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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사색인의 십계명
----제5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제6계: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제5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넓고 깊은 바다에는 모든 강물들이 다 흘러 들어오고 있다.
오늘도 파도와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모든 물고기들은 ‘논쟁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장미 같은 지식, 언제나 충직한 개 같은 지식, 화류계 여자 같은 지식, 기생 오래비 같은 지식, 사이비 학자 같은 지식, 일본병정이나 독일병정 같은 지식, 유태인이나 중국인 같이 돈만 아는 지식, 단 하나의 진리만을 선호하는 기독교인이나 공산주의자 같은 지식, 공공복리와 애국심만을 떠들어 대는 지식, 언제나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을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식 등----.
우리들이 진정으로 소망하고 있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는 부분을 전체와 관련시켜 이해하고, 전체를 부분과 관련시켜 볼 줄 아는 깊이 있고 종합적인 시야를 확보한 지식인일 수밖에 없다.
약한 자는 무리를 지으려고 하고, 강한 자는 독립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전자는 만인평등과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대중문화를 선호하지만, 후자는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에게’라는 슬로건 아래, 소수의 예외적인 인물과 영웅주의를 선호하게 된다. 대중적인 인간들은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이 그 기본 감정이며, 그들은 고귀한 인간들의 업적마저도 한없이 깎아 내린다.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듯이,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민주주의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들의 보편적인 신념이며, 따라서 그들은 때때로 문화적 영웅들의 출현 앞에서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을 어쩌지 못한다. 원한 맺힌 저주감정이 증오심의 산물이라면, 그들의 원한 맺힌 저주감정은 천민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약자는 강자를 증오하지만, 강자는 약자를 경멸한다. 강자는 무리짓는 사회적 동물들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 관용적인 성품으로 모든 것을 다 끌어 안으려고 한다. 문화적 영웅들은 권력을 삶의 본능의 옹호로 이해하며, 그의 독자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그 권력의 신전을 짓고자 한다. 그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며 명령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들은 통속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부화뇌동하는 자들이며, 복종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들의 역할을 숨기고, 감히 명령자의 지위를 넘보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힘 있는 다수 속에서 자기 자신의 얼굴을 지우고, 그 무엇을 주장할 때조차도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줄을 모른다. 그들은 눈뜬 장님이며, 날이면 날마다 삼류 신문을 읽는 문맹자이며, 그들만의 바벨탑을 쌓아주기를 바라면서도 권력을 혐오하고, 그리고 권력을 혐오하면서도 그 권력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바보 얼간이들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전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대작가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이 문화적 영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이처럼 민중의 편에 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태어나고 살다가 갔던 시대는 온갖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철권의 통치가 난무하던 시대였고, 따라서 그는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사라져간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르트르, 미셸 푸코, 데리다,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호르크 하이머 등, 그의 동시대적인 인물들이 모두가 한결같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호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 철학적인 시대적 배경 탓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의 자기 혐오는 지배자 혐오주의가 극단적으로 자기 분열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는 운이 좋아서 오래 살아 남았던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운이 좋은 것도 강자의 미덕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일 수가 있겠는가? 임신에서 출생까지, 또, 그리고 출생에서 죽음까지도 ‘싸움’이 근본적인 삶의 방법이며, 따라서 강자의 미덕을 부정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삶도 가능하지가 않게 된다. 강한 자는 오래 오래 살아 남아서,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그 미래를 감당해 내야만 하고, 또 그리고 수없이 쓰러지고 사라져간 민중들의 삶을 위로해 주고 어루만져 주는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브레히트의 자기 혐오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반대 방향에서, 그 하층민의 취향에 맞춘 생명부정에의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권력도 나쁜 것이고, 삶도 나쁜 것이고, 살아 남은 것도 슬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슬픔의 진정한 주체가 되지를 않고, 그 민중들의 코끝을 끌고 다니며, 사이비 문화적 영웅으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는 만인평등과 대중의 취향에 맞춘 사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이 그 모든 종적을 감추게 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저 천박한 민주주의자(공산주의자)라면 헨리 입센은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주의자(낙천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입센의 민중의 적(헨리 입센, 민중의 적, 신원문화사 2004)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 즉 스토크만이 그의 고향인 히스틴에서, 그 고장 사람들과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펼쳐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역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계적인 대작가로서의 입센의 장점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라는 주제 아래, 역사 철학적인 이야기의 전개와 매우 개성적인 등장 인물들의 창조라고 할 수가 있다. 스토크만 의사는 머나 먼 북쪽지방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그의 고향인 히스틴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된다. 그의 고향 역시 자그만 교외의 소읍에 불과하지만, 그는 남다른 관찰력과 학구욕으로 히스틴 지방의 온천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스토크만 의사의 노력을 비웃던 그 지역 사람들이, 스토크만 시장----스토크만 의사의 형이다----의 지도 아래 히스틴 지방을 관광지로 조성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온천관광지의 기획은 스토크만 의사의 독창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킨 것은 그 지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의 형 스토크만 시장이었다. 스토크만 의사는 이상주의자이며, 스토크만 시장은 현실(실용)주의자이다. 어쨌든 히스틴 지역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온천관광 수입은 그 지방의 유일한 경제적 젖줄이 된다. 스토크만 의사는 그 고장의 온천관광지 의무관으로 재직 중이며, 스토크만 시장은 경찰서장과 온천관리위원회의 의장직을 겸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천하태평스럽고 장미빛 희망으로 가득차 있던 어느 날, 전혀 뜻밖에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스토크만 의사가 온천수의 수질검사를 의뢰했던 대학으로부터 그 고장의 온천수는 “음료수는 물론 목욕물로 써도” 안될 만큼 오염되어 있다는 수질검사의 결과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지난 해부터 간혹 “티푸스와 악성 위장병”이 온천관광객들 사이에 발병을 하게 되자, 그 병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극비리에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그것을 즉시 온천관리위원회 앞으로 보내고, 그 지역의 민보에 기고를 하고, 그리고 또 즉시 온천관광사업을 중단할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의 형인 시장의 의견은 다음과도 같았다.
시장 그럼 너는 이 사항을 정식 공문서로 작성해서 온천관리위원회에 제출하겠다는 말이지?
스토크만 네, 그렇습니다. 그것도 시급히.
시장 너는 그 문서에 꽤 강경하고 자극적인 언어를 쓰고 있어. 특히 눈에 거슬리는 것은 우리가 온천을 찾는 관광객들을 독살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 점이야.
스토크만 형님,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독이 섞인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그것으로 목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엾은 병자들은 안심하고, 우리를 믿고 건강 회복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있는 겁니다.
시장 그럼 네가 생각한 결론은 또다른 배수로를 설치해서 물레방아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불결한 물을 배출하고 지금의 도수관을 전부 다시 설치하라는 말이지?
스토크만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그쪽 일은 잘 모릅니다만......
시장 나는 오늘 아침에 우연히 우리 시에서 일하는 토목기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농담처럼 장래의 일이지만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며 네 계획을 보여 주었다.
스토크만 장래의 일이라고요?
시장 기사는 내가 내민 거창한 공사 계획을 보곤 웃더군. 너는 이 개량 공사에 얼마나 비용이 들 것 같으냐? 생각이라도 해본 게냐? 대략 계산으로도 십만 클로네가 든다더구나.
스토크만 그렇게 큰 돈이?
시장 그뿐이 아니야. 이 개량 공사에 최소한 이 년의 시일이 소요된다는 거다.
스토크만 이 년? 이 년 꼬박입니까?
시장 그것도 빨라야 이 년이야. 그렇다면 그 이 년 동안 온천장은 어떻게 해야 하지? 폐쇄하지 않을 수 없지. 물론 폐쇄하는 도리 밖에는 없어. 그리고 온천의 물이 해롭다는 소문이 나돈다면 누가 오겠어? 아무도 오지 않을 테지.
따지고 보면 온천수가 오염되었고, 그 온천수 때문에 ‘티푸스와 악성 위장병’의 발병의 위험성이 있다면, 그 온천 사업은 즉시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러나 이처럼 자명한 문제마저도 눈 앞의 사소한 이익과 경제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어느 누구도 해결해낼 수가 없는 난제가 되어 버린다. 스토크만 의사는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의사로서, 즉각 온천관광사업을 중단하고, 오염원인을 제거해낸 다음에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하지만, 그의 형 스토크만 시장은 그 도수관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개량의 필요성을 검토”해 보자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레방앗간 골짜기의 배수로와 온천물을 끌어 오는 도수관의 설치공사에는 적어도 2년이라는 시간과 그 공사비용에만 “십만 클로네”가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첫 번 째는 그 엄청난 공사비용을 감당할 방법이 없고, 두 번째는 그 공사기간 동안 히스틴 지역과의 경쟁관계에 있는 또다른 온천지역으로 모든 관광객들을 빼앗기게 되고, 따라서 히스틴 지역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장의 이로정연한 반대의 논리였다. 스토크만 의사는 이상주의자로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 집니다. 여름이 되어 더워지면 틀림없이 사고가 납니다”라고 말하지만, 시장은 현실주의자로서 “어쨌든 너는 너무 과장하고 있어. 적어도 양식 있는 의사라면 좀 더 신중한 태도로 예방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점진적인 개량방법을 역설하게 된다. 시장은 스토크만 의사의 허황되고 신중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고, 스토크만 의사는 어쨌든 “미봉책”은 안 되며, 형님과의 “더러운 계략의 공모자”가 될 수는 없다고 면박을 주게 된다. 그러자 시장은 스토크만 의사가 작성한 공문서를 위원회에 제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 내 임무라고 말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온천관리위원회의 이름으로 모든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진술서를 작성하여 공포하겠다고 말한다. 또한, 시장은 온천장에 근무하는 일개의 관리(의사)로서 상관의 명령에 거역하면서 자기 소신을 말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면, 스토크만 의사는 나는 “이 세상의 사소한 문제에 대해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있다”라고 반박한다. 또 스토크만 시장이 “너는 그 어리석은 고집으로 우리 고장의 번영을 가져올 유일한 돈줄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그 돈줄은 썩었습니다. (......) 우리는 세균과 부패물을 팔아먹고 있는 겁니다. 우리 사회생활 전부가 사기와 죄 속에 뿌리박아 번창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마침내, 시장은, 만일, 그렇다면 “온천장 소속 의무관의 직책”에서 파면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스토크만 의사를 “자기 고장에 손해를 끼치는 사회의 적”이라고 단언을 하게 된다. 스토크만 시장은 “시민의 의무를” 역설하는 스토크만 의사에게 “민중이란 원래 새로운 사상 같은 건 요구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아. 그런 것보다는 옛날부터 내려온 관례대로 원만하게 다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반박을 하고, 급기야는 스토크만 의사를 향해서 “너와는 함께 일할 수 없는 인간”, 즉, “비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인신공격을 퍼붓게 된다.
스토크만 의사는 사사건건 반항적이고 구제불능의 비정상적인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고향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털어버리고 싶은 ‘무서운 악행’은 좀처럼, 그 반향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사회의 적’(‘민중의 적’)으로 배척당하는 빌미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크만 의사의 가족은 그의 아내와 여교사인 큰 딸, 그리고 두 어린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아내 카트리네는 “권력 없이는 정의도” 어쩔 수가 없다는 현실주의자이며, 그의 딸, 페트라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여교사답게, “나는 그 영감쟁이(시장)의 목을 꽉 죄어주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그의 아빠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게 된다.
하지만 스토크만 의사 부인인 카트리네는 그 걱정이 태산같기만 하다. 만일, 스토크만 의사가 그 싸움에서 지고 파면을 당하면, 일정한 수입도 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고, 모처럼 찾아온 행복이 멀리 달아날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물론 그들이 당신에게 취하는 수단이 비열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 사회에는 부정이라는 것을 알면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허다해요. 여보, 애들이 돌아왔어요. 저 애들을 보세요. 저 애들의 신세가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안 돼요. 오,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라고 간절하게 애원해 보지만, “안돼, 나는 전 세계가 무너지는 한이 있다고 해도 그 녀석들의 멍에를 지고 기어 다닐 수는 없어. (......) 나는 내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 자유인이 되었을 때를 위해서라도 정의를 땅 속에 묻을 수는 없소”라고, 그 싸움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입센의 민중의 적은 보기 드물게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그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고, ‘진리와 정의의 편’에 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 즉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로 무장한 인간에게는 ‘진리와 정의’는 언제나 변함없는 버팀목이자 그 유일한 목표가 되어 주지만,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쫓아서 부화뇌동하는 어중이 떠중이들에게는 ‘진리와 정의’는 단지 하나의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스토크만 의사의 반대 방향에서, 반동적인 인물인 그의 형 스토크만 시장에게는 허위와 불의 자체가 그 유일한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스토크만 시장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움켜쥐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것을 지켜 내려는 무서운 악당이라면, 그 형제들 사이에서 부화뇌동하는 ‘민보사’의 주필 호스타트와 그 기자인 빌링, 그리고 인쇄소의 사장인 아스라크센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인물들에 불과하다. 호스타트와 빌링, 그리고 아스라크센은 히스틴 지역의 온천개발의 주인공인 스토크만 의사를 그들의 제일급의 필진으로 극진히 모시며, 온갖 아첨을 다 떨어대다가, 의사와 시장의 그 불꽃 튀는 논쟁이 있은 다음, 시장의 감언이설에 호도되어, 급기야는 스토크만 의사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스토크만 의사는 시장과의 그 싸움이 있은 직후, ‘민보사’로 찾아가, 온천수의 수질검사의 자료와 함께 그의 기고문을 보도해줄 것을 약속받아 내지만, 그 낌새를 알아챈 시장은 극비리에 ‘민보사’로 찾아가 그 보도가 미칠 수많은 파문들을 역설하게 된다. 첫째, “그 의사 나리가 구상한 개조 계획에는 십만 클로네라는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고, 온천의 소유자들은 현재 그 이상의 투자 능력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 그 “공사완료까지 이 년 동안 온천장을 폐쇄하면” 히스틴 지역의 경제는 완전히 쑥대밭이 된다는 것이 시장의 주요 논지였고, 호스타트, 빌링, 아스라크센도 그 시장의 말에 동조를 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온천물에 독소가 섞였다, 또는 이 고장은 건강상 극히 유해한 곳이다, 아니, 시내 전체가 병균의 소굴이다라고, 하면 어느 누가 찾아오겠소”라고 의견일치를 본 끝에,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스토크만 의사의 무책임한 언동은 미친 자의 공상에 불과하다고 몰아부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스토크만 의사의 자료와 그 기고문을 묵살하고, 스토크만 시장이 그 좋지 못한 풍문을 잠 재우기 위해 작성한 진술서를 보도하기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게 된다. 바로 그때 스토크만 의사가 민보사를 방문하게 되고, 스토크만 시장은 옆방으로 숨었다가 곧 들통이 나고 만다. 스토크만 의사는 그의 형인 시장의 비열한 계략을 알아 차리고, “사회의 거역할 수 없는 위력은 내 편이오. 호스타트와 빌링은 민보에 퍼뜨리고 아스라크센은 가주 총동맹의 선두에서 지휘하도록 되어 있소”라고, 제법 호기 있게 스토크만 시장을 몰아 부치지만, 이내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논문은 그릇된 생각 위에 세워진 주장이었습니다. (......) 그건 낼 수도 없습니다. 낼 수도 없고 내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는 것을 당국이 용인하지도 않습니다”라는 호스타트의 말과, “당신의 논문이 신문에 실리는 것은 바로 시민사회를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아스라크센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졸지에, 순식 간에, 히스틴 지역에서 반동적인 인물로 낙인을 찍힌 스토크만 의사는 자비로 팜플렛을 만들고 민중대회를 개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그때 현실주의자로서 남편의 미친 짓을 만류하러 왔던 카트리네가 그 광경을 목도하게 되고, “그것은 이 고장의 모든 인간들이 모조리...... 꼭 당신처럼 낡은 사상에 절은 아낙네같기 때문이오. 모두들 자기 집 살림걱정이나 할 줄 알지 사회 일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오”라고 면박을 당하고, 마침내 남편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단 한 사람의 낡은 사상에 절은 여편네가 경우에 따라서는 사내 구실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어요. 이제부터 저는 당신 편이예요”라는 말과 함께, “여보, 져서는 안 돼요. 우리 애들이 따라 가겠지요”라는 말이 그것이다.
남 다른 애향심을 갖고 있고 눈 앞의 사소한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는 스토크만 의사, 진리와 정의의 화신인 스토크만 의사, 그러나 그는 병든 사회를 고발하려는 그 어떤 수단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민보사의 지면도 봉쇄되어 있었고, 팜플렛의 제작도 가능하지가 않았다. 가주 조합에서도, 어떤 시민 단체에서도 그가 민중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천신만고 끝에, 그의 친구인 홀스텔 선장이 그의 집을 ‘민중대회의 장소’로 제공하고, 그곳에서 민중대회를 개최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의 편에 가담한 아스라크센이 민중대회의 의장(사회자)으로 선출되고, 자칭, “절제를 존중하고 평화와 온건을 사랑하는” 아스라크센의 그릇된 사회권에 의하여 스토크만 의사는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된다.
시장 모두 익히 아시겠지만 현재 봉직 중인 온천 의무관은 본인과 가까운 인척 관계에 있기 때문에 본인이 이 자리에서 발언을 삼가려는 입장을 취하려는 겁니다. 그러나 온천에 대한 본인의 직책 상, 그리고 이 고장 전체의 이해 관계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인 이상 마음을 정하고 감히 등장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 회동하신 시민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 고장의 온천 및 고장 전체의 위생 상태에 관한 과장된 해괴한 보도가 세간에 유포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은 계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아스라크센 (방울을 들어 흔든다) 제군, 진정하십시오. 나는 시장의 동의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의무관 스토크만 씨의 개혁 운동에는 깊은 저의가 있다는 시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스토크만씨는 표면에 온천장 문제를 내걸었으나 사실은 혁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시정을 현임자 외의 다른 자의 손에 넘기려고 획책하는 것입니다. 의사의 이 저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시민 제위께서도 이 점을 인정하시는 데 이의가 없으실 줄 믿습니다. 나 자신도 시정은 시민의 손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기를 갈망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납세자의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주장을 따르면 결과는 그렇게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바보천치 같은, 아차 이건 실례.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스토크만씨와는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황금도 너무 비싸게 사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호스타트 본인 역시 차제에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토크만씨의 개혁 운동에 처음에는 다소의 반향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가능한 한 공평한 입장에서 후원을 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후일에 본인 등은 허위보고에 농락을 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부지 어린 소년 시절에 고향을 떠났다가 사랑하는 조국을 잊지 못해 되돌아 왔던 스토크만 의사, 머나 먼 북쪽 지방의 외국 땅에서 “세상의 버림을 받고 외롭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고향의 메 마른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동경했던 스토크만 의사,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와 “가슴 속에 따뜻하게 알을 품은 거위 마냥” “온천계획”을 발표했던 스토크만 의사,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의무관으로서 온천수의 오염을 발견하고 그 근본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스토크만 의사----, 그러나 그 스토크만 의사가 받아야만 했던 대접은 ‘미치광이’, ‘공상가’, ‘모반자’, ‘민중의 적’이라는 여론의 뭇매와 그들의 사악한 험담 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토크만 의사는 “이제 온천수의 도수관에 유독 성분이 들어 있다거나 당 시市의 보양지保養地가 병원균의 소굴이라는 문제는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하게 된다. 왜냐하면 “즉, 우리들의 정신 생활의 샘이 이미 무서운 독소의 침범”을 받았고, “우리 사회가 허위라는 무서운 질병을 일으킬 가공할 땅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을 비롯한 유력자들과 온천장의 사업자들, 그리고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과도 같은 신문사의 기자들과 인쇄업자들, 또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며, 진리보다는 허위를 신봉하고, 정의보다는 불의를 사랑하는 한심한 무리들에 불과하다. 스토크만 의사, 아니 헨리 입센은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 사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비판하고, 그 민주주의 사회의 주체들인 민중들을 “진리와 자유를 해치는 가장 위험한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민중들은 홀로 설 수 없는 자들이며, 자기 반성과 성찰이 없는 우중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사상이나 이념보다는 낡디 낡은 관습을 더욱더 좋아하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창조성보다는 민중의 취향에 맞춘 ‘대중성’을 더욱더 좋아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삶의 본능의 옹호인 권력을 혐오하고, 복종하는 자보다는 명령하는 자가 얼마나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인가를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들의 자유와 평등과 사랑은 지배자 혐오주의의 극치이며, 무리를 이룬 어중이 떠중이들의 승전가라고 할 수가 있다. 민중들은 위대한 영웅들과 그 권력을 혐오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의 다수의 힘을 믿고, 한 개인의 독창성이나 천재성보다도 민중의 취향에 짜맞춘 대중성을 더 좋아하며, 진리와 정의의 법정에 서기보다는 여론몰이식의 인민재판을 더욱더 좋아한다.
그 여론몰이식의 인민재판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스토크만 의사----. 그러나 그 여론몰이식의 인민재판 앞에서도, 다음과 같이, 의연하고도 꿋꿋하게, 그 우중들을 크게 꾸짖고 있는 스토크만 의사의 연설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사이에서 진리와 자유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적은 무리를 이룬 다수입니다. 그 빌어먹을 떼거지로 무리를 이룬 다수.
다수는 불행히도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는 아닙니다. 정의란 나 자신이나 나 이외의 소수에게만 해당되며 소수만이 항시 옳습니다.
나는 다수 속에 진실이 있다고 하는 미신을 깨뜨릴 하나의 혁명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일반적으로 다수가 신봉하는 진리란 어떤 진리일까요? 그것들은 너무 낡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러나 일단 진리가 그렇게 낡은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 역시 허위가 되어 버립니다.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진리는 글쎄요, 한 17년내지, 18년 정도 갈까. 기껏해야 이십 년이고 그 이상 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해묵은 진리는 항시 천박해 지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다수는 그러한 단계에 있는 진리만을 가까이 합니다. 이러한 모든 다수의 진리란 부패하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 햄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 주위의 도처에서 맹위를 떨치는 도덕적 괴혈병의 원천입니다.*(이 글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청하, 1982)의 편집자 해설 속의 번역문을 인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의 편집자 해설의 번역문이 더욱더 아름답고 뛰어났기 때문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온천수의 오염의 원인을 규명해 내고 그것을 민보」에 기고할 때까지는 스스로를 ‘민중의 벗’으로 자처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계획이 다수의 힘에 의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이내 그 잘못을 깨닫고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로 전향을 하게 된다. 우리 사이에 진리와 자유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적은 무리를 이룬 다수이며, 그 민중들은 불행히도 힘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다수가 신봉하는 진리는 언제나 낡디 낡은 통속적인 진리이며, 그 진리는 기껏해야 이십 년 이상 가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 민중들은 ‘허위’를 ‘진리’로, ‘불의’를 ‘정의’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며, 그 다수의 힘----어리석은 자들의 다수의 힘----으로 스토크만 의사같은 현명한 인사들을 지배하려는 기만적인 행태를 일삼게 된다. 그리고 민보誌는 ‘민중은 국민의 정수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민중들의 코끝을 잡아 끌고 다니는 비열한 신문에 불과하며, 민중들이란, ‘머리에서 발끝까지 평민 근성이 골수에 박혀 있는데도 언제나 정신적인 향상을 꾀하지 않는 사회적 천민’(잡종개)에 지나지 않는다. 호스타트, 빌링, 아스라크센 등의 무리를 이룬 다수와 그러한 평민 근성을 가지고 사회의 최정상까지 올라간 스토크만 시장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이 ‘민중 대 개인’, 즉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과정 속에서 스토크만 의사는 급기야는 ‘전 사회의 멸망을 원하는 민중의 적’으로 낙인을 찍히게 된다. 그 민중 대회는 스토크만 의사가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천 의무관 토머스 스토크만 의사가 민중의 적”으로 규정됨과 동시에, 히스틴 지역의 공익을 위해 “一家의 정실을 과감히 포기하신 시장 각하에 대한 만세 삼창”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 결과, 스토크만 의사의 집에는 성난 민중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고, 그 집안의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어디 그뿐이던가? 유리창 가게에서는 유리창을 갈아 끼워주는 것을 거절하고, 집 주인은 전혀 뜻밖에도 가옥의 명도를 요청한다. 그의 딸인 페트라까지도 극단적인 사상의 소유자라고 학교에서 면직을 당하고, 그 어린 아들들마저도 초등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홀스텔 선장마저도 면직을 당한다. “어느 나라에 가든 당파의 노예가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스토크만 의사의 진단이기는 하지만, 그 당파의 힘은 어떠한 전제 군주의 힘보다도 더욱더 강력하고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현대사회의 민주주의는 그 당파의 힘의 극치이며, 그 무소불위의 권력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흔적조차도 끔찍할 만큼 말끔하게 씻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중들의 광기 그 자체이며, 우리 인간들의 미래를 한없이 갉아먹는 암적인 종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헨리 입센은 이처럼 민주주의의 맹아기에 그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대작가이며, 그의 분신인 스토크만 의사를 통해서 그 민중과의 어렵고도 힘든 싸움, 즉 어떤 승리보다도 더욱더 값진 패배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인 것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汚名이란 바늘로 허파를 찔린 것 같은 아픔”----“모두 진리 때문이오”가 바로 그 오명의 아픔을 대변해 준다----을 간신히 참으면서, 아메리카로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바로, 그때 그의 형인 스토크만 시장이 찾아와 아주 조심스럽게 타협안을 제시한다. 시장은 공식적으로, ‘온천관리위원회의 해고통보’를 가져온 것이지만, 부정부패의 화신인 그는 그 이름에 걸맞게 고등술책을 구사한다. 첫 번째는 스토크만 의사는 이 고장에서 개업을 할 수도 없는 만큼, 당분간 이 고장을 떠나 달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 반 년 가량 지난 다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면 곧 바로 복직시켜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러한 타협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스토크만 의사의 입을 봉해 놓아야 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크만 의사가 그 시장님의 ‘흉악한 계략’을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스토크만 의사가 “그 마귀, 시민이란 마귀 할멈이 내 목을 조여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결코 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시장은 몰텐 킬의 유산상속의 건을 끄집어 내며,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게 되면, 그 유산상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를 한다. 몰텐 킬은 물레방앗간 골짜기의 가죽공장----이 가죽공장은 가장 많은 폐수를 유출시키고 있는 만큼 온천수 오염의 주범 중의 하나이다----의 주인이며, 스토크만 의사의 장인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장인 어른의 유산에 의하여 그의 가정의 장래가 보장받았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라고 기뻐하면서도, “그 늙은 너구리(몰텐 킬 영감의 별명)는 제가 형님과 그리고 현명한 형님의 친구들과 손을 끊은 것을 매우 좋아한다”라고 독설을 퍼붓게 되자, 스토크만 시장은 더 이상의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진노를 하게 된다. 몰텐 킬이 시 의회에서 소위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 만큼, 시장과 몰텐 킬은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원수지간이다. 따라서 스토만 시장은 소위 “복수심 강한 몰텐 킬의 유언장을 얻어내려고 미리 짜고 행한 보복 수단이냐”고, 스토크만 의사의 온천수 오염조사 사건의 전말을 왜곡시키게 되고, 그 형제 사이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가게 된다.
스토크만 (입이 벌어지지 않을 만큼 어이 없어 한다) 형님, 당신은 제가 평생에 처음 만난 가장 비열한 하등 천민이군요.
시장 이제는 서로의 얘기는 끝난 거다. 네 면직은 번복할 수 없어. 이것으로 나도 네게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나간다)
스토크만 퉤퉤, (부른다) 카트리네, 그 놈이 서 있던 자리를 말끔히 닦아야 겠소. 어서, 그 왜, 그 애 이름이 뭐더라? 코 끝에 그을음을 바른 애, 그 애한테 시켜요. 어서, 세숫대야를 들고 오게 해요.
스토크만 의사가 자기 형을 “내가 평생에 만난 가장 비열한 하등 천민”이라고 그 분을 삮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장인인 몰텐 킬이 찾아온다. 그의 장인은 가죽 공장의 악덕사업주이며, 사람됨됨이가 음흉하고 능청스러워서 너구리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늙은 너구리답게 스토크만 의사의 가족들에게 상속해줄 유산으로 온천장의 주식을 아주 싼값으로 싹쓸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토크만 의사에 의하여 온천수의 오염의 문제가 불거지자 그 주식값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고, 따라서 더 이상 스토크만 의사가 가죽공장의 폐수 방출 문제와 온천수 오염 문제들을 떠들어 대지 못하게 그의 입을 봉쇄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토크만 의사에게 있어서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온천수의 오염 문제’를 떠들어 대는 것은 “카트리네와 페트라,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도 같은 짓이 되고만 것이다. 너구리는 음흉하고 능청스럽고 교활하다. 늙은 너구리가 시장이고, 시장이 늙은 너구리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장인 어른을 보고 ‘악마의 화신’이라고 뇌까려 보지만, 그 장인 어른이 제시한 조건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몰텐 킬이 자기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두 시까지 확답을 해달라고 하고 나가 버리자, 바로 그때, 천하에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들, 저 기회주의자의 화신인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이 찾아온다.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이 “선생은 어젯밤 회합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에 대해 몹시 격분하고 계실 줄 압니다”라고 운을 떼자, 아직도 화가 덜 풀린 스토크만 의사는 “오 참으로 훌륭하신 태도였죠. 제기랄, 태도가 다 뭐요. 마치 썩어 빠진 계집년처럼----.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라고 면박을 주게 된다.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은 천하에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들이며, 오로지 자기 자신들의 눈 앞의 이익만을 쫓아 다니는 기회주의의 화신들이다. 그들이 어젯 밤의 민중대회 석상에서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스토크만 의사를 찾아온 것은 이제는 온천장의 대주주의 상속자가 된 스토크만 의사에게 오로지 잘 보여야겠다는 일념 뿐이었던 것이다.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은 스토크만 의사가 온천수의 오염의 문제를 거론한 것마저도, “온천장의 주식을 헐값에 매수하기 위한 교활한 간계”로만 이해를 하고, “차제에 우리 민보誌를 송두리째 선생님의 자유로 써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 교활한 간계에 의한 여론의 조작에는 민보誌가 유용한 수단이 되고, 아스라크센의 가주 조합의 힘과 함께, “이 고장의 고등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토크만 의사는 눈 앞의 사소한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더욱더 중요시하는 문화적 영웅답게, 그 기회주의자들을 향해서 단장을 휘두르며, 그들을 모조리 내쫓아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중의 벗’이지만, 스토크만 의사는 ‘민중의 적’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벗은 ‘허위’와 ‘불의’의 편이지만, 민중의 적은 ‘진리’와 ‘정의’의 사도이다. 민중의 벗은 다수의 힘으로, 또는 저마다 그 다수의 힘을 빙자하여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쫓아가지만, 민중의 적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의 힘으로 전체의 이익을 창출해 낸다. 민중의 벗은 변절과 불의의 화신이지만, 민중의 적은 지조와 정의의 화신이다. 스토크만 의사는, 만일, 민보사와 손을 잡지 않으면, 주식취득 사건의 전말을 모조리 폭로하겠다는 그 ‘민중의 벗’들의 협박에도 전혀 귀 기울지 않고,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그 단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미친 개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듯이, 그의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는 이처럼 거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침내, 그의 장인인 너구리 영감에게, 커다랗게 적은 否字를 통보하게 되고, 그의 진정한 싸움터인 히스틴 지역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게 된다. 스토크만 의사의 절친한 친구인 홀스텔 선장이 그의 집을 빌려주고, 그는 홀스텔 선장의 집에서, 빈민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병원 겸, 소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거리의 부랑자들을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의 아내 카트리네와 그의 딸 페트라가 더없이 고마운 조력자가 되어 준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따라서 스토크만 의사가 무료로 빈민들을 치료해 주고, 거리의 부랑자들을 가르쳐서 소수의 예외적인 인물들로 육성해 내게 될 것이다. 시장이나 너구리같은 당파의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먹은 이리에 지나지 않으며, 호스타트와 아스라크센 같은 인물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수많은 민중들을 물어뜯고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어 놓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민중주의자들의 당파주의와 적당주의가 ‘정의와 도덕’을 뒤집어 엎고,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을 부정부패의 늪으로 몰아가게 된다. 이제는 ‘민중의 벗’이 ‘민중의 적’으로 전도되고, ‘민중의 적’이 ‘민중의 벗’으로 변모를 하게 된다. 스토크만 의사는 기사도적인 모험 정신과 성자의 영웅주의로 무장한 낙천주의자이며,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항상 굳건한 당원과 위험없는 동지들만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에 반하여, 늘 새로운 것과 변화를 죄악시하며, 제 집만을 지키려는 犬公(똥개)들을 닮았다. 그들은 언제나 전통과 역사, 그리고 풍습과 윤리만을 좋아하고, 머나 먼 이상 세계보다는 문전옥답의 오곡백과만을 더욱더 좋아한다. 그들의 목표는 눈앞의 이익이며, 그들의 척도는 만인의 평등과 민주주의이다. 그들은 자유와 독창성을 제일 싫어하고,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싫어한다. 어중이 떠중이들의 선은 공동선이며, 그 공동선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자라난다고, 또한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의 이익, 즉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은 그들이 소속된 국가와 공동체 사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머나 먼 우주와 극북지대를 탐험하려는 미래의 인간들의 탄생을 가로막는다. 온천수의 오염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그 온천지대를 모든 인간들의 건강과 행복이 자라나는 지상낙원으로 가꾸려기 보다는, 우선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그들의 우매함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동선은 악이 되고, 그들의 만인평등과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어중이 떠중이들의 헛된 망상의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만인이 신봉하는 진리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그 진리는 이미 부패하여 모든 인간들을 해치는 독극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강한 인간, 독자적인 사상가, 독자적인 철학예술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소위 ‘왕따’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만큼의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자기 자신만의 길이고, 고귀하고 위대한 낙천주의자의 길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바로 혼자 서 있는 인간이다”. 이 말은 니체가 가장 좋아했던 헨리 입센의 천하 제일의 명언인 것이다.
헨리 입센은 그의 민중의 적을 통하여 민주주의 사회의 모순점과 그 민중들의 위선의 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인 스토크만 의사를 창출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헨리 입센의 민중의 적은 그의 후학인 니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걸작이며, 니체는 헨리 입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의 ‘짜라투스트라’를 창출해 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은 가장 어렵고도 힘든 싸움이며,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에서만 펼쳐지는 싸움인 것이다. 스토크만 의사와 짜라투스트라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전형적인 인물들이지만, 반칠환의 ‘지킴이’(수호신)도 그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하--, 그때가 언제였던가, 풍 맞은 늬 애비와 삼십대 초반의 늬 에미가 머잖아 묵샘에 빠져 죽을 늬 큰성을 앞세우고, 다리가 휘도록 포대기 끈을 조른 갓난쟁이 둘째를 업고 이 솔뫼골 산지기 외딴집에 찾아드는 것을 보았다. 하마 사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다만 회초래기 같은 구렁이 새끼였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늬 에미, 산지기 외딴집에서 등잔불에 그을은 칠남매를 내리 낳을 때마다 산파 대신 손 잡아주던 문고리처럼 늬 집에서 지금껏 머물러 살아 왔다.
2
패가 망신하여 산지기 동생 오두막 열댓 살 뼈무른 조카 등에 업혀온 늬 큰애비가 풍 맞은 애비보다 먼저 타고 가는 상여를 보았다. 이태 후 그 춥던 겨울, 풍 든 애비마저 숨거둘 때 산발한 에미와 감자알 같던 늬 형제들이 오열할 때도 나는 그저 청뜰 밑에서 점점 예민해져 가는 청각을 곧추고 있을 뿐이었다. 뭍짐승들의 소란스런 울음 소리 틈에서도 젊은 암구렁이의 목소리를 가려낼 줄 아는 나이라면 이해하겄는가. 그때 나는 다만 늬 누이 한 줌 머리채만큼 자란 구렁이 총각에 불과했다.
3
인간의 나이 스무 살, 헌걸찬 인물의 늬 큰성이 뇌염에 걸려 맥없이 샘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다. 샘골 그득한 푸른 이내 탓이었을까, 안친 쌀보다 턱없이 큰 무쇠솥을 데우고 나온 저녁 연기 탓이었을까. 까닭없이 코끝을 자극하는 재채기를 털어내듯 나는 그저 음산한 울음을 나직이 풀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제법 지겟작대기만큼 자란 청년 구렁이로 세 번째 허물을 벗었다.
4
내남 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였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 그 시절, 마른 눈물도 없이 술찌게미를 집어넣던, 새 주둥이처럼 빨간 늬 형제들의 목젖을 보았다. 다만, 보았을 뿐이다. 나로서도 살찐 개구리 만나기가 늬형제 이밥보기처럼 어려운 시절이었다.
5
그해, 올도토리가 여물 무렵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의 허물을 벗었다. 허물을 인간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구렁이 세계의 금기였으니, 칠칠치 못한 나의 허물은 두고두고 구렁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큰 허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실수는 나를 다른 구렁이의 운명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이기도 했다. 흐물흐물 내 근육의 틀림대로 양껏 부푼 내 허물은 실제 몸보다 크게 보였을 터, 마당을 쓸던 누이를 보고 에미가 말했다. ‘두거라. 이거는 아마도 우리 집 업이 틀림없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에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경건했다. 그 목소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6
나는 곧 이 집으로부터 나직하고 경건하게 불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눈치챘고, 열심히 그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의 형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나는 그것이 이 집안의 길흉화복을 당기고, 물리치는 가신家神의 역할임을 깨달았다. 나직하고 경건한 존재의 다른 이름이 지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7
늬 에미는 억척스럽고 총명했으며, 형제들은 착하고 똑똑했다. 이것은 나, 지킴이의 말이 아니라 동리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다. 큰성이 명문 중학교에 붙자, 둘째 성과 시째 성이 우등상을 타왔으며, 누이는 글짓기 상을 타고 에미는 장한 어머니 상을 타왔다. 부끄럽지만 큰 애비와 애비의 죽음도, 발가락 움이 돋는 양말의 가난도 내 탓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모두 내 탓은 아니다.
8
지킴이가 된 나는 연애도 잊고 이 집에 ‘내 탓’을 얹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난했으나 스스로 꿈을 세울 줄 알았고, 꿈을 세웠으나 꿈을 위해 남과 다투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도울 수 없는 나야 말로 이 집에서 가장 가난한 지킴이였다.
9
너 막내의 수염이 거뭇해지자 머리 큰 성들은 명절마다 수군거렸다. ‘도시로 가자!’ 나는 찬피동물의 속성도 잊어버린 듯 머리속이 뜨거워졌다. 필시 이농 계획은 나를 빼놓은 구상이 틀림없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도시의 아파트에 깃들어 사는 지킴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10
늬 가족이 도시로 떠나가던 날, 나는 아침 일찍 슬그머니 건너말 송골로 가서 이삿짐을 옮기는 너희 가족을 보았다. 나직이 울었으나 늬 가족이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관절 빈 집을 지켜야 하는 지킴이란 무엇인가. 그해 가을, 겨울 잠 준비도 잊고 가으내 굶었다.
11
가끔 소식을 듣기는 했다. 첫째가 장가가고, 둘째가 장가가고, 셋째가, 마침내 너 막내마저 장가갔다는. 형제들 모두 메추라기 흩어지듯 분가해버리자 어지간히 늙은 나는 또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제 첫째네 지킴이가 될 것인가, 둘째네 지킴이가 될 것인가. 그러나 곧 깨달았지. 모두 도시 속에 자리잡은 그 어느 곳도 내가 갈 곳이 아님을.
12
늬 가족 떠난 지 십 몇 년, 마당과 청뜰엔 잡초 무성코, 방마다 들쥐들이 쑤알거리는 빈집이지만 아직도 이 집안엔 늬들은 잊어버린 늬 형제들이 살고 있다. 성들은 부산하게 책가방을 싸고, 오늘도 짱아찌 반찬에 보리밥 도시락을 싸는 에미와, 빈집 지키며 처마 그림자를 재는 막내둥이가 이토록 선명하거늘, 나는 언제까지나 이들의 유년의 꿈에 귀기울이며, ‘내 탓’을 얹기를 희망할 것이다. 어쩌면 오래잖아 이 집을 찾은 형제들 중 하나는 다시는 보지 못할 내 마지막 허물을 집어들고 나직하고 경건하게 중얼거릴 것이다. ‘아아, 이것은 우리 집 업이었지’라고.
----반칠환, 「지킴이의 노래」 전문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운 사람’, ‘수수께끼 같은 사람’, 혹은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하고 독창적인 철학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부른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투쟁 속의 조화’를 역설한 최초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너와 나, 적과 동지, 선과 악, 진과 위, 남과 여, 음과 양, 친구와 친구, 부모와 형제 등, 이 모든 관계들은 애증愛憎이 겹치는 관계이며, 그 투쟁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관계라고 할 수가 있다. 머나 먼 고산영봉들은 천하의 절경일 수도 있지만, 그 풍경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면 그 모든 것이 싸움이 아닌 것이 없다. 풀과 풀의 싸움, 나무와 나무의 싸움, 짐승과 짐승들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고산영봉에서 내려다 보는 대전은 아름다운 도시일 수도 있지만, 그 풍경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면 그 모든 것이 싸움이 아닌 것이 없다. 날이면 날마다 그치지 않고 일어나는 증오, 질투, 시기,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사건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우리 인간들이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그 싸움의 연습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숨박꼭질, 말놀이, 퀴즈게임, 수수께끼, 전쟁놀이, 축구를 비롯한 운동 역시도 그 싸움의 연습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징기스칸, 줄리어스 시이저, 진시황, 호머, 셰익스피어, 니체, 마르크스, 보들레르, 랭보 역시도 천하의 명장들이며,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만이 아름답고 위대하며, 바로 그 문화적 영웅만이 이 세상을 더욱더 넓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는 낙천주의자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색인의 십계명’ 제5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나는 이 제5계를 쓰기 위해서 아뤼트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보들레르의 악의 꽃, 횔덜린의 빵과 포도주, 하종오의 반대쪽 천국, 반칠환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을 읽어보다가, 육친의 혈연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이고 있는 반칠환의 「지킴이의 노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킴이의 노래」는 그 수호신의 아름답고 거룩한 생애를 노래한 시이며, 만인들(시인의 가족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지킴이(수호신)를 신화적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해 내고 있는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지킴이는 한 가정의 수호신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 가정으로부터 버림을 받기까지의 사십여 년 간의 역사를 가장 탁월하고 아름답게 노래를 하고 있다. 거기에는 시인의 가족의 역사에 대한 위대한 통찰이 담겨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자기 자신의 이상국가를 창출해 냈던 플라톤처럼, 연애도 잊고, 가정도 꾸미지 않고, 오로지 시인의 가정(국가)만을 위해 헌신하다가, 그 만인들(시인의 가족, 또는 국민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우울하고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는 구렁이(수호신)에 대한 위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수호신화에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 이중적으로 겹쳐져 있다. 첫 번째는 시인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구렁이의 싸움이며, 두 번째는 만인들의 반대방향에서, 그 구렁이를 수호신으로 재창조해 놓고 있는 시인의 싸움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속물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만인들(시인의 가족들, 또는 어중이 떠중이들)에 불과하지만, 반칠환은 그 지킴이와 함께, 이처럼 문화의 수호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호신화는 한 가정의 내면의 이야기만이 아닌, 인류 전체의 이야기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장 아름다운 감동의 드라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집안의 “길흉화복을 당기고, 물리치는” 수호신의 역할을 담당했던 구렁이, “연애도 잊고” “가난했으나 스스로 꿈을 세울 줄” 알았던 시인의 가족들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구렁이, 그리고 마침내 “도시로 가자”라는 시인의 가족들의 말 한 마디에, “찬피동물의 속성도 잊어버린 듯 머릿 속이 뜨거워졌다”는 구렁이, 그처럼 너무나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시인의 가족들이 떠나자 “그해 가을, 겨울잠 준비도 잊고 가으내 굶었다”는 지킴이가 어떻게 한 가족사의 사적인 수호신으로만 머무를 수가 있겠으며, 또한 구체적인 역사를 토대로 하여 그 수호신화를 재창조해 놓고 있는 「지킴이의 노래」가 어떻게 한 개인의 업적일 수만이 있겠는가? 반칠환의 「지킴이의 노래」는 장중하고 울림이 큰 대서사시적인 감동의 드라마이며, 한국문학의 새로운 쾌거라고 나는 가장 자신 있고 힘 있게 말할 수가 있다. 「지킴이의 노래」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고 순결한 수호신의 노래이다. 구렁이의 ‘만인 대 일인의 싸움’과 시인의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 낳은 한국문학의 경사이며,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토크만 의사가 지킴이이고, 지킴이가 스토크만 의사이다. 헨리 입센이 반칠환이고, 반칠환이 헨리 입센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인들은 언어의 사제이며, 언어의 사제는 문화의 수호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탤버트 아, 너 존 탤버트,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에게 전술을 가르쳐 주고, 설사 너의 애비가 노령으로 수족도 못 쓰고 맥없이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더라도 탤버트의 이름이 너 안에 소생하기를 바라서였다. 허나 아, 이 무슨 나쁜 운성運星의 장난이냐! 네가 찾아든 곳은 죽음의 향연 속, 무서운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얘야, 나의 제일 빠른 말에 올라 타라. 그러면 단숨에 달려서 이곳을 빠져 나갈 길을 가르쳐 주겠다. 자, 지체말고, 빨리.
(......)
존 그럼 제가 머물러 있겠으니, 아버님이 도망치십시오. 아버님의 죽음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그러니 목숨을 소중히 하십시오.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저는 죽어도 괞찮습니다. 저 같은 걸 죽여봐야 프랑스군은 자랑도 될 수 없지만, 아버님이 죽으면 적의 자랑이 될 뿐 아니라 모든 희망이 죽음입니다. 여기서 도망치셔도 아버님의 지금까지의 명예가 더럽혀질 리 없지만, 아직 아무 공적도 없는 저의 경우는 큰 치욕이 됩니다. 아버님이 도망치시면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서일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제가 도망치면 겁이 나서 그런 거라고 틀림없이 모두 다 말할 것입니다. 첫 싸움에서 겁을 먹고 도망친대서야 제게는 영원히 싸움에 이겨 볼 가망은 없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부탁합니다. 저를 명예스럽게 죽게 해주십시오. 치욕을 짊어지고 살아 있기는 싫습니다.
----셰익스피어, 「헨리 6세」(셰익스피어 전집 5, 휘문출판사, 1971)에서
셰익스피어: 아직도 그의 언어와 문체 속에서, 마냥,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은 세계적인 대작가. 내가 더없이 초라해 지고 더없이 행복해 지는 위대한 스승.
----반경환, 「우정에 대하여」(행복의 깊이 3)에서
나는 반칠환의 「지킴이의 노래」를 몇 번이고 되풀이 읽으면서,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나는 반칠환이가 청동보다도 더 오래가는 문체로, 내가, 셰익스피어 앞에서 보다도 더없이 초라해 지고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적인 대서사시인으로 자라나기를 빌고, 또 빌어본다. 나는 아직도 세익스피어는 수많은 인물들이 겹쳐져 있는 통개인적인 인물이며, 영국인들이 그들의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제멋대로 조작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극과 비극, 그리고 사극들은 「헨리 6세」에서처럼, 한 개인의 창작품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장중하고 그 울림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바로, 그러면 너는 세계적인 대사상가, 또는 문화의 수호신이 될 것이다.
가장 찬란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이란 부처와 예수처럼, 혹은 호머와 셰익스피어처럼, 신적인 인물들에 의해서 펼쳐지며, 그 인식의 제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은 고급문화인으로 자라나게 된다. 고급문화인은 그 신적인 문화적 영웅들의 자식들이며, 그 영웅의 지혜에 의해서 양육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낙천주의자, 즉 문화적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죽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때마다 수없이 새롭게 탄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 이 싸움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밤하늘의 새로운 신성처럼 극히 드물다. 그는 전형적으로 지혜와 용기와 성실 등의 삼박자를 다 갖춘 인물이며, 위험을 기피하기보다는 그 위험의 강도를 더욱더 가중시켜 나가는 인간이다. 만인의 반대 방향에서, 그 만인들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집단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인간,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이지만, 그 정치적 색채가 전혀 풍기지 않는 인간, 저 천박하고 어리석은 만인(민중)들이 사소한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언제나 전체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수천 년의 소나무처럼, 늘 푸르고 장중한 인간, 분명한 사상과 그 목적 아래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심판하고 채찍질 할 줄 아는 인간, 자기 자신의 조국이 위험에 빠지고 더 큰 시련에 빠져 있을 때에도 오로지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념과 그 목표를 향하여 정진하고 또 정진하면서, 마침내 자기 자신의 조국과 인류 전체를 구해내는 인간, 자그만 동정심과 연민에 얽매여서 저 천박한 사제들처럼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말소시켜 버리지 않는 인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통해서 더 큰 삶의 활력을 느끼는 인간----.
아아, ‘만인 대 일인의 싸움’만이 아름답고 훌륭하다. 아아, 그대들이여!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그러면 그대들을 향하여 그 모든 사람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게 될 것이다.
-----반경환의 {행복의 깊이} 제4권 제3장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