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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상초교의 추억 9회
 
 
 
카페 게시글
건 강 스크랩 치매 걸린 90세 노모 정성껏 간병하는 탤런트 전양자의 행복한 인생
용꼬진 추천 0 조회 3,200 11.08.18 15: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치매 걸린 90세 노모 정성껏 간병하는 탤런트 전양자의 행복한 인생

“어머니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행복”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엄마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법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배우도 구순의 어머니 앞에서는 마냥 어려진다고 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전양자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눈물겹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효도할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드린 뒤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친다.
탤런트 전양자는, 그러지 않기 위해 요즘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녀의 나이 올해 예순여덟. 구순의 어머니를 정성껏 보살핀다. 4년 전부터는 치매를 앓아 더욱 애틋한 어머니. 싱글인 딸과 30년 넘게 함께한 어머니를 더욱 살뜰하게 보살핀다. 전양자가 치매 어머니를 간병한다는 사실은 그녀가 건강 악화로 드라마에서 하차한 탤런트 여운계 대신 KBS ‘장화홍련’에 투입되면서 알려졌다
.
그녀가 맡을 역할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변 여사’ 역. 그는 드라마 투입 전에도 ‘장화홍련’ 속 ‘변 여사’를 보며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요즘은 대본을 보면서도 순간순간 울컥한다. 자꾸 어머니의 모습이 대입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가에게 종종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했다
.
74년부터 함께 살았으니 30년이 넘게 함께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82년 후부터는 단둘이 살았어요. 그러니 엄마는 제게 엄마이자, 남편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어요. 지금은 제가 자식처럼 돌봐야 하는 분이 되어버리셨지만….



치매도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면 낫는다
4
년 전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전양자. 얼마나 놀랐는지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2005 11 29 아침이었어요. 나는 인공조미료 대신 다시마나 버섯, 말린 새우 같은 것을 갈아서 천연양념으로 쓰거든. 그날도 양념을 만들려고 부엌에 있는 엄마한테 ‘다시마 좀 꺼내주세요’ 그랬지. 그런데 엄마가 건어물 통 앞에 앉아 다시마를 건네주지 않고 자꾸 모아놓기만 하는 거야. ‘엄마 화났어?’ 물어봐도 날 쳐다보지도 않아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말씀도 이상하게 하시고. 이틀 후 병원에 가서 찍은 엄마의 MRI 뇌 사진에는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려 있더라고요.

 

바로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두세 달 만에 의사는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다’며 퇴원을 권유했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까지 모시고 가 발마사지와 침 요법을 써보기도 했다. 누군가 중국에서 침으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효과가 없자, 한 달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평소 건강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음식이 피를 만들고, 피가 잘 돌면 병이 낫는다’는 신념에 따라 완전한 유기농 영양식사로 어머니를 봉양한다
.
“제가 워낙 약골로 태어나 어렸을 때 몸이 무척 약했어요. 그때부터 ‘나는 몸이 약하니까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해’ 하면서 건강에 신경을 썼지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보니 건강에 대한 상식이 많은 편이에요. 어머니를 돌봐주는 분이 계시지만, 음식만은 직접 만들어요. 몸에 좋다는 땅콩과 호두, 잣 볶은 것을 갈아서 유기농 버터와 밀가루 넣고 크림수프도 만들어놓고, 갖은 유기농 야채를 섞고 갈아서 야채수프도 만들어놓고, 샐러드도 만들어놓고, 미역국도 매일 끓여놓지. 건강엔 좋은 물을 마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끓인 물 안 드리고 좋은 생수를 꼭꼭 챙겨드리죠.

최근엔 매일 새벽까지 진행되는 ‘장화홍련’ 촬영에다 영화 ‘결혼 못한 남자’ 촬영, 또 다른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대본 연습, 마트 경영까지… 하루 서너 시간도 못 잘 정도로 강행군 중이지만, 어머니를 위한 음식만큼은 지금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녀는 ‘사랑과 정성’만이 어머니를 고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3년 반 동안 하루같이 어떻게 하면 더 신선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어머니께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3월부터 유기농식품마트 ‘노른자 쇼핑’의 대표이사직을 맡은 것도 그렇게 맺어진 인연 덕분이다

 

 

 

날 위해 살아온 어머니, 어머니를 위해 살아갈 나
하지만 그녀는 십오 년 전까지는 어머니와 사흘이 멀다 하고 싸웠다고 한다. 단둘이 부부처럼 의지하는 삶. 부부처럼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미워했어요. 엄마가 보통 고집쟁이가 아니거든. 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고. 나는 무엇이든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그것을 확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엄마가 안 들어주시는 거야. 예를 들어 엄마한테 ‘딸기 드시라’, ‘야채 많이 드시라’, ‘계란이 좋다’ 하면 절대 안 들으셔. 그게 못마땅해서 만날 싸웠어요.

 

하지만 한참 싸운 뒤 문을 탁 닫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는 울었다는 두 사람.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 밥 먹자’ 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식사를 했다.

“다 늙어서 깨달았어요. 그 모든 게 내 아집이라는 것을. 아프시고 난 다음부터는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지. 엄마한테 무엇이든 양보하고 져드려요. 엄마가 쌀밥을 보고 팥밥이라 우겨도 ‘그래 엄마. 팥이야 팥. 팥밥 먹어’ 해. 엄마가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오셨으니 지금부터라도 내가 엄마를 위해 살아야지…. 가끔은 내가 엄마를 너무 못살게 하고 스트레스를 줘서 뇌경색이 온 건 아닌가 하고 마음이 아파요.

티슈를 꺼내 드는 그녀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더니 그녀는 얼른 손사래를 친다. “이런 것 찍지 마, 나는 절대로 슬프지 않아, 엄마 때문에 행복해.

 

1960년대에 배우로 데뷔해 70년대까지 손꼽히는 청춘스타였던 전양자. 그녀의 어머니 한순석 여사는 언제나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던 딸이 마음놓고 연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돌봐주던 분이었다. 치매에 걸린 지금도 딸이 새벽에 들어가면 방에서 나와 ‘밥은 먹었어?’ 한다는 어머니. 그래서 딸이 금방 답을 하지 않으면, 어머니 다칠까봐 가스레인지 대신 들여놓은 전기레인지에 불을 켜려고 하는 등 어쩔 줄을 모른다고 했다.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멀어져가도 자식이 밥을 굶는 것은 본능적인 ‘비상상황’인 것이다.

“앓기 시작한 후에도 추운 날 집에 들어가면 방에 전기방석 깔아놓고 플러그를 꽂기 좋게 콘센트 앞에 가지런히 놓아둬. 그리곤 나한테 ‘내가 깔아놨어’ 하고 어린애처럼 말씀하시지. 아침에 일어나 당신 방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면 내 방 이부자리까지 정리하신다고 들어오세요. 엄마는 4남매 중 둘째며느리였지만, 제일 일을 잘하고 예뻐서 시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분이었어.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끝까지 모셨고, 고생을 많이 하셨죠. 희생이 몸에 밴 분이에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머리를 곱게 빗고 나오신다는 어머니. 외출도 제대로 못하시면서 파운데이션을 바르고는 딸에게 눈썹을 그려 달라시는 어머니. 옷을 사가도 ‘이건 싫다’ ‘이건 잘 맞는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는 어머니. 그러나 전양자에게는 그런 어머니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노인정 가서 보이프렌드라도 사귀라’고 하면 ‘미쳤어~’ 하면서도 웃으세요. 말투가 어눌해져서 ‘엄마, 내가 이거 사드릴게’ 그러면 ‘누군데? 누군데?’ 하고 말씀하시면서도 좋아하시죠. 아프시기 전까지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배드민턴도 잘 치셨는데…. 아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내가 더욱 건강해야 할 이유, 어머니
전양자의 다른 형제들은 모두 미국 등 멀리 산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어머니를 더욱 잘 보살펴드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자신의 건강관리에 더욱 힘을 쏟는다. 그녀가 태권도 초단에, 유도를 20년째 하고 있으며 지난해엔 단증까지 땄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1] 1990년대 중반 미국에 여행 갔을 호숫가에 있는 순석 여사. [2] 2001, 어머니의 83 생일에 온가족이 모였다. 그때만 해도 무척 건강하셨다. [3]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국에 갔을 . 당시 전양자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침에 깨어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200번씩 발차기를 한다고 했다. 발차기를 하고 나면 어린 시절 다친 허리가 시원해진단다. 또 아무리 바빠도 9면 유도 도장에 가서 땀을 흠뻑 흘리고 돌아온다. 너무 바쁘면 집에서 잠자기 전 이불을 깔고 낙법 연습이라도 한다. 그래야 몸이 시원하단다. 틈만 나면 산을 찾고 여름에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달걀 두 개에 우유, 로열젤리, 비타민 등 각종 영양식품을 챙긴다. 필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애쓴다.

어머니와 앞으로 함께할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양자. 그래서 함께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드리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저 아쉬움을 스스로 다독여야 한다. 다행인 것은 처음 발병 당시보다 어머니의 증상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당시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했지만 지금은 모두 알아본다. 다만 어휘를 많이 잊어버리고 말투가 어눌해졌을 뿐이다.
“엄마랑 좋은 곳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잡숫게 하고 싶은데 요즘은 어디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낯도 많이 가리셔서 어느 집 다녀오시면 ‘그 집에 안 가! 망령 났어! ’하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는 거예요. 지금도 집에만 가면 만날 둘이 손 붙잡고 있어. 늦게 들어가면 이불이랑 베개 들고 어머니 방에 들어가 손잡고 자고.
연세가 많으신 탓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변비 때문에 애쓰는 어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밖에서 눈물을 떨군다. 얼마나 괴로우실까 생각하면 대신 아파 드리고만 싶다.
“소망이 있다면, 병이 아무리 깊어져도 아프지 말고 오래 사시라는 것. 그래서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계시는 거예요. 엄마는 지금도 매일 ‘네가 나 때문에 힘들다’ 하시지만 전 ‘아냐, 난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데’ 해요. 그런데 정말 나, 행복해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 여성조선  취재 박혜전 기자 | 사진 오수진, 전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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