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의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12牧 (중국 12주의 諸侯,즉 지방장관)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牧民] 하였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정치를 할 때는 사목(司牧.지방장관)을 세워 수령으로 삼았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에 가서 가축 사육하는 것을 백성 다스리는 데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 다스리는 것을 목(牧)이라 하는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주나라 六卿의 하나)가 백성들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자(國子.공경대부의 자제)를 가르쳐 각각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성인의 말도 없어져서 그 도(道)가 점점 어두워졌다. 요즈음의 지방장관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할 것인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서로 떠돌다가 굶어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한데도 지방장관이 된 자들은 한창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아버지께서는 성조(聖朝)의 인정을 받아, 연천현감(漣川縣監),화순현감(和順縣監),예천군수(醴泉郡守),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때 따라 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다소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다소 증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는 이를 쓸 곳이 없게 되었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공부하였다. 다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중국 역사서인 23史(23종의 중국 역사서)와 우리나라 역사 및 문집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지방장관이 백성을 다스린 사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 시골은 전답의 조세(租稅)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그에 따른 여러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하므로 들은 것이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천박한 소견을 붙였다.
모두 12편으로 되었는데,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은 차례대로 육전(六典)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된다. 혹 몇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혹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여 통틀어 48권으로 한 부(部)가 되었다. 비록 시대에 따르고 풍습에 순응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못하였지만, 백성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조례(條例)가 갖추어졌다.
고려 말기에 비로소 오사(五事.수령이 힘써야 할 5가지 일)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이를테면, 수령이 해야 할 일의 대강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고찰하여 스스로 시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있는 것만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방법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옛날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지었고, 유이(劉彝)는 법범(法範)을 지었으며, 왕소(王素)에게는 독단(獨斷)이 있고, 장영(張詠)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호태초(胡太初)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으니, 모두 이른바 목민에 관한 서적인 것이다.
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괴한 글귀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에 ‘옛사람의 말이나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내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어찌 반드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만 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성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 그 당시의 임금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순조) 21년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 정용(丁鏞)은 서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