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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과 이성구 교수에 대한 총회 결정 1. 글의 도입-사건의 전개 지난 총회시에 고신 교회는 이성구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 안건을 다루면서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다. 내용은 총회 게시판에 게시된 총회 촬요를 발제한다. (9)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교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처리하다. ① 신학위원장 최명식 목사가 제출한 “이성구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 보고를 채용하다. ② 이성구 교수의 목사직에 관한 건은 해 노회에 지시하여 처리하도록 하다. ③ 이성구 교수의 신학사상은 본 교단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서 합당치 않으므로 강의 및 모든 보직을 중지시키도록 하고 처리는 고려신학대학원에 맡기기로 하다. ④ 이성구 교수의 교수직 해임은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에서 처리하도록 통보하기로 하다. 결국은 이성구 교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결정이다. 이는 이성구 교수의 학위 논문에 대해서 2003년 총회가 처리를 한 후에, 뉴스앤조이라는 기독교 매체를 통해서 인터뷰한 기사에 대해서 이승미 교수가 질의를 한 것을 발단으로 해서 총회 신학위원회가 입장을 밝히고 총회가 받은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발단이 된 이승미 교수의 질의의 핵심 사항은 인터뷰 기사 중 다음 내용이다. 2003.11.25일자의 인터뷰 기사중 문제의 부분을 발췌했다. 기자 질문- 연합운동에 적극 나서는 것을 비판하는 교단 인들도 있다. 이성구 교수의 답변-“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키는 것이 잘못인가, 분열을 유지하는 것이 잘못인가. 오히려 분리의 원인인 인간적, 교권적, 지역적, 사변적 원인을 찾아 바로잡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는가. 연합운동을 통해 고신교단의 정체성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데 지나친 걱정이다. 또 신사참배로 시작된 교단이라는 ‘자기 의’를 버려야 한다. 이 같은 선민의식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60년대 합동교단과 합동을 한 이전과 후는 완전히 다르다. 무슨 다름이 있는가. 선을 알고도 행치 않음이 죄다.” 기자 질문- 연합과 일치의 전제조건으로 고백일치가 선재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성구 교수의 답변-“<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 완전주의적 분파주의는 잘못이다. 교단신학자 중 그런 입장을 가진 이가 있는데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 이승미 교수가 이성구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서 이 교수의 사상이 자유주의라는 것이 들어났다면서 질의를 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최근의 <뉴스앤조이>와 가진 이 교수의 인터뷰에서 그의 신학사상이 자유주의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문건에서 이 교수가 △ 한국장로교단안에는 자유주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 사도신경외의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이다라고 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 교수의 경우는 동료교수이기에 매우 조심스럽지만 신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승미 교수는 '자유주의자'와 '사도신경' 두 가지의 표현을 중심하여 질의를 했다. 총회 결정이 있은 후에 이성구 교수는 뉴스앤조이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개진했다. 그는 또 “(자신의 신학에 대한 53회 총회의 결정에 대해)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신학적 검증을 받겠다”면서 “분명한 것은 절대로 이 문제가 특정세력의 정치적 공세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이 전원장이 지적하고 있는데 (기사에서 언급된)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수 있다면 논의에 동참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저변의 분위기를 언급한 것이다. 이 연합에 동참않기 위해 특정신학 운운하는 것은 사변적이란 것이 나의 견해”라며 “이것이 잘못이라면 한국교회는 현재와 같이 분열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 전원장은 정확히 지적해 달라”고 반문했다. 이어서 그는 “어찌됐건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시발점이 된 고신교회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상과 같이 논의가 진행되고 총회가 결정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할말이 있었지만 이미 이성구 교수의 학위 논문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 상태여서 한 개인이 이성구 교수를 맹목적으로 방어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지났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것은 그리 정직하거나 용감하지도 못한 행동이었던 같다. 이제 시간이 지났지만 교회를 생각하면서 입장을 개진한다. 이미 지나간 일을 지금이나마 언급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이것은 신학적 논의가 정치적 흥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학적 문제가 특정 파벌의 득세와 실권 그리고 추후 득세로 인한 복권 등으로 연결되기 보다 교회를 세우는 신학적 논의가 항상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사도신경에 대한 개혁주의 표준 문서들의 입장 개혁주의 교리문답 중에서 우리 고신 교회가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은 사도신경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와 자매교회 관계에 있는 유럽의 개혁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교리문답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다. 거기 보면 사도신경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나와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7주 제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 복음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고백되어지는 믿을만한 기독교 신조입니다. 이 교리문답은 죄와 비참에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속되었고, 그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속을 위해서 믿어야 할 믿음의 내용을 22문은 질문한다. 답으로서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복음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었고 이 사도신경은 전세계적으로 고백되는 믿을만한 기독교신조라고 고백한다. 개혁교회는 분명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는다. 이는 사도신경만으로는 개혁교회를 규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사도신경과 개혁교회는 필요 충분조건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개혁교회가 믿는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은 사도신경이란 뼈대로 형성되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약속이 위치한 복음은 사도신경으로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고 이에서 파생된다. 그리고 이 문답은 계속해서 전세계적으로 고백되는 믿을만한 기독교신조라고 고백한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고백되는" 이란 범주는 적어도 기독교라는 말을 붙이는 곳에서는 사도신경이 고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을만한"이란 표현은 형식적인 고백이 아니 실질적인 고백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도신경을 믿을만한 기독교 신조라고 하고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믿어야 할 내용의 핵심으로 소개함은 다른 교회들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다. 이런 태도를 따라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실제로는 사도신경을 해설하는 해설서로서 상당부분을 감당한다. 제 7주 22문답에서 23주 59문에 이르는 내용이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그 의미를 평가한다. 이는 전체 교리문답 중에서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빼고나면(34주-52주까지 92문에서 129문까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십계명을 빼면 앞에 6주분량과 사이의 12주 분량이 다른 교리적 문답이다. 개혁교회가 가진 교리문답 속에서 사도신경의 위치를 이해하고 나서 논의의 핵심인 이성구 교수의 발언으로 돌아가보자. 3.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이상의 인터뷰 기사는 위에서 인용한대로 문맥을 가지고 사용한 표현이다. 즉 교회 연합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서 비판적인 고신 교회 사람들이 있다는 언론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이 교수가 답을 한 직후에 그 답과 관련해서 연합의 조건으로서 고백의 일치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음에 대해서 질의를 했고 이에 이 교수가 답변을 한 대목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이 발언은 교회 연합을 말하는 문맥 속에 들어 있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이 교수가 스스로 설명한 말에 의하면 의도가 분명해 진다.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이 전원장이 지적하고 있는데 (기사에서 언급된)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수 있다면 논의에 동참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저변의 분위기를 언급한 것이다. 이 연합에 동참 않기 위해 특정신학 운운하는 것은 사변적이란 것이 나의 견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교회 연합 운동에 동참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발이다. 즉 교회 연합 운동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사도신경을 고백한다고 했을 때 해 볼만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충분하다는 발언은 교회 연합 운동에 대한 필요 충분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는 발언이다. 논리적으로 하자면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교회연합이란 논의의 충분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미 한국교회는 필요 이상의 분열을 신조와 관계없이 겪고 있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신조는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또한 형성되어 가는 것이기에 다른 교회와 논의를 항상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때에 이미 다르기에 갈라져온 역사를 걸어왔는데, 새로운 시대의 상황과 신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서로의 입장들을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연합의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정당하다. 무엇이 다른 가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같은 가로부터 시작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짜피 양자의 동질성과 이질성은 모두 드러나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성구 교수의 발언의 진의는 교회 연합 운동의 출발과 진행을 두고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고백되는 전 세계적으로 믿을만한 기독교고백을 근거로 연합 운동의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그렇게 문제인가? 한국 교회가 분열이 될 때 정말 신조와 고백을 근거로 갈라진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고신 교회가 환원을 할 때 정말 신조와 고백이 문제가 되었는가? 지금도 고신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박윤선 박형용과 같은 이들이 있는 교회와 분리된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들이었던가? 고백과 신조가 우리를 환원케 했는가? 4.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는 충분하다는 발언을 한 후에 '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이다'라고 이교수가 발언을 한다. 이것 역시 문맥은 동일하게 교회 연합 운동 선상에서 평가된다. 이 성구 교수는 자신의 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연합에 동참않기 위해 특정신학 운운하는 것은 사변적이란 것이 나의 견해”라며 “이것이 잘못이라면 한국교회는 현재와 같이 분열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상 발언의 문맥과 발언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사도신경을 근거로 해서 교회 연합운동 논의를 하는 것이 충분한데(필요충분은 아니다), 이러한 교회 연합을 아예 초장부터 거부하기 위해서 각자의 신조나 고백을 주장하는 것은 사변적인 신학에 매몰되는 것이라는 표현이다. 사변적 신학이라 함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표현이다. 처음부터 교회 연합 운동을 거부하려는 자세를 말함이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 개혁교회들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 등의 표준 문서를 만들었다. 이것은 누가 나와 같은 신앙을 가졌는가를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 다른가를 목적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개신교가 신조를 가진 목적을 차이를 강조하는 관점이 아니라 일치의 관점에서 늘 조명해야 함을 말한다. 신조와 고백이 아닌 역사적 상황과 이익을 중심으로 분열을 거듭한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들이 어떻게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로서 신조를 다루어야 하는가를 반성해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교회 연합 운동의 시작은 사도신경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다. 이전의 세대의 실패가 오늘의 현실에 교훈을 주겠지만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새로운 세대는 자기들의 현실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한다. 5. 고백과 관련된 모순된 고신 교회 결정 각자의 교회들이 고백하는 신조나 교리문답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 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조와 교리문답이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신조와 교리문답은 언제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를 관통하는 성경이 아니다. 그럼으로 다른 역사적 환경에서 생겨난 신조와 교리문답의 고백들이 피선교지이며 한국이란 역사적 장에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언제든지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교회의 연합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교회와 달리 한국 교회의 현장은 교구제의 개념도 없고, 교파 개념도 거의 없고, 신앙고백적 개념도 별로 없다. 이것은 신학교에서나 나오지 실제의 교회나 노회나 총회 장소에도 잘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한 예로서 지난 총회에서 강단교류를 하는 것을 같은 신조의 고백을 하는 교단으로 제한하자는 발언은 묵살되고 당회에 맡기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교회 연합운동의 차원에서 일어났다. 강단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를 가장 특징 짓는 일이다. 그런데 고신 교회는 교회 생활과 교리와 신조에 중대한 차이가 있는 연합운동을 위해서 다른 교단의 목회자를 불러서 말씀을 듣는 실제적인 일을 결정하면서도, 교회 연합운동을 위한 출발의 근거로서 사도신경을 언급하는 일을 정죄한다. 정말 무엇을 삼키고 무엇을 뱉는 결정인가? 강단 교류 개혁교회전통에 있어서 한 교회됨을 말한다. 강단은 말씀을 전함이다. 이것은 최고의 은혜의 방편이기에 우리 고백의 교회의 목자가 아니면 세울 수 없다. 그런데 고신 교회는 누구나 당회가 결정하면 세울 수 있는 방향으로 길을 열었다. 강단 교류는 교회 연합적 차원을 넘어서 교회 일치의 과정을 다 밟고 난 마지막 과정이다. 즉 상대 교회와 우리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실질적인 표현이다. 개혁교회 내부에서 강단교류에 대한 예를 들겠다. 고신 교회와 자매 관계를 맺은 화란 개혁교회가 두 개가 있다. 전통적인 31조파 교회라 불리는 자유 개혁교회가 있고, 최근에 관계를 맺은 기독개혁교회가 있다. 우리와는 자매 관계이기에 서로에게 이명증서를 떼어서 성도들을 보내주고 그것을 가지고 두 교회의 성찬에 고신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란내에서는 이 두 교회는 서로 강단 교류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 두 교회는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고, 신학교 교수들은 상호 방문해서 강의를 하지만 교회는 아직 아니다. 목회자간의 세미나도 열고 있지만 강단 교류만은 아직 아니다. 강단 교류는 교회 일치의 마지막 결론이다. 고신 교회는 명목적인 교회 연합 운동을 목표로 강단 교류라는 결론에서 일어나야 할 개혁교회의 실질적인 표지를 포기하는 교회적 결정을 하면서도 진지한 교회 연합 운동의 출발과 과정은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무시의 한 증거가 이성구 교수의 발언에 대해서 정죄한 것이다. 이제 논의를 시작하면서 서로 연합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싹을 자르고 이미 결론은 삼킨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성구 교수가 교회 연합적인 차원에서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고 한 발언은 교회 일치의 결론으로서 한 발언이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며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았다. 사도신경만 믿으면 강단 교류를 할 수 있고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를 세워갈 수 있다는 결론이다. 시작과 과정을 진지하게 검토하자는 회원은 정죄하고 시작과 과정에서부터 정죄된 입장을 결론으로 받은 교회의 결정을 하였다. 모순된 결정을 신중히 살피면서 교회가 살피기를 바란다. |
첫댓글 이성구 교수의 답변-“<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4나머지 고백들은 사변적 신학(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라는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도신경과 이성구 교수에 대한 총회 결정은 두가지 사안을 내포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상호 유기적 관계에 있지만) 첫째
로는 이문제의 정치적 이해관계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말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 는 그 본래적 의미이다. 정작 의문이 드는 것은 정말 사도신경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는 공동체는 없는가? 우리의 고백과 그들의 고백이 일치 하는가? 그 고백의 보증은 입술에 달려 있는 것인가?
진정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양자가 옳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명쾌히 조언해 주실 분 계시면 도움 부탁 드립니다.
저는 이 교수의 신학이 문제라는 점에 대해서 조금은 유보적인 입장을 가집니다. 즉 그의 신학이 역사적정통개혁주의 입장과 일치하느냐는 것과 그가 자유주의 신학자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신학사상을 문제삼는 이들은 그의 신학에 따른 삶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신학대로 행동하는 셈이지만 다른 이들은 칼빈과 정통을 말하면서 뒤로 호박씨나 까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고신의 신학자들중 문제성있는 신학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신학적 확신이 없거나 이중적이거나 비겁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학을 분명히 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