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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1884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가 쓴 책이다. 엥겔스는 1883년에 칼 맑스(1818-1883)가 먼저 사망하자 맑스가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던 저술 작업과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해야만 했는데, 이 책 또한 맑스의 유언 집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런 작업과 활동의 한 부분이다.
○ 맑스는 루이스 모건(1818-1881, 미국의 민족학자이며, 과학적 인류학의 주창자)이 1877년에 발표한 ≪고대사회≫를 읽고, 꼼꼼하게 발췌하고 방주를 달아놓았다. 엥겔스는 이것을 바탕으로 1884년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두 달 동안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하여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에서 비어있었던 부분, 인류 역사의 발자취, 선사 시대의 문제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론화하였고, 앞의 여러 저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나 여기에서 좀 더 명확하게 국가론에 대해 정리하였고, 이것은 이후 레닌(1870-1924)의 ≪국가와 혁명≫(1917년)으로 발전하게 된다. 엥겔스는 1847년에 맑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표현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문장에 대하여 1888년의 영어판, 1890년의 독일어판에서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이 말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로 씌어져 전해오는 역사를 뜻한다. 1848년에는 사회의 전사(前史), 즉 글로 기록된 모든 역사에 선행한 사회 조직은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학스타우젠이 러시아에서의 토지 공동소유를 발견하였고, 마우러는 그것이 모든 독일 종족들이 역사적으로 출발했던 사회의 기초임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부터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토지 소유를 가진 촌락공동체들이 사회의 원시적 형태였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원시 공산주의 사회의 내부 조직은 마침내, 씨족의 참된 본성과 종족 내에서의 그 지위에 대한 모건의 최종적 발견에 의해서 그 전형적인 형태로 밝혀졌다. 이 본원적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특수한 계급들로의, 그리고 상호 대립적인 계급들로의 사회의 분열이 시작된다. 나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이 해체 과정을 추적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위해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뿐만 아니라 가족의 기원과 본질에 관해 이론적으로 명백하게 할 필요가 생겼고,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 독일의 사회주의자)은 ≪여성과 사회주의≫(한국에서는 ‘여성론’으로 번역ㆍ출판되었다)를 1879년에 출간했다. 여기에서는 여성억압의 역사적 원인들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했다. 베벨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출판되자, 완전히 책을 개편했고, 엥겔스의 책을 가족사 서술을 위한 토대로 삼았다.
○ 한국에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1986년에 처음으로 아침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 2012년에 두레에서 같은 역자에 의해서 다시 출판되었다. 역자 김대웅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74학번으로 백산서당의 편집장을 하면서 원전을 번역하는 일을 했고, ≪경제사 입문≫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민예총 국제교류국장, 문예진흥원 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냈고, 현재 서울 아트센터 대외협력이사로 있으면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1891년 제4판 서문
○ 엥겔스는 여기에서 바호펜부터 모건에 이르는 가족사에 대한 견해의 발전을 개괄하여 정리했다. 가족사의 연구는 요한 J. 바호펜(1815-1887, 스위스의 인류학자)의 ≪모권론≫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한다. ①인류는 최초에 무규율적인 성교(‘난혼’이라는 부적당한 말로 표현)생활을 하고 있었다. ②이러한 관계는 아버지를 확정할 온갖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혈통은 모계에 따라서, 즉 모권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고대인들은 모두 그러했다. ③그 결과, 여자는 어머니로서, 즉 젊은 세대의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부모로서 높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으며, 바호펜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여성지배에 도달했다. ④여자가 오로지 한 남자에게 속하는 단혼으로 이행하는 것은 태고의 한 종교적 계율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침해에 대해 여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속죄해야만 했다.
○ 바호펜에 따르면 남녀 상호 간의 사회적 지위에서 역사적 변천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의 현실적 생활조건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조건들이 사람들의 두뇌에 종교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세계사의 결정적인 공간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결국 신비주의로 빠져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연구자로서 그의 공적이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해 주었는데, 그리스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단혼이 있기 전에 한 남자와 여러 여자 사이뿐만 아니라 한 여자와 여러 남자 사이에도 관습에 저촉되지 않고 성교를 맺었던 사례가 실제 있었음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이 이미 소멸되기는 했지만 그 흔적은 여자가 일정한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모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고, 아이들의 유일하고 확실한 부모로서의 어머니의 지위는 동시에 여성 일반에 대해, 그 후에는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는 것 등을 논증해 주었다.
○ 바호펜 다음의 후계자는 1865년에 나타난 존 F. 맥레넌(1827-1881, 스코틀랜드의 인류학자)이었다. 그의 공적은 족외혼이란 것이 곳곳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큰 의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데 있었다. 맥레넌은 단지 세 가지 혼인형태, 즉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그리고 단혼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공유하는 혼인형태가 미발전 종족들 사이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존 러벅(1834-1913, 영국의 은행가, 고고학자,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1870년에 이 군혼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871년에 루이스 H. 모건은 새로운 그리고 많은 점에서 결정적인 자료를 발표했다. ≪친족제도와 인척제도≫라는 저서를 통해 ①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제도는 아시아, 그리고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해도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많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 ②이 제도는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섬들에서 지금 소멸 단계에 있는 군혼 형태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 ③그런데 그 섬들에는 이 혼인 형태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더 원시적인 군혼 형태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제도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바로 여기서 지금 이 연구의 토대가 되는 ≪고대사회≫(1877년)가 출발했다. 원시사에서 시초의 모권제 씨족이 문화 민족들에게 널리 알려진 부권제 씨족의 선행 단계라는 이 새로운 발견은 다윈의 진화론이나 맑스의 잉여가치론이 각각 생물학이나 정치경제학에서 지니는 의의와 같은 것이다.
1장: 선사 시대 문화의 단계들
〇 루이스 H. 모건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인류의 선사에 일정한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야만, 미개, 문명이란 세 시기를 구분하고 앞의 두 시기와 세 번째 시기로 이행하는 단계를 연구했다. 두 시기를 식품(생활수단) 생산의 발전에 따라 다시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각각 구분하고 있다.
〇 야만의 낮은 단계: 인류의 유년기로 인간들은 열대나 아열대의 삼림 속에서, 일부는 나무 위에서 살았고, 분절언어가 발생한 것이 이 시기의 주요한 성과이다. 야만의 중간 단계는 어류(갑각류, 패류, 기타 수생동물 포함)를 잡아먹고 불을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야만의 높은 단계는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시작된다.
〇 야만의 중간 단계: 어류 섭취 및 불의 사용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후나 지리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야만 상태에서조차 하천과 해안을 따라 지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에 만든 석기들은 전부나 대부분이 이 시기의 것들인데, 이것들이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는 사실은 그처럼 널리 이동했다는 증거이다. 새로운 음식, 즉 전분을 함유한 뿌리와 괴경(덩이줄기)을 뜨거운 재나 불구멍(흙 아궁이) 속에서 구워 먹을 수 있었으며, 최초의 무기인 몽둥이나 창을 발명함으로써 짐승 고기 등을 보충 음식으로 쓸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및 폴리네시아인들은 지금도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
〇 야만의 낮은 단계: 인류의 유년기로 인간들은 열대나 아열대의 삼림 속에서, 일부는 나무 위에서 살았고, 분절언어가 발생한 것이 이 시기의 주요한 성과이다. 야만의 중간 단계는 어류(갑각류, 패류, 기타 수생동물 포함)를 잡아먹고 불을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〇 야만의 높은 단계는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시작된다. 이로써 짐승 고기가 일상적 음식이 되고, 수렵이 정상적인 노동의 일부가 되었다.활과 시위와 화살은 이미 매우 복잡한 도구였는데, 이 발명은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과 더욱 세련된 지역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했다. 이 때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불과 돌도끼로 통나무배를 만들 수 있었고, 집을 짓는데 각재(긴 원목의 통을 네모지게 쪼개 놓은 재목)와 널빤지를 사용했다.
〇 미개의 낮은 단계: 토기제조법을 터득하면서 시작된다. 미개의 특징은 동물을 길들이고 사육하며 식물들을 재배하는 것이다. 때문에 두 대륙의 자연조건의 차이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동부대륙 즉 구세계는 모든 동물과 대부분을 식물을 길들이고 재배할 수 있었으나, 서부대륙 즉 아메리카는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은 라마뿐이었고, 재배할 수 있는 식물은 옥수수뿐이었다. 이 자연조건의 차이로 두 반구의 주민은 다른 길로 발전하게 되었다.
〇 미개의 중간 단계: 동부대륙에서는 가축을 길들이는 것에서 시작하고, 서부 대륙에서는 관개를 통해 식용작물을 재배하며 아도브(햇볕에 말린 벽돌)와 돌을 건축에 사용하면서 시작된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인류는 철광석을 제련하고 문헌을 기록하는데 문자를 이용하면서부터 문명으로 이행한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들이 발견된 당시 옥수수, 호박, 참외, 기타 야채의 재배법을 알고 있었는데, 이 작물들은 그들에게 매우 유용한 식량이었다. 콜롬비아 강 유역 주민들은 여전히 야만의 높은 단계에서 토기 제작법, 식물 기르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뉴멕시코에 사는 푸에블로라는 원주민, 멕시코 인, 중앙아메리카 인 및 페루 인은 정복 당시 미개의 중간 단계에 있었다.
〇 모건의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야만: 주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산물을 가져다 쓰는 시기로 인간이 만든 것들은 주로 그 자연 산물을 가져다 쓰기 위한 보조도구로 사용된다.
미개: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로 인간의 활동을 통해 자연물을 더 많이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이다.
문명: 자연물을 한층 더 낫게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는 시기로 본래적 의미에서 공업 및 기술의 시기이다.
2장: 가족
〇 원시사 연구가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남편들이 다처제 생활을 하는 한편 그 아내들도 다부제 생활을 하며, 이에 따라 쌍방의 아이들이 그들 모두의 공동의 자녀로 인정되었던 상태가 있었다. 한 부족 내에서 구속 없는 성교가 지배하는 원시 상태, 즉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해 있던 원시 상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 자체가 최종적으로 단혼으로 이행하기까지는 숱한 변천을 겪는다. 즉 공동부부의 유대가 포괄하는 범위가 처음엔 아주 폭넓다가 점차 줄어들어 나중에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한 쌍 한 쌍의 부부만이 남게 된다. 모건에 따르면 무규율 상태의 원시 상태로부터 다음과 같은 가족형태가 발전해 나왔다.
〇 ① 혈연가족: 가족의 첫째 단계
여기에서는 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되어 있다. 선대와 후대 간에서만, 즉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서는 서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배제된다. 친형제와 친자매, 종형제와 종자매, 재종형제와 재종자매는 모두 형제자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부이다. 현재는 전멸한 이러한 가족형태로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하와이식 친족제도와 이후의 가족의 전체적인 발전이 이러한 가족형태를 필연적인 선행 단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〇 ➁ 푸날루아 가족(군혼의 최고 형태)
푸날루아란 원래 남편이나 아내를 공유한 배우자들을 이르는 하와이 말이었던 것을 모건이 쓴 것이다.가족의 조직에서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 제1의 진보라면, 제2의 진보는 형제와 자매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푸날루아 가족(원시 상태에서 집단결혼이 허용된 가족형태)은 일정한 수의 친자매 또는 방계의 자매는 그들의 공동남편들의 공동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그들의 공동남편 중에서 제외되었다. 이 남편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푸날루아(친근한 동료, 동반자)라고 불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계열의 친형제 또는 촌수가 먼 형제들도 자기의 자매를 제외한 일정한 수의 아내와 공동결혼생활을 했으며, 이 아내들도 서로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이 가족의 주된 특징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아내 쪽의 친형제, 나중에는 촌수가 먼 형제가 배제되었으며,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도 남편의 자매가 배제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가족제도에서 전연 무의미하던 조카와 조카딸, 종형제와 종자매라는 촌수가 필요하게 된다. 씨족이라는 제도는 대부분 푸날루아 가족에서 직접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 반족(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종족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반족혼은 푸날루아 가족보다 덜 발달한 군혼형태로서, 한 반족의 전체 남자들과 다른 한 반족의 전체 여자들이 집단결혼을 한다) 역시 씨족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나, 그들에게는 씨족제도는 있으나 푸날루아 가족은 없고, 훨씬 미숙한 군혼 형태가 있다. 군혼 가족제도에서는 형태에 상관없이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어도 누가 아이의 어머니인지는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전체 가족의 모든 자녀를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며, 또 그들의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진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역시 자기의 친자녀들을 다른 아이들과 구별한다.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모계만이 인정된다. 바호펜은 모권이라고 부르지만 원시 공산제 사회는 평등했기 때문에 모계가 모권은 아니다. 모든 형제와 자매 간의 성교가 금지되고, 나아가 어머니 쪽의 가장 먼 촌수의 방계 친족끼리의 성교까지 금지되자 한 집단의 친자매들과 방계자매들은 씨족으로 전화했다. 즉 서로 결혼해서는 안 되는 모계 혈족자들의 공고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푸날루아 가족으로부터 씨족으로 발전한 것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고 인정한다면, 씨족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종족, 즉 거의 모든 미개인과 문명인이 과거에 이러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배적인 전체 반족 사이의 결혼은 원시적이고 아주 저급한 군혼형태이지만, 푸날루아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군혼의 최고 발전 단계이다. 전자는 유랑하는 야만인의 사회 발전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며, 후자는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상당히 확고한 정착을 전제로 하며, 더 높은 그 다음 발전 단계로 직접 이어진다. 이 두 결혼형태 사이에도 많은 중간 단계가 있었지만, 아직은 새로운 연구 영역이다.
〇 ③ 대우혼 가족
결혼 금지가 더욱 복잡하게 되자 군혼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어 대우혼 가족으로 대체되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한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계속해서 일부다처제의 권리와 때로는 정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었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같이 사는 동안 정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 그들의 간통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이전의 가족형태에서는 여자의 부족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여자가 부족하여 약탈과 매매가 시작되었다. 아내를 얻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 이 징표에 대해 ‘약탈혼’이니 ‘매매혼’이니 하는 특수한 가족형태가 있는 것처럼 맥레넌은 꾸며냈다. 대우혼 가족은 그 자체가 아직 극히 미약하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대를 요구한다거나, 심지어 그렇게 할 생각조차 못했다. 따라서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원시 공산주의적 세대를 결코 해체시키지 못했다. 원시 공산제 사회는 가정에서 여성의 지배를 의미한다. 여자가 대부분 또는 모두 같은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는 여러 씨족에 분속되어 있는 원시 공산주의적 세대는 원시 시대의 어디에서나 일반적이었던 여성지배의 현실적 토대이다.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부의 원천이 조성되었고, 전혀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선진적인 목축민들은 말, 낙타, 나귀, 소, 양, 산양 및 돼지 등의 가축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나 하고 웬만큼 거두어만 주면 끊임없이 대량 번식하여 젖과 고기를 아주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재부는 일단 개별 가족의 사유재산으로 넘어가서 번식이 빨라지자 대우혼과 모권 씨족에 입각한 사회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대우혼은 친어머니와 함께 친아버지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해 남편은 자녀들을 위해 기존의 상속 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 혈통을 따졌던 시기에는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고 폐지되었다. 실로 이 혁명(이것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의 하나이다)은 살아있는 씨족 성원 단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이전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앞으로는 남자 성원의 자손이 씨족에 남아 있어야 하고, 여자 성원의 자손은 자기 아버지 쪽 씨족으로 넘아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결정을 하였다. 이것으로써 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 상속은 폐지되고, 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 상속이 도입되었다. 엥겔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도구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이렇게 확립된 남성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가족이라는 중간형태이다. 모건의 ≪고대사회≫는 이렇게 묘사한다. “토지를 소유하고 가축 떼를 돌보기 위해서 일정수의 자유민과 비자유민(노예)을 가장의 권력하에 하나의 가족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 이 가장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 … 비자유민은 한 명의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 비자유민이 가족의 성원이 된 것(파물루스[famulus]는 가내노예를 의미했고, 파밀리아[familia]는 한 사람에게 종속된 노예의 총체를 의미했다)과 가장의 권력이 핵심인데, 이런 가족 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는 지역에서는 가부장적 세대공동체가 있었다.
〇 ④ 일부일처제 가족
이것은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만이 이 유대를 끊고 아내를 버릴 수 있으며, 이 단계에서도 남편은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를 관습상 보장받고 있다(나폴레옹 법전).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ㆍ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대우혼과는 달리 결혼 유대가 더 공고해서 어느 편에서나 마음대로 이를 끊을 수 없다. 남편은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를 관습상 보장받고, 사회가 한층 더 발전함에 따라 그 권리는 더 확대되었다. 반면에 아내가 지난날 성생활 습관을 잊지 못해 그런 내색을 한다면 더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이 형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거나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이고 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 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 형태였다. 가족 내에서의 남편의 지배와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야 할 확실한 자기의 자식을 보자는 것이 그리스 인이 공공연히 선포한 단혼의 유일 목적이었다. 이처럼 단혼은 결코 남녀 사이의 합의에 의한 결합으로써 역사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한 성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이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양성 간에 존재하는 모순의 선언으로서 나타난 것이다. 개별 가족은 자체의 역사적 기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남편의 전제적 지배로 인해 가족 형태에서 남녀 간의 적대감이 명백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개별 가족이란 문명기 초기에 계급으로 분열된 이후부터, 사회가 해결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었던 사회적 대립과 모순의 축소판이다. 단혼은 게르만 인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과 더불어 가장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게르만 인들 사이에서는 그 빈궁으로 말미암아 아직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 완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에서 최대의 도덕적 진보는 일부일처제 덕으로 이뤄진, 과거의 어느 세계도 알지 못했던 개인적 성애이다. 그러나 이 발전은 게르만 인이 아직 대우혼 가족 시대를 살았고, 이에 상응하는 여자의 지위를 가능한 한 일부일처제로 옮겨 놓게 한 사정 때문이지, 전설적이며 놀라울만큼 도덕적으로 결백한 천성 탓은 아니다.
〇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애가 하나의 규범으로 될 수 있고, 또 되고 있는 경우는 오로지 피압박계급 사이에서, 오늘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뿐이다. 이 계급에서는 고전적 일부일처제의 기초도 모두 제거되어 있다. 남성의 지배와 일부일처제란 재산의 보존과 상속을 위해 이룩된 것인데, 그들에게는 이런 재산이 없기 때문에 남성 지배를 확립할 데 대한 아무런 동기도, 그렇게 할 수단도 없다. 남성 지배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법은 오직 유산자들을 위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에 노동자의 아내에 대한 지위에는 아무 효력도 갖지 못한다. 그 경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이와 전혀 다른 개인적, 사회적 관계들이다. 대공업으로 인해 여자가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나와 종종 가족의 부양자로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의 남편의 지배는 그 마지막 잔재마저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가족은 쌍방이 열렬히 사랑하고 정조를 엄격히 지키는 경우에서조차, 가지각색의 종교적 의식이나 세속적 의식을 다 지녔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일부일처제적 가족이 아니다. 아내는 이혼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회복했고, 당사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경우라면 차라리 이혼해버린다. 요컨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의 결혼은 어원학적으로 일부일처제적일지라도, 그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〇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현대 사회는 순전히 개별 가족이라는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오늘날 남편은 대부분, 적어도 부르주아 계급은 돈을 벌어야 하고 가족의 부양자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돈이 그에게 지배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법률상의 어떤 특권도 별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지이고 아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러나 산업 분야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법률상 특권이 모두 제거되고, 두 계급 사이에 법률상 완전한 동등권이 수립된 후에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경제적 억압의 특성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해서 이 두 계급의 대립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는다. 반대로 민주주의 공화국은 이 대립의 해결을 위한 투쟁의 기초를 만들어놓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부가 법률상 완전히 동등해졌을 때 비로소 현대 가정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의 특성, 그리고 부부간의 진정한 사회적 평등을 수립할 필요성과 그 방법도 역시 완전히 해명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〇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결혼에는 대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 단계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 시대에는 군혼, 미개 시대에는 대우혼, 문명 시대에는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일처제가 있었다. 이 진행 과정의 특징은 군혼 시대의 성적 자유를 여자는 점차 박탈당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고, 사실상 남자는 오늘날까지도 실질적으로는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일부일처제의 경제적 기초가 다가올 사회적 변혁에 의해 사라진다면 일부일처제는 제대로 실현될 것이고, 남자에 대해서도 현실이 될 것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결혼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에 기초한 소유관계가 지양됨으로써, 오늘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는 그 모든 부차적인 경제적 고려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미 상호 간의 애정 이외의 다른 아무런 동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한 후에 자리 잡을 양성 관계의 형태는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며,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거부하지 않을 때 확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