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이 참 이쁩니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우리의 싸움은 참 행복합니다.
그날 3박4일간 밀양에서 지낼 때, 동화전마을의 주민 한 분이제게 문자를 보내서
'성미산 아이들의 영혼이 참 아름다운 것 같다'며 극찬을 해 주셨지요.
그 아이들의 글을 성미산학교 권희중 선생님께서 모아서 보내주셨습니다.
교사 엽집(김명기)
http://sungmisantransition.tistory.com/9 들어가 보세요^^
8학년 강다운
-나는 왜 화가 나지 않을까?
마을에서 지내다가 우리는 밀양으로 갔다. 밀양은 지금 송전탑싸움 중이다.
성미산, 강정마을, 용산, 밀양 등.. 무지 슬픈 사연들이 많다. 그리고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이런 사연들을 많이 보고 그때그때 마다 ‘지금 사회가 정말 무섭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도와 드릴 수 있는 거지?, 나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든다. 근데 점점 그런 상황들을 많이 볼수록 내가 ‘화가 안 난다’는 기분이 들었다. 슬픈 사연을 듣고 마음이 아프지만 그 사연의 주인공들이 슬퍼하고 화를 내는 거를 보면서 나는 왜 저러지 몬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강정 잼다큐를 보다가 정말 어어어엄처어엉운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울었을 까. 내가 진심으로 성미산을 지키지 몬 한 기억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때의 기분은 공감도 있고, 후회와 미안함 그리고 화가 났기 때문일 거 같다.
내가 화가 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꽤 여러 가지를 상상 할 수 있다.
1. 밀양에서 화가 안 난다는 생각을 시작하고 나서 정리를 하다가 엽집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때 엽집의 좋은 이야기가 계속 머리에 돌고 돈다. “처음 주먹으로 맞았을 때는 아프다는 거를 느끼고 “악!”이라고 소리가 나. 그런데 그렇게 주먹으로 계속 맞다보면 아프다는 것도 무감각 해져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 거지. 네가 지금 그런 거 일수도 있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우리가 때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계속 악이라는 소리를 짜내고 있는 거 일 수도.
2. 사실 나는 슬프다는 감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거일수도. 하지만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하늘이 있으면 땅도 있다는 생각 중에서 슬프다가 있으면 즐겁다가 있다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무언가를 그렇게 정하면 힘들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 슬픈 사연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3. 화가 안 난 이유를 생각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내가 ‘너무 많은 사람을 이해해서’ 일수도 있을 거 같다는 거였다. 밀양에서 이계삼 선생님 얘기를 듣고 영상으로 할머니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전 사람들 도대체 어떤 사람들 인거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얼마 전 드라마 중에 추적자라고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 사연을 보여준다. 근데 왠지 밀양에서 말하는 한전 사람들이 어쩌면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할머니들을 고생시키고 예의를 갖추지 않은 끔찍한 사람들을 무슨 이해를 하려고 하냐!’고 또 다른 내가 나를 혼내기도 했다. 마음이 아프다. 이런 슬픈 사연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것도, 누구는 악이고 누구는 선이 되는 거 같은 그런 기분이 이해를 해보려고 하는 나를 계속 괴롭힌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음...세 번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 되는 거 같다. 이 얘기를 촛불시위 때 마을 분들께 얘기를 했다. 잘 이야기 했다고 말은 해 주지만 그 때 정말 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8학년 강유진
진안에서 생활하다 밀양으로 갔다. 밀양은 지금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싸움현장을 간다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이치우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슬프기는 했지만 나랑은 거리가 좀 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운이는 이런 일에 대해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나도 진심으로 화가 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 될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한전 사람들만의 잘못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전기를 많이 쓰니깐 힘없는 시골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농약을 뿌려 예쁜 사과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도시 사람들이 그런 사과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농사짓는 사람의 잘못 이라고 말할 수 없듯 송전탑 문제도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 고민이 되었는데 심순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한계가 보이고, 그러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마을 주변에 그런 송전탑을 세울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되고 정말 이기적 인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고민되었다. 그래서 평등한 저울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저울이 평등하게 될 수 있으려면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될 것 이다. 그래서 세상의 저울을 보고 잘 판단 할 수 있고, 밀양사람들이 진심으로 화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함께 화내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밀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송전탑 들어오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워서 공사 중지를 시킨 것이다. 밀양 마을사람들은 진짜 목숨 걸고 싸우는 것 같았다. 내가 성미산 싸움은 참여하지 못했지만 성미산 싸움보단 훨씬 절박함이 느껴졌다. 할머니들이 지금 이대로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함께 싸우는 것이라서 마을 사람들끼리도 사이가 안 좋아 질수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평화롭게 싸웠으면(?)좋겠다. 그리고 우리학교에서 밀양을 갔으면 일을 엄청 많이 해야 될 것 같고, 뭔가 큰 도움을 줘야 될 것 같은데 그냥 밀양에 온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하셔서 나도 힘이 났다. 나는 요즘 ‘나’ 라는 작은 존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내가 너무 작아 보였는데(?) 뭔가 나만의 답을 약간 찾을 것 같다.
또 밀양에서 할머니들 일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농성장 짓는 것도 도와드렸다. 지게로 벽돌을 들고 산 위에 올라갔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말로만 반대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뭔가를 실천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우리학교의 여행은 단순히 봉사활동을 가는 마음이 아니라 거기서 직접 사는 분들을 만나고, 생각할 수 있어 항상 뜻 깊은 여행을 다니는 것 같다.
8학년 김다형
밀양 송전탑 싸움
나는 밀양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진안에서 너무 편하게 지내버렸고 밀양에 가면 여러 고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가보니 생각할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저 죄송한 마음 뿐. 책임감이나 그런 말들이 오가기도 했지만 난 그저 죄책감만 들었다. 조금씩 도시에서 산다는 것 자체로도 엔트로피라는 생각을 할 때 내가 쓰는 전기가 밀양을 지나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원자력 발전소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도시라는 구조는 정말 파괴적인 것이구나 생각했다. 벽돌을 등에 져 나를 때는 내가 올리는 벽돌 한 장이 부디 내가 마구 써댔던 전기의 속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일했다.
미국 같은 강대국들이 아프리카 쪽 같은 후진국들에 돈을 주고 안좋은 폐기물들을 버린다는 걸 배운 적이 있었다. 그걸 알고는 강대국들의 물질만능주의나 비 생태적 횡포들에 대해 속으로 크게 분노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행동을 이 좁은 나라 안에서 해왔다는 것에 정말 충격 받았다.
8학년 김유진
밀양에서
이 날이 10월 28일 이었다. 그리고 이 날 가막마을 팀이 왔다. 거의 일주일 동안 얼굴을 못 봐서 그런지 너무나 반가웠다. 오랜만에(?) 봐서 밤늦게까지 밖에 나와 이야기를 했다.
오늘이다. 오늘 드디어 밀양에 간다. 솔직히 가기 너무 싫다. 정말로... 우린 (공정여행사) 풍덩의 도움을 받아 밀양까지 좋은 버스를 타고 갔다. 밀양은 생각보다 멀었다. 도착할 쯤 멀미가 났다. 그때 난 너무나 피곤했고 힘이 없었다. 버스에 내렸다. 마을 이장님이 말씀하기 전까지 난 거기가 고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하신 곳이라는 걸 몰랐다. 이장님이 말씀하실 때 남자들은 대부분 어떤 풀로 옷에 붙이며 장난을 쳤다. 지금 보니 너무 죄송하다. 우린 다시 버스를 타고 동화 마을로 갔다. 내리니 도시였다. 설마 이런 곳에 우리 숙소가 있나? 생각했다. 어떤 공부방 같은 곳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지인지기 때 뵙던 이계삼 선생님을 만났다. 어떤 영상을 봤다. 밀양 송전탑에 대한 영상이었다. 자기가 70년 동안 살아온 곳에 765㎸ 송전탑이 위로 지나간다고 하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영상에서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송전탑 지을 거면 거기에다 날 묻으라고.... 그리고 대부분 어르신들이 보상은 필요 없다고 이대로 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큰 꿈을 꾸고 있는 나로써 너무나도 소박하셨다.
오늘 동화 마을에서 일을 하고 거기서 1박을 한다고 한다. 일은 중평에서도 충분히 했는데... 작게 중얼거렸다. 동화마을에서 하룻밤 잔 후 다시 이곳에 와 자고 다음날 서울로 간다고 했다. 곳 서울에 간다니 정말 좋았다. 1박 할 짐만 챙기니 훨씬 가벼웠다. 동화마을 마을화관 바로 뒤가 산이었다. 주변이 산이었지만 산들은 멀리 보였다. 우리가 할 일은 벽돌 나르기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벽돌하면 작고 회색에 벽돌을 생각할 것이다. 근데 이건 그런 벽돌이 아니다. 우리가 산 정상까지 나를 벽돌에 한 개당 무게는 15kg에 가격은 3000원이다. 아 참 정상에다 집을 짓는 이유는 송전탑이 거기에 만들어지는데 거울에는 추우니까 황도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지개를 매고 벽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정상까지는 약30분이 걸린다. 오늘 몇 개나 할까? 정상까진 그리 멀진 안았다. 단지 너무나 힘들었다. 오전에 난 3장을 옮겼다. 오후엔 어떤 이유로 1장 밖에 나르지 못했다. 이 날 마을에 펜션하시는 분께서 공짜로 숙소로 내 주셨다. 그리고 과자 한 박스랑 막걸리를 가져오셨다. 정말 감사했다. 그날 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된 것처럼 우린 막걸리 2,3잔을 마시며 안주로는 과자를 먹으며 다 같이 웃고 떠들고 노랠 불렸다.
오늘 남은 벽돌들을 다 옮겨야한다. 오늘은 여자들도 한다. 난 여자가 하기엔 너무 힘든 작업이라 생각했는데 놀랄 정도로 일을 잘해 나갔다. 수가 많아서 그랬는지 오전에 작업이 끝났다. 정상에 도착 했을 때 한 할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송전탑 싸움 끝나고 평화로워지면 다시 한 번 여기라... 뭔가 간절했고 감동스러웠다. 다시 안 올수가 없었고 오고 싶었다. 우린 일을 끝내고 마을회관 앞 잔디 않자 버스를 기다였다. 느낌이 전쟁을 마치고 온 느낌이었다. 물론 군대를 갔다와보진 않았지만.. 밀양은 내 생각을 깨고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이날 밤 촛불 문화제를 했다. 사람은 적었지만 정말 재밌었고 이때 원자력과 송전탑은 절대로 지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서울을 가서 좋긴 좋았지만 뭔가 찝찝하다. 이 싸움을 도와 드리고 싶었다. 우린 서울에 살고 전기를 쓴다. 송전탑도 전기를 옮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못했다. 우린 전기를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다. 전기는 원전에서 만들고 우린 그걸 쓴다. 난 작은 거부터 실현 할 것이다. 꼭!
8학년 민승기
밀양에 우리가 가는 이유는 그 곳에서 일어난 송전탑 싸움을 돕기 위해서이다. 지난번 학교에서 한 지인지기에 이계삼 선생님이 오셔서 밀양에 송전탑 싸움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다. 직접 와서 보니까 훨신 더 참혹했다. 그리고 이치후 열사가 돌아가신 그 자리를 보는데 맨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그 자리를 계속 다시 보게 되고 이치우 할아버님에 전사가 헛되이지 않도록 다음날 송전탑 들어오는 자리를 지키는 곳에 황토방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더 열심히 옮겼다. 첫날에는 너무 힘들어서 적정량까지만 하고 쉬었다. 다 하고 나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고맙다고 하시고 수고한다고 그러시고 그러시는게 다음날 일 할 때 생각이 났다. 그래서 힘들긴 했지만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서 힘내서 전날 보다 훨신 많이 열심히 올렸다. 우리 모두 마와 같은 생각으로 벽돌을 열심히 올려서 황토방을 다 만들었다. 우리는 정말 뿌듯했고 우리가 이렇게 도와 드리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매주 한다는 촛불 집회를 했다. 예전에 성미산마을에서도 성미산 지키기 촛불 집회를 했다. 그래서 촛불 집회를 하는 분위기가 정말 자연 스러웠다. 매주 하는 집회라 사람들이 많이 안 온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강다운이 앞에세 우리가 밀양에 와서 한 일 들을 대표로 말 해줬다. 촛불 집회의 분위기는 정말 화목 했다. 각 마을에 인원수 채크하고 같이 만든 영화도 보고 오랫동안 해봐서 정말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우리가 성미산 촛불 집회 할 때 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했다면 지금까지 학교가 지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하니 아쉽다. 내가 벽돌 옮길 때 정상에 올라가 할머님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성미산 이야기를 하니까 할머니들이 공감해 주셨다. 송전탑 싸움은 할머니 아버지의 생명이 달린 문젠데 만약 성미산에 학교 들어올 곳에 내 집이 있다면 나도 할머니 할아버지들 처럼 목슴 걸고 싸울 것이다. 송전탑에서는 인체의 해로운 전자파 수치의 100배 이상의 전자파가 나온다 한다. 그런 송전탑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마을 한 가운데에 설치 한다는게 서럽다. 그래서 몸으로라도 막으려 하면 한전에서는 법이나 돈으로 대응한다. 이렇게 정말 억울한 상황을 보다 못한 이치우 할아버지 께서 분신을 하셨다. 이런 상황이 일어났으면 내 생각에 한전은 살인자들이다. 높은 곳에서 지시를 받아 송전탑 공사를 하는 용역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거기서 송전탑을 막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무시하는 행휘는 충분이 잘못이다. 나라를 잘 굴리면 이런 일은 없을 탠데 아쉽다. 돈만 너무 축내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위해 나라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의 삶만 행복할 뿐이지. 99%를 생각해 주는 좋은 나라 굴리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
8학년 배진현
밀양 보라마을
7박 8일 동안 있었던 중평마을에 정이 들고 익숙해져서 떠나기 아쉬웠지만 중평마을을 뒤로 하고 이계삼 선생님과 밀양 송전탑 대책위원회가 있는 밀양으로 갔다. 7박8일 동안 못 보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서 반가웠던지 가는 버스 안에서 신나게 떠들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밀양에 도착해 있었다. 밀양에 도착해서 이장님께서 맞이해 주시고 밀양 송전탑 사건과 이치우 노인의 분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도깨비바늘을 발견하고는 그런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자리에서 도깨비바늘을 서로의 옷에 붙이거나 던지면서 놀고 있었다. 그렇게 던지고 놀다가 말씀이 다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 순간에 장난기를 자제하지 못하고 그런 짓을 했다는 게 정말 한심하고 쪽팔렸다. 힘들게 거기까지 오셔서 설명해주신 이장님께 정말 죄송하단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 다음날엔 아침에 밥을 먹고 남자애들 대부분이 트럭 위에 올라탔는데 왠지 힘든 일일 것만 같았다. 역시 힘든 일이었다. 지게를 이용해 벽돌을 나르는 것이었다. 지게를 메고 그 위에 벽돌을 올리니……. 와우! 무게가 장난 아니었다. 15kg이나 된다고 하셨다. 경사가 엄청 급한(알고 보니 경사가 50도 남짓이었다고 한다.) 언덕을 올랐다. 정상에 도착하니 할머니들이 손자들 대하듯이 우리를 걱정해주셨다. 물도 갖다 주시고 해서 좀 덜 힘들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난 그 지게를 메고 오전에 3번, 오후에 1번 날랐다. 그러는 도중에 성원이형, 영식이형, 정희형이 도착해서 같이 벽돌을 날랐다. 다음날에는 전부 다 같이 날라서 오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갔는데 어르신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촛불집회 분위기도 신나는 분위기여서 좋았던 것 같다. 밀양에서 3박4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가 핵발전을 통해 얻는 전기를 쓰는 게 이분들에게는 피해가 되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전기 사용을 줄이면 핵발전소를 더 지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집에 와서 전기를 줄일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실천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책(아마도 베르베르의 책일 것이다.)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물 한 방울이 대양을 넘치게 할 수 있다.’
이 말처럼 우리도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잔기 아끼기를 실천해 밀양에 송전탑을 건설할 필요도 없어지고, 삼척에 원전을 지을 필요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8학년 오선재
날 무섭게 만드는 것.
진안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밀양으로 떠났다. 1학기 때 뵙던 이계삼 선생님이 말씀하신 송전탑싸움. 그 곳에 찾아가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냥 진안에서 더 있고 싶었다. 이번에 처음 오는 가막마을 이었지만 떠나기가 싫었다. 그리고 밀양의 그 무거운 분위기가 무서웠다. 싸 . 움 이라는 글자가 날 무섭게 만들었다. 난 성미산싸움 이후로 싸움 이라는 단어가 무서워졌다. 이미 나의 어릴 적 추억을 냉정하게 가져가 버린 성미산싸움 이후 다 무서워졌다. 그래서 회피를 하려고 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우선은 밀양에 왔으니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가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분위기는 냉정상태에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송전탑을 반대하고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우리가 오자 웃으며 맞이해주시고, 일손을 도와드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름 즐거웠다. 솔직히 가막에서는 이장님과 할머님과 재밌는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었는데, 밀양에서는 그 삭막해 보이는 공간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까 걱정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2박3일이었지만 일손 도와드리고 벽돌 나르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밀양에 빠져들었던 거 같다. 난 정말로 존경스러웠던 점은 유쾌하게 싸움을 하시는 거였다. 송전탑을 지키시면 서도 텃밭도 하시고 그런 모습이 멋졌다. 정말로 이런 싸움이 멋진 거 같다. 찬성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유쾌하게(?) 싸움을 하시는 모습이 멋져보였다. 이런 멋진 분들께 우리가 도와드린 것들이 꼭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싸움 현장에만 오면 피했다. 잘 맞서 싸우지를 못했다. 성미산싸움 때도 그랬다. 정말로 나는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싸움 현장이나 문화제에 잘 못나갔다. 피했다. 무서워서. 이번 밀양에서 처음으로 도와드렸다. 도와드리면서 정말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성미산싸움 때 난 뭘 한 걸까. 정말로 그렇게 울면서 까지 성미산을 아끼던 나는 그 당시 그냥 잠깐 시간 내서 문화제 나가는 것도 안하고, 뭐했을 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앞으로 맞서 싸워야겠다.
8학년 윤가야
밀양은 송전탑 일 때문에 갔는데 사실 무척 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이계삼선생님께 얘기도 들으니까 무척 심각한 문제라는 걸 느끼고 내가 귀찮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뭐라도 좀 도움을 드려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 일은 썩은 콩을 고르고 볏짚을 뒤집고 묶는 작업이었는데 다 하고 나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고맙다고 해주셔서 뿌듯했다.
농사일 말고도 벽돌도 옮겼다. 벽돌을 지게에 싫고 옮기는데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강한 의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갖고 계신 의지 덕분에 지금까지 밀양에만 송전탑이 세워지지 않고 자연이 살아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또 그 의지 덕분에 우리가 나중에 살 세상은 좀 더 안전해 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의지 뿐만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진심으로 열심히 반대를 외치셔서 공사가 중단이 된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과거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을 간직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셔서 지키시고 또 지금 현재 자기의 집, 논, 밭 이런 것들을 먹고 사시려고 도 지키시고,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좀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강한 의지로 지키시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과거도 생각하시고 지금 현재도 생각하시고 심지어 미래도 생각하시고 계속 송전탑을 반대하시는 건데 한전은 돈이나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현재만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런 면 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가서 일한 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됬으면 한다.
힘드실 텐데도 끝까지 송전탑 반대를 외치시는 것을 보고 진짜 의지라는 게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의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학년 장진하
밀양
동화마을. 이름답게 마을입구서부터 아기자기한 벽화가 있었다. 마을을 딱 보고 왜 여기 오지 않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는 밀양, 우리가 갔던 곳은 진안이더라.ㅋㅋㅋ 외지인들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 할머니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다. 상대적으로 젊으신 부부도 살고 계셨다.
밀양에서 일을 도와드렸는데, 농활을 중심으로 도왔던 사람도 있고, 송전탑 반대하는데 추워서 짓고 있는 흙집의 재료가 되는 흙벽돌을 옮기는 것을 중심으로 했던 사람도 있었다. 남자들이 흙벽돌을 이틀 모두 날랐고, 여자들은 둘째 날만 했다. 농활보다는 흙벽돌 날랐던 게 더 기억에 남는다. 몸을 움직이며 해서 그런지, 더 힘들어서 그런지, 암튼 간에 말이다. 벽돌은 하나에 15kg. 지게로 거의 꽤 높은 곳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첫날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해보고 싶다는 도전심이 생겨서 다음날 열성적으로 벽돌 나르기에 가겠다고 했다.
으에;;; 들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처음 지는 지게에 15kg이나 되는 벽돌을 올리니 ‘쿵!’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올라갈 때는 정말 헉헉대며 올라갔다. 얼만큼 가야하는지 어림을 잡을 수 없으니 더 힘들었다. 자세가 이상했던건지, 목도 아프고... 자신을 세뇌하며 갔다. ‘초콜릿초콜릿... 올라가서 먹자... 얼마나 걸릴까... 얼마 안 걸릴거야!!’이러며 걸었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 산들 올라갈 때 ‘20분 남았어!’ ‘15분 남았어!’하듯이 올라갔는데, 정말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너무 쫄았는지, 엄청엄청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죽을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체력지구력 둘 다 딱히.. 하지만 하나 자신 있는 건 회복력이다.
얼마나 힘들든, 5분만쉬면 힘이 난다. 빨리 올라오지는 않지만 조금 쉬고 내려갈 수는 있어서, 3번이나 왔다갔다했다! ㅎㅎ
그 전날에는 남자들이 4-5개씩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건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도와드리고 싶었다.
송전탑
송전탑을 막으시는 할머님 할아버님들의 청원서를 이계삼 선생님이 보여주셨다.
의논 하고 쓴 것이 아님에도, 다수의 청원서에는 “지금처럼만 살게 해 주소”라는 내용들이 담겨있었고, 자신을 위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 그리고 후손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반대한다는 분들도 계셨다. 송전탑 싸움을 보면 성미산도 생각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성미산은 마포 주민, 동네사람들의 뒷산이 파괴된다는 것 때문에 반대한 걸까, 그곳에 사는 식물들과 동물들과, 땅을 위해서였을까.
사실 싸움을 하면서는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들어오는 게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우리가 한 것은 호소였다. “우리의 성미산을 지켜주세요”
확실히 어느 부분이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어떤 부분이 많이 다르다는 것은 느껴졌다.
사실 이런 싸움들을 보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도. 이런 싸움들이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지낼 건지.
여행에서 얻은 화두다. 사실 이 화두는 [두 개의 문]을 봤을 때도 들었다.
이런 실상을 알리는 영화를 보고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이 찝찝한 감정.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어찌 보면 내가 불편하기 싫어서. 솔직한 내면은 그런 것 같다.
내가 찝찝하기는 싫은데 무엇을 해야지 찝찝하지 않을까. 내 찝찝함을 해소해야하는 걸까? 자기만족이 아닌가. 이럴 때는 내가 이 싸움을 안다는 것이 불편해 져서 슬그머니 덮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8학년 현홍준
사실은 가막에서 보내며 느꼈던 일들보다 지낸시간은 반밖에 되지 않지만 밀양에서 시간을 보내면 느낀 생각들이 더 많다. 밀양의 상황은 지금 건설되있는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수도권으로 올려보내기 위한 송전탑이 세워지기로 결정이 되면서 송전탑이 파괴할 많은 밀양 주민들의 논과 밭과 삶을 지켜가기 위해 투쟁중이다. 우리는 가막과 중평에서의 여행을 모두 끝내고 모두 모여 그런 밀양의 주민들의 투쟁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밀양에서는 몸으로 한 일은 딱 한가지 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농성하고 계시는 산 꼭대기 농성장까지 온돌방을 만들 블럭을 옮기는 일이다. 블록이 하나에 15KG이나 해서 한번 오르락내리락 하는것이 정말 힘이 들었다. 그 일을 하면서는 별 생각없이 오르고 내리는 데에만 집중했지만 끝내고 나니까 할머니들이 거기서 지낸다는 생각을 하니 뿌듯한 기분이었다.
밀양에와서 지인지기에 초청했었던 이계삼 선생님을 다시 만나고 지금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영상을 봤다. 지금은 공사가 잠깐 정지되어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는 상태이지만 산에서의 농성은 계속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들 중에 선생님이 중립이라는 것이 양쪽에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논쟁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중립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언제나 내가 제 3자가 되어야하는 상황이 오면 중립적으로 상황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송전탑 싸움이나 성미산 싸움도 그때는 그냥 마을에서 반대하고 있으니까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측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나서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계삼 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는데 선생님은 중립이라는 것이 약한쪽에 힘을 주어서 양쪽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식으로 여러 사회 문제들을 보니까 나도 관점이 좀 달라졌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약한쪽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니다. 융통성을 발휘 해야겠다.
성미산이든 강정이든 지금 송전탑이든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공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워본적은 없다. 공사를 하면서 막아내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미워야 정상일거 같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사람 한사람 한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너무 커버려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슬퍼하기 힘들어진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공사하는 그런 말단 직원들을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 그분들은 그저 그 회사나 사회분위기 그 공동체가 결정한 일들을 따를 수밖에 없을것이다. 그저 한사람이 그런 사회의 분위기를 이겨내기는 쉽지않다. 우리가 칭송하는 과거의 여러 공동체들과 사람들도 사실 그 안의 모두가 그 공동체의 성격을 띄고 있던게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몸만 따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건설현장의 욕을하는 아저씨도 때리는 아저씨도 더 높은 사람도 심지어는 사장까지도 그 개인만을 욕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정이 격해지면 그럴수 있겠지만. 그분들도 다들 가정이 있고 사연들이 있다. 나에게 박정희나 이건희등의 사람들에게도 욕을 할 수 없나 라고 묻는다면 마음껏 욕하라고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대로 누구를 까고 욕을 하는건 자유다. 욕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그 한사람만을 보지 말고 그 뒤에 더 큰 조종자 배후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오해하지 말하주셍.
에 또 이건 우리가 한전 사람들과 대치하러 갈 때의 일이었는데 엽집과 선생님들(이러니까 이상하닼ㅋ)이 가서는 진정하고 사려야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쉽게 흥분할 것 같은 사람을 놔두고 갔는데. 그러면서 감정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판단이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그때 내가 생각한 감정적이다라는 의미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때 무의식에서 그 상황에 알맞은 가장 내 몸이 해야하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같은 일이 벌어져도 판단하는게 다르다. 각자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감정적이라는 것은 사실은 생각없이 막 나대는게 아니라 무의식에서 내 관점과 사상에 가장 적합한 결단을 자동으로 내려주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이성적이라는건?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입장 뿐만이 아니라 전체의 입장을 생각해서 행동하는 거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행동했을때는 내 사상과 입장만을 반영한 결단이라서 이성적인 판단과 차이가 있는것이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때는 내 사상과 성격에 반하는 판단을 내릴때가 많다.
9학년 김진세
밀양
이계삼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밀양 송전탑에 관한 영상, 브리핑을 해주셨는데 지인지기 때 들었던 송전탑 이야기보다 훨씬 더 생생했다. ‘왜 한전은 밀양에 송전탑을 지으려 하는가?’, ‘송전탑이 지어지면 지역 주민들에게 얼마나 피해가 가는가?’, ‘송전탑의 문제가 무엇인가?’ 등의 의문이 술술 풀렸다. 우선 송전탑의 문제를 들어보자면, 동식물에게 치명적인 막대한 전자파가 나온다는 점, 송전탑이 대부분 밭에 지어지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어르신 분들의 삶의 터전을 잃는다는 것이 큰 문제다. 송전탑은 한국전력공사의 이득과 도시로의 전력 공급을 위한 거지, 밀양 지역 주민들을 위한 게 아닌데 누가 이걸 지지하겠나? 故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자살을 하셔서 돌아가신 사건을 보고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다행히 지금은 송전탑 건설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지역 주민 분들은 한전을 못 믿겠다고 하셔서 공사 주변을 계속 감시하고 계신다.
밀양에서도 일을 도와드렸다. 산으로 벽돌을 지게에 지고 나르는 일이었다. 지금 ‘동화마을’ 인근의 산꼭대기에 잠시 중단되어 있는 공사현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 어르신들이 벽돌로 작은 집을 짓고 계신다. 우선 힘이 되는 남자들부터 모여서 벽돌을 날랐다. 처음엔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산 중간쯤에 올랐을 때부터였다. 엄청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땀이 너무 많이 나.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전부터 어르신들이 벽돌 나르는 일을 하셨을 때 힘을 엄청 많이 쓰셨을 것이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고. 죽을힘을 다해 그렇게 이틀 동안 다 나른 결과, 매우 뿌듯했다. 어르신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한다. 사실은 일 더 하고 싶었는데.
마지막 날에 밀양 시내에서 촛불집회를 했다. 밀양 주민 분들이 하신 말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진 말라.’였는데 공감이 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공사를 강행했던 한전은 여전히 얄밉다. 다음에는 이런 비겁한 짓을 하지 말길 바란다.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주민들의 반발심만 사게 될 뿐이다.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아서 개인적으로 아쉬웠지만, 언젠간 밀양 송전탑 건설이 백지화되길 바라며 지금도 끝까지 투쟁하고 계시는 분들, 힘내시길 바란다.
9학년 문정범
밀양으로 갈 때는 전세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멀리 이동해서 머리가 아팠다. 한참을 이동해 우리가 내린 곳은 765Kv송전탑 건설을 반대하신 故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하신 장소였다. 사실 이때 내가 옷에 달라붙는 도깨비 풀을 던지고 놀았는데 일의 심각성을 알고 난 뒤엔 너무나 창피했다. 내가 던지고 놀아서 애들도 따라서 던지고 놀았기에 더 창피했다.
송전탑 때문에 조상님이 대대로 물려주신 밭과 집을 부셔지게 될 지경이니 이분들은 정말 막아야만 할 상황이다. 한전은 비열하게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용역깡패를 불러서 진압하려 했지만 이분들이 열심히 막아내서 현재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추워지니 산 정상에서 보초를 서시는 분들이 황토벽돌집을 지으려고 해서 우리가 황토벽돌을 지게로 150장 날랐다. 어깨와 허리가 아프고 힘이 쭉 빠졌지만 우리가 안했으면 어르신들이 이 일을 했어야 하니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한다.
9학년 박범규
밀양에서
대부분의 중평마을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밀양에 가고 싶지 않다고, 중평마을에서 더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나도 물론 중평마을 사람들이랑 같이 편하게 지내는 게 좋았지만, 딱히 그런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라기 보단 여행지가 두 곳이라는 데에 아쉬움이 있다. 진안에서 두 팀으로 나뉘는 것도 물론 아쉽지만 더 아쉬운 건 10일 동안 한 지역에 있는 게 아니고 한 지역에 있다가 옮겨 가는 것이다. 저번 학기에는 별로 그런 게 없었는데, 이번에는 진안에서와 밀양에서의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른? 그런 게 있었다. 마치 두 여행이 다른 여행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 밀양에 가기 싫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는 게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겠지만 나는‘밀양 송전탑’하면 성미산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단순히 떠오르는 것만은 아니다. 혹시 저번 학기 때 프로젝트를 하면서‘나누기는 더하기다’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 기억나는가? 그 때 했던 성미산 이야기가 아직도 나에게는 인상 깊다. 내가 왜 성미산이 개발 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계기였다. 나는 그저‘마을에 있는 뒷산' 이어서 반대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나무들과 생명들을 생각해서‘ 반대했던 것일까?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물론, 내 주위에 있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간다는 말은 맞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성미산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이유는 단지‘마을 뒷산’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서다. 물론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성미산의 나무를 깎지 마세요’라고 이야기 하면서 다른 곳에 있는 산과 나무들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니까 우리 마을은‘성미산에서 잘려 나가는 나무’와‘종이를 낭비해서 잘려 나가는 나무’를 다른 개념이라고 봤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오해일수도 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게 맞지만 마을 차원에서 그런 작은 실천마저 하는 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이 곳 밀양은 어떨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우리 마을과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를 하고 계시는 분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가가고 계셨다. 밀양에 도착한 첫 날에 이계삼 선생님이 송전탑 싸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그 때 멋대로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밀양 송전탑 싸움의 목표가 단지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 그 때 이계삼 선생님이 아니라고, 원자력 발전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라고 답변을 해주셨다. 별로 비중이 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벽돌을 나르다
현재 밀양에서의 송전탑 공사작업은 멈춰있는 상태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이기지 못하고 한전이 공사를 중단했다. 현재 밀양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송전탑 공사작업은 모두 끝난 상태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산에는 포크레인, 자재 등등이 있다.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에는 힘든 상황인 것 같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아직까지도 농성장이나 공사현장을 지키시고 계신다. 그 중 하나인 동화마을에서는 겨울을 나기 위해 산 위에 황토집(?)을 짓고 계신다. 그 작업을 도와드리기 위해 우리는 이틀 동안 150개의 벽돌을 지게를 지고 산을 20분 정도 올라가며 나르는 작업을 했다.
나는 나름대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벽돌을 날랐다. 누가 시키거나 혹은 강해보이고 싶어서 많이 날랐던 것이 아니고, 정말로 그냥 최대한 많이 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머릿속에 있었던 가장 큰 생각은 어르신들 생각이었다. 이 송전탑 싸움을 하고 계시는 대부분의 분들이 다 어르신이다. 산 위를 지키시는 분들도 당연히 어르신 분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여기서 지게로 돌을 나르는 작업을 하시던 어르신 두 분이 병원에 실려 가셨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뺀질거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힘을 다 쏟아 부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최대한 힘든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체험하러 온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진심을 다 해서 도와드리러 왔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 이유 외에도 내가 얼마나 많이 일할 수 있는지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약 10개정도의 돌을 날랐다.
지금 이대로
밀양에 도착한 첫째 날 이계삼 선생님이 어르신 분들이 국회에 작성해 제출하셨던 탄원서를 보여주셨다. 정말 그 탄원서들은 내가 본 글들 중에 가장 진심어린 글이 아닐까 싶다. 이보다 더 진심을 담아서 간절하게 글을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들 내용 중에 가장 인상이 깊었던 내용은‘그냥 지금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더 나은 것, 또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농촌에 계시는 이런 어르신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이대로’라는 말이 이렇게 와 닿는 말 인줄은 몰랐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나도 아마 지금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원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지금 이대로’라는 말은 과연 젊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의 삶이 나은 삶일지, 아니면 어르신들 말씀처럼 ‘지금 이대로’사는 것이 나은 삶일지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말인 것 같다.
정말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9학년 박정민
밀양
솔직히 밀양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송전탑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었다. 그 이상으론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밀양 방문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밀양에 도착하자마자 우린 보라마을로 갔다. 故이치우 할아버지께서 몸에 불을 붙이고 쓰러질 때까지의 모습을 설명해주시는 분의 말씀을 들으며 상상해봤다. 끔찍했다. 몸에 불을 붙이시고 애를 써서 걸어가시던 그 모습을 상상하니 무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무섭고 끔찍했지만 그 이야기 다음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는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을 치고 다른 곳에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 날에 혜원 누나의 리뷰를 했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장난 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리뷰를 들으면서 반성했다. 보라마을에서 이야기를 듣고 숙소인 너른마당으로 이동했다. 주택가 사이에 생협과 공부방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너른마당은 바닥은 차가웠지만 만화책이 많았다. 너른마당에 도착하니 이계삼 선생님께서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에 관한 동영상과 사진, 그리고 자료들을 보여주셨다. 영상은 한 할머님을 인터뷰 한 것이었다. 할머님께선 송전탑이 들어서면 갈 곳이 없으시다며 화를 내셨다. 할머님들이 적으신 편지에는 ‘이 늙은이는 그저 농사 짓다 죽고 싶습니다.’, ‘보상금 대신 농사 짓다가 죽게 해 주십시오.’ 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할머님들의 절실함이 느껴졌다. 밀양에서 보낸 첫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동화전 마을이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 남학생들이 하기로 한 일은 산 위에서 송전탑 건설을 막고 계시는 할머님, 할아버님들을 위해 황토방을 지을 때 필요한 황토 벽돌을 옮기는 일이었다. 지게에 벽돌을 지고 산을 오르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벽돌이 떨어질까 걱정도 되었고, 다리와 어깨도 아팠다. 정상에 도착하자 할머님들께서 나오셔서 물을 주시며 수고했다고 말씀 해주셨다. 물을 마시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 정상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부니 비닐 천막이 날아갈 듯 펄럭거렸다. 지게를 내려놓고 더 높이 올라가자 포크레인과 건축자제들이 있었다. 구덩이도 두 개나 파여 있었다. 할머님 한 분이 올라오시더니 여기에 한전놈들이 송전탑 만들려고 구덩이를 파놓았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한전놈들이 여기에 송전탑 만들려고 하면 할머니들은 구덩이에 들어가서 우리도 같이 묻으라고 하면서 공사 막았어. 차라리 같이 묻히겠다고 그러면서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공사를 못 하거든.”
어제 이계삼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영상에 나오는 할머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데 공사현장에서 막으시는 할머님께서 해주시는 말을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더 절실하게 들렸다. 난 그 할머님께 대단하시다고 꼭 막으실 거라고 격려해드렸다. 그리고 산을 다시 내려와서 두 번째 벽돌을 옮겼다. 점심을 먹고 세 번째, 네 번째 벽돌도 옮겼다. 더 많은 벽돌을 옮겨서 빨리 황토방이 완공되어 할머님들께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은 나의 몸이 버티지 못 했다. 그래서 아쉽게도 네 개 밖에 옮기지 못했다. 그래도 마을에서는 우리가 벽돌을 잘 날라주었다며 돼지국밥을 만들어주셨다.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는 황토방도 빌려주셨다. 덕분에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따뜻한 황토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조금 나아진 기분이었다. 마을회관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한전에서 자재를 옮기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가야 된다고 하길래 몇몇 사람을 빼고는 모두 마을 어른들과 함께 건설자재를 보관하는 곳으로 갔다. 뭔가 큰 싸움이 일어날까 걱정도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자재 옮기는 것을 취소했다. 트럭이 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벽돌 옮기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모든 학생들이 벽돌 옮기는 일을 했다. 우리가 모두 함께 벽돌을 옮기니까 남은 벽돌들은 빨리 옮겨졌다.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며 할머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곤 다시 너른마당으로 와서 촛불집회 참여 준비를 했다. 우린 ‘냅둬유’를 밀양에 맞게 개사하여 부르기로 했다. 촛불집회를 끝내고 너른마당에서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린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기차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돌아오면서 기차를 타서 좋았다.
다녀오며
밀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며 미국에 가있는 친구가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그 친구에게 먼저 말해놓은 상태여서 그 친구는 여행을 잘 다녀왔다고 물었다. 그러면서 어디어디를 다녀왔냐는 질문도 같이 했다. 그래서 난 중평마을에서의 생활과 밀양에서의 생활을 들려주었다. 그 친구는 내가 밀양에서 한 활동을 듣더니 질문을 했다.
“근데 그 송전탑 반대하면 너 전기 못 쓰는거 알고 반대한거임?”
밀양에서 마지막 리뷰를 하면서도 고민했던 점을 이 친구가 한 번 더 알려주었다. 사실 밀양을 거치는 765 송전탑을 통해서 우린 전기를 받아 쓰고 있다. 전기 자급률 2% 이하인 수도권에 살면서 우리가 쓰는 전기를 옮기기 위해 설치하는 송전탑을 반대하는 행동이 맞을까 라는 고민을 했었다. 이 송전탑이 우리가 쓰는 전기를 수도권까지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아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컴퓨터와 휴대폰과 각종 전자기기에 빠져있는 우리가 어떻게 전기를 안 쓰는데 당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난 내 하루 일과 중 전기를 사용하는 행동을 조금씩 줄여보기로 했다. 일단 시작은 계단 이용하기로 정했다. 집이 6층이기 때문에 그렇게 높지도 않고, 운동도 될 것 같았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아파트의 승강기는 타지 않고 있다. 여행이 끝난 직후 무거운 짐이 있을 때에만 탔었다. 지금까지 계단으로 걸어 다녀보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계단으로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전기를 아끼는 행동을 조금씩 늘려가다 보면 나중에는 당당하게 송전탑을 반대할 수 있을 것 같다.
9학년 이창주
밀양에 가기가 사실은 좀 싫었다. 중평마을은 음식도 맛있고 생활이 즐거웠기 때문에 가기 싫었다. 그리고 밀양 송전탑 싸움은 투쟁중이기 때문에 사람을 전투적이게 했다.
밀양 보라마을에 왔을 때 이장님이 나이가 많으셔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도깨비풀을 던지고 놀아서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전마을에 갔을 때는 가자마자 일을 했다. 내가 한 일은 볏짚을 나르는 일인데 논마다 볏짚이 쌓여 있어서 맨 위에서 던져야 하는게 무서웠다. 실수로 떨어졌는데 아팠다. 그리고 그 때가 마침 내 생일이어서 할아버지 분들이 술을 주셨는데 한잔씩 마시다가 취해버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난 주사를 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생일을 챙겨주셔서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날 나도 벽돌을 옮기는 데 엄청 무거웠다. 애들이 이걸 하루에 4장 옮겼다는 게 대단했다. 다행히 난 오전만 하는 거여서 2장 옮기면 되는 거기 때문에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위에 올라왔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끈끈했다. 단합이 잘돼서 놀라웠다. 조금 더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그러면 내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 이 정도 하고 우리는 밀양 시내로 돌아갔다. 밀양 시내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데 할머니들이 많이 참석하셔서 네트워크가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촛불집회에서 재미있는 영상도 나오고 분위기가 그렇게 무거운 편이 아니어서 좋았던 것 같다.
9학년 장원영
밀양
진안에서 7박8일 동안 보내고 밀양으로 장소를 옯겼다. 밀양에 가자마자 이치우 할아버지 대해서 들었다. 하지만 나는 뒤에서 애들이랑 같이 투닥거리고 장난치면서 이장님 말을 듣지 않았고, 이치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아스팔트 위에서 애들이랑 같이 장난 쳤던게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여기에 만약 송전탑이 들어오면 사람이 살 곳이 안되고 농사도 지을 수가 없다. 아예 자신의 삶과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고 너른마당가서 765송전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많이 쓰니깐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우고 송전탑 또한 더 많이 건설하게 된다. 근데 송전탑이 논밭과 마을을 왜 가로지른지 이해가 안 간다. 송전탑 건설하는데 보면 다 직선으로 변전소까지 안가고 다 방향을 틀어서 간다. 우리 부모님이 내는 세금을 마음대로 펑펑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좀 화가 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계삼 선생님의 이야기도 들었다. 다행히 우리가 왔을 때는 송전탑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게다가 밀양시에 송전탑이 아직 건설도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농성장에 황토방을 만드신다고 그러셔서 우리가 황토벽 150장을 하루 종일 날랐다. 나는 황토벽을 들면서 6~70대 어르신들이 어떻게 이 무거운 황토벽을 들고 산을 왕복했는지 상상이 안 간다. 황토벽 나르는 일은 매우 힘들었지만 그 일을 다하면 왠지 뿌듯하고 보람이 찬다. 그리고 밀양 마을 주민들은 진안과 강정마을과 달리 마을이 쪼개지는걸 원치 않하신다. 진안과 강정마을은 각각 핵폐기장과 해군기지 건설 때문에 찬성과 반대가 갈라져서 싸우다가 결국은 이 싸움이 끝나고 나서 같은 마을에 살아도 서로 얼굴을 안보고 원수가 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가 정책 하나로 마을 공동체가 깨진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말이 있는데, 진안이랑 강정은 죄와 사람을 미워했기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깨진 상태다. 밀양에 송전탑이 들어오든 안들어오든 마을 공동체가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전 사람들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없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10학년 이신해
송전탑은 절대 안돼! 저리가라!
이계삼 선생님을 만나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에 관한 영상도 보고 사진도 봤다. 영상에서 이치우 할아버지의 동생분인 이상우 할아버지도 나오고 다른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과 할머니 분들도 나왔다. 영상이 너무 무서웠다. 이치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에도 가봤는데 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흔적이 있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밀양에 사시는 분들이 송전탑 반대 싸움을 많이 하신 것 같았다. 송전탑이 있으면 밀양 사람들은 생활하는 것이 괴롭다. 자유롭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은데 송전탑이 있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동화전 마을에서 어르신들의 일을 도와드렸는데 점심 먹고 오후에 어느 나이 많은 아주머니 댁으로 가서 일을 했다. 쥐눈이 콩을 가르는(?) 일을 했는데 어렵지는 않았지만 약간 지루했고 허리도 아팠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해서 참을 수 있었고 뿌듯했다.
촛불집회도 했는데 다운이가 나와서 인사를 한 후 하고 싶은 이야기도 좀 했다. 다 같이 노래도 불렀다. 이계삼 선생님께 인사도 드렸다. 오랜만에 보니까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것 같다. 제발 송전탑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10학년 이현우
밀양에서 벽돌 나르기
여행에서 3박4일은 밀양에 간다고 했다. 밀양에서는 송전탑 공사반대 때문에 여기 밀양 주민들은 거센 반발로 인해 공사는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 정산에 보면 포크레인과 쓰다남은 공사물품들을 보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동화마을에서는 농성장과 공사현장을 지키기 위해 산 정상에 황토집을 짓는다고 했다. 밀양에서 벽돌을 옮기는 작업을 한다고 하길래 평소에 보는 작은 벽돌 머 그런 것 인줄알고 코웃음 치면서 만만하게 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15kg이나 나가는 황토벽돌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산 정상에다 갔다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떨렸다. 중평에서의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 이였다. 일단 지게를 매고 벽돌 하나를 지게에 놓고 산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거기다 산의 경사가 올라가기가 힘들게 가파르다.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다. 어디까지 가야 정상인지도 몰랐고 길은 험하고 힘들었다. 그렇지만 왠지 나의 삶과 비슷하게 느꼈다. 어디로 가야 끝이고 정상인지도 모르고 내가 가야 할 길은 험한데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힘들고 답답했다. 하지만 벽돌을 옮기면서 답답했던 일과 서울에 있었던 잡일들이 까맣게 잊고 일에만 열중하면서 후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즐겁게 생활을 보내니까 왠지 모르게 너무나 평화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어르신들께서 이 무거운 벽돌을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가혹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 무거운 벽돌을 많이 옮긴 옆집과 범규가 자랑스러웠으며 한편으론 존경해야겠다고 느꼈다.
첫댓글 아이들의 솔직한 후기가 좋네요^^ 다들 고생 많았겠어요.
어른보다 깊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의 글 잘 보고 생각많이 하게 됐습니다. 모두에게 힘이 되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