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장락서원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으니 맛있네요
박학군자(博學君子)인 약전(若銓)형님
다산의 글에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라는 짤막한 한편의 글이 있습니다. 정말로 머나먼 바다 속의 외딴 섬에서 귀양 살던 중형(仲兄)인 정약전을 위해서 지은 글입니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사리(沙里)라는 마을인데, 그 당시에는 나주목의 부속 도서인 흑산도의 사촌(沙村)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다산은 분명히 '사촌서실'이라고 했건만 어떤 이유인지 지금 찾아가면 초가로 복원한 집에 「사촌서당(沙村書堂)」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있습니다. '당(堂)'이나 '실(室)'의 뜻이야 같으니 관계없다 해도, 원래의 이름이라면 '서실'로 해야 맞지 않을까 싶은데 왜 그렇게 바꿔서 걸어놓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복원이라도 해서 손암 정약전의 유적지를 찾는 답사자들에게 흔적이라도 제공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실로 박학한 군자(君子)가 있어 옛날의 고전을 많이 읽은 뒤에 법식에 맞게 가르치면, 경전(經典)의 뜻을 구별하여 분석할 수 있는 때에 이르러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러 학자들과 어울리게도 되며, 더 나아가서는 성인이나 현인도 되고, 문장학이나 경세학을 익힐 수도 있을 것이니, 조그만 섬의 백성들도 큰 섬의 백성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 대여섯 명을 데리고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는 형님의 초라한 서실의 높은 효과를 크게 격려하는 글의 내용입니다. 누에치는 집의 잠실도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지만 누에가 자라 명주실을 뽑는 데는 차이가 없음을 전제하고는, 아무리 큰 서실이나 아무리 작은 서실도 누가 어떻게 가르쳐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인재양성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열거하여, 외롭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손암(巽菴)선생을 위로해주는 글임에 분명합니다. 대도시의 대형 학교에서만 인재가 배출되고, 시골의 조그만 학교에서는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습니까. 섬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높은 학문과 인격을 구비한 자신의 중형이 가르쳐주는 한, 인재는 배출될 수밖에 없다는 형제간의 믿음은 지금 읽어도 든든하기만 합니다.
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중에서
첫댓글 장락서원의 개원 취지에 꼭 들어맞는 글귀같습니다. 훈장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정약전은 유배된 섬에서 외로이 물고기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다 육지로 돌아오지 못한채 죽었다지요? 다산의 형님에대한 위로가 애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