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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산, 안나푸르나
2006년 7월16일 일요일 밤부터 내리는 비가 아침이 되어도 그치질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밤에만 내리던 비가 오늘 아침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새벽5시 30분쯤 눈이 떠져서는 조금 더 자고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아이들을 깨우고, 7시도 안되어 도착한 버럿(가이드)과 함께 우리는 밴으로 페디까지 이동했다. 오는 길에 허가증을 받기 위해 관광안내소 2군데를 들렸고,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혹시 아이들 감기 걸릴까봐 우의를 사고 싶었는데 페디 바로 밑에 있는 가게에는 네모난 김장 비닐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멍을 세 개 내어 종윤이와 내가 하나씩 쓰고, 한국에서 가져온 판쵸는 종하를, 숙소에서 빌려준 우의는 종은이가 입었다. 그리고 재식씨는 등산화를 따로 빌리지 않고 평소에 신던 자신의 샌들을 신고 비가 금세 그칠거라며 우비도 없이, 김장 비밀도 없이 비를 맞고 걸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안나푸르나는 쉽지가 않았다. 아이들도 힘이 드는지 종윤이는 벌써 배가 아프다고 하고, 종은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울상을 짓는다. 벌써부터 고산증이 올리도 없고-
우선 모르는 척 하고 앞서 걸었다.
잠시 앞에서 같이 걷게 된 버럿과 한 달 전 마오이스트가 정부군을 이김으로써 평화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며, 나라가 불안해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실직을 하거나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심각해 졌다는 이야기등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종윤이가 “거머리다”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돌아보니까 정말 내 새끼손가락만한 거머리들이 종윤이 신발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 옆에 있는 풀잎마다 거머리가 두 서너마리씩 꼿꼿이 서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돌 위에 서 있는 거머리는 마치 손을 흔들듯이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며 누구라도 나타나면 얹혀가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니 몸 전체가 스물스물.. 괜히 발을 높이 들어 걸어보기도 하고, 거머리 떼기에 좋은 지팡이도 만들어 걷기도 해보고. 그런데 문제는 우리 남편이다. 등산화를 신은 우리와 달리 맨발에 샌들을 신은 상태라 물가나 돌 위만 지나가도 거머리가 떼로 매달려 피를 빨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식씨는 매달린 거머리 떼느라고 뛰고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물이 많은 논둑길을 지나칠려면 순식간에 어찌나 많이 매달리는지 그런 거머리가 떼어진 자리에선 붉은 피가 여기저기서 흘렀다. 양말이라도 신으면 어떨까 했는데 재식씨는 개의치 않는다. 여하튼 말로만 듣던 거머리 군단이 우리가 가는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우리는 거머리 덕분에 더 빠른 속도로 걷게 되었다. 그래서 4시간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는 Phontana에 있는 Gurung guesthouse까지 3시간이 걸렸다.
우왂!
롯지에 도착해 등산화를 벗는 순간, 등산화 안에 어찌나 거머리가 많은지- 실거머리부터, 왕거머리까지- 나도 모르게 꺄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소름이 싸악 돋고-
거머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서 발견 되었는데 모자속, 반바지 속, 심지어 샤워하려고 옷을 벗자 배꼽 주변에도, 브래지어 속에도 있었다. 손으로 잡아 떼려는데 오히려 살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녀석들이라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집 할머니가 하얀 거즈에 뭔가를 담아 건네 주셨다. 물을 약간 묻혀 거머리 위에 두들기라는 것이다. 말씀하신대로 하니 거머리가 뱅글 뱅글 몸을 틀다가 다시 피를 토하며 살갗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음날은 출발할때부터 소금방망이를 각자 하나씩 준비했다. 1시간 반만에 도착한 담프스(dhampus)는 말그대로 작은 산(?)의 능선에 자리 잡은 마을이었다. 그곳의 첫이미지는 아이들 소리다. 어디선가 어린 아이들이 입을 모아 책을 읽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걸어가 보니 ‘학교 school’라는 명패가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나무로 만든 대문을 빼꼼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남자 선생님하고 눈이 마주쳤다.
“I'm a tourist, I'm a KOREAN, may I look around this school?"
(나는 관광객이고, 한국인입니다. 이 학교를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했더니 선뜻 들어오라고 안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따라 들어간 곳은 여러개의 방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학교라기보다는 작은 집 같은 공간이었는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칠판과 책상 사이에서 낯선 우리를 보고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 교실은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분이 담임이었다. classs2 라고 하면서 8살 정도의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고 했다. 거칠게 보이는 나무책상에 공책을 펴놓고 칠판 가득 판서된 내용을 베껴쓰나 본데 나를 아이들에게 소개하자 아이들 모두 일어나서 두손을 모으더니 “welcome song"을 불러주었다. 마치 기도를 하는 듯 눈을 감기까지 하고는. 그리고 잠깐 나갔다 온 선생님은 한국에서 보내온 서류봉투를 보여주었는데 그 속에는 한국 아이들 사진과 엽서가 있었다. 선생님 표정으로만 봐도 자랑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축제 사진도 보여주고, 단체 사진도 보여주면서 그중 행사사진 2장을 그분의 네임카드와 빼곡히 무언가 적혀있는 A4용지와 함께 건네주었다. 그 분이 주신 A4용지에는 교류를 했으면 하는 내용과 자신의 학교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놓고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학교에는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각자가 수기로 싸인한 교직원 명단이 있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잠깐이지만 카투만두에 머물고 있는 이주일 정도 우리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을 때 자신의 학교 아이들의 학업 분위기가 염려된다며 정중히 미안해하며 거절했던 카투만두 중학교의 교장선생님도 떠오르면서 가난한 나라 네팔에 진정으로 교육을 생각하는, 무엇이라도 이 가난한 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열정적인 따뜻한 아빠같은 모습을 가진 선생님들이 계셔 다행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Education is rlight(교육은 권리입니다)”
그 선생님이 건네 준 서류봉투에 적혀 있는 글귀를 가슴에 품으며 기쁜 마음으로 오후의 트렉킹을 또 시작했다.
Dhampus-8, Pokhari, Kaski, West Nepal
Phone;98460-29652
E-mail; harish 2027@hotmail.com.np
Harishchandra Paudel-Founder Principal
정말로 신기하게 그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소금주머니는 거머리에게는 특효약이었다. 왕거머리든 실거머리든 소금만 닿으면 바로 직사를 하는데, 특히 왕거머리는 피까지 토하며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업안을 하나 생각해 냈다. 한국에 돌아가면 거머리 죽이는 약을 개발해 (죽염치약 같은) 네팔로 가져와 트렉킹을 안내하는 에이전시에 팔기로*^^*-
이른 아침이라 거머리가 자나- 했는데 40분쯤 걷다가 종윤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자연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하며 보냈는데 잠시 후, 종윤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들판 한쪽에 쭈그려 앉아 일을 보고 있는데 순간 팔에 뭔가 따끔해서 보니까 거머리가 팔까지 올라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이곳 저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서 그사이 그렇게 많은 거머리들이 몰려왔는지 신발에, 다리에 온통 거머리 천지였단다. 그렇게 엉겁결에 일을 보고 와서는 하는 말-
“엄마, 거머리 떼느라 어떻게 일을 봤는지 모르겠어요-”
아침을 먹으려고 도착한 데우랄리는 정말 환상이었다. 숙소에서부터 계속 오르막길이어서인지 발아래 펼쳐진 산은 굽이굽이 능선에 흰 구름이 절묘하게 입혀져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렇게 하염없이 산아래를 바라보다 딱 뒤돌어 섰는데-
허걱~
버럿말처럼 우리가 오른 산은 산이 아니라 언덕이었다. 등 뒤에 있는 위엄조차 느끼게 하는 산들을 바라보자 앞으로 우리가 가야하는 대장정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데우랄리 이후부터는 계속 내리막 길 이었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오래 전,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천황산의 천황봉을 낀 세 개의 산을 종주 하고 하산 할 때의 고통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나는 늙은 사람, 젊은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을 산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내려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나눈다. 나이가 들면 체중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하는 내리막길이 훨씬 무서워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때 이제 나도 나이가 든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리막 길에서 발 하나를 내려 놓을 때마다 무릎이 시큰해지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끝도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을 한 시간 이상 내려간 듯 싶었다. 옆에 있는 아이들도 처음엔 신났다고 속도를 내더니 긴다리의 종하도 무릎이 아프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내려가다간 또 얼마를 올라가야 할까-
그러나 다행히도 네팔의 산은 워낙 커서인지 우리는 산을 다 내려와서는 그만큼 다시 올라가지 않고 생각보다 완만한 좁은 길을 따라 산을 돌아내고 있었다. 힘들다 싶을 때, 지루하다 싶을 때 만나는 농가의 사람들, 그런 산속에서 어떻게 학교를 다닐까 걱정스러운 아이들, 그야말로 산촌에 버려진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초입에서 만난 아이들은 “give me sweet(사탕 좀 주세요)" 하더니 산이 깊어질수록 아이들은 ”give me medicine(약 좀 주세요)"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팔뚝이나 다리에 나있는 많은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캔디가 아닌 바르는 연고 좀 챙겨서 올걸..
놀 준비는 열심히 하면서 나눌 준비는 전혀 하고 오지 않은 것이 민가를 돌아 걸을 때는 많이 미안했다.
그렇게 걸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도 젊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여행이 있다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여행이야말로 나이가 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돈이 있다 해도 체력이 없으면 이렇게 7-8일동안 매일 빗속을 걷거나, 거머리들과의 전쟁이 재밌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다시 걷게 된 이날의 마지막 남은 코스는 아이들 말처럼 장난이 아니었다. 다시 계속 내려가고, 평지를 걷고, 계곡을 잇는 양쪽에 로프가 있는 나무다리를 벌써 세 번째 건너고, 이제 다리도 후들거리고, 어지럼증까지 느껴졌다.
혹시..고산병..?
점점 선발대로 걷고 있는 버럿하고 간격이 벌어졌다. 버럿의 파트너인 종윤이가 맨 앞에, 나와 파트너인 종하가 중간에, 또 한참 뒤에 재식씨와 종은이가 걸었는데 점점 서로의 모습이 아물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나 닮아 평발인 종은이가 발바닥 암홀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그럼에도 큰 불평없이 아빠와 함께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종하야 지리산 종주가 더 힘들었어? 지금 안나푸르나 트렉킹하는게 더 힘들어?”
“그때와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이 덜 힘들어. 그때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만 했었거든요- 특히 발바닥이 어찌나 아팠던지..”
하기야 그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걷고, 밥도 해먹고, 자는 것도 길에서 잤는데 뭐..
그래도 지금은 포터가 있어 적당한 시간 분배와 잘 곳, 먹을 것이 잘 준비되어 있으니까..걷는 양이 있더라도 편하지 뭐.
그런데 비슷한 질문을 재식씨도 종은이한테 했다는데 우리 막내-
“근데 아빠 우리 설악산에 갔을 때 굉장히 추워서 목도리에, 모자에 꽁꽁 둘렀었잖아요. 그런데 그때 대청봉 비석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저보고 침 흘렸냐고 했어요. 숨쉬면서 얼어서 그런건데...”
힘들다는 말 대신에 종은이는 남편이 한국에서 매년 여름, 겨울방학때마다 18번 걷기 여행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그 설악산 이야기를 했단다.
도보 여행을 무슨 사명처럼 해냈던 우리 가족은 종은이가 여섯 살 되던 겨울엔 대관령 친정집에서 설악산까지 6박7일간 걸었다. 그 때는 폭설주의보까지 내린 영하 25도. 우리 아이들 셋에 조카 둘에, 친구 아들까지 데리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희운각 대피소의 철사다리를 걸어올라 소청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눈보라에 종은이는 장갑도, 목도리도, 털모자도 온통 꽁꽁 얼어 있었다고 종은이를 목마 태우고 후발에 있었던 남편은 회상했다. 손이 곱을 대로 곱은 종은이가 울먹이며 “아빠 추워”했을 때 남편은 너무 미안해서 종은이의 손을 자신의 뱃속에, 입속에 넣으며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만 기능성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고, 그 당시 아이들을 위한 기능성 옷이 일반적이지 않아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엔 아예 마음을 먹고 제일 먼저 아이들 옷을 모두 기능성 옷으로 갖춰 주었다. 딸내미들은 그런 옷들의 디자인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때 기억나는 일 하나가 있다. 선발이었던 내가 큰 아이들을 앞세우고 중청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산장지기가 했던 말이다. “혹시 고아원에서 아이들 정신수련 시키러 오셨어요? 이런 날씨에 올 수 있는 분들은 대체로 그런 류의 사람들인데..” 폭설주의보로 중청까지 식료품 배달이 되지 않아 휴게소에는 에이스 과자 2개가 전부였고, 우리는 싸 가지고 간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져 그날 밤 아이들은 거의 굶다시피 잠을 잤다. 그 아이들을 위로하고자 산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먹고 싶은거 3가지를 적으라고 했고, 그 다음 날 동트자마자 대청봉에 올라 칼 바람 맞은 바위를 붙들고 사진 한 장을 찍고 바로 엉덩이 스키를 타고 하산을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오색 약수터 앞 식당에 들어가 각자 먹고 싶었던 음식 3가지씩 시키고 배터지게 먹었었다.
오전에 출발할 때 봤던 그 산이 어느새 우리 바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언제 끝날지도 예측할 수 없는 끝없는 계단이 보였다. 저만치면 끝이겠지 하고 올라가면 다시 턴해서 계단이 이어지고, 그만큼 올라가면 다시 턴해서 계단이 이어지고.. 지리산 종주할 때의 뱀사골 계단은 계단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젠 기운도 떨어지고,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갈증은 계속 나고. 그래서 두 번 정도 샘물처럼 솟아나는 물을 손에 받아 세수하면서 받아서 먹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애써 추스려 조금 더 걷다가 결국 계단에 주저 앉았다.
에고- 어디만큼 가야 하는 거야?
이젠 종윤이 팀은 보이지 않고, 한참 떨어져 걷던 종은이 팀까지 우리와 합세 되었는데-
정말 더 걷기가 싫을 정도로 몸이 지쳐 있었다. 그러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길 소원하며 계단에 올라서자, 우거진 산속에 단촐히 자리를 잡은 지누 게스트하우스.
그 뒤로 보이는 설산의 south 안나푸르나-
그새 밤이 되어 우리는 달밧과 낮에 점심으로 버럿이 시켜 먹었던 에그 프라이드 라이스를 세 개 시켜 먹고 편안한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 고통을 이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 달콤함이 있을까.
다음날 아침엔 5시에 일어났다. 네팔에 와서 단 한 번도 밤에 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난밤엔 비가 오지 않았다. 아침 5시 15분쯤 영 잠이 안와서 일기나 쓸 겸 노트북을 들고 2층에 있던 숙소 앞 야외테이블에 앉았는데 순간 구름이 사라지더니 어제 오후엔 구름 속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였던 안나푸르나가 완전한 형체를 드러내었다. 갑자기 현깃증이 났다. 안나푸르나의 산세와 기상이 순간 나의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려 무릎을 꿇리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큰 산에 들어서기 전에 심마니들이나 마술가들이 산의 정령들에게 입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구나. 빨리 남편을 깨워 이 느낌을 공유하려고 의자에서 일어서자 벌써 남편도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산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구름의 이동이 변화무쌍해서 안나푸르나는 숨바꼭질을 하는 듯 했다. 그래서 그 찰나를 놓치면 안나푸르나 전체의 모습을 보기는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어젯밤 버럿이 내일은 날이 좋을 거라고, 그렇게 되면 안나푸르나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역시 산사람이다. 비가 올까하여 채양 안쪽에 말렸던 빨래를 다시 햇볕 잘 드는 곳에 옮겨놓고, 여전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안나푸르나를 아이들을 깨워서 함께 보았다.
짐을 정리하고 출발한 시간이 또 1시간이나 늦어졌다. 어젯밤 비가 오지 않은 관계로 아침 일찍 뜬 햇볕에 빨래를 좀 더 말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태양은 어찌나 뜨거운지, 뜨자마자 온 세상을 달구기 시작했다. 이러다 곧 현지인 소리 듣겠구먼.
어지간히 빨래가 말랐다 싶었을 즈음, 우리는 지누게스트 하우스를 떠나 마을을 벗어났다.
그런데 또 돌계단-
거기에 70도 이상의 경사도-
아이들이 얼마 걷지 않아 호흡을 다듬기 시작했고, 드디어 종하 종은이는 울상이 되었다. 태양의 열기에 어지러움증까지 느끼고 종은이는 토할 것 같다며 얼굴이 벌겋다. 뒤에 따라오는 종윤이 아빠도 아이들이 걱정이 되는지, 속도를 늦추라고, 자주 쉬라고 이야기 했다. 앞서서 걷던 종윤이와 버럿은 그 덕분에 우리를 기다리느라고 한자리에서 30분 이상을 쉴 때도 있었다.
이곳엔 마리화나가 많이 피어 있었다. 날렵한 잎사귀와 가느다란 줄기가 우리나라에 피는 야생화와 별반 차이가 없었는데, 버럿이 마리화나라고 알려줘서인지 유독 다른 풀들보다 키가 커 눈에 잘 띄었다. 분명, 마리화나(하시시-속어)를 아는 사람에겐 더 쉽게 눈에 뛸 것 같았다. 마리화나가 많이 피어있는 곳에서 잠깐 쉬면서 버럿은 네팔인들이 싫어하는 나라가 있다고 농담섞인 말을 건넸다.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둘 있는데 그 하나는 이즈라엘이고 그 하나는 미안하게도 한국이라고 했다. 이즈라엘을 싫어하는 이유는 네팔을 방문하는 이유의 90%가 마리화나를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에 묵으면서 마리화나를 집단으로 하기도 하고, 좋지 않은 행동도 거침없이 한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 사람들은 마리화나를 하고 길을 다니다 싸움을 하기도 하고, 크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기도 하고, 산을 오르다 떨어져 죽기도 한단다. 이곳 네팔 사람들도 용골이라는 사람들이 마리화나를 오랫동안 하고 있어서 제정신들이 아니라고 했다. 버럿의 걱정스런 표정이 그는 흡연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싫어하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인 이유는 바로 무조건 깍는다는 것. 나도 한국여행객들을 만날 때 마다 듣게 된 이야기가 현지인들과 가격흥정하는 요령이었다. 어떤 여행자들은 그들이 부르는 가격의 30-40%에서부터 흥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하게는 허리를 쳐서 흥정을 시작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서 하듯 “깍아주세요” 라고 시작하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건지, 아니면 그들이 외국인 가격을 붙여 팔고자 하면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버럿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보다 물가가 저렴하다고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도, 외국인이면서 마치 현지인처럼 무조건 현지인 가격으로 해달라고 고집하는 것 모두 적절한 선에서의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꼭 내가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먼저 내 예산을 정리해서 물건을 고르고, 무엇보다 내 이익을 위해서 무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흥정하는데 단 한 번도 기분이 상해 본 적이 없다. 물건을 저렴하게 사고 싶은 마음이나,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받아 이익을 챙기고 싶은 두 마음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며 흥정을 하게 되면 어느 누구와도 충돌이 생길수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가격을 주기까지 상대의 마음 열기를 먼저 가르친다. 그럴려면 먼저 발품을 팔면서 여러 군데 값을 알아보고, 맘에 드는 물건을 살 때 내 예산이 많지 않지만 꼭 당신의 물건을 사고 싶다고 하면서 내 예산을 말하면 대체로 그들도 웃으면서 들어주는 것 같다는 팁도 알려주고.
출발 하기 전 예상한 두 시간을 넘어 두 시간 30분이 되어서야 우리가 아침을 먹자고 예상한 촘능(chumrong)에 도착을 했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버럿이 우리의 오늘밤 숙소를 손으로 가리키는데 무척 가까워보였다. 대부분 식사를 주문하면 그때부터 1시간이상 걸리기 때문에 우린 자연스레 배낭에 묶어 둔 빨래를 다시 널고, 책을 펴고, 카드놀이를 하기 위한 카드도 꺼내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듯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먹은 음식은 지금까지 중에 제일이였다. 물론, 먹어 본 것 중에 비교할수 있는 것은 egg frid rice지만 여하튼 제일 우리 입맛에 맞았고, 꿀하고 찍어먹은 구릉 브레드라는 것도 정말 맛있었다. 종하는 이 아줌마를 한국에 데리고 가서 장사를 해도 잘 될거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네팔인들이 먹는 특별음료에 도전해 보게 되었는데 버럿 말로는 우유를 상온에서 오랫동안 숙성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숙성시킨 것에 씨앗을 갈아 넣고 먹으면 아주 영양만점의 드링크제가 된다고 추천하면서 조금 전에 이곳의 아주머니가 버럿에게 준 음료를 우리에게 먹어보라고 권해 주었다.
으잉! 우유를 상온에 오랫동안 두면 상하지 않나?
버럿의 권유대로 먹어 본 그 음료는 푹 상한 걸쭉한 쉰 맛에, 곡식이 갈려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 한 모금씩 먹어보고는 엑엑엑~
우리의 모습을 보고 버럿은 웃겨 죽겠단다-
그러고보니 그날 포카라 시내에서 붓다템플가는 날,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우유를 사기위해 우리나라 정수기 위에 꽂는 통 같은 크기의 함석통 같은 것을 들고 줄을 서는 것을 봤다. 냉장고도 없는 사람들이 저 많은 우유를 어떻게 보관하려하나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들이 그 많은 우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갑자기 또 쏟아지는 비 때문에 부랴부랴 널었던 빨래를 다시 싸가지고 2340미터의 상시누아(up sinuwa)를 향해 내리막길의 계단을 따라 신나게 걸어 내려갔다. 계속 되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며 우리는 그곳에서 제주도를 보았다. 제주도처럼 돌로 밭주위도 쌓아 놓고, 집들의 담도 쌓아 놓았다. 거기에 초록색의 벼와 푸른 하늘이 매치가 되어 너무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윤이가 초등학교 3학년때, 종하가 1학년때, 막내 종은이가 5살 때 조카들 셋을 더해서, 이렇게 아이들 6명을 데리고 제주도 공항에서 출발해 2주 동안 줄곧 걸어서 제주항에 도착해 배를 타고 서울로 왔었던 그 제주도를 이곳 네팔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우리 부부는 그 때의 이야기로 한동안 또 행복해졌다. 아침에 수영을 하고, 점심을 해먹고, 아이들을 잠시 재우고 오후 3시나 4시에 출발해서 다음 해수욕장이나 텐트장까지 8시간 정도를 걸어야 했던 제주도, 천제연 폭포 근처의 리버사이드 호텔 바로 옆 공원에 텐트쳤다고 사복 경찰이 왔었던 일, 서귀포 휴양림까지 올라가면서 종은이가 졸리다고 징징대던 일, 천지연폭포를 바다로 수영해서 봤던 일,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봤던 사슴, 13일째 텐트의 폴대소리를 들으며 가족 모두가 멀미를 해서 마지막 밤은 찜질방에서 잤던 일등... 누군가는 추억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던데 바람이라는 말에도, 물이라는 말에도, 전기라는 말에도 술술술 할 이야기들을 엮을 수 있는 것을 보니 그동안의 우리가족 시간투자가 아주 성공적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누아에는 딸들도 많고, 사진도 많고, 수다도 많고, 웃음도 많았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그 시누아 주인장은 자기도 아들하나에 딸 둘이 있다고 흐뭇해 한다. 그러나 주인장의 인상 좋음과 달리 이 시누아의 룸은 정말 수용소같다는 인상을 갖게 했다. 훵한 맨 시멘 바닥에 뚝 떨어진 침대 2개,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부는 게 아까 낮에 봤던 동네 아저씨의 두꺼운 잠바가 오늘밤은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기를 정리하고,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식사준비를 위해 주문을 먼저 했는데 보통때와 달리 피자2개에, 스파게티1개, 달밧을 시켰다. 점점 고지가 높아지면서 가격도 따라 높아지고 피곤한데다 입맛도 없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메뉴를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사이 샤워를 하고, 방 정리를 하고. 음식이 나왔다. 종윤이 아빠는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은지 얼굴이 안 좋다. 그런데 다행히 피자도 스파게티도, 달밧도 보기와 달리 맛있었다. 오늘의 운은 요리 잘하는 요리사 만나는 것인가 보다. 콜라까지 시켜서 먹자마자 종윤이 아빠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관리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지, 갖고 있는 휴대용 가스가 많지 않다고 끓인 물을 100루피 주고, 3.5l보온병에 주문을 했다. 그래서 떨어져가는 생수대신 홍차를 우려 빈병에 담았다. 내일은 이 물로 갈증을 해소해야 할 것 같다.
밤 새 종윤이 아빠는 몸살이 나는지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몸살약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오늘밤, 잘 자고, 내일은 잘 걸어야 하는데, 오후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자 은근한 걱정이 몰려왔다.
빗소리에 새벽 5시쯤 눈이 떠졌다. 자고 있는 남편의 이마를 만져보니 다행히 열이 내렸다. 7월인데도 제법 쌀쌀한 것을 보니 고도가 꽤 되는 듯 싶었다. 식당으로 노트북을 들고 가보니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난 아이들이 있었다. 이 집 주인이 자랑하던 이쁜 딸 들, 방학이라더니 학교를 가는 것처럼 준비를 한다.
“Are you going school?(학교가니?)"
"Yes(네).."
뒤이어 일어난 버럿에게 물었더니 원래는 어제가 개학일이었는데 축제일이어서 학교를 쉬었고, 오늘부터 개학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6시간 걸어서 포카라에 있는 학교를 가야 한다고.
6시간을 걸어가야 그나마 버스를 탈 수 있단다.
“그럼, 얘네들을 당연 지각이겠네.”
그랬더니 버럿이 그렇다고, 그래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채비를 다하고 산을 내려 갈 때 쯤, 이런 저런 당부를 하던 아빠는 딸 아이들이 사라지자 그 걱정이 깊어졌는지 바로 뒤따라 나갔다. 앞으로 6시간이나 걸어가야 하는 딸들을 보는 게 이 산속에 살아야 하는 아빠로써 미안하고 안쓰러운 것 같았다.
우리의 아침은 짜파티와 차. 다행히 괜찮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남편과 소박한 아침을 먹는 사이 버럿 말처럼 비가 그쳤다.
우와- 오늘은 데우랄리까지, 총 6시간 걷기.
이제부터는 민가를 걷는 게 아니라며 버럿은 종윤이와 다시 선두를 섰는데 오늘은 종은이까지 선두를 서겠다고 따라 나섰다. 종윤이가 버럿과 선두를 서면서 먼저 숙소에 도착하면 로지주인이 버럿에게 주는 음료를 종윤이에게도 준다는 말을 듣고, 종은이도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나선 것이다.
정글을 걷는 것은 무척 기분이 좋다. 우거진 나무에, 각종 새들에, 그 사이, 사이 예쁘게 핀 꽃들- 지리산 정상 즈음에서 각종 꽃들을 봤을 때 그 기분처럼 오늘은 꽃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데우랄리부터는 3000미터가 넘어서인지 기온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심지어 올라오면서 비에 젖고, 땀에 젖었는데도 우리는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데우랄리는 전기공급이 안되고, 시누아처럼 태양열을 이용한 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 묻힌 수건으로 대충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해가 떨어져서는 더욱 추워졌다. 저녁을 먹고 잠깐 같이 머물게 된 외국인 친구들과 아이들은 카드로 성쌓기 놀이를 잠깐하고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추워서 몇 번이나 잠을 깼다.
데우랄리의 새벽은 많이 분주했다. 같이 있었던 외국인들은 여기서 두시간 거리에 있다는 mbc(마챠푸추레 베이스캠프)에서 머문다고 들었는데 아침 6시쯤 부랴부랴 챙기더니 30분만에 숙소를 떠났다. 아직도 몸이 완쾌되지 않은 종윤이 아빠와 나도 그때쯤 눈이 떠져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7시쯤 아이들을 깨웠다. 그리고 이닦고 세수하고, 아침을 먹는 사이 다시 뜨거운 태양이 마당 위 돌을 아침부터 데피고 있어 우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4시간 남았다는 것에 여유를 부리며 온갖 빨래를 마당에 널었다. 양말, 신발, 우비, 팬티, 티셔츠까지.
데우랄리 로지를 출발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하얀 종 모양의 히말라야풀이라고 하는 꽃이었다. 3천미터를 넘으면서부터는 이 꽃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난 그꽃을 볼때마다 지리산 정상 근처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산오이풀이 생각났다. 정말 오이향이 은근히 퍼져서 지친 산행에 위로가 되었던 풀. 그러고 보니 그 이쁜 자주색 꽃에도 산오이꽃이라고 하지 않고 산오이풀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이풀이 그 풀은 아닐테지만, 내가 버럿에게 한국말로 풀이라고 하는것은 grass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다. 이젠 안나푸르나하면 내가 지리산을 떠올릴 때 산오이풀을 떠올리듯, 히말라야풀이 생각날 것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소원탑을 보았다. 아마도 이 길을 걸었던 많은 트렉커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담아 쌓아놓은 것 같았다. 우리도 그 위에 돌을 하나 얹으면서 내려올때는 우리도 우리나라식의 소원돌탑을 세워놓고, 예쁜 솟대도 하나 만들어 꽂아 놓아야겠다고 남편은 주머니에서 연장을 꺼내고 적당한 나무를 찾았다.
마차푸추레 베이스 캠프 MBC는 데우랄리에서 두시간 조금 더 걸려 도착했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한국인 트렉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안나푸르나를 내려가서 가려고 계획한 룸비니를 다녀온 길이라며 그곳 한국절인 대성석가사에서 스님이 싸주셨다는 미수가루를 우리 아이들에게 봉지째 건네주고 그곳에 대한 정보도 덤으로 알려 주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천천히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ABC를 향해 올라갔다. 마차푸추레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도가 이미 많이 높아졌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주의를 버럿은 여러번 강조했다. 한 발 한 발에 호흡을 실어가며 걸어가는데 눈 앞에 펼쳐진 산은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위엄이 느껴졌고, 빙하에서 흘러 나왔을 차디 찬 개울물은 손이 시렸고, 마치 54색 물감을 커다란 붓에 묻혀 휙 뿌렸을 때 볼 수 있는 온갖 색깔의 꽃들이 그 개울물 주변에 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싶었을 때, 갑자기 안개가 몰려왔다. 바로 옆에 있던 남편과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방울 소리가 주변을 꽉 채운다 싶었는데 안개가 순식간에 거치고 우리는 양떼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이 높은 곳에서 양떼를 키우다니.. 양떼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양떼를 보호하는 허름한 누더기를 여러겹 입은 헤리포터의 헤그리드를 연상시키는 목동이었다.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도 생각나서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시 안개가 밀려오고, 그들은 사라졌다..
“할머니가 오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텐데...”
그러찮아도 아까부터 말이 없던 남편이 종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아주었다.
꿈 속 같은 꽃밭을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 했을 때는 우리도 약간 기분이 이상하다 느꼈는데 종은이가 제일 먼저 머리가 아프다며 평소와 달리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남편은 고산병이 온 것 같다며 이미 어두워져 하산할 수 없는데 큰일이라며 걱정을 했고, 같이 동행한 한국인 트렉커 두분은 자신들에게 약이 있다며 먹여보라고 건네주었다.
그 약을 먹고, 종은이는 잠이 들었고, 남편도 속이 머쓱거린다고 종은이 옆에 누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종윤이, 종하와 나만 그 한국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종윤이도 갑자기 토하고 싶다고 하고, 종하역시 머리가 아프다고 울상이 되었다.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일을 했다면서 한국말을 유난히 잘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책임자는 해가 뜨자마자 마차푸추레로 내려가면 금세 괜찮아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새벽 동트기가 무섭게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깨워 서둘러 마차푸추레로 내려가기 위해 로지의 문을 열었다. 순간,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하얀 눈으로 뒤덮여 사람을 압도하려는 기세로 바로 코앞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보는 거대한 안나푸르나에 기가 질려 한 발자욱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산이 이렇게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은 내 인생 처음었다.
갑자기 이 산은 우리나라 산과 달리 인간과 더불어 사는 산이라기 보다는 사람에게 위엄을 과시하는 공포의 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간단하게 사진 몇 장을 찍자마자 부랴부랴 마차푸추레로 거의 뛰다시피 내려왔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히말라야의 한 봉우리 안나푸르나. 포카라까지 와서는 여름산은 거머리가 무섭고, 겨울산은 추워서 엄두를 못내겠다고 돌아서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나푸르나 등반은 가치가 있었다. 특히, 안나푸르나가 영감을 준다는 말을 듣고, 등반하기 전, 이 여행이 끝나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영감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그 질문에 “scool without school” 이란 명제를 받았다. 학교는 학교인데 학교 없는 학교. 그때는 왠 뜬금없는 메시지인가 했지만 나중에 이 여행학교를 시작하고 나서는 그 때 받았던 메시지는 이미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 준비되어져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안나푸르나를 거의 다 내려와서 막내랑 걸으며 농담처럼 물었다.
“종은아, 너 누가 1000만원 주고 바로 뒤돌아 다시 안나푸르나를 다녀오라고 하면 갈수 있겠니?”
“아니, 안가, 그런데 1억원 주면서 갔다 오라고 하면...음...그땐 갈거야-”
“왜? 너 1억원 갖고 뭐 할 일 있니?”
“아니, 우리 가족을 위해 있으면 좋을 돈 인것 같아서-”
그만큼 안나푸르나의 8일 트렉킹은 우리같이 여행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음식이 아닌 현지식으로 20끼 이상을 해결하는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늘 위와 같은 질문에 있어 그래도 잘했다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누군가를 만나면 꼭 한번 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경험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 산맥 중 안나푸르나를 4130m까지 올라가 제대로 보고 올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큰 산이 있다는 것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우리는 가족이 함께였다는 것에 더 감동이었다.
우리가 함께 한 여러 가지 일중에서 이번 트렉킹도 분명 우리가족에겐 특별한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이다.
거머리하면 떠오를테고, 여름에 내리는 비를 보고도 가족들이 우의입고, 김장 비닐에 구멍 3개 내서 입고 하염없이 걸었던 네팔의 hillside를 떠올릴 테고, 목욕탕에 가서 손바닥, 발바닥에 생긴 쭈글이 주름을 보고도 젖은 양말에, 젖은 등산화를 10시간이상 신고 벗었을때 그때의 발바닥과 손바닥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피자를 먹을 때도, 스파게티를 먹을 때도 우리는 시누와에서, 촘능에서 먹었던 그 맛을 이야기 할 테고, 우리나라 음식을 먹으면서도 네팔에서 손으로 먹던 달밧을, 챠파티를 우리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사는 것에 의미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 ‘추억 앨범’에 또 하나의 커다란 사진을 붙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난 이번 여행을 끝내면서 우리 가족에게 참 감사했다. 특히, 더위에, 몸살에, 배앓이에 여지껏 여행한 것 중에 최악의 상태였음에도 최고의 리더로 우리 가족을 보살펴준 내 친구이자 남편에게, 무거운 배낭을 지며 가끔 ‘이러다 키 안크는 거 아닌가’ 염려하면서도 꿋꿋이 우리 가족의 명예를 걸고 앞서서 잘 걸어주고, 현지식을 제일 잘 먹으며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종윤이에게, 그 긴다리에, 눈썹에 있는 거머리를 코딱지 떼듯이 떼면서 거머리가 무섭지 않다고, 종은이 다리에 붙은 거머리도 떼주고, 비가 오면 종은이 모자며, 옷매무새를 잘 살펴주고, 손잡아 걸어준 다정한 종하에게, 그리고 귀염둥이 막내답게, 이사람, 저사람과 짝을 이루며 힘든 걸음을 웃게 해준 우리 종은이에게.
ABC에서도 정희연씨와 예창웅씨에게도 말했지만 이렇게 우리가족이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우리가족은 진정한 행운아다.
거머리와 비 때문에 더 재미있었던 이번 산행-
거머리들이 가끔 귀엽다고 하는 종은이처럼 배에도, 눈썹에서도, 귀에서도, 거머리를 꺼내면서도 행복하게 웃었던 우리 가족, 어려우면 어려운 이유가 있다고 평소의 소신대로 그 어려운 이유를 알게 해준 그 산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그리울 것 같다-
돈 많다고 생각하는 트렉커 준비물 | 돈만 많이 들고 가시면 아무 준비물이 없어도 7박8일간 트렉킹 가능하십니다- | 그래도 침낭하나는 필수! 그곳 이불을 사용하고 빈대에 고생한 사람 봤음. |
돈은 많지 않지만 몸이 좀 되는 트렉커준비물 | 왠만하면 산의 높이가 달라지면서 가격도 오르니까 아래에서 사서 메고 가십시오- | |
돈도 안되고 몸도 안되는 분 | 다음번으로 미루시는게 좋습니다-몸되고, 돈될때 까지-*^^* | |
공통준비물 | *등산화를 하루 빌리는 값은 비수기일때 25루피씩할수 있습니다. 정상시즌일때는 30루피이상하는데 신발의 상태가 좋지 않으므로 등산옷 파는 여러곳을 다니며 발품을 파세요- 그리고 등산화는 발목이상까지 올라오는게 좋고, 등산화 끈밑에 있는 발등 덮개 천이 운동화 몸체와 따로 떨어지지 않게 날개가 이어져 있는게 좋습니다.-그래야 거머리침입을 덜 받을수 있습니다. *거머리의 특효약은 소금입니다. 로지를 떠날 때 소금주머니를 작게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 좋습니다. 신발바닥에나 발목등에는 미리 뿌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거머리가 달라붙어있을때는 즉시 소금주머니로 문지르면 즉시 떨어지며 죽습니다. 이때 한두방울 물을 소금주머니에 넣어 사용하면 더 좋습니다- *비수기때는 우기임으로 비닐이든 우비 하나 정도는 센스입니다. *되도록 큰돈이 아닌 잔돈으로 거슬러가십시오. *커피나 녹차가루를 준비해 가서 자주 마시십시오-lodge에 도착해서 끓인 물을 주문하면 100루피에 3.5l정도 보온병에 끓여줍니다. 따뜻한 물과 차를 많이 마셔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입은 옷(짧은 반바지, 반팔)에 긴 바지, 긴팔을 넣고, 약간 따듯한 점퍼1개, 되도록 침낭을 하나 구입해서 가지고 가십시오(빈대주의) 수건, 비누, 치약, 칫솔, 양말 (신은 것 포함해서)3개, 속옷3개(입은 것 포함), 읽을 책 한 권, 일기장-꼭 가져가십시오- *상비약-가려움증에 바르는 것, 아스피린(고산병), 지사제, 몸살약 *간식-과일, 오이, 트윅스같은 쵸콜릿, 과자. *침낭-빈대에 무관한 사람은 각 숙소마다 블랭킷이 많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상관없음.*^^* | *포터를 데리고 갈 경우-포터에겐 10~15kg의 짐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포터는 짐을 내 잠자리에 가져다줍니다. 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부탁해서 같이 가면 굳이 가이드를 따로 쓰지 않아도 길안내를 잘합니다. 우리도 포터를 썼는데 아주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정이 끝난 후, 300루피정도 팁을 주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가이드를 쓸 경우 짐은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설명은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