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부(白磁賦) / 김상옥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 부연(附椽), 긴 서까래 끝에 덧얹어 높이 솟게 만드는 서까래.
* 채운(彩雲), 빛갈이나 무늬가 있는 구름.
<해설> 1947년 김상옥의 첫 시조집 [초적(草笛)]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재 중에서도 특히 백자에 애정을 기울여온 김상옥의 초기 작품으로, 백자를 시의 제재로 삼아 백자가 지닌 단아한 아름다움을 예찬한 현대시조이다. 전통적인 율격과 제재를 바탕으로 민족 고유의 예술미와 한국적 서정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이 시조를 통해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와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장별배행으로 이루어진 전4연의 연시조로, 백자의 은은하고 순박한 아름다움을 예찬적 어조로 노래한 서정시이다. 시의 형식은 4음보의 외형률을 지닌 정형시이다. 표현상의 특징은 현재적 시제와 영탄의 효과를 함께 나타내는 '오도다'(제2연), '드노다'(제3연), '-하도다'(제4연)와 같은 종결어미의 사용과 적절하게 구사된 역설적 표현이 특히 돋보인다. 이러한 표현법은 관조적이며 묘사적인 성격을 띤 이 작품의 시적 정서를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1연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와 제3연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에서 시인은 소나무·백학·바위·불로초·구름(채운)·물(시냇물)·사슴 등 십장생(十長生)이 표현된 백자의 무늬를 노래하며 이상향을 지향하는 우리 선조들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이야기한다. 제2연에서 시인은 고결한 기품이 느껴지는 백자의 자태를 보며, 그리운 임에게 고이 바쳐지던 술병으로서의 백자를 상상한다. 이 시조의 주제연이기도 한 제4연에서는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티없이 맑고 깨끗한 백자의 순결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두산백과)
* 우리의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시적인 형상화를 통해 나타냄으로써,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자가 지니고 있는 순백의 아름다움과 고결한 품격을 전통적 시형태에 옮겨놓고 있다. 제1연은 소나무 가지에 학이 깃든 모습을 담고 있는 백자의 모습을 통해, 전통사회에서의 선비들의 절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제2연은 그리운 임과의 반가운 재회를 상상하며, 그 반가운 자리에서 귀한 용도로 쓰이는 백자의 품격을 묘사해 놓고 있다. 제3연은 동양적 이상향이 그려져 있는 백자의 문양을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묘사해 놓고 있다. 제4연은 순박하면서도 고결한 아름다움을 지닌 백자의 모습을 예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백자대호(白磁大壺)는 흔히 달항아리로 불린다. 둥그런 몸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이 보름달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희고 깨끗한 살결은 순박하지만 고상하고, 좌우 대비층의 둥근 몸매는 부정형(不定形)이지만 원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달항아리에는 우리 조상들의 단아한 정신 세계가 녹아들어 있다.
기교를 지워 기품을 새겼으며, 빛깔을 지워 달빛을 빚었다. 뽐내지 않아 푸근하고, 억지가 없어 너그럽다. 백자 항아리는 모든 것을 비웠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 달항아리의 수수한 자태는 우리의 옛 여인네를 닮아 있다.
이 시에서처럼 달항아리는 불같이 뜨거운 장인 정신이 빚어낸 얼음처럼 맑은 빛깔은 곧 우리의 누이, 우리의 어머니의 살결이다. 달항아리의 풍만한 곡선은 낮고 둥근 우리의 산하를 닮아 있다. 소박한 자태이지만 그 기품은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질' 만큼 백자는 곧 흙으로 빚은 한국인의 마음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단순하다는 것은 흔히 단조하다느 것과 같은 뜻으로 풀이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 백자가 보인 단순만은 단조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단조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단조로운 것이지만, 단순하다는 것은 모둔 군더더기를, 아니 모든 설명적인 요소를 다 제거한 다음에 얻어낼 수 있는 '생략의 미'라고 할 것이다. (중략)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아예 장식에 있지 않다. 차라리 그 바탕을 이루는 살결과 태깔에 있다고 하겠다. (김상옥, <시와 도자기>)
* 오래 전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 - 1979)는 한국의 달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 백자는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백자를 품는 일은 행복을 품는 일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해는 졌지만, 우리의 '달'은 지지 않고 세계를 비추고 있다.
<김상옥(金相沃): 1920 - 2004>
* 1920년 경상남도 충무에서 태어났다. 호는 초정(草汀·艸丁·草丁).
* 1939년 시조시인 이병기(李秉岐)에 의해 [문장]에 시조 <봉선화>가 추천되어 등단했다.
* 1938년 시 동인지 [맥]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모래알>, <다방> 등의 시를 발표하고, 같은 해 시 동인지 [아(芽)]에도 작품을 발표했다.
* 1940년대부터 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져 백자를 수집했으며, 1972년까지 인사동에서 표구점 겸 고미술품점인 '아자방'을 경영하면서 백자에서 얻은 감흥을 시와 그림으로 작품화했다.
* 194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낙엽>이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시대에 사상범으로 여러 차례 투옥된 경력이 있다.
* 1946년 부터 마산고등학교, 삼천포고등학교, 부산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등에서 교원생활을 했으며,
*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출간하였다.
* 1949년 시집 [고원(故園)의 곡]과 [이단의 시]를 간행하였고, 시집 [의상](1953)과 [목석의 노래](1956)를 펴냈다.
* 1956년 통영문인협회를 설립하는 등 문학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 1973년 시조집 [삼행시]를 출간했다.
* 1972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서화전을 개최했으며,
* 1989년 고희기념시집 [향기 남은 가을]을 출간하였다.
* 저서에 시조집과 시집으로 [초적], [고원의 곡], [이단의 시], [의상], [목석의 노래], [삼행시], [묵을 갈다가](1979), [향기 남은 가을](1989), [느티나무의 말](1998), [눈길 한번 닿으면](2000), [촉촉한 눈길](2001) 등이 있고, 동시집 [꽃 속에 묻힌 집](1958)과 산문집 [시와 도자](1976) 등이 있다. 노산문학상과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두리 직지문화공원 김상옥 시비, 시제는 '백자부'>
◇ 백자예찬
"참 잘생겼다~." 어른들이 둥그렇고 묵직한 수박 한 덩어리를 만지며 종종 이런 말씀을 하지요? 넉넉하게 둥근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사진)를 보아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둥근 것은 모자람 없이 완전하게 채워진 모양이라 보는 이에게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니까요. 자꾸 보아도 또 보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 얼굴을 '환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하는데, 백자 달항아리도 이 표현에 꼭 들어맞습니다. 둥근 보름달처럼 어디를 보아도 예쁘고, 아무리 보아도 지겹지가 않거든요.
백자 달항아리의 흰 빛깔도 그렇습니다. 휘황찬란한 여러 색 사이에서 흰색은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언제 보아도 한결같은 고요한 기품을 풍기지요. 무늬 하나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한 달항아리는 자기 좀 봐달라고 소란을 떠는 일이 좀체 없습니다. 저마다 어여쁜 빛깔과 무늬로 인정받고 싶어 안달인 물건들 사이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기다릴 뿐이에요.
둥글고 하얀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옆선이 모나지 않아 안심하고 선뜻 다가갈 수 있고, 여유롭고 풍성한 그 생김새는 익숙하고 정겨운 느낌을 주지요. 아이를 가진 여인의 볼록한 배처럼 흐뭇한 소식을 담고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얀 항아리는 표면에 작은 흠이 나 있고 여기저기에 얼룩도 퍼진 상태입니다. 불가마 속에서 뜻하지 않게 불순물이 들어가 흠이 생겼고, 표면에 유약을 고르게 펴 바르지 못하는 바람에 얼룩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 항아리는 자기 몸에 생긴 흠과 얼룩에도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백자는 뜨거운 시련을 겪고도 망가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해져 하얀빛이 나는 사람,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지만 그것조차 덤덤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순박한 성품을 지닌 우리 민족을 닮은 듯합니다. (발췌) (이주은/건국대교수, 조선일보 '백자예찬')
<백자 달항아리, 17-18세기>
♣ I will follow him/Sister Act에서
http://youtu.be/ghHE_kVWX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