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후손 백강 이경여 가문의 교육
세종가문인 밀성군파 백강 이경여 집안의 독서관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인으로 가는 수련의 과정이었다. 이경여는 큰 아들 이민장에게 `네 나이 열다섯인데 아직 학문을 이루지 못했으니 크게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은 덧없이 빨리 흐르고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청소년기에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질책이었다.
둘째, 굶어도 책은 팔지 않는 것이었다. 이인상의 아내는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책 만큼은 지켰다. 이인상이 시와 서 그림에 모두 능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목숨처럼 여기는 가풍 덕분이었다.
셋째, 부단한 노력이었다. 문과에 장원한 이민적은 아들에게 지독한 독서를 시켰다. 밥을 먹은 뒤 소화가 되기만 하면 책을 읽게 했다. 자신이 장원급제에 이어 큰아들 이사명의 장원급제 손자 이기지의 장원급제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벼슬에는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좌의정 이건명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유언에서 '글을 열심히 읽어 마음을 닦되 출세에는 연연하지 말라'고 했다.
이건명의 형으로 좌의정을 지낸 이관명도 한때 노비로 전락하고 아내에게도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은 벼슬 때문이라고 후회했다.
이병인은 아예 과거를 보지 않고 독서를 하며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벼슬길은 필히 정쟁에 휘말리고 이는 자신의 삶도, 가문에게도 누를 끼칠 수 있다는 현실을 바로 본 것이다. 그래도 이 가문에는 벼슬은 하지 않되 글은 게을리 읽어서는 안된다는 철학은 분명했다.
하지만 출사를 하면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숙종 때 이민적은 열 살 왕세자의 혼례추진에 대해 강하게 비판을 했고, 경연을 자주 거르는 현종에게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운동'을 청하기도 했다. 임금의 허약은 운동부족에서 온다는 비판이었다.
암행어사로 나간 이관명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은 숙종을 분노케 했다가 한 자리에서 3계급 특진이라는 훈장으로 돌아온다는 야담을 낳게 하기도 했다.
이관명은 어전의 재판에서도 감성이 아닌 논리로 접근해야 해야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해 공감을 얻은 바 있다.
스토리텔링 교육으로 손자 4명을 정승과 판서로 만든 할머니
인격체로서 대우 받은 이 가문의 여성은 스토리텔링에 의한 논리성 함양 교육으로 자녀를 양육해 명문가문의 밑그림을 그렸고, 의로운 일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남편이 과감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경여의 아내 풍천임씨는 손자들을 스토리텔링으로 교육해 3명의 정승과 1명의 판서로 만들었다.
또 3대 연속 문형을 만들었다. 그녀가 항상 무릎 위에 앉히고 옛이야기와 할아버지의 일화를 대화식으로 들려주었던 손자중에 이사명이 병조판서, 이이명과 이관명, 이건명이 각각 좌의정에 오른 것이다.
특히 아들인 이민서 손자인 이관명 증손자인 이휘지가 3대 연속 문형에 오른 청사에 빛날 업적을 남겼다.
그녀의 교육법은 백강공 신도비에 적혀있다.
첫째가 근면함이다. 스스로 일찍 일어났고, 어린 손자라도 늦게 일어나면 꾸중을 했다.
둘째가 여색 경계다. 자식이나 손자가 술을 마시거나 부녀자와 가까이 하면 엄히 훈계를 했다. 옛 고사를 인용해 이해의 폭을 넓혔다. 요즘 말로 단순훈계가 아닌 스토리텔링을 함으로써 쉽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셋째가 실천궁행이다. 그녀는 출산 후 10일 만에 손님을 맞았다. 또 겨울에 손등이 얼어터지도록 일을 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는 이에게 성의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그게 집안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손주와 자식이 조그만 태만하면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큰 인물이 되려면 자신을 닦아야 함을 역설하곤 했다.
넷째. 독서다. 임씨부인은 손주들에게 할아버지인 이경여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나랏일에 바쁜 이경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임했다. 매일처럼 피로했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책을 읽었다. 손주들에게 책 읽는 모델로 할아버지 이경여를 제시한 것이다.
<출처: 이상주 저,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