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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00-654, 2018. 5. 8. 화>
음악과 가족
< 음악으로 하나되는 음악가족들 2 >
Johann Sebastian Bach (1685.3.31.-1750.7.28.)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J.S.Bach, Jesus, Joy of Man's Desiring [BWV 147]
Willem van Twillert plays
Carl Philipp Emanuel Bach(1714.3.8.-1788.12.14.)
고전파 작곡가.
‘베를린의 바흐’ 또는 ‘함부르크의 바흐’라고도 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다.
프로이센 황태자 프리드리히(훗날의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에서 쳄발로 주자로 일했으며,
그의 즉위와 함께 베를린의 궁정악단이 되었다.
1768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의 궁정악장으로 재직했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아버지인 바흐보다도 이름이 더 알려진 음악가였으며 그는 바로크에서 고전파로의 전환기를 대표하는 작곡가였다. 특히 소나타를 중심으로 한 클라비어작품이 유명하며, 그의 저서 《올바른 클라비어 연주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악기 연주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모차르트 등 고전파 음악가들에게 준 영향은 크다.
C.P.E. Bach flute concerto in d minor, 1st mvt,
Flute / Sébastian Jacot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6.8.-1856.7.29.)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 평론가.
1810년 작센 주 츠비카우에서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뒤에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는 등 피아니스트가 되려 하였다.
무리한 연습으로 손가락을 다쳐서 작곡가의 길을 가게 되었고, 음악 평론가로서도 활약하게 되었다.
중학 시절에 바이런·리히터 등의 낭만주의 작품을 애독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1834년 <음악 신보>를 창간하고, 1840년 클라라
비이크와 결혼하였다.
그 후 수많은 가곡을 작곡하고 멘델스존의 라이프니츠 음악원에서 강사, 드레스덴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 뒤 정신 이상으로 라인 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조되었으나 2년 후 1856년, 46세에 현재 본으로 편입된 엔데니히의 병원에서 죽었다.
Horowitz plays Schumann / Traumerei in Moscow
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9.13.-1896.5.20.)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 해설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이다.
클라라 슈만은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5세부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특출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 명연주가로서 명성이
널리퍼지게 된다.
이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유럽 각지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이 때는 클라라 비크라는 이름으로 크게 알려졌었다.
독일 화폐가 유로화로 통합되기 이전인 1990년대, 지폐 100마르크화에 클라라의 초상이 쓰이기도 했다.
Clara Schumann Three Romances for oboe and piano Op.22.
Juan Manuel García-Cano Ruiz, oboe. Alina Artemyeva, Piano
Fanny Mendelssohn
(1805.11.14, Hamburg, Germany-1847,5,14, Berlin, Germany)
파니 헨젤은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 무언가, 바흐의 재발굴로 유명한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이다.
그의 작품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본인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은 가족의 굉장한 반대가
있었다
“시작부터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다....나는
출판을 시작했어.
내가
출판하는 것으로 인해 네가 불명예를 당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창작을 위한 자극을 항상 필요로 해왔어.”
위와 같은 편지가 남아 있을 정도였다. 파니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도 이야기하였다.“음악은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겠지만, 너에게는
결국 장식에 불과할 뿐이며 너의 존재나 활동의 기반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펠릭스에게는 명예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야망이
무척 중요한 일이란다.
왜냐하면
그는 음악을 천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너에게는 정숙하게 행동하는 것이 곧 명예로운 일이란다. 가령,
동생에게
쏟아지는 갈채를 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함으로써, 타인으로
하여금 너 또한 존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리라. 여자스러운
것만이 여성의 자랑이 될 수 있으니까”
Fanny Mendelssohn String Quartet - Fourth Movement
Attacca Quartet plays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1809.2.3.-1847.11.4.)
독일의 초기 낭만파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유한 시민층 계급의 명망이 있는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의 형제로는 유명한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자신의 맏형 요제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어머니인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Lea Mendelssohn Bartholdy)는 살로몬의 제조업 가문 출신이다.
1844 년 여름에 있었던 멘델스존의 8 번째 영국 방문에서 그는 런던에서 다섯 개의 필 하모닉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계절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매일 3 주 전에 매일 약속이 채워졌고 나머지 2 개월 동안 나는 더 많은 음악을 듣게되었습니다. " (레베카 멘델스존 바르 톨디에게 보낸 편지, 소덴, 1844 년 7 월 22 일). 계속되는 방문에서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 과 남편 앨버트 왕자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음악을 크게 경 쳤던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는 버밍엄 트리엔날레 뮤직 페스티벌 (Birmingham Triennial Music Festival)에 의해 위촉 받아 1846 년
8 월 26 일 버밍엄 타운 홀 (Town Hall) 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그의 시간 동안 많은 멘델스존의 작품을 저술하고
번역 한 윌리엄 바돌로매에 의해 영어로 번역 된 독일어 텍스트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Mendelssohn Rondo Capriccioso
Piano. Canadian Joel Hastings
Daniel Barenboim
(히브리어: דניאל ברנבוים) 아르헨티나 태생.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1942. 11.15.-)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남.
양친이 모두 피아노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1950년에 일곱 살의 나이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개최해 신동으로 불림.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바렌보임은 1952년에 가족들과 함께 이주해 아르헨티나+이스라엘 복수국적을 취득.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빈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유럽 무대에도 진출해 연주 활동.
1966년에는 지휘자로도 공식 데뷔. 이듬해에는 영국의 유명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이스라엘에서 유대교 의식에 따라 결혼한 뒤 곧바로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가져 화제가 되었다.
아내 뒤 프레가 1970년대 초반 무렵 부터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 활동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고, 결국 1973년 2월에 열린 뉴욕 공연을 끝으로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뒤 프레가 아직 세상을 뜨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에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슈키로바와 내연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다비드와 미하엘 두 아들까지 낳았다. 결국 뒤 프레가 1987년에 사망한 뒤 바렌보임은 이듬해 바슈키로바와 공식 재혼했는데, 이는 뒤프레도 이 관계를 용인했다는 것이 정설임에도 세간에는 불륜으로 비춰져 지금까지도 이 건을 들며 바렌보임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다.
Jacqueline Mary du Pré, (1945.1.26.-1987.10.19.)
영국의 첼로 연주자.
5세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해서 15살에 프로로 데뷔하여 20대 초반에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나,
25세 때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28세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엘가 첼로 협주곡 연주가 그녀의 대표적인 명연주로 꼽힌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였지만 그 당시 신예 지휘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던 한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만남은 자클린 뒤 프레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게 된다.
뛰어난 음악성과 표현력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자클린 뒤 프레는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다니엘 바렌보임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만난 지 6개월만에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두 음악가의 결혼소식은 당대 최고의 이슈가 되었고 음악가들의 러브스토리 1순위에 꼽히는 ‘슈만과 클라라’에 비유되며 재능 있는 두 음악가의 만남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기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다. 실제로 결혼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연주를 다니기도 하고, 따로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나갔고, 레퍼토리를 넓히며 음악성을 키워나갔다. 그녀의 환한 웃음을 더욱 자주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열정이 지나쳤던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은 도저히 여자의 몸으로는 소화해낼 수 없는 스케쥴로 자클린 뒤 프레를 강압적으로 몰아부쳤고, 이를 묵묵히 감당해내며 혹사당하던 그녀는 결국, 온 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는 다발성 경화증 (Multiple Sclerosis)에 걸리게 된다.
악보가 잘 보이지 않으며, 자주 쓰러지기도 했던 자클린 뒤 프레. 병이 점점 악화되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연주를 끝까지 놓지 않았는데, 그녀의 이런 상황을 모르던 음악 평론가들은 그녀가 인기와
명성이 높아지더니 거만해져 연주도 대충한다며 악평을 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꿋꿋하게 참아내며 끝까지 첼로를
놓지 않았던 뒤프레는 결국에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음악 생활을 중단하게
된다.
한 때 너무나 사랑하며 서로의 음악성에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최고의 호흡을 맞춘 두 사람.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세기적인 불운의 사랑으로
손꼽히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두 사람이 함께했던 그 때만큼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지피고 두근거리게 만든다.
Jaqueline Du Pre & Daniel Barenboim - informal
1976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 수훈
ELGAR CELLO CONCERTO, 1st Movement
performed by cellist Jacqueline Du Pre with Daniel Barenboim conducting
the
London
Philharmonic in 1967.
첫댓글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재클린 뒤 프레!
열정적인 결혼을 했으나
고집스런 다니엘 바렌보임의
무리한 행보로 그녀의 건강이
나빠졌다니.
가엾은 재클린 뒤 프레!
늦었지만
당신을 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