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5일
제목 사람이 되신 예수님
본문 요1:14 요일1:1-4
여러 해 전 가을 광주에 있는 장애인 문학모임 회원들이 순천만에 문학기행을 왔습니다. 이분들이 제게 책 한 권을 남기고 가셨다. “장애는 능력입니다. 장애인은 아름답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여러 장애인의 글 모음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글의 내용은 대부분이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한 시각장애인은 11살 때 밤중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뛰어오다가 담벼락에 부딪혀 한 쪽 눈을 다쳤는데 시신경이 손상을 입었지만, 수술비가 없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한 쪽 눈만 가지고 결혼하여 1년이 지났을 때 남은 한쪽 눈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부인마저 두 아이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실의 가운데서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어두움과 절망이 걷히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또 한 분의 이야기를 더 소개해 봅니다. 이 사람은 뇌 병변을 앓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화장실에 혼자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변이 마려웠습니다. 혼자서 바지를 벗는 데 30분이 걸렸고, 변기에 앉는 데 20분이 걸렸습니다. 뒤처리는 혼자 할 수 없어 사람이 올 때까지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지만, 변기에 앉아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혼자 바지를 벗고, 변기에 앉을 수 있음을 인하여....
또 다른 장애인이 자매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7살 때까지 기어다니고, 8살에 목발을 짚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11살 때부터 간신히 걷게 되었습니다. 특수학교에 다니며 중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죽는 게 더 낫겠다며 생을 비관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장애는 능력입니다. 장애인은 아름답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 정상인 못지않은 능력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세 장애인을 절망에서 일어설 수 있게 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의 힘이 극한의 어려움을 견디게 했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세 장애인의 사례를 통해서 신앙이란 막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임을 배웁니다.
기독교는 실제적인 종교다
기독교의 신앙은 허황한 진리나 비현실적인 가상의 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탄절은 기독교가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볼 수 있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상의 세계를 살았던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던 땅에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며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본 경험을 했습니다. 요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그 경험을 토대로 오늘 본문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배고픔, 피곤함, 노숙, 슬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육체의 연약함을 다 경험하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에 주시고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농촌에 살아보아야만 농촌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실패해 본 사람이 낙방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자의 마음을 압니다. 늙어보아야 늙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심은 우리끼리 사귐을 갖고, 우리와 하나님이 사귐을 갖고 싶어서입니다. 3절“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결과적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죗값으로 죽어야 하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절박한 운명에 처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지옥 불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되 죄가 없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와 무관한 마리아의 태를 빌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시기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근본의 문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한 집에 불이 났습니다. 다급한 아이 엄마는 아이를 이불에 싸서 문밖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이를 도와주십시오. 누군가가 우리 아이를 받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되었을까요?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은 3층에서 던져진 아이를 팔에 안았습니다. 아이를 받은 사람은 야구선수 바스켓즈라는 사람인데 그는 포수였습니다. 그는 자기 실력 뽐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는데 오른손에 아이가 안겨 하나님께 감사했다.” 기독교 신앙은 먼 훗날 천국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맛보며 누리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일상의 삶 속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며, 풍성함을 누리게 합니다. 그렇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삶도 실제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의 삶이 실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느껴지도록 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외롭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지역사회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고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이웃들이 우리를 향해서 교회 다니는 당신이 우리 이웃이어서 너무 좋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선생님이 위로받고 가르칠 맛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무슨 일이든 부탁하면 들어주는 형제 같은 친절한 동료는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뿐이더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실제적인 효력이 미쳐야 합니다. 교회를 다닌 이후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것을 남편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님들은 정말 격이 다름을 자녀들이 느껴야 신앙의 지도를 기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입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화하고 실제화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영원한 세계를 중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영광을 미리 맛볼 수는 있어야 합니다. 죄를 싫어하며 불의를 미워하고,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풂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만큼 그 지역과 지역민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함을 입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실제적이어야 하며,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 가운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실제적인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