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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660
['가든파이브' 이주사] 청계천 복원부터 가든파이브까지
입력 2014.06.23 21:54:08 |
어느 상인의 이야기
2002년, 청계천 복원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까지 안규호씨는 황학동 시장에서 비디오 총판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이었다. 1967년, 17살의 나이로 빈 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 종합 시장에 뛰어든 후 평생 장사로 생활을 꾸려 왔다. 부침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성실함과 정직함이 삶의 미덕이라 믿고 살아온 안규호씨는 전국적인 거래처를 둔 상인이자, 인근 상인들의 신망을 얻어 황학동 상가협의회 회장으로 일했다.
2014년, 현재 안규호씨는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해 현재 서울시 도시개발공사인 SH공사에 의하여 강제명도집행에 내몰린 가든파이브 상인이다. 2009년, 가든파이브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한 이후 가든파이브 소규모 상인들과 함께 비상대책위원회 활동을 했던 그는 어느새인가 ‘업무방해’ 등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700만원의 벌금을 내지 못해 구치소에 수감되는 등 험난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가든파이브 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지방선거에 후보자로 출마하기도 했던 안규호씨. 그의 지난 12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구술사 형식으로 풀어내보려 한다.
이는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대규모의 피해자를 남긴 청계천 복원 – 가든파이브 이주 문제에서 상인 개개인이 서울시의 정책 실패를 통해 어떠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는지 살펴보고, 서울시의 공식 문서와 자료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행정의 실패가 시민 개개인에게 어떤 비극을 불러왔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가든파이브 문제에 대한 다각도의 관찰을 통하여, 지금 서울시가 당면한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인터뷰의 주인공인 청계천 이주 상인이자 가든파이브 세입자 상인 안규호씨. (이
미지 출처 - 참세상)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장사를 시작하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른 새 어머니가 오셨어. 그때 집안에 돈도 없고, 그런 가정적인 문제들도 생기고 해서 공납금도 제대로 못 내고 있었지. 그래서 학교에 안 나가고 먹고 살려고 1967년에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왔지. 그 당시는 어디 취직을 하려고 해도,내가 전라도 사투리를 썼거든.(그는 1951년 생, 광주가 고향이다.) 그래서 밥만 먹여주면 일을 하겠다고 했어도 취직을 세 번이나 못했어. 그러다가 시계방 같은 곳에 자주 드나들면서 일도 도와주고, 구경도 하고 하면서 거기서 일하게 된거지. 그때는 뭐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이런 것도 아니고 보고 혼자 따라하면서 시계 고치는 기술도 배우고 그랬지. 그렇게 점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처음 장사 일을 하게 된거지.”
“결혼을 스물여덟에 했지. 그때는 보통 그 정도에 했으니까 빠른 것도 아니었지. 점원으로도 일하고, 시계도 고치고 하면서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가게를 얻었어. 시계나 귀금속 같은걸 다루는 금방을 하다가 결혼하고.. 큰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쯤인가, 그냥 서울이 싫어가지고, 그리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강원도로 갔어요. 강릉에 가서 다시 금방을 좀 했었지. 왜 강릉이냐, 내가 그때 아팠는데 강원도 양양에 우리 큰 처남이 병원을 하고 있었어. 거기서 요양도 할 겸 몇 달 있다가.. 돈을 벌어야 되니까 있던 집을 팔아가지고 가까운 강릉에서 가게를 하게 된거지. 양양은 장사하기엔 너무 작으니까. 그렇다고 강릉에서 장사를 오래한건 아니고 한 2~3년 정도... 장사가 안 되더라고. 텃세가 너무 세 가지고. 학연, 연고지, 성씨 뭐 이렇게 원래 하던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니까. 한 3년 정도 하다가 완전히 거덜이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 뭐 건강은 많이 회복 했고, 귀금속방은 체력을 많이 안 써도 되니까. 근데 집 하나 팔아가지고 강릉에서 다 녹아버렸지. 그러니 뭐 건강 회복 차원에서 강릉 갔다 온거나 다름 없는거고...”
황학동, 노점으로 다시 시작하다.
“강릉에서 거덜나가지고, 서울에 와서는 회기동에 있던 아는 전파사를 찾아갔어요. 거기는 가게 공간이 커서, 약간 자리를 받아가지고 좀 장사를 했어. 강릉에서 남은 물건들, 귀금속이나 시계 같은거 가지고... 거기서도 장사가 잘 안되고 점점 수익이 줄어드니까 청계천으로 나왔지. 황학동 시계방에 점원에서부터 다시 시작한거야. 근데 점원도 월급이 적으니까, 그 당시는 청계천에 노점들이 많이 있었어. 삼일 아파트(1,2층이 상가였던 한국 최초의 시민 아파트이자 주상복합건축물. 노후화가 일찍 진행되어 청계천 복원 사업 무렵 재개발 되었다. 현재 삼일 아파트 터에는 롯데캐슬 베네치아가 들어서 있다.)가 죽 있으면, 그 앞 인도에 노점들이 늘어서있고. 그 노점 자리도 거래가 되는거여서, 점원으로 반년 가량 일하다가 일수를 빌려서 내 장사를 하려고 노점으로 나온거지.”
“노점도 그 당시엔 아무거나 못했어. 원래 이전 노점이 하던 업종을 계속 받아서 해야 되는거지. 그때 내가 귀금속방하다가 남은 물건들, 악세사리, 귀금속, 시계 같은 것도 진열하고, 원래는 거기가 비디오테이프 하던 자리였기 때문에 비디오테이프도 받아서 장사를 했어. 근데 그게 장사가 잘 되었어. 권리금 주고 노점 앞 점포를 인수해서 장사를 했을 정도니까. 그 당시에 비디오테이프들이 덤핑이 많이 나오고 했어. 덤핑을 잡아서 전국적으로 공급하고.. 그때 비디오대여점이 많았으니까 거기에 비디오를 계속 깔아 줬던거지. 전국적으로 신용이 쌓였으니까.. 그때는 마진이 괜찮았지. 새 비디오 하나 나오면 전국으로 뿌렸으니까.”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는 날벼락
“2012년 11월 초인가 10월 말인가.. 청계천 복원 사업에 대해 얘기가 나온게. 사실 원래 그 전에 처음 얘기가 나올 때는 뭐 이게 되겠어? 그리고 한다고 해도 시간이 좀 걸리겠는지 했는데... 청계천 복원 공약을 처음 만든게 양윤재 추진본부장, 원래 서울대 도시공학 교수였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였던 양윤재는 2001년, 청계천 복원 담론을 주도했던 청계천살리기연구회에 2차 심포지엄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여, 이명박 시장 취임 이후 청계천복원추진본부장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을 주도하였고 2004년에는 서울시 행정2부시장으로 임명된 이명박 시장의 측근이었다. 2005년, 청계천 주변 재개발 비리와 관련하여 수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지만, 2년 후 특별 사면되었다.) 이 양반이 먼저 김민석 민주당 후보한테 찾아가서 청계천 복원 공약을 가져가고.. 거기서 시기상조라고 하니까 이명박 캠프로 간거지. 근데 이명박이 당선되니까 바로 추진본부 만들어서 진행을 했던거지. 당선되자마자 추진을 하니까... 이명박 시장이 2002년 7월에 취임했는데, 12월부터 청계천 상인들끼리 단체를 만들어서 복원 반대 운동을 했었지. 우리 상인들의 뜻을 반영을 해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 청계천 복원 사업을 앞두고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左, 당시 방송인)과 [청계천 복원 사업은 문화혁명]이라는 제목의 대담을 진행한 양윤재 당시 청계천추진본부장(右). (출처 : 서울시 홈페이지) |
“처음엔 당연히 상인들은 반대였지. 고건 시장은 청계천 보수 비용으로 3천억정도 배치해서, 상시 보수했는데 (복원 사업 이야기 나오고 나서는) 서울시에서나 언론에서나 청계천 지하 가보면 뭐 석축이 썩어있고 냄새가 나고 가스가 차있어서 위험하다, 별 이야기를 다 해서 국민들한테도 뭔가 하긴 해야겠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만든거야. 서울시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하면 80퍼센트 이상 찬성이었으니까.. 우리가 반대를 하는건 집단 이기주의로 몰린 상황이었지.”
‘이주단지’라는 제안
“그러다가 어느날 양윤재 추진본부장이 나한테 왔더라고. 2002년 겨울에,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에 와가지고 그러더라고. 서울시민들 80퍼센트가 찬성을 하는데 사업 해야 하지 않겠냐. 나는 공사를 하게 되면 교통접근성도 안좋고 재개발도 할 거고 상인들이 피해를 받으니까 보상을 해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본부장이 보상은 안된다, 정말 보상 받고 싶으면 피해 내역을 증명해서 소송을 걸어라. 지면 서울시가 주겠다,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름대로 우리가 또 알아봤는데 소송을 하는데 변호사 비용도 엄청나고.. 변호사도 엄청 어려운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해서 그건 어렵겠다고 하니까 본부장이 보상은 어쨌든 안되니까 차선책을 제안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학동 상인들이 모여서 임원 회의를 했지. 그래서 나왔던 얘기가 차라리 이주를 시켜달라는 것이었어. 이주 단지를 만들어 달라, 그럼 이주를 하겠다. 그러니까 양윤재 본부장이 서울시에 비공개로 공문을 넣어달래. 공문을 보내니까 서울시가 이주단지를 원가로 해주겠다고, 땅값하고 건축비용만 받아서 평당 육칠천으로 해서 충분히 이주하게 해주겠다. 상인들이 누가보더라도 아,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해준거지. 사실 딴 곳에 들어가면 권리금이 얼마야.”
“황학동 상인들은 이주한다는 것에 다 동의를 했어. 그래서 서울시에 요구 공문도 보내고 했어요. 그 당시 청계천 다른 지역 상인들이랑 세운상가에서 단체장 회의를 했어. 뾰족한 대안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냐, 이주를 시켜달라고 하자. 그 당시 다른 지역 단체장들은 이주 안된다, 반대한다고 하고... 그래서 이주 찬성, 이주 반대 단체장들 따로따로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랬지. 이주 반대하는 상인들은 뭐 세운상가나 평화시장 상인들이었고. 그러던 중에 내가 그렇게 말을 했지. 우리는 장사꾼들이다. 장사꾼은 손익에 대해서 냉정하게 계산을 해봐야 한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서울시민들 80%가 동의하는 사업인데, 우리가 반대하게 되면 매도 당하기 쉽다. 실리도 찾으면서 복원을 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자고 말을 했어요. 나는 서울시의 정책에 최대한 협조 하면서, 이주단지라는 제안을 가져가자고 주장을 했던거지. 내가 이거 때문에 단체장들하고 같이 술도 먹고, 설득하려고 엄청 노력을 한 사람이에요. 개인 돈도 많이 깨지고.”
서울시의 약속, 가든파이브
“그런데 이주단지 해준다고 서울시에선 말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잖아. 서울시에서는 처음엔 7만 5천평 정도로 해주겠다고 했어. 우리는 무슨 소리냐, 38만 5천평을 해달라. 건물을 수직으로 높이 올려서 집어넣지 말고 지금 영업을 하듯이 수평으로 가게들이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 황학동 장사하는 업종이 다 그랬듯이 무슨 패션몰이 아니기 때문에 왔다갔다 해야되거든. 창고도 필요하고. 그러니까 서울시에서는 9만 평 얘기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굶어죽는다, 상인들이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5천명이 모여서 집회도 하고 그랬지. 고가 점거도 하고... 그러니까 서울시에서 협의를 해준 것이 15만평 이상에 해주겠다. 그리고 전용 면적 7평에다가 특별 분양, 이런 것들로 해주겠다. 이걸 서울시장 직인도 있는 문서로 주더라고. 특별분양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가격 얘기는 없고 특별분양이다, 라고만 적혀있었어. 그때는 특별분양이라고 하니 우리는 처음 얘기한 원가로 해주겠다는 얘기인줄 알았고. 아무튼 그때 얘기한 15만 평에 이주 단지는 2만 4500평 밖에 안되는거야. 그래서 우리가 장사할 수 있도록 대로변에 가게들을 깔아줘야지 왜 그렇게 안하느냐 항의도 하고 그랬어.”
“서울시에서 이야기한건, 너희만 이렇게 옮겨 간다고 해서 장사가 되는건 아니다. 코엑스처럼 문화컨벤션단지로 만들어야 손님들도 많이 오고, 원스탑 쇼핑 센터로 만들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한거지. 뭐 서울시에서 부시장, 국장, 과장 이런 사람들이 잘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걸 우리는 법으로 생각했지. 가장 신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상인 대책위 사람들도 크게 반대를 하진 않았어. 그 당시 장소도 내가 문정동으로 해달라고 했던 거에요. 마곡지구라던지.. 뚝섬경마장 자리 뭐 이런 얘기도 나왔는데 문정동으로 정한거야. 서울 시유지도 좀 많고 하니까 개발도 편하고, 교통도 사통팔달로 좋다고 하고 앞으로 서울의 허브가 되는 위치라고 말하니까 거기로 정했던거지. 한 대여섯 군데 정도 되는 후보지 중에서 문정으로 결정을 했던거지. 그게 지금 가든파이브 자리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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