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척의 배가 침몰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이번 사건도 어쩌면 그런 일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환갑이 넘은 이 나이까지 숱한 일들을 겪고 보아 왔지만 이번 사건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수시로 심호흡을 해도 가슴은 답답하고 눈물은 시도 때도 없이 찔끔거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설레는 기대를 안고 수학여행을 떠나온 남녀 고등학생들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울려 장난을 치며 이 세상을 든든한 품처럼 믿고 따르던 그들을 세상은 차가운 주검으로 만들고 말았다. 글 모두를 써놓고 뒤를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사건 발생 열흘이 넘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도 이 사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잠시 골몰할 일이 생기면 잊고 있다가도 일이 끝나면 다시 사건으로 되돌아온다. 눈앞에서는 이른 봄꽃이 지고 새로운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마음은 즐거워할 수가 없다. 단지 아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그 가족들의 비통함 때문이라면 시간이 가면 언젠가는 가라앉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다르다. 단지 충격과 슬픔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에서 나는 썩어빠진 한국호의 전복을 경고하는 신의 분노를 본다. | | | ▲ 지난 16일 전남 진도군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고교생 등 477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가운데 17일 오전 침몰한 세월호 사고 해역에서 해양경찰과 군이 실종자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2007년에 세월호의 쌍둥이 배라는 오하마나호를 타고 인천에서 제주까지 가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이 주말의 무박3일을 이용하는 한라산 등산객들이었다. 승객 수도 수였지만 어마어마한 화물 적재량에 놀랐다. 덤프트럭을 비롯하여 거대한 트레일러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배가 크니 그러려니 했지만 보도에 의하면 그 화물 적재량은 기준을 현저히 초과하는 것이었다. 아침 8시경 배가 제주항에 도착하면 버스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승객들을 한라산 입구로 실어 나른다. 저녁에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면 그 역순의 강행군이 시작된다. 늦으면 배를 놓치는 경우도 생긴다고 들었다. 세월호는 안개주의보 때문에 2시간을 늦게 출발했다. 그 정도면 출발하지 않았어야 했다.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배는 위험한 맹골수로를 선택했다. 배는 1994년 6월 일본에서 첫 취항했던 배니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관련법 시행규칙을 고쳐 제한 선령을 개정하지 않았더라면 수명이 2개월 밖에 남지 않은 고물 선박이었다. 배가 흔들릴 때 균형을 잡아주는 스태빌라이저는 고장이 나 작동을 못했다. 엄청난 화물은 제대로 결박을 하지 않았다. 좌현으로 꺾으라는 항해사의 지시를 조타수가 잘못 알아듣고 우현으로 꺾었다가 다시 되돌리려 좌현으로 꺾는 과정에서 배는 심하게 기울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제대로 묶이지 않은 과적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는 쓰러졌고 이내 전복되고 말았다. 과적을 위해 배 아래쪽의 평형수를 빼고 공기를 채워 넣어 배의 무게중심이 올라간 탓이라는 기막힌 분석도 있다. 조사결과는 어쩌면 조금 다르게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고의 원인이 무리한 항해, 낡은 선박, 안이한 인식이라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 원인들. 이상하게 그것은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지난 반세기 이상에 걸쳐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런 사고가 한두 번이었나? 저 까마득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1970)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수 남영호 침몰 사건(1970),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1971), 이리역 폭발 사고(1977), 경산 열차 추돌 사고(1981), 목포 아시아나기 추락 사고(1993), 구포 열차 전복 사고(1993),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1993),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1994), 성수대교 붕괴 사건(1994),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1995), 칼기 괌 추락사고(1997), 씨랜드 참사(1999), 대구 가스 폭발 사고(1995), 인천 호프집 화재 사고(1999), 대구지하철 화재 사건(2003) 등등 우리의 기억은 온통 검은 죽음들로 점철되어 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로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깔려 죽지 않았던가. 이 모든 사건, 사고들에는 공통된 한 가지 성격이 있다. 그것은 자본의 폭주를 허겁지겁 뒷받침하던 인간 사회가 빚어낸 실조(失調)라는 것이다. 사고의 매체는 평소 자본이 스스로의 위세를 자랑하던 항공기, 선박, 기차, 자동차, 건물, 교량 등이었다. 이 위풍당당한 자본의 문장(紋章)에는 태초부터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질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인간의 이기(利器)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인간의 합리적 통제 하에 두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본과 인간, 물질과 인간의 싸움에서 최소한 인간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간단한 원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보라. 세월호 사고가 나기 전 한 달도 안 된 지난 3월 20일 무슨 일이 있었던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소위 규제개혁을 주제로 무슨 사명감에 북받쳤던지 7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했고 정신 나간 언론들이 그것을 꼬박 생중계하는 기막힌 모습을 보였다. 아마 건국 이래 최초였을 것이다. 규제개혁.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숨겨진 성격마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규제개혁이란 일언이폐지하여 돈에 자유를 주는 것이다. 자본이 네 활개를 펼치고 나설 때 그 사방에 어떤 것도 걸리적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도, 남자도 여자도, 초등학교도 공인인증서도, 아니 단원고 학생들도 걸리적거리지 마라. 자본이 납신다. 인간을 비롯하여 지저분한 것들은 저만치 물렀거라. 그것이 간단히 말해서 규제개혁이다. 이번 사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바로 이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20년으로 제한했던 선령을 이명박 정부는 30년으로 풀어 일본에서 폐기처분하는 고물 선박을 사들여 작동도 제대로 안 되는 채로 운항시키지 않았던가! 배가 기울어도 스태빌라이저는 펴지지 않았고 수심 4미터 아래로만 내려가도 자동으로 떨어져야 하는 40대의 구명 뗏목은 한 대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결과로 지금도 백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그 선령 19년 10개월의 고물 선박 안에서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더 확실한 증거를 코앞에 들이대야 규제개혁이 무엇인지를 납득하겠는가? 규제를 마치 공직자들이 횡포를 부리기 위해 만든 불필요한 장치나 되는 것처럼 인식시키는 터무니없는 회의를 7시간이나 주재하고 규제를 “쳐부숴야 할 원수이자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라고 천박한 용어로 공격해댄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이 사고 앞에서, 팽목항의 유족들 앞에서 다시 7시간의 회의를 주재해 보라. 30년도 암덩어리니까 40년으로 늘리라고 할 것인가? 규제개혁을 주재하는 대통령의 논리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자본의 에이전트들이 속삭거린 이야기가 그대로 먹힌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70년대 말 유신의 망령이 지배하고 있던 그 어두운 시절에 충효 사상으로 국민의 정신을 개조해 보겠다고 영생교 교주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 운동이라는 음침한 운동을 전개했던, 서른 살도 안 된 박근혜 총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단순한 논리로 복잡 미묘한 나라의 온갖 것들을 경영하겠단 말인가! 자고로 인심유위도심유미(人心惟危, 道心惟微)라 하지 않았던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도심에 접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데 대통령의 생각은 유위(惟危)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을 문방구에서 파는 실로폰으로 연주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선박 안전에 관한 온갖 기준을 강화하고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하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러면서 관료 마피아 운운하며 공직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겠지. 선장을 살인자 운운 하는 것만 보아도 역시 뻔하다. 한마디로 권력 자체에는 추호도 책임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돈만의 세상으로 모든 것을 몰아온 것은 누군가? 돈의 욕망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얼씬도 못하게 감싸온 것은 누군가? 두 시간이나 늦었는데 무리하게 출항하게 한 것, 맹골수로를 선택한 것, 화물들을 제대로 묶지도 않은 것은 선장만인가? 선주만인가? 청해진해운만인가? 유병언과 그 자식들만인가? 해양수산부만인가?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뭘? 철저히 관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는가? 국정원과 군이 엄청난 기구 확대를 통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는데도 그들이 내 편이고 나를 위해 하던 일이라고 이리 감싸고 저리 덮으며 별의별 짓을 한다는 것을 만천하가 다 보았는데 누구더러 철저한 관리를 시키겠다는 것인가? 해운사는, 해수부는 저희들 편이 없고 저희들 이익이 없는가? 무얼 보고 배웠다고 그 동네만 청정 동네로 남겠는가? 국민들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국무총리 한 명을 해임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장관 절반을 교체하든, 모조리 교체하든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물러난다 하더라도 과연 달라질까? | | | ▲ '세월호 침몰' 후 실종자 생존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겨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
권력이 자본과 손잡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행군하는 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무성이나 정몽준이 하면 달라지는가? 그들의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보지 못했는가? 야당이 하면 달라질 것인가? 그들의 기자회견이라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대통령의 사과나 요구하고 총리 사퇴를 무책임하고 비겁한 회피라고 공격하고 공직사회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추악한 커넥션과 부패를 공격하면 모든 것이 다 되는가? 권력자들의 안이함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것이 그들이다. 그 어떤 것에서도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야당이 언젠가 했던 말이 옳았다. 사람이 먼저다. 이 사건에 대한 궁극적인 처방은 그것이다. 그런데 김한길도 안철수도 왜 그 말을 못하는가? 국민들이 무슨 소리를 할까 해서? 누군가가 종북이라고 몰아댈까가 두려워서? 자본의 전횡을 막을 유일한 지표는 사람이 먼저라는 이 기치를 하늘 높이 세우고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진정한 속죄고 반성이 된다. 왜? 왜 말하지 못하는가? 문재인 후보의 대선 구호여서? 그 말을 문재인이 했든 누가 했든 무슨 상관인가? 미쳐 날뛰는 돈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참사는 이미 그 도화선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는가, 모르는가? 어제도 새로운 사망자가 40명이나 발생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오늘도 역시 새로운 사망자가 40여 명이나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40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과 절망 끝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 9년째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살률이 우리의 참혹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그것이야 각 개인의 선택이 아니겠냐고 손바닥을 펼쳐 보일 것인가? 물어보자. 나라를 경영한다는 사람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두고 무엇을 했는가? 한 시간의 회의를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따지고 보면 한 달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질식할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나 저 검은 배 안에서 한 순간에 3백여 명의 생령이 허파에 물이 차 죽어가는 것이나 그 근본 원인에서 무엇이 다른가? 돈지랄에 미친 나라가 그 광분에 걸리적거리거나 낙오하는 자들을 죽이고 있는 것 아닌가? 자본이 살아가자면 그런 죽음들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인가? 그 말은 곧 너희들이 죽어야 자본이 산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자본과 권력이 손잡고 죽인 것이다. 견강부회라고 할 것인가? 희대의 비극적 사건을 두고 정치적으로 비화하는 짓이라고 비난하고 싶은가? 오늘만은 참지 않겠다. 무식한 아가리를 다물어라. 모르면 배우려는 자세라도 있어야 하고 무식하면 순진하기라도 해야 한다. 먼저 권력이 거적때기 위에 올라앉아 재를 덮어쓰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이 사건에 관한 그 어떤 조치도 거짓과 시늉에 불과하다. 관료 마피아를 문제 삼으려면 먼저 권력이 스스로의 횡포와 커넥션을 잘라버려야 한다. 온 국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에서 권력이 회개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다. 아아,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군림하는 것만 배워온, 웃으며 손 흔드는 것만 배워온 박근혜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거기서 바로잡히지 않는 한 어디서도 바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불변의 이치다. 절망감 속에서 이 글을 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