배하는 권력의 세계에 대한 도전은 여성의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1640년대의 정치적 붕괴와 그 직전부터 점차 증가된 사회적·문화적 일탈현상으로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는 어떤 합일점도 찾아보기 어렵다.
고급문학과 저급문학 간의 괴리가 점차 심해짐에 따라
엘리자베스 시대의 작품들이 지녔던 강렬함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를 미덕을 권장하는 설득자로 보았던 옛 생각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었고,
특히 합리적으로 균형잡힌 2행연구(聯句)의 시와 자서전 및 소설 등이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대두된 것이 이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시에서는 존 던이
형이상학파라고 알려진 전통을 대변한다.
그는 16세기의 핵심 전통인 평이한 시 전통의 정점에 있었다.
그의 언어는 항상 극적이며,
운문은 '강렬한 시행'·불협화음·일상회화체를 사용하고 있다.
존 던은 최초의 런던 출신 시인이라고 할 만하다.
초기 풍자시와 애가들은 바쁜 대도시의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으며,
최고 걸작이라 여겨지는 연가나 소네트는 상호모순되는 태도·역설·우발성 등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어 도시생활의 근대적인 모습을 실감나게 한다.
그는 전통적인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거부하여,
정신적·종교적 맥락으로만 사용되던 언어로 애인을 열렬히 찬양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존 던은 마지못해 교회 직분을 가짐으로써 사회적 명망을 얻었겠지만,
그의 종교시조차 세속시와 마찬가지로 자기확신과 자기비하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존 던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의 추종자 중 가장 흥미있는 사람들은
조지 허버트, 리처드 크래쇼, 헨리 본 등의 종교시인들이다.
실제로 경건한 신앙심을 지녔으며
부유한 집안 출신인 조지 허버트는
존 던의 고통스런 자아를 대신해서
자비롭고 명상에 잠긴 확고한 신념을 표현했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리처드 크래쇼는
찬양시를 통해
대륙의 바로크 문학이 지닌 감각적 환희와 풍요로움을 소개했다.
헨리 본의 시는
심원한 자연주의와 신비스런 황홀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던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는 앤드루 마블이다.
마블의 뛰어난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고 긴장감이 있으며
표현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궁정시풍의 서정적인 우아함과 청교도적인 언어의 절제가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벤 존슨의 전통을 따른 것은 사회적 성격의 시였다.
이 부류의 시는 고전의 명증성과 무게를 지닌 동시에
교양있는 분별력, 격식에 대한 존중, 내면적인 자족감이라는 이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즉 그것은 일반대중이 공유한 가치관과 규범을 표현한 시였다.
존슨에게 있어서 평이한 문체란 노력과 절제 및 통제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를 계승한 로버트 헤릭, 토머스 커루, 존 서클링 경, 리처드 러블레이스 등의
궁정시인들은 세련됨과 환락이라는 요소를 더욱 부각시키는 경향을 보였다(왕당파시인).
18세기 영국문학
언론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사라지고
보통선거의 기회가 크게 늘어나자
정치적 성향의 언론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초기 작가들로서 대단한 기량을 지닌 글을 정기적으로 발표한 두 사람은
다니엘 디포와
조너선 스위프트이다.
그들의 논쟁기술은
〈태틀러 The Tatler〉(1709~11)·
〈스펙테이터 The Spectator〉(1711~12)지에서 활동한
이 분야의 혁신적인 작가였다.
그들은 친숙하고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문체로
정치에서 유행, 대학에서 상업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왕정복고기의 도덕적 방종을 겪은 뒤 예법을 순화하고자 한 사람들과 동조하여,
이들은 사회·가족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개선시키려는 취지에서 폭넓게 글을 썼다.
당시의 또다른 주요 정치작가는
알렉산더 포프였는데,
그는 의사서사시체의 〈머리카락의 겁탈 The Rape of the Lock〉(1714)·
〈인간론 Essay on Man〉(1733~34)·
〈도덕론 Moral Essays〉(1731~35)·
〈우인열전 The Dunciad〉(1743) 등으로 유명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가장 뛰어난 산문 풍자작가로,
그의 작품 중 가장 광범위한 풍자서는
역시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 Gul- liver's Travels〉(1726)이다.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미묘한 역설적 기법은
독자로 하여금 이제는 더이상 예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인간의 본성을 찬양할 수 없게 만든다.
사회와 인간성에 대한 이같은 논란은 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형식의 성립을 수반했다.
탁월한 초기 소설가 중 한 사람인 디포는
여러 방면에 대한 열의를 소설 속에 끌어들였다.
그러한 소설 가운데 첫 작품인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1719)는
청교도적인 정신의 연대기적 전통,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색,
독자적으로 현대의 신화를 고안해내는 남다른 능력 등이 독특하게 결합된 허구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부응한 다음 작가는
리처드슨이었다.
〈파멜라 Pamela:or, Virtue Rewarded〉(1740)는
리처드슨의 소설이 그러하듯
서간체를 사용하여, 주인이 젊은 하녀를 유혹하려고 하는 바람에
하녀가 고통을 겪게 되나
결국 회개한 주인과 정숙한 결혼을 함으로써 보상 받는다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의도적으로 준엄한 도덕적 입장을 강조한 까닭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리처드슨의 걸작 〈클라리사 Clarissa:or, the History of a Young Lady〉(1747~48)는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영국소설 전통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여운있는 비극 작품으로 꼽힌다.
〈클라리사〉는
복수화자를 등장시켜 상반되는 주장들간의 암시적인 상호작용을 보여준다(심리소설).
헨리 필딩은
극작가로서 성공한 후 소설 쓰기에 전념했다.
〈샤멜라 An Apology for the Life of Mrs. Shamela Andrews〉(1741)는
리처드슨의 〈파멜라〉를 희화한 것으로,
〈파멜라〉에서와는 달리 남자의 재산을 노리는 위험한 인물로 변모한 여주인공이
냉혹하게 주인을 유혹해 자신과 결혼하도록 만든다.
〈조지프 앤드루스의 모험 The History of the Adventures of Joseph Andrews〉(1742)·
〈톰 존스 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1749)에서
필딩은 서사시·그림·극 등 전통적으로 좀더 인정받는 양식에서 사용되던 기법들을
노골적으로 소설에 적용시켰다.
토비어스 스몰릿의 소설들은 형식상으로는 고르지 않지만,
모두 진정한 힘과 개성을 드러내는 긴 문장들을 담고 있다.
주제가 해상전투이건 온천에 모인 노약자들이건 그는 당대 현실에 대한 뛰어난 보고자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들로는
〈로더릭 랜덤의 모험 The Adventures of Roderick Random〉(1748)·
〈페러그린 피클의 모험 The Adventures of Peregrine Pickle〉(1751)·
〈험프리 클링커의 탐험 The Expedition of Humphry Clinker〉(1771) 등이 있다.
급진적이고 독창적인 실험은
로런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섄디 Tristram Shandy〉(1759~67)로서,
이 책은 현재까지의 영국 소설발전에 대한 뛰어난 희극적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그속에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거나 신화화한 인물들이 가득 차 있다.
스턴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지나가는 감상여행
Sentimental Journey Through France and Italy〉(1768)
역시 여행기에 대한 상투적인 생각을 거부한 점에서 이와 비슷하다.
포프 이후 18세기의 시단에
토머스 그레이나 크리스토퍼 스마트 같은 주목할 만한 시인이 몇 명 등장했다.
1780년대에 로버트 번스의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1786)이 출판되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스코틀랜드 어휘와 발라드 양식도 시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음이
효과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밖의 중요한 시인들로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새뮤얼 존슨이 있다.
존슨은
뛰어난 시인이긴 하나 주로 산문에 정력을 쏟아부었으며,
일찍부터 런던에서 문필을 생업으로 삼았다.
1주일에 2번씩 〈램블러 The Rambler〉(1750~52)지에 기고한 논설은
문학이나 도덕의 문제들을 인상적인 방식으로 다룬 글로서,
절정에 이른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분석력은 2가지 업적, 즉 혁신적인
〈영어사전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1755)과
셰익스피어 희곡집(1765)에서 입증되고 있다.
제임스 보즈웰의 권위있는 〈존슨 전기 Life of Samuel Johnson〉(1791)는
그 주인공의 윤리적 성실성이나 풍부한 지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더불어,
그의 사사로운 습관과 태도를 세세히 전달하면서
항상 찬사만 늘어놓지 않는 객관적인 관점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다.
현대의 영국문학
에드워드 시대의 많은 작가들은
새로운 세기에서 그들의 임무란 단호하게 교훈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1903 출판, 1905 공연)이나
〈소령 바버라 Major Barbara〉(1905 공연, 1907 출판)를 비롯한
일련의 재기발랄한 우상파괴적 희극을 통해
조지 버나드 쇼는 극장을 당대의 주요한 관심사,
즉 정치조직의 문제, 무장과 전쟁의 도덕성, 계급과 직업의 기능,
가족과 결혼의 타당성, 여성해방의 문제 등을 다루는 토론장으로 만들었다.
H.G. 웰스, 아널드 베넷, 존 골즈워디, E.M. 포스터 같은 많은 에드워드 시대 소설가들도
영국 사회생활의 결점들을 열심히 탐색했다.
이전 세기에 명성을 누렸던
토머스 하디와 러드야드 키플링 및 힐레어 벨록, G.K. 체스터턴, 에드워드 토머스 등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까닭에 발라드, 이야기체 시, 풍자, 공상, 지형설명풍의 시,
수필 같은 전통양식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월터 드 라 메어, 존 메이스필드, 로버트 그레이브스, 에드먼드 블런든 등은
20세기 전반부 영국 문학에서 중요하면서도 종종 무시당한 흐름을 대변한다.
당대의 가장 중요한 글들은
전통적이든, 근대적이든, 희망이나 염려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기가 문명 전체를 붕괴시키리라는 다소 어두운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보어 전쟁에 대한 시에서
하디는
단순하면서도 냉소적으로 제국건설을 위해
인간이 치러야 하는 희생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많은 영국 시인들이 이 세기 동안 사용하게 된 어조와 문체를 확립했다.
쇠퇴하는 제국문명의 의미를 가장 충실하고
예리하게 포착한 사람은 미국의 망명작가 헨리 제임스였다.
그는 영국 상류층이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세기말에 이르러 그는 혼란스러운 변화를 주목했다.
대영제국은
구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언제나 추악한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제임스의 낙담은
〈비둘기의 날개 The Wings of the Dove〉(1902)·
〈사자(使者)들 The Ambassadors〉(1903)·
〈황금의 잔 The Golden Bowl〉(1904) 같은 후기 작품에서
어두운 환멸의 분위기로 나타났다.
또다른 망명작가인
조지프 콘래드는
제임스의 위기감을 공유했으나,
그것을 특정한 문명의 쇠퇴라기보다는
인간성 자체의 타락에 기인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고독하고 낭만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 세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세상에 그의 의미를 강요하려고 한다.
〈올메이어의 우행 Almayer's Folly〉(1895)·
〈로드 짐 Lord Jim〉(1900)에서
그는 이러한 곤경에 공감을 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둠의 한가운데 Heart of Darkness〉(1902)·
〈노스트로모 Nostromo〉(1904)·
〈비밀요원 The Secret Agent〉(1907)·
〈서구인의 눈으로 Under Western Eyes〉(1911)에서는
이러한 공감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1908~14년에 소설가와 시인들은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문학 관습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정신분석 등의 새 사상에 의해 자극받은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정신인 모더니즘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것은 이미지스트라 불리운 영·미 시인들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가가
T. E. 흄,
F. S. 플린트,
리처드 올딩턴 등의 영국 시인들과
힐다 둘리틀(H. D.),
에이미 로웰 등의 미국시인들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언어를 정확한 묘사와 분위기 조성의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시어를 다듬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자유시나 비정형시를 실험했고,
이미지를 주요수단으로 만들었으며,
간결하고 절제된 형식을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더니즘 혁명의 초기에 종지부를 찍었고,
영·미 모더니스트들은 이상과 혼란스런 현실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깨닫게 되었다.
2권의 가장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 H.로렌스는
현대문명의 병리현상이
인간정신에 가해진 산업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노동계층의 가족생활을 다룬 자전적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대단히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소설 전통의 관습을 거부하고,
강렬한 인간관계와 열정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전개하기 위해
신화와 상징에 의존했다.
한편, 런던에 거주한 또다른 미국 시인이며 극작가 T. S. 엘리엇은
그의 가장 혁신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
〈황무지 The Waste Land〉(1922)를 통해
현대문명의 질병은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와 박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시 전통의 관습을 무시했기 때문에
엘리엇도 로렌스처럼
개인적·집단적 재생의 희망을 전개하기 위해 신화와 상징에 의존했으나,
재생이란 자기부정과 자기부인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분명히 구별된다.
로렌스와 엘리엇은
전후시대에 영국에서 영·미 모더니즘을 이끈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시인·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아일랜드 소설가인 제임스 조이스 역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젊었을 때 낭만주의와 라파엘 전파 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예이츠는
초기 시와 극에서 자주 애매하고 과장된 언어로
아일랜드의 전설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환기시켰다.
그의 원숙한 명상시가 지닌 위엄은
대체로 그가 이상화된 아일랜드를 허상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량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문체는
정열과 정확성을 띠면서 동시에 강력한 상징, 힘찬 리듬, 명료한 어법을 보여준다.
뛰어난 단편모음집
〈더블린 사람들 Dubliners〉(1914)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1916)에서
조이스는 성(性)과 상상력이 억압된 아일랜드 생활 속에서
개인이 치러야 하는 희생을 묘사하고 있다.
〈율리시스 Ulysses〉(1922)는
도시생활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 소설로
성의 묘사가 솔직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좀더 전통적인 작가들,
특히 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사실적이면서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루퍼트 브룩은
전쟁 초기의 이상주의를 그려낸 뒤 전사했다.
시그프리드 서순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점점 높아가는 분노와 소모감을 포착했다.
참호 속의 전우애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좀더 커다란 도덕적 혼돈까지도 표현했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문단을 지배한 분위기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에서 볼 수 있듯이
냉소적이면서도 혼란된 것이었다.
그러나 헉슬리의 염세적인 관점은
1930년대에 그의 가장 유명하고 독창적인 소설이며
반(反)유토피아 공상물인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와
당대 중산층 지식인의 불안을 묘사한 〈가자에서 눈이 멀어 Eyeless in Gaza〉(1936)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다.
〈인도로 가는 길 A Passage to India〉(1924)에서
E.M. 포스터는
영국 통치하의 인도에서 다양한 인종적·사회적 집단이
서로 인간적 이해를 추구하다가 겪게 되는 좌절을 다루고 있다.
좀더 젊고 현대적인 작가들은
블룸즈버리 그룹의 구성원들이었다.
영국 상류층에 속했던 그들 부모 세대의 특징인 위선과 사기에 대항하여,
그들은 사생활이나 예술생활에서 시종일관 솔직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태도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심오하면서도 감동적인 결실을 맺었다.
대단히 섬세하고 서정적인 매력으로 가득 찬 장편·단편 소설에서
그녀는 시간 속에 묶여 있는 자아의 한계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또다른 자아나 어떤 장소 또는 예술작품에 몰두하면 이 한계는
〈댈러웨이 부인 Mrs. Dalloway〉(1925)에 큰 영향을 미친 조이스와 더불어
울프는
소설에서 주관성·시간·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을 변모시켰으며,
전통적인 소설양식은 더이상 적절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느낌을 작가들 사이에 확산시켰다.
1930년대의 많은 글들은 황량하고 염세적인 느낌을 준다.
W.H. 오든과
그의 옥스퍼드대학교 동기인 C. 데이 루이스,
루이스 맥니스,
스티븐 스펜더의 시가
새로운 세대의 진정한 주장으로 곧 인정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시가 절망과 저항감을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개인적 성향이 어떠했든간에,
이 시인들은 모두 시에서 어조와 분위기의 급격한 변화,
일상적인 것과 신비한 것의 기이한 병치,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진지함과 고상한 정신의 혼합을 보여 주었다.
1914년에 그랬던 것처럼 1939년에도
전쟁이 이 위대한 지성적·창조적 탐닉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시기의 걸작은
T.S.엘리엇의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1935~42)로서,
그는 언어·시간·역사에 관한 명상을 통해
폐허의 와중에서 도덕적·종교적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많은 작가들은 전통적인 가치를 갈구했고,
조지 오웰을 비롯한 작가들은
그 당시의 문명을 탐구했다.
오웰의 〈동물농장 Animal Farm〉(1945)은
파시즘에 대한 승리가
어떤 면에서는 전체주의의 확산에 무의식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쓰디쓴 진실을 다루고 있는 반면,
〈1984년 Nineteen Eighty-four〉(1949)은
개인의 권리를 잠식하는 집단주의가
개인에게 미치는 위험을 경고했으며,
한편 엘리엇은
시를 포기하고 희곡과 비평에 전념했다.
엘리엇의 작품활동이 뜸한 가운데 절정기에 이른 오든과
그레이브스가 전후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다.
부분적으로는 전쟁과 관련된 이유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신화가 상당히 중시되고
시에 묵시적·신낭만주의적·수사적 분위기가 발전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표현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는
딜런 토머스와
여류시인 에디스 싯웰,
데이비드 개스코인과 조지 바커가 있다.
이블린 워는
전쟁에 대해서 아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의 소설 〈다시 가본 브라이즈헤드 Brideshead Revisited〉(1945)는
인간사에서 작용하는 신의 은총을 탐구해보려는 시도였다.
워 세대의 다른 소설가로 전후에 그와 비슷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앤소니 파웰이다.
파웰의 뛰어난 재능은
12권의 연작소설 〈시간의 음악에 맞춰 춤을 A Dance to the Music of Time〉(1951~75)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파웰과 워는 당대의 가장 탁월한 문장가였다.
킹즐리 에이미스는
존 웨인, 존 브레인, 앨런 실리토 등
1950년대에 나타난 우상파괴적 소설가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럭키 짐 Lucky Jim〉(1953)은
에이미스 특유의 악의 어린 희극적 관점과
당대의 언어 변화에 대한 남다른 감각에서 나온 작품이다.
에이미스의 중요한 동료로는
이 두 사람은 에이미스처럼 자유주의적·인본적 전통에 속해 있다.
인물중심의 소설과 현대 소설이론의 긴박한 요구를 서로 조화시키는 것이 극히 중요해졌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영국 소설이 삶과의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예술로서의 활력을 갱신시킬 수 있었다.
당대의 반가운 현상은
신예 작가들과 수많은 원로 소설가들 간의 적극적인 상호 교류였다.
1960년대 이후 우수한 소설가들은
형식의 문제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그들은 이러한 관심을 자유주의적 소설에 접목시켜 힘과 다양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예로는
윌리엄 골딩, 앤소니 버제스, 도리스 레싱, 뮤리얼 스파크, V. S. 나이파울을 들 수 있다.
20세기 중반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국 시인 중 한 사람은
필립 라킨이다.
라킨은
마음속에 미묘하고 개인적인 인상들을 채색시키기 위한 단어와 운율을 사용했다.
그는 통제와 조직화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일상성과 단조로움, 고통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할 수 있었다.
테드 휴스의 작품 역시 중요한데,
그의 작품은 통제된 폭력, 동물적인 본능을 가진 내면성,
인간성의 다듬어지지 않은 측면에 대한 강렬한 탐색 등이 특징이다.
아일랜드 시인 시머스 히니는
1970년대에 등장해,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있는 시인으로 떠올랐다.
전후에 진정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곳은 연극 부문이었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ack in Anger〉(1957)에서
존 오즈번은
잘 다듬어진 희곡의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 생활의 강압과 흥분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극작가
새뮤얼 베케트가
처음 사용한 혁명적 방법은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1954)는
장식 없는 무대,
나무 한 그루,
조명만으로 이루어진 극히 간단한 소품과
극도로 절제된 대사만으로도 인간 정신의 내면적이고 잠재적인 활동을 극화함으로써
관객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케트는 예술의 유혹적인 환상을 거부하고,
그대신 가장 단순하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핵심을 추구했다.
해럴드 핀터는
〈생일 파티 The Birthday Party〉(1958)·
〈관리인 The Caretaker〉(1960)·
〈귀향 The Homecoming〉(1965) 등에서
베케트로부터 모든 것을 해소시킨 극을 쓰는 기법을 배워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좀더 인습적인 극작가들이 인생의 모호하고 불가해한 측면을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반면,
핀터는 모든 이들이 경험하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적 권력투쟁과 정신적인 위기를 꾸밈 없이 제시함으로써
또다른 유형의 극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 오턴의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희극과
톰 스토파드의
양식적이고 기교가 뛰어난 극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