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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에 관한 설화.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한 뒤 자신은 죽음을 당한 인물전설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일본 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 사람임을 주장한 뒤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副使)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사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 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그래서 望德寺 앞 모래톱을 長沙라고 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 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 한다. 다른 구전으로는 박제상의 아내는 죽어서 ‘치’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술’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암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乙〕가 되어 숨어서〔隱〕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날개가 달려 공간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새라면 바다를 건너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으련만……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사후에 새로 변신하여 성취되었다. 죽어서 새가 되어 풀고 만난 점에서 한국인의 애정관이 절절히 표출된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새가 된 것도 죽음을 건너 이어지는 부녀간의 사랑이다. 치술령의 산신이나 신모가 된 것은 주민이 박제상 부인을 존경하는 마음과 신앙심이 강조된 현상이며, 산신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이 지어진 것이다. 고뇌를 근거로 한 애정·정렬·효도 등의 복합적인 윤리관이 들어 있다. 구전설화 쪽이 더 인간적이며 가정적인 것은 물론이다. 韓國口碑傳說의 硏究(崔來沃, 一潮閣, 1981), 朴堤上說話論(蘇在英, 국어국문학 통권53호,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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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울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 30-2
홈페이지 : guide.ulsan.go.kr
연 락 처 : 울산광역시청 관광과 052-229-3852
개 요 : 1. 치산서원지 (박제상 유적지)
- 이곳은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
이다.
박제상은 신라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눌지왕이 임금이 된 후, 고
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싶어 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
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
흔(未斯欣) 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
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
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그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
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
암(隱乙岩)에 숨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
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2. 망부석(박제상 유적지)
- 망부석은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 하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돌로 변했다는
전설(傳說)을 가진 바위를 말한다.이러한 전설은 몇 군데에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
표적인것이 박제상(朴堤上) 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
는 이곳 망부석의 전설이다.
3. 은을암
- 은을암은 새(乙)가 숨은(隱) 바위(岩) 라는 뜻이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
곳 치술령(隧述嶺)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 이 바위에 숨었다고 한다.이 새가 날아
오른 자리를 비조라 하여 두동면 만화리에 비조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또 새가 바위
틈에 숨었다하여 이 바위를 은을암이라 했으며, 여기에 암자를 지어 은을암이라 하였다.
은을암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인데 박제상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하려면 두동 치산
서원에서 출발하여 치술령 망부석을 거친 뒤 은을암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은을암과 치
술령의 망부석은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다.
건립연대 : 신라시대
교통정보 : 318-2번, 802-2번 박재상 유적지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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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도지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박제상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부도지 강의를 민족강사할 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를 바로알고자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박제상은 신라의 충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