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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소몰이 소년
2화 회색 도시
3화 달님의 슬픔
4화 고향의 설음
5화 루즈-내츄럴 캔디
6화 낯선 만남-하나 그리고 열하나
7화 그녀, 또 다른 그녀
8화 그녀의 향기, 그녀의 아픔
9화 아아, 달님
10화 벼랑의 끝자락
11화 어머니의 끝섬
12화 작은 장구벌레의 우화(羽化)
13화 아담과 이브, 만개하다
14화 꽃잎 떨어지다
끝섬(EDGE ISLAND)
<7화>그녀, 또 다른 그녀
회사가 경기도 외곽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갑자기 전해졌다. 직원들은 술렁거렸다. 각자의 거취에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비교적 출퇴근이 먼 거리였다. 나는 경리인 미스 노를 볼 면목도 없어 때마침 핑계 삼아 사표를 제출했다. 다음 직장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표는 모험이었지만, 당분간 푹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했다. 또 하나 직장을 다니기 민망한 사건이 생겼다. 술자리에서 직원 하나가 띠가 뭐냐고 갑자기 물었는데, 제대로 답하지 못해 나이를 속인 것이 들통 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리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나는 아쉬운 나머지 염치없게 은애를 찾아갔다. 은애라면 이런 복잡한 상황을 누구보다 진솔하게 들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나를 보자 얼마 전 입사한 신입 도안사가 의외로 반색을 하며 반겼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그는 처치가 비슷해서 그런지 나에게 남다른 관심과 친절을 보였다. 나와 동질감을 느껴 친하게 지내려는 의중이 다분히 느껴졌다. 직원들과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사무실 곳곳을 기웃거리며 은애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은애는 보이지 않았다.
“은애 씨는?”
“지금 피신해 있어요!”
“피신이라뇨?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얘기하면 복잡합니다. 소설 같은 얘기거든요.”
은애의 소설 같은 이야기도 금시초문이지만 피신이라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마음이 정직하고 착한 은애에게 피신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뭔가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음이 틀림없었다.
“사무실 뒤에 귀빈다방 아시죠? 거기 한번 내려가 보세요.”
신입 도안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급히 귀빈다방으로 갔다. 귀빈다방은 휘문인쇄소 직원들 모두의 단골 미팅 장소일 뿐만 아니라 아쉬울 때마다 은애와 차를 마시던 곳이다. 다방으로 들어서자 다방 안 귀퉁이 탁자에 숨은 듯 은애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잔뜩 짜증이 붙어있었고 다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이 황당하여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대답 대신 의자에 앉으라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얘기하면 길어요!”
은애가 한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잘 왔어요. 바쁘지 않으면 오늘 잠깐 내 옆에 있어줘요.”
그녀는 보디가드를 원했다. 나는 평소와 달리 맞은편이 아닌 그녀의 옆자리에 보호자처럼 앉았다. 이윽고 은애는 영화 같은 소설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5년 동안 날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어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장내야 한다며 무작정 기다리나봐.”
“갑자기 무슨 얘기예요? 애인 없지 않았어요?”
내가 놀라서 물었다. 은애의 남자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평소에 눈치 챌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도 5년씩이나 쫓아다닌 남자가 있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5년이라면 내가 그녀의 도움으로 휘문인쇄소에 취직하기 전으로 그때부터 은애는 이미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비밀 때문에 나와는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은 사무실로 쳐들어온다고 해서 피신해 왔어요. 계속 일방적이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럼 큰일 아니에요?”
“뭐에 쫓기는지 이제는 막무가내로 청혼까지 해서 미치겠어. 정말!”
그녀가 투덜댔다. 청혼을 했다는 것과 은애의 반응으로 보아 그 남자는 거의 사생결단을 낼 각오인 듯했다. 은애는 오랜 세월 비밀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그만큼 그 남자와의 관계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것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은애의 모습과는 또 다른 일면이었다.
은애는 그 남자와의 5년 내력을 푸념하듯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은애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미 지주와 머슴으로 맺어진 주종 관계의 후손이었다. 은애 할아버지가 부농의 지주였을 때 머슴들 중 그 남자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대대적인 토지정리가 들어갔을 때 머슴들은 할아버지로부터 경작하던 토지의 일부를 나누어 받았다. 지주와 머슴의 관계는 무너졌고 머슴들은 인근 마을에 흩어져 가족을 구성하고 살았다.
그때부터 은애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 대에 이르자 형편없이 빈곤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살던 곳이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지목되어 일본군에 의해 온 마을이 모조리 불태워졌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그나마 남은 임야나 토지는 장남이었던 어린 아버지를 속인 동네 친일파가 날치기해 갔다. 당시 정 판사라는 사람을 대동한 마름이 채 4살도 되지 않은 아버지의 인장을 강제로 찍어갔다. 눈 뜨고 재산을 탈취당한 것이었지만 나이 어린 아버지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땅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장손이었지만 형편없이 몰락한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작은 할아버지에게 양자를 갔다.
그곳에서 가문의 장남으로 성장한 은애 아버지는 열아홉에 보국대로 끌려가 다리를 놓는 현장에서 지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교각을 세우는 밑바닥에 배치되어 둑 터진 물에 휩쓸리기도 하고, 위에서 떨어진 장비에 머리를 맞는 등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렵게 보국대를 탈출한 아버지는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살았지만 곧 창씨개명과 함께 일본군으로 다시 강제징용 되었다. 제주도에 끌려간 아버지는 종전이 임박하던 해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다리를 잃었다. 일본 패망 후 함께 징용되었던 고향 사람 유골 두 구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정신적 충격 탓인지 술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집안에 아들이 여럿 있으면 암묵적으로 하나씩 나누어 우익과 좌익에 내주어야 하는 뼈아픈 현실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작은할아버지의 장남이며 호적상 아버지의 동생을 남로당에 입당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한국전쟁 후 작은아버지의 남로당 경력으로 온 집안은 곤욕을 겪어야 했다. 휴전 후 마을 청년들은 아버지를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청년들은 작은아버지를 숨긴 곳을 말하라며 윽박질렀고 아버지는 수없이 뭇매를 맞았다. 아버지는 3일을 감금당했고 3일을 맞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작은아버지의 전쟁 중 행방불명이 밝혀지고, 아버지의 보국대 차출과 강제징용도 인정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뭇매의 핵심에 그 남자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 남자의 아버지가 은애 아버지를 끌고 간 마을 청년 부장이었던 것이다.
은애 아버지는 끝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미 상당히 버려진 몸이었지만 단 하루도 끊을 수 없는 술로 인해 몸은 점점 형편없이 망가져갔다. 술집에 널브러져 지내는 날이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하천에 쓰러진 채 발견되어 리어카에 실려 오기도 하고, 무턱대고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끌어내기도 했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 잘하는 동생들이 뜻을 펼쳐 보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에게 조사를 당하기까지 했다. 경찰이 종종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행방불명된 작은아버지가 혹시 북쪽에 살아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진위를 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도대체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은애가 네 살 되던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은애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은애를 사랑한다는 그 남자와는 지주와 머슴의 관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가해자의 아들이 피해자의 딸인 은애에게 반해 5년 넘도록 끈질기게 구애를 해왔지만. 은애의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모르는 아픈 구석이 많았구나 생각되었다. 하지만 너무도 궁금해서 힘주어 물었다.
“그런데 은애 씨는 그 남자가 싫지는 않으세요?”
“사람은 그렇게까지 밉지 않아요. 착하거든…….”
“그럼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군요!”
“꼭 그런 건 아니고……. 다른 건 몰라도 근본이 착하다는 얘기지.”
은애는 그 남자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지주의 후손이 머슴의 후손에게, 그것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시집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라고 했다. 아직도 그 당시의 장본인들이 살아 있는 마당에 그것은 추호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결혼이란 당사자만이 결정해서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 간의 결합을 의미하므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자 한편으로는 죄 없는 그 남자가 불쌍하기도 하고, 조금은 이해가 되어 용서가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어요. 그 사람 아버지 말고 또 다른 머슴의 딸이 그 남자 형하고 결혼했어요. 내가 그 남자와 결혼하면 그 머슴 딸의 아랫동서가 되는 거예요. 나보다 나이도 어린 여자인데……. 참 기막힌 관계도 다 있죠?”
은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뒤틀린 관계를 줄줄이 설명했다.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저돌적인 남자도 남자지만, 5년 넘게 그 남자를 뿌리치고 거절해온 은애도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죽기 살기로 사랑한다는 남자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일이라는 묘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얘기는 소설이나 영화에만 있는 줄 알았지 나한테 닥치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에요. 오늘은 결판내야 한다고 저 난리이니 어쩌면 좋아?”
은애는 정말 좌불안석이었다.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어머니는 뭐래요?”
“어림없는 소리예요. 청천벽력 같은 일이라서 말도 못 꺼내게 해요.”
“어머니도 아시는 얘기인가 보죠?”
“그 남자가 열 번도 더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며 울고 그랬어요. 아마도 삼촌들한테는 몰매 맞을지도 몰라요.”
“그 남자, 은애 씨를 사랑하긴 엄청 사랑하는가 보군요.”
“모르긴 해도 결혼 안 해주면 죽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든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공무원.”
그녀에게 또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쩔 셈이에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이미 그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꼬인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 잘못도, 그 남자의 아버지 잘못도 아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러 세대가 지난 작금에 이르러 모두가 피해자가 되었다. 그것부터가 정녕 정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신입 도안사가 급하게 다방으로 내려와 은애를 찾았다.
“누나, 사무실로 빨리 올라가 보세요!”
“왜,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놀란 토끼눈으로 물었다.
“그 남자, 지금 사무실에 와 있어요. 오늘은 꼭 누나를 보고 가야 한다며 꼼짝도 안 해요!”
“행패 부리는 건 아니고…….”
“행패는 무슨……. 원래 착한 사람이잖아요.”
“알았어! 금방 올라갈게.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모르는 사이 은애의 소설 같은 얘기는 사무실에서 공공연한 이야깃거리로 오르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5년이란 세월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혼자만 걱정해 오다가 근래에 노출된 것을 보면 어쩌면 은애도 그 남자에 대한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치겠어 정말! 오늘은 결판을 내야지 도저히 창피해서 안 되겠어!”
은애는 중얼거리며 핸드백을 주섬주섬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방을 나갔다. 다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꽤나 당당해 보였다.
은애를 만나 한심한 내 현실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으려 했으나 입도 벙긋 못하고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쓸쓸해졌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 남자와 잘 매듭지어 은애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다방을 나온 나는 땅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무기력감에 휩싸였다. 당분간 은애에게 내 문제를 의논할 여지가 없다는 게 불안하고 맥이 풀렸다. 서울이라는 이 넓은 공간에서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직기간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수렁으로 처박힐 위기에 처한 현실이 처량 맞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두워지는 검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온통 짙은 어둠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은 곧 내 미래와도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질주하는 차들의 엔진소리가, 오가는 행인들의 구둣발 소리가, 아련히 바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밀려오던 파도 소리가 조용해지고 뒤로 넘어지며 다시 바다로 밀려가고……. 하얀 모래톱이 쓸려 덮여가고 또 덮여가고……. 그 끝섬에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이제는 얼굴조차도 희미한 잔영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어머니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때 갑자기 어깨를 노크하듯이 톡톡 치며 낯익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머, 여긴 어쩐 일이세요?”
놀라서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색을 하며 서 있는 정숙희의 눈웃음이 두 눈에 확 들어와 박혔다. 나는 울적하던 차에 그녀의 등장이 반가웠다. 하지만 겸연쩍은 웃음으로 대꾸했다.
“나야 그냥……. 그런 숙희 씨는 어디 가는 길이에요?”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어쨌든 이렇게 만났는데 차나 한잔 하죠?”
좁은 인쇄타운에서 은애든 숙희든 우연히 만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숙희는 약속 없이 길에서 나를 만난 것은 대단한 사건이라는 듯 흥분하는 분위기였다.
“친구 만나러 간다면서.”
“친구한테는 늦는다고 전화하면 돼요! 커피보다 차라리 저녁을 먹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먼저 팔을 잡아끌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너무 갑작스런 상황이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잡아끌었고 나는 공연히 버티었다. 그러자 그녀가 옆에 있는 돼지갈비 집으로 일방적으로 떠밀며 나를 밀어 넣었다.
내가 먼저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사이 숙희는 노란 공중전화 앞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스듬히 기대어 전화를 하고 있는 그녀의 뒤태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눈을 어지럽혔다. 살집 있는 여자에게 늘 시선이 가던 나의 눈에 그녀의 뒷모습은 눈길을 오래 머물도록 만들었다.
“이제 됐어요. 간단한 모임이라 친구한테 못 간다고 했어요. 저녁도 안 했죠? 아예 술도 한 잔 해요.”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를 시켰다.
“참 이상해요. 팔백만 서울 시민 중에 어떻게 길에서 이렇게 만날 수가 있죠? 서로 한 발짝만 어긋나도 힘들 텐데 말이에요. 그런데 회사 그만 두고 어디 있었어요?”
“회사 그만둔 건 어떻게…….”
“허 화백님한테 들었어요. 오늘 전화했더니 벌써 그만 두었다고 하더라고요. 난 은근히 걱정했는데, 무심하게 연락도 없어요?”
숙희가 살짝 눈을 흘기었다. 그녀는 허 화백을 통해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늘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우울했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
그동안 미스 노의 사촌과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 숙희와는 의례적 행사인 양 세 번의 만남밖에 갖지 않았었다. 숙희에게 숨겨왔던 순간들을 떠올리자 더없이 미안해졌다. 숙희에게 꼭 숨기려고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야기를 꺼내 숙희에게 부담을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변명하는 것이 더 어처구니없는 꼴이 될 것만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술이 준비되고 돼지갈비가 불판에 올려졌다.
“먼저 한 잔 받으세요.”
나는 최소한 그녀의 상기된 분위기 정도는 맞춰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따라준 술잔을 가뿐하게 비웠다. 빈속을 훑고 내려가는 시원한 소주의 감촉이 금방 배 속까지 전해졌다. 전과 다르게 술맛이 달게 느껴졌다.
“노수 씨 고향이 충주랬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그 정도는 다 아는 수가 있어요. 나는 전라도 광주에서 자랐어요.”
숙희는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갈 요량인지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검은 스타킹 사이에 통통하고 뽀얀 살이 탐스럽게 숨어있었다. 나는 애써 그녀의 다리를 외면하는 척했다. 오늘따라 자꾸만 눈이 가는 그녀의 구석구석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숙희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성장 과정을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숙희는 어머니가 늘 앓고 있어서 어린 나이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어머니가 누워 지내게 된 건 장마철 산사태 때문이었다. 잠시 친정에 들렀던 어머니는 산사태를 만나 진흙더미 속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기사회생으로 살아났지만 후유증 때문에 어머니는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숙희는 위로 오빠와 아래로 두 동생을 뒷바라지해야 했고 누워있는 어머니까지 보살펴야 하는 장녀인 관계로 많이 배울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아픈 와중에도 아버지는 딴 여자를 만났다. 아버지는 아픈 어머니를 방치하고 이혼을 요구할 만큼 염치없었던 사람이라며, 그녀는 거침없이 자기 집안의 치부를 드러냈다. 그녀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해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더니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그녀는 이미 하늘이 두 쪽 나는 치열한 절망을 경험했다.
수입이 일정치 않았던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두 동생의 학비를 대면서 까지는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몹시 어려웠다. 군대 간 오빠가 적은 월급을 모아 부쳐주기도 했지만, 돈은 늘 부족했고 결국 주변에 빚을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그녀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버지는 숙희가 엉뚱한 데 빚을 진 것으로 몰아붙였다. 숙희는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 갈 곳이 없었던 그녀는 부천에 있는 먼 친척의 사랑방에 기숙하면서 소위 식모생활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수소문 끝에 시골 동창의 소개로 봉제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급료가 제대로 지불되지 않을 정도로 신통치 않은 곳이었다. 그 후 봉제 공장 책임자의 소개로 오늘날 진 사장이 운영하는 작은 기획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숙희의 오빠는 군 제대 후 시청소속으로 트럭운전을 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 올케의 왜곡된 신앙생활로 형제관계가 틀어져버렸다. 올케의 맹목적인 신앙생활은 늘 형제간의 불화를 촉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케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며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숙희를 포함한 동생들이 뒷걸음치게 되었다.
숙희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마음 편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올케로 인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녀는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결코 그런 행동은 안 할 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다만 남동생만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를 따른다고 했다. 학비까지 벌며 광주에 있는 대학교를 어렵게 다니는 남동생이 안쓰럽다고 했다. 반정부 동아리서클에 입단하여 가끔 피해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 없는 동생이라며 보고 싶다고 했다. 숙희는 형제들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다. 노수 씨한테 별 얘기를 다 하고…….”
숙희의 눈은 이미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녀의 명랑함 속에 이토록 강한 외로움이 깔려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알 수 없는 울분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속내를 감추려는 나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쉽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나에게 모두 털어 놓은 것을 보면 나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돼지갈비가 익기도 전 오고간 몇 차례의 술잔에 그녀는 물론 나 또한 빠르게 취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법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온몸으로 번진 술기운이 감정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나 또한 그동안 숨겨놓은 아픔을 서서히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 놓았던 비밀을 스스럼없이 말한 것에 대한 답례라도 하듯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나의 회상은 숙희의 회상만큼이나 촉촉했다.
“숙희 씨, 난 고아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소장수였던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초등학교 때 어머니는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나는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소몰이 생활을 하다가 그 생활이 싫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유년기의 추억도 많지만,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부터는 인생이 꼬이기 시작해 형편없어졌다고도 말했다. 캄캄한 지하에서 한 층 한 층 기어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더 추락할 곳도 없는 초라한 신세라고 말했다.
민기나 유정숙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지만, 처음으로 은애 이야기는 꺼냈다. 서울에 올라와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 천만다행으로 은애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도안사가 되었고 몇몇 직장을 옮겨 다니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낱낱이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남해안 끝섬이라는 곳에 살아계신다는 말만 들었는데, 아직 끝섬이 어디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늘 바다가 그립다고 했다. 어머니와는 파도소리를 음률과 같다며 들려주던 추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끝섬이라는 곳을 찾아 꼭 어머니를 만날 생각이라고도 했다.
“그래도 말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네.”
내가 피식 웃으며 회상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숙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을 받았다.
“어머니는…… 나중에 시간 내서 같이 한번 찾아보도록 해요.”
그녀는 어머니를 찾아 인사를 드리자고 덧붙였다.
“고마워요. 아무리 힘들어도 용기 잃지 말고 우리 힘내죠!”
내가 그녀에게 건배를 요청하며 ‘우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녀가 혼자가 아니며, 나 또한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주길 진정으로 바랐다.
숙희가 눈가에 맺힌 이슬을 훔치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오늘 기분 너무 좋다. 노수 씨 나이트클럽 가봤어요?”
“아니요. 그런데 오늘은 너무 취한 것 같아서…….”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내가 낼 테니! 엊그제 보너스 조금 받았어요.”
“벌써 밤 열 시인데 통행금지 걸리지 않을까요?”
내 은근한 걱정은 뒷전으로 하고 숙희는 벌써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약간 취기가 오른 그녀의 얼굴 위로 전에 보지 못한 즐거운 표정이 드러났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그녀는 서둘러 계산을 마친 모양이었다. 음식점을 나오자 이른 봄비가 지척지척 내리고 있었다. 버스는 버스대로 택시는 택시대로 갑작스런 비를 피해 서로 타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온통 아우성이었다. 빗방울이 머리며 어깨 위로 마구 튀어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다.
우왕좌왕 뛰다가 택시를 몇 번 놓치게 되자 내가 물었다.
“숙희 씨, 어디 멀어요?”
“아뇨. 가까우니까 차라리 걸어가요.”
숙희가 내 옆구리에 바짝 달라붙으며 팔짱을 꼈다. 온몸에 취기가 올랐는데도 따스한 온기는 짜릿한 전기처럼 내 몸을 관통해 심장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나도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았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우리가 도착한 나이트클럽은 일본관광객이 많이 드나든다는 비교적 저렴한 호텔 내에 있는 곳이었다. 현관에서 머리와 어깨의 빗물을 털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기다리기라도 한 듯 나비넥타이를 한 말끔한 청년이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청년이 안내한 4층은 엘리베이터 문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자 갑자기 현란한 불빛의 조명과 네온사인, 시끄러운 음악이 한꺼번에 벌떼처럼 달라붙었다. 당황한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낯선 광경에 짐짓 놀라는 나를 본 숙희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씩 웃어버렸다. 씩 웃는 그녀의 얼굴은 내추럴 캔디 립글로스와 함께 앙증스러웠다.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한 평 남짓한 원형 무대 곳곳에 몇몇의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뱀처럼 몸을 비틀고 있었다. 꿈틀대는 몸짓에 노랗고 파란 불빛들이 반사되고 교차되어 더욱 커다란 율동을 느끼게 하였다. 그녀들의 의상은 해수욕장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속옷 같은 비키니 차림이었는데, 온통 구슬을 달아 놓아 움직일 때마다 현란한 몸놀림으로 살아 움직였다.
웨이터가 안내한 좌석에 앉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홀 중앙에는 음악에 따라 여러 팀의 남녀들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빠르게 또는 느리게 출렁이고 있었다. 운동장처럼 넓어 보이는 나이트클럽에 어쩌면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지 무척 놀랐다.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로봇 춤을 추는 무대 위의 공연이 끝나자 잠시 시끄럽던 음악이 멎었다. 그리고 이어서 흐르는 느린 블루스 음악에 연인들은 뒤엉켜 잔잔해진 물결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남녀가 서로 달라붙어 회전하는 낯선 풍경에 나는 몹시 긴장했다. 그녀는 긴장한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고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 놀랐지?”
숙희가 오히려 재미있다는 투로 귀엽게 약을 올렸다.
“정신을 못 차리겠어!”
“처음에는 다 그래. 하지만 저길 좀 봐. 여자들이 맘 놓고 담배도 피잖아!”
그녀가 손짓한 건너편 좌석에는 자연스럽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여자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있었다. 진한 화장으로 보아 평범한 여자들은 아니리라 추측은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드러내놓고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광경을 보긴 처음이었다.
“도대체 뭐하는 여자들일까?”
“신경 쓸 거 없어. 술집 여자들인지도 모르지.”
어느새 우리들은 말을 트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 편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나이트클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당황하는 나를 보는 게 몹시 즐거운 듯 연신 생글거렸다.
잠시 후 기본이라며 안주 한 접시와 맥주 다섯 병이 놓여졌다.
“오늘 큰일 났네. 지금도 취했는데…….”
“취하면 어때. 나도 취했는데!”
그녀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맥주를 따라주며 건배를 하자고 잔을 높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연거푸 마시는 술맛은 돼지갈비 집 소주 맛과는 또 다르게 달콤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흥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홀은 디스코에 이어 블루스로 이어지고, 다시 블루스에서 디스코로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음악이 바뀔 때마다 무희도 바뀌었고 춤추는 손님들도 바뀌었다. 천장에 붙어 돌아가는 미러볼과 현란한 조명은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충분할 만큼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맥주 다섯 병을 마시고 다시 다섯 병을 시켰다. 그녀와 나는 이미 과한 알코올을 몸 안으로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브레이크를 잡지 못했다. 빠른 디스코 음악으로 바뀌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나가서 춤추자!”
나는 난생 처음 나이트클럽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율동에 따라 어색하게, 그녀의 몸짓과 비슷하게 따라 하려 애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이 어색하여 주위를 힐끗힐끗 훔쳐보며 몸을 흔들었다. 맞은편 대형거울에 내 모습이 비췄다. 음악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비틀대는 것처럼 보이는 내 몸놀림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나를 보고 있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어색하여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는 흥에 겨운 율동과 함께 제법 리듬을 타고 있었다. 좌우로 흔드는 동작마다 동그란 그녀의 가슴 또한 가볍게 흔들리며 율동을 보였다. 발동작은 발동작대로, 손놀림은 손놀림대로, 언제 그 율동을 몸에 익혔는지 의심될 정도로 그녀는 나를 자연스럽게 리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는 열기가 가득했고 이내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고고 타임에도 블루스 타임에도 숙희는 나를 리드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이트클럽의 열기를 만끽했다. 블루스 타임이 되자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려는 나를 극구 잡아끌었다. 그리고 내 양손의 위치를 잡아준 다음 블루스 스텝을 유도했다. 하지만 스텝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발을 밟히면서도 뒤뚱거리는 나를 잡아주는 게 재미있는지 내내 즐거운 표정이었다. 주위의 연인들은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밀착하고 춤을 추었지만, 우리는 가슴은커녕 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의 블루스를 췄다.
그녀에게서 땀 냄새가 났다. 그 싱그러운 냄새는 목 뒤로 감아 묶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뽀얀 목덜미 아래 어깨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보스스한 코밑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땀 냄새는 차라리 향기로웠다.
나는 억지로 스텝을 밟지 않기로 했다. 마침내 서로 한 몸처럼 밀착하고 돌아가는 커플처럼 무작정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내 몸에 닿았다. 나는 뭉클한 그녀의 감촉에 감전될 지경이었다. 그녀 또한 정전기처럼 스치는 촉감에 잠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스스로 팔 안으로 파고들며 내 안에 자신을 가뒀다. 우리는 음악이 멈출 때까지 한참동안 그렇게 돌고 또 돌았다. 그녀는 발이 몇 번씩 밟혀도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숙희는 그녀의 발을 아예 내 발 위에 올려놓고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다시 빠른 디스코음악으로 바뀌자 자리로 돌아왔다. 남은 맥주로 갈증을 풀고 다시 다섯 병을 더 주문했다. 나는 온몸이 무너져 내릴 지경으로 취해버렸다. 빈속에 소주부터 시작한 탓도 있었지만, 숙희가 편해 마음 놓고 마시는 사이 평소보다 몇 배 더 빨리 취한 것 같았다.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통행금지가 가까워진 한밤중이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도 뜸해진 시간이었다. 그녀는 마침“우산이요!”을 소리치는 소년에게서 마지막 남은 비닐우산 하나를 샀다. 숙희가 우산을 펴며 비틀거리는 나에게 밀착해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하지만 어깨를 감쌌다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그녀에게 매달렸다고 봐야 옳은 몸짓이었다. 한 사람이 써야 될 정도로 작은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빗물은 얼굴까지 튀어 올랐고 숙희는 아예 나를 끌어안으며 한 몸처럼 부축했다.
“어떻게 할래? 택시 잡아 줄까?”
그녀가 물었다.
“……아니, 그냥 이렇게 걷자!”
“어떻게 하려고? 오늘은 너무 취했어.”
“걸으면서…… 걸으면서 생각하자!”
“늦어서 택시도 어차피 못 타. 통행금지 되기 전에 어디 여관에라도 가서 자. 내가 데려다 줄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멀리 여관이라는 희미한 수은등 간판이 쏟아지는 빗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흐려진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자욱한 어둠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숙희 씨?”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날 어떻게 생각하니?”
“뭘?”
“무엇 때문에 우리가 만나고 이러는 걸까?”
“우리 그런 말, 안 하기로 하구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인 내가 두렵지 않아?”
“바보같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숙희의 떨리는 목소리는 금방 울음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위태롭던 비닐우산을 마침내 찢어놓았다. 그 틈 사이로 세찬 빗방울이 마구 튀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우수에 젖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녀를 온통 적셨다. 빗물에 그녀의 가슴과 몸태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그녀를 와락 얼싸안았다. 그리고 서툴게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개화되었다. 빗물도 눈물도 그녀의 입술에서는 달콤한 포도 알처럼 변해있었다. 나는 목석처럼 버티고 서서 한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고 바닥에 떨어진 비닐우산은 을씨년스럽게 뒤집힌 채 바람에 휩쓸려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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