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이 온다고 법석대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 데 어느새 벌써 2000년의 세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다.
뭔가 달라진 것이 있는가 싶어 둘러 보아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 전과 모두 마찬가디로 일년이 가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송구영신을 치뤘다는 느낌 이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다.
천년과 천년이 이어지는 접합점을 목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새 천년을 맞은 의미가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생각만으로는 어딘가 미흡하게 느껴진다.
새 천년의 의의는 물리적인 시간의 변화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변화에 부여하는 의미의 깊이 때문에 생겨난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이 다른 날과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물리적 시간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대하여 새겨 넣고 부여하는 우리들의 의미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새 천년을 보름이 넘게 지나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새 천년의 시작에 별로 특이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겨 넣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되는 게 아닌가?
국가적으로는 「새 천년 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의미 부여를 하고자 애써왔고, 가톨릭 교회에서도 「2천년 대희년」의 기치를 내걸고 무수한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 나의 머리 속에서는 하등의 특별한 의미도 생성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나는 그동안 살아 오면서 겪었던 53번의 새해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2000년의 새해도 그냥 덤덤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덤덤해도 되는 것일까?
새 천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했다. 새 천년에 새겨야 할 의믜를 좀더 지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내가 부여하는 의미의 내용과 크기 만큼 새 천년은 내게 있어서 남다른 뜻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조금 더 확대한다면,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의 내용과 크기 만큼, 우리와 우리 사회도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은 국제사회 특히 선진 부유국가에 2천년 대희년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아주 중요한 제안을 한 바 있다.
이른바 제3세계의 후진국들이 선진국에 대하여 지고 있는 엄청난 국가의 빚을 탕감해주자는 제안이다. 이 제안은 희년 정신의 핵심을 반영하고 있다.
대희년의 기본정신은 무엇인가?
레위기에 이렇게 써있다.
「오십년이 되는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의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로 돌아가야 한다」(레위. 23,10).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억압과 불평등의 관계를 털어 버리고,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셨던 원레의 자연스런 상태에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것이 희년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노예의 신분을 벗겨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고, 진 빚은 탕감시켜서 원래의 평등 관계로 되돌리는 것이 그 핵심인 만큼 국가간의 채무 탕감 제안은 바로 이 희년 정신의 정확한 반영인 것이다.
교황청의 제안대로 선진국의 관용이 베풀어지기를 기대하고 우리나라도 그런 관용자의 편에 서서 한 몫을 크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우리도 우리 수준과 처지에 맞는 대희년의 해방과 관용이 있어야 되는게 아닐까?
한국주교회의는 「새날 새삶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내용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 「좋은 이웃 되어 주기」항목이 있고 그 안에 또 「용서 청하고 용서하기」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과 관련해서 나는 이런 해방과 관용이 대희년의 한가지 깊은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우리 한국인들은 지난 50여년 동안 6·25, 4·19, 5·16, 12·12, 5·18 등 잦고 참혹한 정변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내용과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 가슴 속에는 한(恨)이 많이 응어리져 있다. 자기네 집안을 해코지 한 원수(怨讐)를 대대로 대물림 해서 기억하고 있는 집안이 많다.
이런 한을 새 천년에도 그대로 기억하고 기회가 오면 앙갚음할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의 미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면 안되는가. 그리고 나도 나의 미움으로부터 해방되면 안 되는가?
2천년 대희년에 이런 해방과 관용의 노력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해방과 관용의 노력이 우리사회 전체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문용린(돈보스꼬·13일 교육부 장관 피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