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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9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 한성일 목사 -
사도행전 19:1-7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찬양: 여기에 모인 우리 (다음에는 ‘성령이 오셨네’ 로..)
<성령님을 주인으로…>
타 교회 초청 예배 인도 등으로 그 교회 담임 목사님 댁이나, 교인의 집에서 하루 이틀 신세 질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집 주인 되시는 분들이 꼭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푹 쉬세요’
감사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듣고 정말 집 주인 처럼 아무 방이나 열어보고 장롱, 냉장고 등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니면 아마도 그 주인은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무리 내 집이다 생각하고 쉰다 하지만, 주인은 아니기에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도 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누군가 부탁 하기 전까지는 물로 포도주를 바꾸지 않으셨던 것 역시 손님이었기에 그랬습니다.
성령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성령의 임재하심이 가득해 보이고 저 사람을 통하여 많은 일들을 해 나가시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럴까..? 생각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셨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시면 역사를 안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못 하시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 혹 마음이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하여 분주할지라도,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실 말씀에 집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받지 못한 에베소 제자들>
오늘은 초대 교회 이야기를 시작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럽 지역까지 번지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물론 사도라 불리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바울 역시도 예수님의 직속 제자는 아니었지만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제자 보다 더욱 활발하게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바나바, 아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인물, 또 그 외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복음전파에 힘을 쏟았는데, 사실 이 사람들 외에도 비록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함께 도와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라 생각 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서신서를 보내는 교회들도 나오고, 계시록에도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도 나오고 하는데, 거기 보면 칭찬 받는 교회, 책망 받는 교회도 있지요. 그런데, 지금이 만일 초대교회 시대라면 영국에 있는 우리 ‘엑시터 민트교회’도 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우리 교회를 보면서 어떤 교회라 말할지 어떤 메시지를 줄지 궁금 합니다.
‘주의 형제 된 사랑하는 엑시터 민트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니.. ‘ 하면서 우리 교인들의 이름도 거론 될텐데.. 어떤 면에서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것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아직 부족하여 책망 받을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방문 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있던 성도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이 도대체 뭡니까?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았습니까?”
“우리는 그저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만 들었고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 가르침을 받고 그렇게 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세례를 받을 적에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냥 회개하고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의식이고 그래야 구원 받는 정도로만 두리뭉실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 기억해 보면 당시에 어떤 큰 감동 없이 세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런 교회들이 사실 많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는 다니지만 성령과의 교통 없이 살며 참 능력 없는 신앙생활 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저는 믿기를 이것은 지도자의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경험해보니 지도자가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따르는 무리도 성령 충만해지기 어렵습니다.
에베소에도 왜 이런 일이 일어 났냐면 사실 바울 일행이 에베소 교회에 오기 전에 이 곳에서 복음을 전하던, 오늘 말로 목회를 하던 사람이 아볼로 라는 인물이었는데 지도자였던 그가 바로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것입니다.
행18장에 보면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때의 상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열심으로 목회는 하나, 성령을 가르치지 아니하니 평신도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이 사람 아직 잘 모르는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더욱 정확하게 풀어 알려주는 모습이 나옵니다.
지도자가 성령을 모르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알 방도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참 중요하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의 신앙을 돌보는 것은 부모인데, 부모가 성령충만하지 않고 기분 내키는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녀의 신앙을 지도한다면 그 자녀의 신앙도 부모의 신앙을 닮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볼로라는 인물이 전혀 형편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 처럼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바울 등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감당 했던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그럼 이 아볼로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볼로 VS 바울>
아볼라는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됩니다. (ppt)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학문이 많은 사람
성경에 능통한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사람
언변이 좋은 사람
이렇게 아볼로를 보면 갖출 것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에다가 바울과 같이 학문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닥터 같은 사람 입니다.
더불어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성경에 능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고, 평신도 분들도 그렇게 생각 하실 텐데, 목사나 전도사는 성경을 완전히 꽤뚫고 있다고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비록 책 한 권 이지만, 이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역사적 분량이 얼마나 많고, 지리적 분량, 문화적 분량이 방대한지 모릅니다. 그러한 배경을 다 알기도 어렵지만, 다 안다고 해도 성경을 관통하는 지식을 갖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또 더 깊게 의미를 파악하려면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볼로는 유대사람이었으니 히브리어는 모국어였을 것이고 당시가 헬라문화 아래서 살았으니 헬라어도 almost native 수준이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정말 부러운 사람입니다.
게다가 아볼로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자라 하였습니다. 열정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거의 최고 수준의 목회자이며 어느 교회에서도 반길만한 목회자입니다.
이에 더불어 마지막으로, 아볼로는 지식만 충만한 자라 아니라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바울은 사실 글은 잘 써도 언변에서는 많이 뒤쳐지는 자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에는 바울 파와 아볼로 파가 나뉘기도 하였는데, 달변을 중요시했던 상류층 사람들은 아볼로를, 하류층 사람들은 바울을 지지하며 교회 내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글은 잘 쓰지만 말의 능력은 떨어지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다소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아볼로의 이런 언변의 능력도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할 때 조그만 메모에 큰 소제목만 몇 개 써갖고 나와도 술술 설교가 풀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그런 분들 설교는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고 단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원고를 작성할 때 문장 하나 하나를 다 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메모만 해서 전달을 하면 제가 말 제주가 부족하기에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교정하고 또 교정하면서 가능하면 내용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은혜가 전달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쓴 문장들을 또 외워야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게 여러분 얼굴을 바라보면서 설교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젊으니 설교문을 외울 수 있는 몸이 되는데, 앞으로 나이 들면 어떻게 하나 가끔 걱정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이 언젠가 달변의 은사를 받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많은 목회자 후보생들이 말하기를 신약성경에서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을 들라 하면 많은 이들이 바울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아볼로 같은 목회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겉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는 목회자입니다. 인기 있는 목회자입니다.
아볼로는 왠지 얼굴도 잘생겼을 것 같아요. 아주 호감형이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대머리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결혼하는 것보다 ‘나와 같이 싱글로 남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는데, 어떤 사람은 바울이 대머리 였기에 하도 여자에게 차이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울은 또 성격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다소 냉정한 면이 강했고, 교회에서 조금만 잘못했다 싶으면 그냥 내 쫒으라 하고, 공동체나 사람에게도 쓴 소리를 단호하게 잘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미가 없어 보이고 특히 여자들이 볼 때는 전혀 매력 없는 스타일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 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볼로가 아닌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바울에 비하여 결코 뒤쳐질 것 없어 보이는 아볼로를 제치고 바울은 위대한 사도로,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의 서신서를 완성하는 위대한 인물로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아볼로와 다른 차별성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성령충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아볼로는 성령을 모르는 자였고, 바울은 비록 말도 잘 못하고 성격도 다소 둥글둥글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충만으로 사는 것을 중요시 하였을 때,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삶을 따라 능력 있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저는 많이 경험하고 삽니다. 우리 삶에 성령 충만함이 없으면 능력 있는 삶, 에너지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일이든 어떤 일이든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성령의 충만함이 없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매우 건조합니다.
저는 설교하면서 제가 먼저 압니다. 오늘 내가 성령으로 설교하는지, 아니면 건조한 설교를 하는지 먼저 압니다. 때로는 우리 찬양팀이 성령이 충만함으로 찬양하는지 아니면, 노래는 잘하는데 건조함으로 찬양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에는 언제나 열매가 있습니다. 그 말씀과 찬양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회개가 나타나고, 거룩한 다짐이 생기고, 기쁨이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에는 아무리 잘 짜여진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 번은 주일 예배 후에 청년들이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갔다는 것을 들었는데, 다들 식사를주문 하면서 음료를 시키는데 그 중에 한 형제가 평소와 달리 와인인지 아무튼 술을 시키지 않더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러냐 물으니 오늘 예배 드리고 은혜 받아서 술 먹으면 안되겠다고 소프트 드링크를 시켰다는 겁니다.
제가 안보고 안듣는 것 같아도 다 압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회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건조한 예배나 모임을 통해서는 이런 열매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의 경우 예배를 드리고 2차로 술 마시러 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저는 어릴 적 성남에서 자랐는데 제가 다니던 동네 고향 교회에서는 고등부 학생들이 예배는 임원회의를 어디서 했는 줄 아세요? 호프집에서 자주 모였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이나 담당 전도사님이 아셨다면 기절할 일이었을 겁니다.
이제서 기억해 보면,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와 담당 전도사님이 아마도 그리 성령 충만한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22살 경에 성령 충만한 지도자를 만나게 되며 그 분의 인도하심 가운데 말씀이 제 영혼을 찌르기 시작하고, 예배를 통하여 성령을 받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술도 그 무렵 완전히 끊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니 22살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토바이 타고 새벽이고 밤이고 날마다 교회 가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은혜가 더 깊어지게 되며 결국 오늘 날 이렇게 목사까지 되었잖습니까? 젊은 날 만난 성령의 인도하심이 한 젊은이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한 곳에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성령이 충만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에베소 교회에도 바울을 통하여 성령이 충만하여지니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을 모르던 교회에 성령의 세례를 베풀고 성령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그 성령의 은혜가 그들에게도 옮겨졌습니다. 성령을 받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최근에 한 집사님이 방언을 받았는데, 담임목사로서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또 이어지는 10절에 보면 한 성령이 충만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니 두 해 동안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 헬라인 할 것 없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역사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권능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날 교회 위에 하나님의 권능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부흥을 위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세미나도 해 보고, 전도행사도 해 보고, 셀 목회가 좋다고 하니 속회 이름도 바꾸어 셀이니, 목장이니 바꾸어 봅니다.
총동원 전도주일도 해 보고, 행복한 부부학교, 아버지 학교 등 이것 저것 교회 부흥에 도움된다는 것은 다 해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사에 한 가지가 빠지면 모두 행사에 지나지 않는 오히려 에너지만 고갈하는 행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권능이 있을 때 우리 교회들에 부흥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이 최고로 쓰시는 사람은 학벌이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성서학 교수도 아닙니다.
열심만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 최고로 쓰이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성령이 있는 자 인줄로 믿습니다. 다른 것이 다 부족해도 마음에 성령님이 함께 계시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18절 다시 한 번 크게 읽을까요?
성령 충만한 것을 술 취하는 것과 비교해서 말합니다. 왜 술과 비교할 까요? 그 두 가지에 공통된 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술에도 취해보고, 성령에도 취해 보았잖습니까?
술이 취하면 어떻습니까? 일단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아무리 안 취하게 마신다 하지만 우리 뇌가 어떻게 1%도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1% 만큼이라도 우리는 정신을 잃는 겁니다.
성령에 취하는 것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성령의 정신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또 한가지 공통점은 겁이 없어지는 겁니다. 술 마시면 겁이 사라지면서 객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좋지 않은 모습의 겁상실 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성령에 취하면 하나님의 권능을 입기에 용기가 생깁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세상 사방에 유혹하는 것과 시험하는 것이 많아 성령 충만에 방해가 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까지 그 충만함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매달리십시오.
성경에도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성령 충만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창세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렵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 자녀에게 돌을 주겠냐고 하시던 예수님의 비유가 있는데, 그 비유의 결론적 목적은 바로 ‘아버지에게 성령을 달라고 하면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로 마치게 됩니다. 구하기만 하면 준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할 때 아직까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분명히 약속하신 겁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또한 오래 전에는 성령 충만했는데, 요즘 들어 시들해진 분들이 있다면 역시 성령 충만을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되돌아 다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뒤로 도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성령 충만한 여러분과 우리 교회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