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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나는 부활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 병고치심은 예수님의 체휼하심 (마 8:17)
예수님은 이 땅을 사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특별히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우리는 너무 많이 읽고 들어서 새삼 새롭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이기 때문에 당연! 기적과 병 고치시는 것은 당연히 행하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은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원래 이사야 53장 4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 대단히 위대한 일입니다. 역시 예수님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 질병, 질고와 슬픔을 짊어지신 것이라고 합니다.
2. 예수님께서 죽음을 감수하시면서 나사로에게 가심
오늘 본문이 다루는 사건에서 우리는 주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기적에 주목합니다.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엄청난 일들인데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 내십니다. 더 큰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는 자들은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나사로의 소식을 접한 것을 11장 3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세 남매는 예루살렘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베다니에 사는 꽤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든 것을 멀리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서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 쪽으로 가시기전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유대인들과 대치하였습니다. 10장 33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돌로 쳐서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합니다. 이 모든 일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쪽으로 내려가 계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 매우 근접한 곳이기 때문에 베다니로 가신다는 것은 다시 돌로 쳐 죽이려는 위험에 자신을 내모시는 것이었습니다.
11장 8절에 제자들은 바로 이런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1장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베다니로 가는 길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길에서 나사로가 죽은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계속 베다니를 향하십니다. 이 때 다시 한번 도마가 16절에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엄청난 사건, 그 결과만을 주목하지만 사실 예수님에게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길은 사실상 죽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역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난 후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11장 46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보통 죽은 자를 살려낸 사람에게는 엄청난 명성과 인기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53절에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믿을까봐 아니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을 걱정하면서 53절에 이 날부터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겹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직면하면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음에도 여전히 죽이고자 하는 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 같은 일의 영웅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예수님은 그가 살린 나사로가 경험했던 사나흘이나 되는 기간 동안 죽음에 머물러 있는 상황까지 내몰리셨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죽은 자를 살릴 정도의 기적중의 기적을 행했다면 그 어떤 권세자 들보다 엄청난 대우를,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높여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린 분이 죽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려고 베다니로 가시는 길은 사실상 죽음을 향해 가시는 길이 되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능력으로 일으키신 분이 바로 그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짊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가진 감정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에게 말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의 교감을 보여주셨습니다. 11장 33절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마리아의 슬픔, 유대인들의 슬픔에 대해서 깊은 교감을 가지십니다. 이는 모든 인류와 그들이 처한 죄, 비참,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가진 깊은 하나 되심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는 능력을 행하신 것이 그의 큰 권능의 시위가 아니라 우리의 질고, 병, 슬픔을 우리와 똑같이 지심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먼저 죽은 나사로와 하나처럼 죽으시는 것, 모든 죄에 처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의 자리에 서시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나사로와 하나가 되시고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자들의 슬픔과 비참에 동참하십니다. 죄는 없으시지만 죽으셔서 죄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4. 죽음에서 하나됨, 부활의 보증
예수님은 죽으셔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자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까지 죄로 인해 죽어야 하는 모든 자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주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죽음에 두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렸던 행악자중 하나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누가복음 23:39) 고 외쳤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던 분이 왜 자신은 살리지 못하는가? 왜 구원하지 못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으신 것에서 모든 소망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사흘후에 참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아무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 나사로는 이제 죽은 것이라고 좌절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살린 똑같은 일이 성부 하나님께서 죽은 자신의 아들을 살리는 일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을 때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의 부활 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믿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분의 죽음에서 이미 우리와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부활도 우리와 하나 되신 분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분은 죽으심에서 나사로의 죽음, 우리의 죽음이 되셨습니다. 똑같이 그 분은 부활에서 나사로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 되십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가셨고 나사로를 살리셨음에도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나사로의 죽음과 하나가 되셨고 죽음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가 되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사로가 죽은 자에서 살아난 것처럼 우리도 죽어도 살 것이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II. "나는 생명이요“
1. 예수님의 지체하심: 요11:6, 17
11장 5절 예수님은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11장 6절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일부러 서둘러 가시지 않으시고 지체합니다.
11장 17절 그리고 마침내 죽고 나흘이 지난 후에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리아가 있는 나사로의 초상집에 도착하셨습니다.
나흘이 지났다는 것은 3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날 정도로 완전하게 죽은 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 병들었을 때, 죽은 직후에 오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날 정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왜! 라는 합리적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렇게 일부러 지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사랑하신 자들의 소망처럼 병들었을 때 전속력으로 오셔서 왜 고쳐주시지 않고 일부러 지체하셨을까요?
이렇게 하신 것에는 나사로를 완전한 죽음에서 살리시는 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단지 나사로에만 있지 않고 마르다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2. 마르다에게 참된 믿음을 주시려는 예수님
분명히 마르다는 살아있는 자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21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오셨다면 분명히 살리실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슬픔을 위로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2절에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마르다가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21절의 말과 22절의 말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39절에 “주여 죽음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한 말에서 보아도 마르다는 나사로를 살릴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한 말도 마르다는 지난 며칠간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일반적인 조문의 인사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24절에 보면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3. 나는 생명이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는 생명이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부활이다”는 것은 25절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이다”라는 말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와 연결됩니다.
그렇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되었습니다. 시신에서 냄새가 날 정도였습니다. 마르다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이 둘 사이에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까지 몰랐습니다. 심지어 27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는 너무나 찬란하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지만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분임은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역은 사실 마르다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다고 믿고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너 자신이 사실 죽은 자와 다름없다. 살아서 믿어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복음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마르다가 하고 있는 아름다운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가 진실되고 참되며 분명한 고백으로 이끌기 위해서 늦게 도착하셨고 병자 나사로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부활일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생명 자체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4. 살아있으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우리는 마르다보다 나은 처지에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마르다입니다.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를 신뢰하며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는 주님을 모릅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죽었다고 여기시면서 생명 주시기 위해서 여기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7:3에는 이 영생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공예배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듣고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 분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속 주님이 오셔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우리를 더 풍성하게 가르쳐 주시면서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들이 주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도 완전 주님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고백이 완전히 거짓된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좀 더 풍요롭게 분명한 주님에 대한 고백과 지식으로 더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되고 채워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때로 우리 생각대로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시간이 지체되고 도무지 안될 것 같은 현실이 닥쳐 옵니까? 시간, 현실을 나의 어젠다에 맞추지 말고 예수님의 일정표에 맞추어 봅시다. 예수님은 지체하고 지체하시면서 나흘 후에야
도착하셨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이를 통해 마르다가 살아서 그 분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옆에 있었던 마리아도 함께 이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11장 2절에서 미리 말하고 있듯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을 보지 못하던 마리아만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믿음을 증거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의 일에 우리는 주목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극적인 사건이, 극적인 역전이 일어나길 꿈꿀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이 지체될 때, 예상대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함께 하며 그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일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부활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참된 믿음을 가진 생명 속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마르다를 위해서 이 많은 일들을 보여주시고 섬세하게 말씀해 주셨던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섬세하고 따뜻하게 가르쳐 주시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처럼, 아직은 부족한 고백을 가진 우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은혜를 누리면서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들, 그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그 생명을 즐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