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낸 이근호(李根澔)[1860~1923]의 불망비로 재임 [1902년 2월~ 1903년 9월] 이 후인 1904년 2월에 세웠다.
앞면에 “관찰사 이공근호 불망비 (觀察使 李公根澔 不忘碑)”, 뒷면에 연기 갑진(甲辰)을 기록하였다.
총 높이 155㎝, 비신 높이 150㎝, 너비 65㎝, 두께 19㎝이다.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 이근호(李根澔) 매국수작 / 남작
이근호(李根澔, 1860년~1923년)는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충청북도 충주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1878년 무과에 급제했는데, 동생인 이근택이 임오군란때 충주로 피신한?명성황후의 눈에 들면서 그도 요직에 기용되었다.
1891년에는 평안북도 영변군의 부사로 재직하면서 재물을 탐학한 죄로 벌을 받았다가 재기용된 전력을 가졌을 정도로, 일찍부터 이재에 밝았다. 1899년 상업은행의 전신인?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될 때 발기인으로 가담했고, 민병석이 사장을 맡은 종로직조사의 부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민소식과 함께 광신교역회사를 설립하는 등 기업 활동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전라남도 등 지방의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1910년 한일병합(한일병탄)조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전라남도 등 지방의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한일병합(한일병탄) 후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23년 3월 1일 사망했으며 작위는 서장자(庶長子)?이동훈(李東薰)이 이어 받았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동생들과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는 이근호의 작위를 습작한 아들 이동훈도 포함되어 있다.
이근호의 집안은 세 형제가 작위를 받아 습작자까지 모두 여섯 명이 조선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사람들은 이근상 5형제를 '5귀(五鬼)'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삼형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근호가 친일 행위로 일제로부터 습득한 경기도 화성시와 오산시, 충북 음성군 등의 토지를 되찾고자 하는 소송을 이근호의 손자가 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