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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
헤롯의 가계는 B.C.37년에서 시작되어 A.D.70년까지 약 100년 간 어어진 왕가이다. 이 왕조는 안티파테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안디바”라고 불리워진 사람이다. 그는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의하여 이두메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안티파테르 2세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히르카누스 2세에게 밀착되어 이를 조정함으로써 조금씩 권력을 쌓아 갔다. 그리고는 결국 로마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분주하게 활동하였다. 마침내 쥴리어스 케사르는 그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은 혈통적으로는 이두메(에돔)출신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요한 히루카누스가 B.C. 125년에 이두메을 정복하여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개입
롬마가 유대 역사에 개입하게된 것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정황을 알아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 사이에 계승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 하스모니아 가문의 소식이 로마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소식을 접한 로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여 폼페이우스를 파송하게 된다.
히르카누스 2세가 3개월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어도 싸움이 끝나지 않게 되자 로마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마침내 폼페이우스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해 들어왔다. 지쳐 있던 히르카누스는 로마를 지지하여 마침내 아리스토불루스는 무너지고 히르카누스가 세력을 잡게 된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장교들을 이끌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격분했다. 반면에 폼페이우스는 성전에 들어갔으나 성전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아르스토불루스의 패배와 함께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은 로마가 지배하는 시리아령의 일부 지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헤롯대왕(B.C.37-3)
그는 헤롯 아티파테르 2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니 25세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거는 당시의 골칫거리였던 도적 떼들을 체포하여 즉시 처형함으로써 산헤드린의 분을 사기는 했지만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의 유대인들로 부터는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안타고누스가 길릴리를 침공하였을 때도 이를 물리치게 되었다.
그 후에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가 암살 당했을 때 로마의 집정관 마르크 안토니우스는 헤롯과 그의 형제 파사엘을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파사엘은 안티고누스를 왕으로 삼는 파르티아 군에 포위되어 결국은 체포되었고, 감금되어 있던 중에 자살하고 말았다. 이를 본 헤롯은 팔레스틴을 버리고 로마로 망명을 가서 거기서 정치적인 공작을 해서 마침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을 받아 내었다. 38년에는 로마 군이 파르티아 군대를 몰아내었고, 1년 후에 헤롯은 안티고누스를 물리치고 왕위를 획득하였다.
헤롯은 일반적으로 팽화로운 통치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유대인들의 인심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러운 정치를 해 나갔다. 로마와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헤롯은 그 후에도 자신을 후원한 안토니우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호감을 사는 데도 성공했다. 그야말로 헤롯은 정치적인 제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중에 유대의 국경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적으로는 헬라화를 시도하였고 위대한 건물들을 건축하였다. 그러한 업적은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을 보아서 헤롯 당원들이 생겨날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업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각 도시를 모두 새롭게 단장하였고, 본래 “스트라토”라는 성체를 재건하여 가이사랴라고 이름하여 로마의 팔레스틴 수도로 삼았다. 그는 전형적인 헬라 양식의 극장들을 지었다. 지금도 팔레스틴의 가이사랴의 유적지 해변에는 헤롯이 만든 극장과 수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롯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그 건물은 B.C.20년 경에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에도 건축중이었고 64년 경에댜 완성되었으니 적어도 84년이나 걸리는 대 역사였다. 헤롯이 시작한 성전공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곳은 45m까지 파고 기초를 놓았을 정도이고, 그 표면의 면적만도 480 300m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완성된지 불과 6년만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헤롯이 짓고 있는 건물의 위용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곧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13:1-2)
헤롯의 정치는 밖으로는 유화적이었으나 가문 내에서나 측근들에게는 매우 잔인한 정치를 했다. 헤롯의 질투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헤롯은 질투심과 의심과 정권욕에 사로잡혀 거의 이성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불안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혈통적으로는 이두메(에돔)출신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그 이유는 요한 히르카누스가 B.C.125년에 이두메(에돔)를 정복하여 모든 이두메인들을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하였기 때문이다. 하스몬 왕조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화한 것이 이러한 대가를 치르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결국 하스몬 왕가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헤롯은 자신이 참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취한 행동이 하스몬 왕가의 후손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하스몬 왕가의 사람이 대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두려워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스몬 왕조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을 내다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하나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미리암네의 모친 알렉산드라는 내심 심하게 분하게 되었다. 하스몬가의 사람이 하나넬이 대제사장이 된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손자인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우기로 마음에 결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계략을 총 동원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는 마침내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연락하여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헤롯에게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할 수 없이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소환되었다. 그렇게 하여 결국 하나넬은 해임되고 아리스토불루스가 대제사장으로 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알렉산드라의 정치적인 대 승리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헤롯과 알렉산드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평정을 되찾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 헤롯은 알렉산드라가 클레오파트라와 연락이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가. 그 후부터는 헤롯이 알렉산드라를 감시하여 예루살렘 밖으로 나갈 수 없게 감시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예루살렘을 빠져나가서 외교적인 활동을 재개하려고 관을 만들어 숨어서 나가려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헤롯은 알렉산드라를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라는 예루살렘에 완전히 연금되고 말았다. 헤롯은 사람들을 시켜서 결국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를 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 헤롯은 이 소식을 접하고 꽤나 슬퍼하는 척했다.
대제사장 아리스토불루스가 헤롯에 의해 살해당한 후 알렉산드라는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편지를 보내어 헤롯을 출두시켜 대제사장의 죽음에 대하여 해명하라고 명령하도록 부탁을 했다. 이번에도 알렉산드라의뜻이 받아들여져서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소환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편 헤롯은 애굽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기의 숙부가 되는 요셉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자리를 비우게 될 동안 나라의 일들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하고, 또 안토니우스가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소식이 도착하면 즉시 자기의 아내 마리암내를 죽이라고 말했다.
요셉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헤롯은 애굽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런데 얼마 후 헤롯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러자 알렉산드라는 왕위를 자기 가문의 것으로 만들 것을 꿈꾸게 되었다.
한편 헤롯의 숙부 요셉은 마리암네에게 아첨을 하여 헤롯이 왕비를 죽이라고 했었던 것을 토로하였다. 알렉산드라의 계획이 착착 추진되고 있는 순간에 죽었다던 헤롯이 갑자기 들이닥치게 되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를 찾아가서 일의 전말을 교묘하게 꾸며서 잘 둘러대고 오히려 큰 권한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헤롯은 그동안 진행된 사실들을 추궁하여 자기의 숙부 요셉을 처형하였고, 자기의 아내 마리암네를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헤롯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왕비 마리암네가 모든 사실을 추궁하게 되자 헤롯은 마리암네가 요셉과 부정한 관계를 맺은 겻으로 알고 변명의 기회도 없이 숙부인 요셉을 죽여버렸다. 알렉산드라 역시 반여자로 몰아 감옥에 쳐넣고 말았다.
한편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기회주의자인 헤롯은 재빠르게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헤롯의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헤롯의 의심과 질투는 심해져 갔다.
그는 경쟁적인 왕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학살한 그 왕이었다.
헤롯의 말년은 왕위 계승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였다. 헤롯이 이 문제를 풀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왕자들 가운데 3명을 살해하였고 그밖에도 많은 측근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헤롯은 하스몬 왕조의 주요 인물들을 45명이나 처형하였고 그 재산들을 몰수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히르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와 결혼까지 했지만 마침내 그는 마리암네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아난 아들까지 처형하였고, 하스몬 왕조의 피가 섞여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 없앴다. 뒤늦게 파르티아에서 돌아온 히르카누스도 헤롯의 손에 죽었다. 헤롯은 자기의 죽음을 5일 앞두고 자신의 장자 안티파터를 죽였다. 헤롯은 왕위 계승을 두고 지명자를 여섯 번이나 바구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헤롯의 아들(Huios)이 되는 것보다는 헤롯집의 돼지(Hus)로 태어나는 것이 더 안정하다”는 속담이 생겨났을 정도다.
결국은 아켈라오를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으로 인준하고 나머지 영투를 빌립과 안티파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얼마나 자신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했던지 자신의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여리고 경기장에서 다수의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경건한 유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두고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려는 그의 계산이었다. 헤롯은 B.C.4년 4월 1일 장암과 수종, 동맥 경화증 등의 합병증으로 죽었다.
헤롯이 죽은 후 헤롯의 가문은 매우 복잡하게 얽힌 역사를 기록하게 하였다. 헤롯 가문의 불륜과 정치적인 곡예는 로마인들까지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헤롯 대왕
아켈라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아르립바 2세
아켈라오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과 말다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헤롯 대왕이 그를 첫번째 상속자로 지명함으로써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으로 피난해 있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유대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 때 유대 땅은 아켈라오가 다스리고 있었다.(마2:22)
아켈라오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유대로 가기를 무서워할 때 다시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B.C.4년 경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도 A.C.4년까지 아켈라오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3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의 비위를 거스리고 또 유대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이키게 될 것을 감안하여 로마의 인준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기 전에 아켈라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향한 적개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유월절까지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유월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유월절에 성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A.D.4년경 아켈라오는 안티파스의 도전을 받았는데,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처음 유언장을 근거로 자기의 왕권을 주장하였고 아켈라오는 수정된 유언장을 가지고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였다. 아켈라오의 어머니 말다케는 아켈레오와 로마로 동행을 했는데, 말다케는 오히려 안타파스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유대의 왕위 계승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팔레스틴에서는 마침내 로마 군이 개입하여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편 유대로부터 또 다른 대표단이 로마에 도착하여 헤롯 가문의 누구에게도 왕권을 수여하지 말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의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렇게 되자 헤롯 가문은 또 위기에 봉착하였고 헤롯 빌립이 아켈라오를 지지하기 위하여 로마에 도착했다.
이 모든 소송 사건을 다 들어 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대 땅의 절반을 아켈라오에게 주었고, 남은 절반을 가지고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셋 다 왕의 칭호을 받지 못하고 분봉왕이라는 명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결국 아켈라오는 로마로부터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까지 다스리는 분봉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통치를 잘하면 장차 왕의 칭호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켈라오는 유대로 돌오와 대제사장직에 있던 요에젤을 경질하고 그의 동생 엘르아살을 임명하였다. 아켈라오는 글라피라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려고 자기의 아내 마리암네를 버렸는데 이 일이 유대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다. 아켈라오를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고발하기 위하여 로마로 대표단을 파송하였고 마침내 로마에 알려지게 되자 A.D.6년에 아켈라오는 갈리아 지방의 비엔나로 추방되고, 총독 코포니우스가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다스리게 되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A.D.4-39)
헤롯 대왕과 그의 사마리아인 아내 말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다. 그의 이름은 신약에서 헤롯 왕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막6:14, 22; 마14:1, 9)
그는 자신에게 왕위를 하사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티베리우스를 건설하였다. 지금도 티베리아스는 갈릴리의 최대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나바테아의 공주(아레타스 4세의 딸)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아내로 삼았다.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부도덕한 헤롯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공개적으로 질책하였다. 한편 아레타스 왕은 이렇게 자신의 딸을 배신한 헤롯을 응징하기 위하여 항상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 빌립의 아내이며 자신에게는 질녀가 되는 아리스토부루스의 딸 헤로디아를 가로채었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이 이 사람을 책말하다가 결국 목베임을 당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헤롯 안티파스의 이야기이다. 그는 양심과 야심이 혼합되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복잡한 인물이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즐기고 또 그녀의 딸을 향하여 음욕을 불태우는 한편, 세례 요한의 용감한 예언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로마까지 가서 자신의 조카이자 제수이기도한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결국 데리고 온 것이나 그러한 괴물을 따라 나선 헤로디아의 불륜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의 야수 같은 눈길은 이제 제수인 헤로디아에게서 그녀의 딸 살로메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헤롯에게 복수하는 헤로디아의 방법이 곧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게 한 것이다. 헤롯의 눈에는 세례 요한의 후계자처럼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적지 않은 두려움이 었었던것 같다. 한편 호기심이 많아서 예수님께서 무슨 기적을 행하시는가 보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 빌립(A.D.4-34)
빌립은 헤롯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이두메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다스리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던 것이 밝혀져 있고, 그 밖에 빌립에 대한 기사를 찾기가 어렵다. 그는 A.D34년에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의 영지는 시리아에 병합되었다가 후에는 아그립바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B.C.10-A.D.44)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는 헤로디아와는 친남매간이었다. 그리고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 된 후 로마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는 황실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와 친구가 되었다. 청년으로 자라면서 그는 방탕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팔레스틴으로 갔지만 거기서 안티파스의 미움을 사서 결국은 다시 로마로 갔다.
A.D.36년 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가이우스 갈리굴라와 친분을 맺었다. 곧이어 티베리우스가 죽고 갈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 대하여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다가 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풀려나와 팔레스틴의 빌립이 다스리는 영토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갈리굴라가 미쳐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그 흉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고 하자 아그립바는 이를 단념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 있는 동안 갈리굴라가 죽었다.
아그립바는 그 동안 클라우디어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 중재를 하였다. 이 공로를 클라우디어스가 인정하여 마침내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군도 아그립바에게 일임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였고(행12:1-2)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했으며(행12:4-5), 그는 유대인의 비위를 맞추는데는 아주 명수였다.
그리하여 그런 대로 정치적인 곡예를 잘 하다가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열렬히 환호하는 소리가 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치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충이 먹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행12:20-23)
헤롯 아그립바 2세(A.D.27-100)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로마에서 자라났다. 그의아버지가 죽었을때 그는 불과 17세였다. 그래서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해서 유대의 관할 구역은 총독들의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A.D.50년 경에 파레스틴 북부 칼키스(지금의 레바논지역)지방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53년에는 클라우디어스가 발립이 다스리던 땅과 교환하여 주었고, 클라우디어스가 죽고 네로가 황제가 된 후에는 티베리우스를 포함한 상당한 영토를 더 붙여 주어 상당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누나를 범하여 근친상간을 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가 베스도와 함께 바울의 증언을 듣다가 베스도가 바울을 향하여 미쳤다고 말했던 사람이다.(행26:24-32)
그는 후에 예루살렘에 있던 하스모니아 왕국을 확장하였다. 또 가이사랴에 서 건축 사업을 추진하였다. 66년 제 1차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그는 로마로 가서 행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거시서 장수하다가 약 100년 경에 죽었다. 그는 헤롯 와가의 마지막 통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