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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24 온고을교회 주일설교(황의찬목사)
생명은 어디서 오나?
요20:19~22
“문 닫고 들어와!” 무심코 쓰는 말인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어떻
게 문을 닫고 들어올 수 있을까? 그런데, 역사상 문을 닫고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딱 한 사람, 부
활하신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모르던 제자들은 은밀한 곳에 모여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칩거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방안에 나타나셨다. 그야말로 문을 닫고 들어오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과 변화된 점이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는다. 부
활은 영원이다. 그래서 영생(永生)이라 하지 않는가?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과는 달리 오직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모습을 보이신다. 또 시공을 초월하신다. 순간 이동도 하고, 벽을 통
과하기도 하며, 하늘에도 가뿐히 오르실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물론 손과 발의 못 자국, 옆구리 창
자국은 그대로 있었고, 제자들과 식사도 했다. 신비이다.
부활 후 만난 성도들에게 건넨 첫 번째 인사말은 ‘평안’ ‘평강’이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막달라 마
리아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시고, “평안하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참 평안이 무엇인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이다. 평안이 무엇인가?
최근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재벌’이 트랜드다. 재벌들의 삶의 모습과 생각이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들은 전용 비행기를 타고, 그 비행기 안에는 수술실까지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왜? 평안을 위해서다. 혹여 비행기 안에서 병이 나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무
슨 소용인가?
돈이 많아 집안에서 화려한 패션쇼를 하고 수천만 원짜리 옷을 입으면 평안할까? 그렇지 않다. 세
상 모든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죽는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깜깜하다. 그래서 공포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다 죽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모르니까, 아예 죽음을 생략해버리자고 사람들
사이에 묵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다고 죽음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에
게 진정한 평안은 없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밝힌다. 죽음은 죄의 결과(롬6:23)이다. 이 말은 죄가 없으면 죽음이 없다는
뜻이다. 죄가 없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는가?
오직 한 사람,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렇다면 성경이 오류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죄 없이 죽은 예수님을 살리셨다. 그것이 부활
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 했다. 이 말은 둘째 열매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죄 덩어리인 인간이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종신형을 살려도 부족하다. 십자가 사형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여, 자기 앞
에 ‘의인’으로 세월 부활의 두 번째 열매로 키우기 위한 방편을 마련하신다. 자기의 외아들인 예수
로 하여금 인류의 죄 값을 치르도록 하시는 조치이다.
죄 덩어리 인간이 달려야 할 십자가에 자기의 외아들이 매달려 죽게 했다.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믿는 자가 ‘의인’이 되고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구원받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실직고
하는 일이다.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 부활의 열매가
되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본문 22절에는 사족(蛇足)처럼 여겨지는 구절이 하나 삽입되어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에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라는
대목이다. 이 말이 없어도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그런데 왜 이 말이 들어갔을까? 여기에 대단히
깊은 뜻이 스며 있다.
인간의 근본적 불안요소처럼 보였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여, 나를 믿고 구원받으면 너
희도 이렇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한다고 하심으로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자
하심이다.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죽음의 반대 개념인 ‘생명’이다. 죽음을 정복했다면 생명의 근원
도 분명히 알면 좋겠다는 예수님의 바람 때문에 이 대목이 추가되었다.
생명은 어디서 오나?
죽음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던 것처럼 생명 역시 어디서 비롯하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고대 유
대인들은 생명은 바람에서 온다고 믿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삼라만상이 소생하고, 겨울바람이
불면 일제히 숨을 죽인다. 겨울바람은 죽음의 바람, 봄바람은 생명의 바람이다.
아기는 모태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순간부터 숨을 쉰다. 그때부터 시작된 코를 통한 바람의 소통의
끝은 죽음이다. 바람이 생명이다.
한국 사람들도 생명을 바람으로 인식했다. 동네 처녀의 아랫배가 어느 날 부터 불러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뒷집 갑순이 바람 든 것 아녀?” “맞아, 바람이 들었으니께, 저렇게 아랫배가 풍선맹키로
부풀어 오르는 겨”하면서 수근 댄다. 그렇다. 바람이 생명이다.
사람들은 바람이 부는 것을 몸으로 느껴 알지만, 정작 그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어디로 가는
지, 어디 가서 소멸 되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생명이 어디서 발원하며, 죽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
르듯.
바람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바람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생명이 시작되게 하신 분
이다(창2:7).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누림에 있어서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과의 교제로 생명을
향유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죽음도 정복하고, 생명의 근원을 아는 자가 진정한 평강을 누린다. 그들이 두 번째 부활의 열매다.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