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경전
한 알의 곡식에 담긴 만인의 노고에 감사하라
성은 문윤정 (수필가)
새벽에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다. 어제 밤에 남편은 아버님 방으로 건너가면서 “일찍 일어 날거지”하면서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시집에 오면 어른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른들은 벌써 부산하게 움직인다.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러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어제 밤늦게 까지 밤하늘의 별도 쳐다보고, 논둑에서 개구리의 합창을 들었던 그 풍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에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낯설었다. 두터운 안개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안개는 푸른빛이 감도는 산을 비롯한 멀리 보이는 풍경들을 삼켜버렸다.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십 수년을 보아 온 동네이건만 이처럼 낯선 모습은 처음이다.
안개가 두텁게 끼여 한 치 앞을 겨우 내다 볼 수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을 두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는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안개가 자욱한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그 모습은 한국화 한 폭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안개 속을 가만가만 걷는 사람들이 궁금해 앞으로 나아갔다. 이슬에 젖은 풀잎들의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발목에 와 닿았다. 그 풀잎들을 조심스레 헤치면서 걸어갔다. 조용한 논둑에 사람의 발자국을 감지한 청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논으로 뛰어내리거나 다른 곳으로 숨는다. 풀 속에서 뛰어 나온 청개구리는 내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작다.
칠십에 가까운 연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앞에 서고 할아버지는 뒤에서 무언가를 밀고 간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콩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세발자전거의 바퀴보다 더 작은 바퀴가 앞으로 나아가면 뒤쪽에 붙은 삽이 땅을 갈아엎었다. 나는 쟁기라는 기구를 떠올렸다. 소등에 얹는 멍에 대신 어깨에다 걸 수 있게 하얀 천으로 된 멜빵을 할머니는 어깨에 지고 있었다. 하얀 천에 불과하지만 워낙 연로하신 할머니가 앞에서 끌고 있는지라 소등에 얹혀진 멍에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차마 그들의 노동 현장을 오래도록 쳐다 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힘이 없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던지 나무 막대기를 짚고서 걸어간다. 그 막대기라도 튼실하다면 보는 사람의 마음이 덜 애처로울 텐데 그 막대기의 굵기는 할머니의 몸집만큼이나 가늘었다. 할아버지가 똑바로 걸어가지 않는다고 뒤에서 핀잔을 주자 할머니는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한마디 하였다.
“나는 일하는 소가 아니다”
그 한마디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농사는 농기계가 도맡아서하는 시대인 줄 알았지, 이렇게 힘든 노동이 있을 줄 몰랐다.
남편은 가끔씩 뚱뚱한 사람들이 다이어트 한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는 모양새를 보고는 질타에 가까운 말을 한마디 한다.
“촌에 가서 뜨거운 땡볕 아래에 한나절만 콩밭을 매면 땀이 비 오듯 흘러 살이 저절로 빠질 텐데.”
도회지의 아침은 장사꾼의 외치는 소리가 아침을 열고, 또 출근을 위해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이 아침을 깨운다. 시골의 아침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조용히 잠든 대지를 깨우고, 새벽의 공기를 가르면서 아침을 연다.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내는 아침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안개는 너무 두터워 쉬이 걷히지 않았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어머님 옆으로 다가갔다. 어머님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말씀하셨다. 나는 쟁기질이라고 하는데 ‘골을 타는 것’이라면서 콩밭은 그렇게 해야 지심(地心)을 돋우고, 잡초도 뽑아진다고 한다.
나는 차마 우리 집의 콩밭을 가는 일은 누가 하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연로하신 어른들이 하신다고 하면 차마 그 콩을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님이 챙겨주시는 검정콩, 메주콩이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생겨난 줄은 정말 몰랐다. 콩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노동과 땀을 말하기보다는, 콩은 단백질덩어리이며 머리가 좋아지고 키가 커진다는 영양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머님을 도와 식사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와 보았다. 희붐한 안개 속에 힘겨운 쟁기질은 계속되었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지자 다른 밭에서도 쟁기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더운지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는다. 나는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한 알의 콩이 어떻게 해서 우리 입에 들어오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쟁기질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 농부들의 소금기 담뿍 배인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려 땅을 적시고 내 가슴마저 적시는 것만 같다. 그들의 땀방울이 없었다면 한 알의 곡식이, 한 알의 콩이 내 입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우리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만인의 땀과 노력이 녹아 있는 생명에너지를 먹는 것이다. 음식에는 만인의 수고만이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생명이 깃들어 있다. 햇빛과 달빛과 별빛과 바람과 비를 먹고 자랐으며, 또한 그 속에는 여름 날 내려치는 벼락과 천둥까지도 견디어 낸 에너지가 들어 있다.
절에서 행해지는 바루공양을 해 본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어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육신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바루공양을 행할 때, 밥알 하나라도 남겨서는 안 되며, 고춧가루가 그릇에 붙어 있어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어들인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요, 그들을 키워 낸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부처님은 음식을 마주하였을 때에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음식을 얻으면 그 힘으로 마음을 불도에 기울여야 합니다. 음식을 얻을 수 없을 때는 모든 악행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대하면 절제를 지켜 욕심을 적게 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거친 음식을 대할 때에는 모든 것이 허공처럼 모양이 없다는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음식을 삼킬 때는 선정의 기쁨으로 음식을 삼고자 힘써야 합니다. 다 먹고 나서는 공덕이 몸에 충만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을 뵙고 공양을 할 때에는 지혜의 눈을 얻어 여래의 실상을 보고자 합니다.”
한 그릇의 밥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로 오게 된다. 부처님은 이런 과정을 거쳐 먹게 되는 음식에 대하여 ‘맛있다, 맛없다’는 분별심을 가지지 말 것이며 먹는 것에 집착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공양을 할 때도 공부하는 마음을 놓치지 말기를 당부하는 말씀이시다.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합장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 나로 인해 이만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로 인해 이만한 공양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모든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스스로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 의해 살려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또한 바루공양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가 아닌가? 음식을 대할 때도 ‘살려지고 있다’는 그 마음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되며, 그 마음이 바로 도를 구하는 마음 그 자체인 것을 부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시골에 손님처럼 갔다가 손님처럼 행세하고 돌아 온 나를 무참하게 만들었다. 뒷짐지고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고, 사계절 들판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이야기하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감상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그 매혹적인 냄새에 가슴은 한없이 평온함을 느꼈던 그 이면에는 힘든 노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 시리도록 빛나는 초록빛 속에서 혹은 출렁이는 황금빛 속에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목가적인 전원의 풍경화처럼 감상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마치 시골의 풍광이 연출하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고정된 인물로만 생각하고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쯤해서 가만히 공양게를 외워 본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기에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기에
이 음식으로 몸 다스려 만생명의 복밭 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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