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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여인)를 기억하라 |
최만자 |
성서본문 : 마태복음 14:3-9, 갈라디아 3:28, 창세기 1:26-28 따라서 학문의 영역에서나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삶의 영역 등 모든 영역에서 그 관계들을 새롭게 이루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우리들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종속적 존재로 간주하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구조를 벗어나서 상호적이며 동등한 남녀협력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실제로 그 지위나 역할, 활동범위 등에서 남녀의 관계가 재검토되고 있으며, 상호적인 관계로 바뀌어지는 일이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 수상들도 출현하고 있으며 각 분야에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성공회가 여성사제를 배출함으로써 오직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허용하고 있는 카톨릭 쪽에도 일정정도의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전근대적 특성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여성차별이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의 여성차별의 대표적 내용은 대부분의 교회가 여성들을 성직에서 배제하고 있으며, 모든 결의기구로부터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있고 여성들을 그 능력에 따라 평가하고 직분을 맡기기보다는 그 성별을 근거로 하여 대체로 가사노동의 연장선에서 봉사와 희생적 성격의 역할을 주로 책임 지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이 여성예배는 바로 그러한 변화들 속에서 기독교 안에서의 남녀관계의 현실을 정리해 보고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는 남녀관계가 과연 성서로부터 조명해 볼 때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하고 성서의 참된 진리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에게 값진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비판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있고, 그 다음 예수께서 그 여인을 편들고 있으며, 나아가 그 여인이 행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를 기억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사실 우리들은 이야기의 내용을 세밀히 기억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들은 많은 의미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들려지는 말씀은 이 여인을 기억하라는 예수의 당부를 우리가 너무도 철저하게 망각하고 있었음에 대한 자책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 여인의 행위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한 무명의 여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차별적 시각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향유를 예수의 머리가 아닌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발을 닦는, 보다 낮은 자세를 가지는 모습으로, 초라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또 이 여인을 기억하라고 하는 예수의 당부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누가의 관심은 이 여인을 죄 많은 가련한 여인으로 보이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를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신학적 관심에 집중하였고 그래서 이 여인을 보다 죄 많은 모습으로 드러내고자 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이야기에다가 빚을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연결시켜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귀한 향유를 바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형은 그 여인의 모습을 보다 가부장적 틀 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 여인이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 동일한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고, 또한 손님의 발에 기름 붓는 평범한 일(그 당시에 자기 집에 온 손님의 발을 씻기는 관습이 있었다)의 이야기라면 복음의 선포로서 기억되고 반복될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며,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이 보다 원형적인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머리에 기름 붓는 행위는 구약성서에서 예언자가 유다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며, 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어, 이 여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스스로 예언자적 행동을 취했고, 예수를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로 명명한 사람은 성서에서 오직 이 여인 한사람뿐입니다. 그 여인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예수의 메시아성을 예민하게 감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를 쫓아다니던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유다이고 다른 한 제자는 바로 이 향유를 부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다 아는 바대로 베드로와 유다는 그들의 행위가 부정과 배반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잘 기억되어져 왔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곳에서 그리고 성만찬이 행해지는 때마다 예수의 수난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곳에는 언제나 그 남자 제자들의 이야기는 전해졌지만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가 14:9)라고 말씀하신 이 여인에 대한 기억은 교회 안에서는 매우 희미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조차도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나마 바울은 그의 여성 동역자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로마 16: 1-15).
우리나라 초기 교회가 수많은 여성들(전도 부인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성안수를 금지하는 등 한국교회도 또한 여성들을 망각하였고 그것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메시아를 인지하는 일이나 참 제자직의 수행을 하는 일에 있어서나 그 모두가 여성들에 의하여 그 참 범례(paradigm)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 교회는 참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 이후로 오늘까지 교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여성에 의해 보여진 참 제자직의 범례를 알지 못한데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메시아 됨이 고난의 길이라면 그를 따르는 제자됨 또한 그 고난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받는 메시아를 인지한 것은 남성 제자가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고난받을 일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 8-10장에서 세 번씩이나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남자 제자들은 그 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였고 용기 있는 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니다"라는 훌륭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난받을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는 사탄이라고까지 야단을 칩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9:35)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주께서 영광 받으실 때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남자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아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감람산에 기도하러 갔으나 그들은 잠만 잤을 뿐 예수의 고난의 무게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씩 부인했고 유다는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마가는 향유 붓는 여인의 이야기 직후에 유다의 배반 사건을 기록하여 남자 제자와 여자 제자 사이에 커다란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요구한 제자 됨은, 이교도적 지도권이 권력과 지배에 기초되어 있는데 반하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지배의 그러한 가부장적 관계들이 금지된다는 것이며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선교와 그의 본성과 사역의 정체성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의 체포와 처형 동안에 그를 배반하고 부정하고 버리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예수의 안타까운 질책에도 불구하고 고난받는 제자직에로의 부름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고난받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알았습니다. 또 이 여인 이외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 올라왔고 그를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8:1-3절에는 여러 여인들이 그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 공동체를 섬겼다고 하며 마가 15:40-41절에는 예수를 따른 여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여인들이 마가 8-10장에서 말하는 대로의 참된 제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이 여인들의 행동을 보시고 참 제자직의 범례가 바로 저런 따름과 섬김이구나 하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제자 됨의 범례를 말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여인이 고난받는 메시아로서 예수를 인지할 수 있었던 그 예민한 감수성은 어떻게 이 여인에게서 형성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무명의 여인의 그 큰 감격은 그만큼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그의 삶이 억압적인 상태였으리라는 짐작을 갖게 합니다. 여성들의 경험에 의한 분석에 의하면 여성들은, 다른 사람 곧 여성의 노동과 성을 당연하게 소유하고 이용해온 남성들에 비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이나 인간의 대상화에 대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억압을 체험적으로 느껴온 터이라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고 감정이입적 자기동일시를 쉽게 이룰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자신의 억압 경험 속에서 갖게 된 새로운 역사에 대한 진정한 비전이 예수의 행함과 일치되었기에 그가 메시아이신 줄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성성은 기존의 병든 문명을 치유할 커다란 잠재력을 가졌으며, 인간과 자연 관계를 지금까지 규정해온 이원론을 극복할 가능성은 우주질서를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상호의존성을 인식해온 여성들에게서 찾아질 가능성이 크며, 그 여성들은 지배적 위치에서 소외되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억압당해온 집단은 자신을 의심하고 성찰하는 습성이 있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감정 이입적 이해의 능력을 가졌으므로 더욱 인간적이며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드는데 중요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근본적 질서의 변화를 못 보았고 다만 새로운 세상은 그들이 대신 권력집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더 큰자인가 그리고 누가 권좌의 오른편에, 왼편에 앉을 것인가에 대하여만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보다 발전된 방향으로 정리하여 봅시다.
우리들의 근거는 다만 우리가 얼마만큼 고난받는 메시아의 사역에 동참되고 있는가에 의하여 우리 스스로가 판단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입니까? 감정 이입적 자기 동일시를 얼마만큼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극복하는 지향점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지향은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나면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절에는 "유대사람이나 그리스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담고 있는 신인합일의 신비한 체험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어떤 영적 체험으로서의 신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3:28절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세례의식을 베풀 때 읽었던 신앙고백문이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신의 형상은 오직 왕에게만 부어진다고 생각하였고 왕만이 신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모든 인간이 왕과 같이 귀한 존재임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은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고 있어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적 존재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관련되는 많은 논쟁의 여지를 뒤로 하고 한가지 우리들이 주목할 점은 창세기 1장도 창세기 2장도 모두 성서기자의 의도가 하나님이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임을 선언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저자에게는 남녀차별의 의도가 없습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했다하여 아담에게 여성이 종속된다면 아담은 흙에서부터 취하였으니 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되지 않습니까?
'하와를 만들다'에 사용된 '만들다'라는 동사는 망대를 세우거나 성벽을 짓는 것과 같은 오랜 시간 노동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하와의 창조에 아담의 역할을 배제함으로써 여자의 창조주가 오직 하나님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남자도, 하와-여자도 모두 하나님의 생기로 인해 그 호흡이 달려 있는 인생일 뿐입니다. 모든 인생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귀한 존재로서 내일의 역사는 남녀협력의 공동역사와 문화창조가 되어야 하겠고 그 일을 위해서 이제 그 여인을 기억하는 교회로 새롭게 출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향유 부은 여인을 기억함으로써 그 여인을 편드신 예수를 볼 수 있듯이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을 편드는 모든 남성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성안수를 위해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을 겁내지 않고 여성들과 함께 총회에 도전했던 1933년의 함남노 회장이나 1934년의 김춘배 목사와 같은 분들입니다.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이 함께 협력하며 걸어나가는 그 시작을 여기 모인 우리들이 담당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 이 말씀증거는 1993년 9월 12일 새길교회에서 행해졌습니다.
여성신학자 최만자 님은 <한국 여신학자 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여성운동에 참여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