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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창간 정신을 계승하며
『한국 현대시』는 무잡한 시지(詩誌)들의 범람 속에 뛰어들어 한국현대시를 새롭게 건설한다는 목표로 2007년 6월 30일 반 연간지로 창간된 협회의 기관지입니다. 따라서 전통을 지키면서도 21세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시론(詩論)의 모색과 개척에 힘을 쏟는 것이『한국 현대시』의 존재 이유이며 창간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의 상투적이며 관념적 표현으로부터 벗어나서 현대시다운 현대시를 써야 한다는 현대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써 그 밑바탕에는 언어의 예술적 기능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그것을 시로 구현해 보자는 시인들의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현대시가 메시지의 전달, 감정의 독백(獨白)과 분출에 만족한다면 시중에 범람하는 유행가사와 시의 차이를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목적에 접근하기 위해서『한국 현대시』는 전통적인 방법의 시들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현대시의 실험성을 존중하고, 난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양한 창작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전통적 방법론을 존중하는 회원들도 현대시에서 ‘정서와 사물과 언어의 재인식’, ‘새로운 표현 문제’에 대해 시인의 기본적인 자세에 부합하는 판단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협회의 명칭에 붙어 있는 ‘현대’라는 단어가 단순한 수식적인 단어가 아니고, 회원들에게 현대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현대시』4호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창작의 가치를 인식하고 적극 호응해 주신 회원들의 애정 어린 참여와 협조가 이루어낸 결과물입니다. 나는 창간 정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발간사를 줄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건필과 행운을 빕니다.
2012년 6월 30일
한국 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심상운
특집 : 박재릉(朴栽陵)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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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에서 인간의 사후(死後)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생생한 현실로 보여주는 박재릉의 시는 무속시(귀신시)로서 독보적 위치에 있다. 그는 이성(理性)을 넘어선 무당(巫堂)의 의식(意識)으로 귀(鬼)의 세계를 포착하고 있으며 그것을 동영상화(動映像化) 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이러한 무의식(巫意識)의 표출은 이른바 무의식(無意識)에서 생긴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쓰는 초현실주의 시의 기법인 오토마티즘(automatism 자동기술법)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박재릉의 무속시(귀신시)는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속에 잠재된 원천적인 욕망(慾望)으로부터 나온 포에지(poesy)라는 것과 우리민족의 토속적인 샤머니즘(shamanism) 세계의 시적형상화란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시집『가야의 혼』(2011, 2 시문학사)으로 2012년 제 13회 <청마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재릉 시인의 시세계를 특집으로 조명(照明)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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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선정한 대표시 7편
지금 잠들면
지금 잠들면 무서워.
지금 꿈 속은 평원동 근철거야.
댕기 딴 시악시들이 불켜고 나올 거야.
아직 안 간, 머언 오매가 머리풀고 웃고 있구나.
오매한테 붙은 그 놈이
이젠 오매한테서 뜨려고 해.
지금 잠들면 무서워.
지금 잠들면 평원동은
온통 음산한 달빛일거야.
뜨락에 선 대추나무 하나가
넌지시 이켠 밖으로 손을 뻗어.....
지금 잠들면 무서워.
꿈속에선 언제나 난 애기처럼 어려
천년 전에 죽은 애귀신에 씨운 듯
발버둥치는 애기 울음으로 어려.
뒷 울 밑으로 선 서너 개의 장신
돌담 잎새 사이사이로 오락가락하는 머리카락.
히히 덤빌거야. 입맞추러 덤빌거야.
지금 잠들면 무서워.
지금 잠들면 무서워.
* 오매: 강원도 벽촌 사투리로 처녀를 뜻함.
행진곡行進曲
미칠라.
저 나무 위에 애기 셋이
나를 보고 웃지 않느냐.
미칠라.
간밤에 뒤따르던
돌다리 위의 호롱불 하나
울안에 파란 눈으로 살아 있지 않느냐.
미칠라.
영산동 갯마을에 구복이가 신음하는
신음 소리가 서녘 바람에
피흘려 오고 있지 않느냐.
꿈꾸면 또 빨간, 빨간 신방 하나
새로이 시왕풀
영신네와 금순네와
어제 바로 갓 묻힌 점이가 있지 않느냐.
허공 위로 바람 위로 허공 위로 바람 위로
뜬 눈 하나 뜬 눈 하나
흩어진 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
미칠라.미칠라.
소리 없이 이 몸을
몰래 맡아 내갈 자 없을라.
징그럽기 징그럽기 만하던 남사당패 하나 없을라.
미칠라.
어느 밖으로 고요히
이 몸을 떠내다 말릴
어느 외딴 별 하나 없을라.
미칠라. 미칠라. 미칠라. 미칠라.
술시戌時의 시
희야, 같이 가자.
빨간 호롱불 들고
돌다리를 건너는 희야.
컴컴한 여흥산 묘밭을 휘휘 돌아
어지러이 굽은 소나무 사이사이를 휘휘 돌아
눈부신 네 꽃집 눈부신 네 곳으로 가자.
희야, 언제 빨리 네 나를 먹었니.
무등산 별밭을 헤메던 꿈속의 나를
어떤 오색깔 영롱히 묻은
열손가락 끝으로 따끔따끔 찔렀니.
지금은 환한 한낮의 생시라도
네 그림자 내 그림자 나란히 나란히
살얼음 같은 볕 속을 헛디디지 않게
네 발자국 내 발자국 미친 듯이 맞춰 찾아
검은 수렁이건 숲이건 뚝이건
눈감고 감아도 네가 주는 쪽빛길.......
네 가는 네 꽃집 네 곳이 어디냐.
달려라. 희야, 달려라.
쇤네 울안이냐,
돌이네 창 곁이냐.
건너온 여흥산 화산밭에 서 있던
일하는 시악시를 너는 보았지,
수렛마을 갯강에 빨래하던 시악시를
히히 네 몰래 나는 먹었지. 희야, 달려라, 달려라.
네 가는 네 꽃집 네 곳이 어디냐.
계시癸時의 시
새벽 1시
네가 올 시각이다.
하얀 달빛 능선 위에
아지랑이처럼 가벼이
흰옷 입은 여인 하나.
흰옷 입은 여인 하나.
뿌우연 문설주 곁에
허연 문쌀 하나.
허연 문쌀 하나.
내 설익은 어렴풋한 꿈사이
이 안과 그 밖이 깨지지 않게
어렴풋한 사이로
바람 사이의 바람 소리로 깨지지 않게 너를 불러
개천 위 빨간 호롱 불 곁을 지나
쉿쉿 성황당 근처의 쉿쉿 소리를 지나
순네 팔순 먹은 늙은 할멈이
저승이라고 바장이고 섰는
고령제 앞이마를 스쳐서 스쳐서
네 둔갑 열두번 재주 넘어도
시왕을 풀 수 없어
시왕을 풀 수 없어
네 눈물 열두 번 딴 세상을 굴려도
촛불을 켤 수 없어
촛불을 켤 수 없어
차령산상 도솔천의 정수리를 치달아 와도
그 무릎 암자 아래 물 떠 놓고
물 떠 놓고
오늘도 또
촛불을 켤 수 없어, 촛불을 켤 수 없어
애타선, 애타선, 애 타선, 애타선,
...............
새벽 3시
닭이 운다.
*시왕 풀이: 이승에 맺힌 한을 풀어 주는 굿
무두귀상난조無頭鬼像亂調
목매단 네 몸
비늘 갑옷 어깨 위로
춤추는 네 각시 무동 타고
여드레 속앓이 앓는 바람과
백발 백발 백발 센
십이궁十二宮 할매들이 무동 타고.
그 위로 아득히
네 상투 움켜쥔
저승 귀신과
그 위로 억수로 치는
저승 무당 굿하는
소나기 소리와
소나기 속에
번쩍번쩍 눈 뜨는
네 눈 번갯불이 무동 타고.
*무두귀(無頭鬼): 머리가 없는 귀신
내 눈 뜨는 날
내 미치는 날
울산 사당집 각시 눈에
내 모습이 보이는 날
내 몸 썩는 냄새 내 아는 날.
울안 까마귀 눈에
내 죽은 날이 보이는 날
내 기침 먹는 허공 위 서낭집.
서낭집 후살이하는
푸른 손각씨.
열두 나날을 어지러이 헛보고 사는
내 모습을 깨워내려는
열두 신장대로 오는
대들보 위의 성주와
천둥, 천둥치는 구천 보살과.......
내 냄새 허우적거리는 칠흑 그믐 속
흔들리는 흔들리는
내 몸짓 다하는 날이
내 눈 뜨는 날.
*손각씨(孫閣氏): 처녀귀신
꿈꿀 땐
꿈꿀 땐 다홍치마 입고
꿈속 연기 오르는 갯강으로 가고
꿈꿀 땐 젖은 속옷
삼단 머리 헝크린 채 나오고.
꿈꿀 땐 칠흑 어둠 그믐 한밤을 이고 가고
그믐밤 마늘 밭에서
까마귀 울음 먹다
돌아 올 땐 이빨 가는
이빨 가는 소리만 오고.
동東에서 번개가 번쩍할 땐
남南쪽 꿈으로 가고
서西에서 번개가 번쩍할 땐
북北쪽 꿈으로 가고.
백날 번갯불이 머문 곳에서
천둥 먹고 발가 벗고
웅크리고 죽은
더벅머리 숫총각
앙가슴을 껴안고
보름날을 키워선
둥근 보름달을 안고 나오고
나의 무속시 이론(巫俗詩 理論)
박 재 릉
1.귀신과 이미지
나의 무속시가 공감을 일으킨다면 귀신과 귀(鬼)적 존재가 인간 누구에게도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인간이 사멸하면 정신적 세계(무의식의 세계)에 잔재한 한(恨)의 요소가 남는다. 이 귀적 존재가 동하면 귀신이 된다. 이 귀적 존재는 생존한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가령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헛소리, 잠꼬대, 취중언동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이성이 허약하거나 마비되었을 때 무의식의 관념들이 마구 나오는 것들이다. 즉 무의식의 단자(單子)가 이성이란 제약을 벗어나 임의적으로 발아되어 나오는 것들이다. 이 단자들은 곧 인간의 한(恨)인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한 즉 귀적 존재는 남는다. 이같이 귀적 관념이 무의식의 단자와 일치하므로 귀신이란 곧 우리의 내적 세계와 일치한다. 우리의 내적 세계와 귀신의 세계는 무엇이 다른가. 귀신의 세계는 이성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의 무속과 민속학이 그 해답을 보이고 있다.
나는 귀신을 직접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항간에 산재한 무속과 민속을 바탕으로 있을 법한 가공의 진실로써 말할 수 있고 또한 쓸 수도 있었다. 곧 허구로써 말이다. 이 글은 1995년에 발표한 것으로 그 이전에 쓴 「巫俗詩考(현대문학,1975년 1월호)」의 속편이다. 그 당시까지 나왔던 나의 시집『밤과 蓮花와 上院寺』(1972년간)와 『亡父祭』 (1992년 발간)의 시를 바탕으로 무의식학적인 이론의 해설을 붙인 것이다.
① 귀신 침입시의 전율
이미지의 출발은 귀신이 인간에게 접근하기 직전, 내적 감성이 외계에 대한 영적(靈的) 인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귀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 사이― 이때는 인간 심리에 이상 야릇한 매료와 더불어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 전율과 더불어 내면엔 리듬이 생긴다. 귀신 침입 직전의 이 전율적 예감에서 생긴 리듬을 받아쓰면 시적 이미지가 태동하는 것이다. 이 리듬은 나의 무속시의 전신(全身)이라 할 수 있으며 리듬에 호흡을 맞출 수 있다면 곧 나의 무속시를 거의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잠들면 무서워/지금 꿈속은 평원동 근철거야./ 댕기 딴 시악시들이 / 불켜들고 나올거야. ―「지금 잠들면」의 일부
평원동은 원주시에 있는 지명으로 나의 무속시의 산실이 되는 곳이다. 꿈속에 있을 처녀 귀신에 대한 침입 예감이 전율로 다가오고 있다.
미칠라./ 저 나무 위에 애기 셋이/ 나를 보고 웃지 않느냐.
―「행진곡」의 일부
나무위에서 동자보살(애기귀신)인 애기 셋이 인간에게 침입하기 위해 웃는 장면이다. 동자보살의 웃는 전율적 모습이 나무 위에 있다.
새벽 1시/ 네가 올 시각이다./ 하얀 달빛 능선위에/ 아지랑이처럼 가벼이/ 흰 옷 입은 여인 하나./ 흰 옷 입은 여인 하나. ―「계시(癸時)의 시」의 일부
새벽 1시. 하얗게 소복한 여자귀신이 인간에게 침입하기 직전의 전율이다. 소복한 여귀는 미명귀이나, 달리 보는 견해도 있다.
어둠을 둘러쓰고/우리 애기를 먹으로 온/ 남산댁 그믐에 떠난 내 소실의 고운 이모./ 소복한 하얀 눈초리. ―「밀야」의 일부
소복한 하얀 눈초리의 여자귀신이 내 애기를 먹으러 침입해 오기 직전이다. 이모는 미명귀로 하얀 눈초리의 전율적 모습이다.
② 샤먼의 신장(神將)대
샤먼이 신장대를 잡고 집념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샤먼의 지성이 내적 무의식을 정돈 파악하는 상태(정신 집중하여 살피는 상태)라 볼 수 있다.무의식 내에 있는 귀신(자기와 공생하는 곧 자신이 믿는 신의 대상: 무당신 등)의 단자만을 찾는 상태이다. 여러 무의식 단자들 중 믿는 대상의 귀신과 통하게 될 때 신장대는 떨리기 시작한다. 필요한 사항을 물을 때, 그 단자는 떨림으로 답변한다. 떨림의 내용을 샤먼은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고, 떨림 자체를 샤먼의 지각이 무엇이라고 감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떨림 자체의 관념보다는 떨림이 드러나는 샤먼과 신장대의 외적 객관 사항이 이미지로 효과를 드러낼 수가 있다.
네 시왕가르는 신대 위에 올라 앉아선/ 상문상 받고 눈물잔 받고
―「살풀이」의 일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시왕가름)무당의 신장대에 실린 원귀의 살풀이(액을 풀어 주는 굿)의 모습. 원귀가 신장대에 실려 무당이 차려 놓은 제물상(상문상)을 받고 있다.
③ 정신분열증의 형상
이성이 감성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미친 사람이라 한다, 미친 사람의 언어 그 자체는 무의식의 토로로 귀신 자체만의 술회와 거의 대동소이하나 그보다는 그를 보는 외부적 형상이 시적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아직 안 간 먼 오매가 / 머리풀고 웃는구나./오매한테 붙은 그놈이/이젠 오매한테서 뜨려고 해 ―「지금 잠들면」의 일부
머리풀고 웃는 오매(강원도 처녀)는 몽달귀(남자귀신: 그놈)가 실린 미친 처녀이다. 머리 풀고 웃는 외부의 모습이 이미지로 된다.
이레 치레 고운 이승을 마지막 남겨두고/ 이켠보다는 저켠을 더욱 길들이느라고/ 에미는 저승 골목을 동냥을 구하러/ 하루에도 수십 번 드나들고/그러다가 저승이 멀 땐/ 이 산좌(山座) 툇마루를 길가처럼 들러 ―「삭망(朔望)」의 일부
이승 저승을 오락가락하는 에미는 미친 상태이다.
병든 애비를 보아라./ 저쪽 세상 헛보다/노오랗게 저쪽으로 돌아선/한많은 더벅머리 한날도 늙지 않고/한세상 저쪽으로 눈맞추었던/칠흑머리 댕기딴 푸른 손각씨(孫閣氏).
―「망부제(亡父祭) 서(序)」의 일부
애비의 병은 정신분열증. 처녀 귀신 곧 손각씨에게 실려 있는 미친 애비의 상태이다. 인간에게 침입한 귀신은 그렇게 단시일에 나가지 않는다. 귀신이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아간 다음의 인간 상황은 침입 이전 과거의 백치(白痴) 아니면 ������죽음������두 가지 경우가 허다하다. 전자의 경우 인간 내적 감성과의 교합으로 존재하던 귀신이 감성의 극한적 소멸로 이 이상 무용한 인간에게서 떠나버릴 때, 인간은 허탈감 내지는 모든 활동이 원천으로 회귀한 백치 상태가 된다. 이때는 이미 미쳤을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미치기 이전 아니면, 보다 먼 유아적 상태로도 돌입한다. 지능도 그에 비례한다. 원상 복구된 백치 상태의 모습이 시의 이미지로 규명될 어떤 가치성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후자의 경우가 이미지로서의 만족도와 시적 생명력을 살릴 수 있었다.
접힌 실눈으로/저무는 이승빛을 깜짝깜짝 붙드는/ 노오랗게 병든 애비를 보아라.
―「망부제(亡父祭) 서(序)」의 일부
후자의 경우인 죽음의 말로이다.
④ 굿
샤먼이 무의식적으로 귀신과의 관념 상통을 통해(②의 샤먼의 신장대 참조) 어떤 문제점을 풀어주는 행위가 굿이다. 굿의 주술 내용보다는 굿의 외적 상황의 묘사가 무속적 이미지로 가치가 있다.
이달 저- 나를 키운/평원동 아득한 아지랑이 밑에선/소란소란 시왕굿으로 무당들이 들끓어 ―「삭망(朔望)」의 일부
굿의 내용보다는 굿의 외형을 나타낸 것이다. 임동권(任東權), 김태권(金泰坤)의 굿의 종류를 열거한 내용은 그 수가 상당하다. 그 수의 종류에 따른 특색 있는 굿의 외형도 이미지가 가능할 것이다.
네 시왕가르는 신대 위에 올라앉아선/상문상 받고 눈물잔 받고 ―「살풀이」의 일부
원귀의 한을 풀어 주는 시왕굿이다. 시왕굿은 시왕가름(한을 풀어 줌)해 주는 굿이다.
⑤ 허상(虛像)괴 실상(實像)
한 사람이 밤에 길을 가는데 키 큰 도깨비가 희롱하므로 큰나무에 묶어 놓고 다음날 아침에 가 보았더니, 도리깨장치(농기구) 하나가 묶여 있더라는 것. 밤에 본 그것은 허상이고 아침에 본 그것이 실상이다. 도리깨장치를 도깨비로 본 것은 그 사람 자신의 감성적 투시에 의한 것으로 시적 허구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가령 한낮이라도 으슥한 곳에 키큰 나무가 키큰 사람으로 빗보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빗본다는 자체는 자신의 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감성의 시야로 바라본 경우이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허상이 우리 민속이나 무속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며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은 허상으로만 존재하며 허상의 이미지는 허구적 귀신의 이미지임은 부인 할 수 없다. 이 허상에는 실상이 허상화 되는 경우와 전혀 허상 자체만으로 생성된 경우가 민속학 상으로 나타나 있다. 필자가 시의 이미지로 실험한 것은 거의 전자의 경우다.
등나무 아래로 네 그림자가/흰 여인으로 빗보이게 서선/등나무 허리통에다 빨간 띠를 두르고/ 돌을 하나씩 쌓곤 절을 하고 있었다. ―「보련사(寶蓮寺)」의 일부
보련사는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사찰로, 양생이 만난 여귀신의 대상(大祥)을 치르던 곳. 윗 구절은 여귀신이 양생과의 결혼을 발원하는 내용을 픽션화한 것.
쪼개진 하늘새로 무엇이 뵈는가/ 니이체의 머리칼과/ 보카치오의 우레와
―「잔적(殘跡)」의 일부
천둥치는 하늘 사이로 보이는 니이체와 보카치오는 일종의 귀신적 허상이다.
2. 귀신과 꿈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란 말은 이미 상식적인 말이다. 잠들었을 때 이성의 억압이 해이된 사이에 무의식의 내용이 형상화되어 보이는 것이 꿈인 것이다. 꿈에 대한 해몽으로 여러 현실들을 점(占)치는 것은 무의식적 사항을 지각이 알아내는 샤먼의 점술과 대동소이하다. 흔히들 꿈에 여인이 보이거나, 개(犬)가 보이면 악귀(惡鬼)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좁은 의미로 한정된 것이 아닌가 한다.
① 귀신의 꿈과의 내왕(來往)
여인이나 개가 보이는 꿈은 상식적으로 풀이되는 귀신의 내왕이지만, 귀신이 인간을 침범하는 때를 꿈으로 택했다면 다양한 상황으로 벌어질 것이다. 귀신이 꿈으로 침범할 때는 인간이 원하는 상태와 일치하는 모습으로 온다. 이를테면 누구를 그리워하는 한 남성의 꿈엔 그 남성이 그리는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침입한다. 꿈속에서 그 남성이 여인을 반겨서 수용하면 귀신(여귀)은 인간에게 침입한 것이다.
시방 그녀는 내 잠자리에다/ 빨간 꿈을 몇 개 묻어 두고 / 밤불이 달아 오르면/시왕 각시 댕기 풀고 호롱불 들고/핫슈 같은 입술을 달큰히 맞추러 오리./ ―「밀야」의 일부
남성의 꿈에 여귀가 침입하는 상태다. 남성의 꿈이 매혹적인 여성(여귀)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② 귀신의 둔갑
한 여성 귀신이 한 남성의 꿈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그 남성이 희구하는 적절한 대상으로 둔갑한다. 귀신의 무형(無形)이 다양한 유형(有形)으로 둔갑하는 상태라 볼 수 있다. 이성적 상대, 혈육의 모습, 친한 지인의 모습 등으로 유형화(有形化)한다.
그 산상을 넘으면 지기(地氣)를 묻은 묘밭들이 돋아나/ 내 오랜 옛적 이복(異腹)으로 같이 살던/ 순네는 소복한 객귀/내 이모의 고운 모습으로 건너 오기도 하고./ ―「삭망」의 일부
순네의 객귀는 내 구미에 맞는 내가 좋아하는 이모의 모습으로 둔갑해 오기도 한다.
네 각시 영산 대밭에서 눈맞추었던/ 생시적 서방이/둔갑하고 있을 때다./ ―「닭이 울 때다」의 일부
각시의 꿈에 서방으로 귀신(男鬼)이 둔갑하고 있다.
③ 귀신과의 공생(共生)
침입한 귀신이 인간의 감성과의 공생이 이룩되었을 때, 꿈속의 상황은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로 드러날 수 있다. 꿈은 인간과 귀신의 유희가 벌어지는 이미지의 제시장이 된다.
꿈꿀 땐 다홍치마 입고/ 갯강에 오르는 연기 곁으로 가고/ 나올 땐 젖은 속옷/삼단 머리 헝크린 채 나오고/(중략)/백날 번갯불이 머문 곳으로/천둥 먹고 발가벗고/웅크리고 죽은/ 들킨 더벅머리/앙가슴을 껴안고선/ ―「꿈꿀 땐」의 일부
침입한 귀신과 인간이 공생하는 이미지이다. 여성이 꿈에 남성 귀신과 교감하는 내용이다.
④ 현실과 꿈
인간과 인간의 내적 감성끼리의 교합은 귀신과 귀신의 교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감성이 인간인 이상, 정화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이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끼리의 갈등의식은 귀신과 귀신 자체의 것과 별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저주스런 일을 저질렀다면, 복수에 타는 원한의 심령은 때에 따라 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감성의 내왕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갈등은 원귀적 속성과 다를 바 없이 꿈에 나타나질 것이다. 가령 어떤 남자가 한 여성을 강간하였다면 그 여성의 심령은 원귀자체와 같기 때문에 꿈으로 그 남성과의 교합을 위해(또는 복수하기 위해) 들어갈 것이다.
저 아가씨 빈 그림자 색동저고리 입고 / 새치름히 가는 척하는 저 아가씨./돌아볼 땐 돌아가고 돌아갈 땐 돌아보고/해종일 골목골목 기웃거리다간/날 저물면 허겁지겁 솟을대문 두드리고/사방맞아 떨던 몸을/ 꿈으로 찾아들고./ ―「저 아가씨」의 일부
저 아가씨������는 대낮에 강간당한 한 아가씨, 감성의 허상적 반영인 귀신이다. 그 귀신은 낭군을 찾아 꿈으로 들어간다. 강간당한 여성의 원한이 귀신이 된 것이다. 이상은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꿈으로, 귀신과 같은 상태가 되어 드러나는 경우이지만, 반대로 꿈의 귀신이 현실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도 흥미롭게 여겨진다. 아마도 현실의 적격자인 그 누구에게 반영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령 한 남성의 마음속에 손각씨(처녀 귀신)가 침입해 들어 있다고 할 때, 그 손각씨는 생시엔 어느 K라는 여성에게 씌워 있어서, 그 남성은 이유도 없이 그 K여성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게 된다. 이때 K여성에게 오발적 애정의 행위가 이 남성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는 우리 실생활에서도 왕왕 볼 수 있는 실태가 아닌가.
3. 무속과 불교
우리나라의 불교는 한국적 원시 종교와 결탁하면서 정착했다. 지금도 사찰에는 칠성당, 산신당이 있다. 임동권은 그의������한국민속학논고������에서 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하고 있다. 곧 토착적인 본래의 우리 무속에 불교가 정착하기 위해선 무속과 결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건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속에도 불교가 침투되어 있다는 말도 당연히 성립된다. 샤먼들이 외는 주술 등에는 불교의 <천수경(千手經)> <반야심경(般若心經)> 등의 구절이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등의 보살을 외는 경우도 여실히 볼 수 있는 점이다. 이상은 시대적 환경의 여건에 의한 것이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보면 불교와 무속의 관계는 밀접한 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시습의 소설<남염부주지(南炎部洲志)>에서 박생이 염부주에 끌려갔던 이야기는 불교와 귀신의 혼합 사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박생이 염라대왕에게까지 간 자체는 귀신적 의존이며,<만복사저포기>에서 불전에 기도드리는 처녀 귀신의 사항도 같은 것이다.
귀신은 시간적 공간적 구애성이 없기 때문에 무당은 그를 이용해 점술을 치는 것이다. 불교의 불(佛)은 인간적 모든 욕망을 완전히 해탈한, 환언하면 인간의 감성이 갖는 귀(鬼)적 존재를 완전히 없앤 상태에서의 현상을 의미한다. 불(佛)의 경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靜)적인 반면에 귀신의 경우는 동(動)적이다. 귀신의 동적인 것을 불교의 정(靜)적인 바닥이 안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형체인 것이다.
한밤 오랜 밤 더딘 밤/ 징그럽게 너와 나는 엎치락뒤치락했고/ 한밤 오랜 밤 더딘 밤을
그러다가 너는 지쳐/저만큼 떨어져 누웠고/(중략)/지금 온통 밖으론/저승의 한낮이 들끓어 / ―「삼계무량(三界無量)」의 일부
삼세(삼계)의 바닥은 불교의 바탕이요, 내왕하는 너와 나는 동(動)적인 귀신이다.
전생(前生) 그쪽 제상 위에선/ 억만 조객의 곡소리가 새는 바람 사이로/소나기처럼 이쪽으로 들려오는 듯 들려오고/그쪽에 바로 그 시(時)에 죽은 혼이/이승에선 애기 혼으로 태어나야 할 것이/새로 온 수줍은 옆집 연순네 각시처럼/ 멍청히 그쪽에서 발가벗었던/ 벗었던 혼령채로 저 뜰위에 다가서 있고/ ―「고령(高靈) 대주(大主) 일품(一品)의 터에서」의 일부
전생의 저승은 이승이다. 이승에 온 것은 귀신이 아니라, 혼령이다. 귀(鬼)것이 있는 혼(魂)은 혼백(魂魄)이고, 귀(鬼)것이 없는 혼(魂)은 혼령(魂靈)이다. 전생에서 정화되어 이승의 혼령으로 승격한 것이다. 즉 발가벗은 혼령은 정화되어온 혼이다.
내 치성으로/ 전생의 빗소리 듣는 법을 하나 배워 가지고/ 오동나무 아래로 달빛에서 뿌우연히 그 소릴 들어 보았더니/ 내 일찍 이승으로 왔기 때문에/ 그 쪽에선 상사, 상사병에/ 시름하는 연이가 머리풀고 미쳐선/ 비맞으며 우는 울음이 그 빗소리 속에 섞여 있었다.
―「치성」의 일부
연이는 이승으로 혼령이 돼 올 수 없으므로 전생의 귀신의 울음을 이승으로 보낸다. 혼령이 돼 이승으로 올 수 없는 것은 한(恨)의 내용 때문이다. 이상은 주로 불교의 삼세를 내왕하는 경우들이다. 귀신이 불(佛)에 대해 자신의 한을 기원한다고 보면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서 처녀 귀신이 불전에 기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動)적 존재의 귀신은 전적인 불(佛)에 의존하고 있음이 확연해질 것이다.결국은 귀신을 움직이는 원리는 불(佛)의 바탕이란 것이다.
그래 우리는 처지가 곤란해질 때/ 이 외부에선 산란히 깨지지 맙시다./ 마음속 반야심경/ 어느 한 구절이라도/ 빠뜨리면 큰일입니다. /―「귀명례(歸命禮)」의 일부
귀명례(歸命禮)-불교 용어로 불법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원래의 말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이다. 이는 귀신의 바탕이 불(佛)이란 뜻이다.
4. 귀신의 색채관(色彩觀)과 체취관(體臭觀)
귀신이 좋아하는 색채는 흑(黑)과 백(白)이다. 방위로 따지면 북(北)과 서(西)이다. 귀신 자체는 색채가 없으나 그가 나타나는 곳을 볼 수 있는 세계는 북쪽의 흑색과 서쪽의 백색이다.
검은 수렁 위 물소리와 수선거리는/ 인복이네 누이 죽은 시악시 하나/생시인 양 물소리처럼 깨 있는 한밤이다./ ―「축시(丑時)의 시」의 일부
귀신이 나타나는 검은 색깔인 한밤이다.
새벽1시/ 네가 올 시각이다./ 하얀 달빛 능선위에/ 아지랑이처럼 가벼이/ 흰 옷 입은 여인 하나./ 흰 옷 입은 여인 하나. /―「계시(癸時)의 시」의 일부
귀신이 좋아하는 흰옷을 입고 있다. 귀신의 체취는 귀신 자체가 생의 감성적 본령이란 관점에서 생(生)의 체취와 동일하지 않을 수 없다. 음산하고도 어두운 냄새가 곧 생 자체가 사멸한(귀신) 냄새인 것이다.
칠흑 삼단 머리 늘어뜨리고/ 속가슴 다 훔치고/ 더벅머리 알몸과/목매다는 냄새.// 천길 하늘 먹구름 뚫고/ 을순이 네눈의 벼락과/ 더벅머리 벼락이/ 부딫혀 타는 냄새/
―「냄새」의 일부
남녀의 목매다는 죽음의 냄새와 혼신(魂神)이 타는 벼락 냄새가 그것이다.
내 가슴 냄새 먹고 크는/ 지어미의 눈감은 눈이/ 내 냄새 다하면 초승달로 눈뜰까.// 눈감은 속으로/ 내 천길 가슴 속은/ 얼머나 더 많은 냄새로 남아 있을까./
―「지어미」의 일부
나의 냄새는 생의 전신이요, 눈감은 지어미의 눈을 보름달로 뜨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지어미 입덧할 때/월산 점이가 찾는 조상 잔치 음식이/ 남산 석이가 찾는 제상 음식이/ 칠흑밭에 메시꺼워 뒹굴며/ 입덧나선/ 입덧나선./ ―「입덧」의 일부
뱃속의 애기는 귀신이다. 애기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 냄새가 메스껍다. 그것이 입덧이다. 누구나 귀신을 싫어하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도 귀적 감성을 짙게 갖고 있는 인간을 증오하고 거부한다는 말도 성립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체취는 무속적 의미로는 절대적이다. 아니 무속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현대시에서 흑색과 생에 결부된 체취가 왕왕 드러나는 실정을 본다. 그것이 무속적 원천에서 발상하지 않았다고 단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정서가 불건전한 경우의 시들은 대부분 그 이미지의 색채가 흑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서가 불건전한 상황 자체가 귀(鬼)적 전염에서 이루어진 경우임이 당연시된다.
5. 결어
이상으로 무속시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합리화해 봄으로써 피상적 무속의 개념보다는 인간 내면과 결부되어 현실로 나타난다는 타당성을 제시해 보았다. 보다 차원 높은 세계를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구자를 갈망해서이다. 아울러 우리의 주체적 전통시가 과연 무엇인가를 일깨워 보고자 함에서이다.
필자가 시도한 무속시에 대해 터부시하는 오류를 갖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뜻도 있다. 시대 풍조가 새로운 현대적 소재로 응당 나아가야겠으나 인간 심성과 결부된 전통적 소재의 융합도 우리 시가 찾고 걸어야 할 한 방향이 된다고 믿어서이다. 전통과 결부된 시만이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아니다. 시적 기술의 발전이 우선적 방편은 되겠으나 종말에 찾아가야 할 우리의 안착지는 과연 어디인가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토속적 샤머니즘 속으로 들어 간 박재릉의 시
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와의 만남 -「저년을 잡아라」
심 상 운(시인, 문학평론가)
1995년 <시문학> 8월호에「내 뒷모습을 보셨나요」「청기와집」「눈 감지마라」등과 함께 발표된 「저년을 잡아라」를 읽으면서 나는 후끈후끈한 지열이 식을 줄 모르는 여름밤에 지열보다 뜨거운 인간내면의 열기와 전율(戰慄)에 휩싸여 평소보다 더 많은 땀을 쏟아야 했다.
저년을 잡아라.
정신 나간 저년이다.
나를 노려보는 춘향이 같은 입술이
뱀처럼 달큰히 징그럽게 날름거리는 저년이다.
삼도천서 멱감던 저년이
도솔천서 깔깔거리던 저년이
이승 어느 낭자에 실려
내 입술이 지그시 닿으면
소름끼치게 펄쩍 뛰는 저년이
미침 저년이
이승 신방 숨은 골방을
몰래 덥쳐 안고
빨간 등불 시왕각시
타는 알몸으로 알몸으로...........
머구리를 먹은 듯 울렁거리는
질갱이를 씹은 듯 메스껍게
체한 울음을 토할 듯 미친 저년이
칠성당서 웃는 저년이
양천 우물가에서 뒤보는 저년이
감악산 약수터를 휘휘 돌아서
깔깔깔깔 달아난다. 달아난다.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
내 혼비백산 타는 앓는 숨결속에서
주름살이 울고 바람이 울고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전문
* 시왕각시: 이승에서 한 맺힌 젊은 여자
* 칠성당七星堂):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집
그때 나는 이 시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시편들은 박재릉 시인이 70년대부터 줄곧 한 길로 추구해온 한국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늙은 박수무당이 된 시인. 신 지핀 소릴 내며 시 속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다. 그 춤은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한 춤이 아니다. 원초적인 생명력을 불러오기 위한 춤이다.
특히 「저년을 잡아라」에서는 그 생명력의 강렬한 호흡이 그대로 전해온다. 이 시인에게 강한 생명력을 주는 것은 ”나를 노려보는 춘향이 같은 입술이/ 뱀처럼 달콤히/징그럽게 날름거리는 저년“이며 ”이승 신방 숨은 골방을/ 몰래 덥쳐 안고/빨간 등불 시왕각시/ 타는 알몸으로 알몸으로...“ ”체한 울음 토할 듯 “ 징그러운 저년이다. 원초적인 생명력과 성적 에너지가 토속적인 귀신의 혼령과 결합되어 시 속에서 폭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저년을 잡아라」는 서정주(徐廷柱)의 초기 시「화사花蛇」나 「입맞춤」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재릉의 시는 현실문제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현실의 뒤쪽에 숨어서 현실을 움직이는 에너지로 작용해온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세계(무의식)를 현대시로 표현하고 그 세계를 줄기차게 지속해온 것은 독특한 개성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1995년 9월호 <시문학> 월평)
지금 읽어보아도 그때 내 판단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박재릉 시인의 샤머니즘 시에서 무엇보다도 용암같이 분출되는 뜨거운 시적 에너지를 중시한다. 그것이 시속에서 급박하고 뜨거운 리듬과 호흡을 만드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서는 이미 선(善), 악(惡), 미(美), 추(醜)의 관념은 사라지고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서도 알몸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인간 영혼의 원초적인 생명력이다.
박재릉의 시는 그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 혼(魂)의 알몸들을 밝은 세상에 드러내어 뜨거운 전율의 감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인의 내적의식과 원초적 에너지의 만남이다. 그것은 접신상태(接神狀態)와 같은 정신적인 절정의 상황을 형성한다. 만약 박재릉의 시편에서 그런 원초적인 에너지가 사라지면 언어의 박제(剝製)만 남을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서 시의 공간(이승에서 저승으로)을 확장하고, 한국의 토착적인 샤머니즘의 시세계를 당당하게 펼쳐서 보여주고 있는 박재릉 시인은 이제 세계적인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시인들의 대열에서도 앞자리에 설 것 같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아직 박재릉 시인과 동류(同類)의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비슷한 시편들은 찾아볼 수 있지만 접신상태(接神狀態)와 같은 정신적인 절정의 상황을 드러낸 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이 무당(巫堂)에 대한 무지와 폄하(貶下), 우리 것을 낮추어보는 문화적 열등의식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비어 있는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볼 때, 1973년 박재릉 시인의 초기 무속시집(巫俗詩集)『밤과 연화(蓮花)와 상원사(上院寺)』를 읽고 권위 있는「현대문학상」을 수여한 <현대문학사(주간 조연현)>의 혜안이 높이 평가된다.
박재릉(朴栽陵) 시인 약력
*1937년 강원도 강릉 출생 * 춘천고등학교 졸업 * 연세대 국문과 졸업 * 1961년 <자유문학>에 「너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 * 정일학원 국어과 강사, 교수실장 역임 * 한국현대시인협회 평의원 * 한국문인협회 한국사 편찬 위원 * 국제 편클럽 자문위원
* 시집 : 『작은 영지1집』(1963)『작은 영지2집』(1964)『않는 잔존』(1965) 『밤과 蓮花와 上院寺』(1972)『亡父祭』(1992)『분바르고』(2002)『박재릉시99선』(2005) 『박재릉 시전집』(2008) 『가야의 혼』(전집이후 시집 2011』
* 수상: <현대문학상>(1973), <한국현대시인상> (1992), <한국문학상>(2002) <청마문학상 본상>(2012)
<시론>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어
-- ‘멍텅구리의’ 시학
안 수 환(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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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그는 멍텅구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멍텅구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시를 쓰되 그는 멍텅구리의 생각을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뜻을 품는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이것들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생각 (즉, 의意) → 말 (즉, 사辭) → 뜻 (즉, 지志)’으로 흔들리는 것들이다. 생각은 모습 (즉, 상象)에 붙어 있는 것. 모습은 실유(實有)로서의 근본과 여줄가리 root and branch (즉, 본말)를 가리키는 것. 모습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생각 또한 이리저리 흔들린다. 시인은 모습을 바라볼 뿐, 말과 혹은 뜻 따위에는 무심한 반응을 내보인다. 먼 옛날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 “시를 말하는 자는 글 (즉, 문文) 때문에 말을 해치지 않고, 말 (즉, 사辭) 때문에 뜻 (즉, 지志)을 해치지 않는다. 생각 (즉, 의意)을 가지고 뜻 (즉, 지志)을 맞이한다. 이것이 뜻을 얻게 되는 것” (설시자 불이문해사, 불이사해지 이의역지. 시위득지 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志)...<『맹자孟子』「만장장구⦁상 萬章章句⦁上」제4장>. 맹자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생각보다는 말 (즉, 사辭)을 귀히 여기고 말보다는 뜻 (즉, 지志)을 귀히 여겨가며 글 (즉, 문文) 혹은 시를 바라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말을 거꾸로 들어보면, 시는 ‘뜻 (즉, 지志) → 말 (즉, 사辭) → 생각 (즉, 의意)’의 방향으로 흘러넘치는 문맥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생각이 불붙고, 생각이 꺼지는 모습을 바라보자. 어떤 생각은 하늘의 모습 (즉, 천위天爲)에 닿아 있고, 어떤 생각은 지푸라기 (즉, 초개草芥)에 닿아 있다. 맹자의 어투로 말해보자면, 대인의 눈빛은 천위를 꿈꾸고, 필부의 눈매는 부귀를 꿈꾼다. 작은 것이 물러가고 큰 것이 돌아오면, 그것을 『주역周易』에서는 지천태(地天泰) 라고 불렀다. 혹은 큰 것이 물러가고 작은 것이 돌아오면, 그것을 『주역周易』에서는 천지비(天地否) 라고 불렀다. 태(泰)와 비(否)의 차이. 대인과 소인의 차이.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 생각은 멀고, 뜻은 가깝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촛불이 타오를 때는 심지가 불붙고 촉농(燭膿)이 흘러내리는 것. 심지는 남고 촉농은 소멸한다. 뜻 (즉, 심지 혹은 등심燈心)은 남고, 생각은 소멸한다. 심지와 촉농의 불가분의 관계. 촉농의 소멸을 통해 촛불은 빛나는 것. 빛이 본질인 것. 생각의 소멸을 통해 뜻은 빛나는 것. 빛으로 말미암은 뜻. 뜻은 분명할수록 좋지만, 생각은 아득할수록 좋다. 뜻은 하나이지만, 생각은 일만이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것.
2
그런데 먼 옛날 공자는 맹자와는 다르게 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 “글 (즉, 서書)은 말 (즉, 언言)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생각(즉, 의意)을 다하지 못한다” (자왈, 서부진언, 언부진의, 子曰, 書不盡言, 言不盡意)<주역周易』「계사상전繫辭上傳」제12장>. 글과 말의 모양은 생각의 깊이에 닿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이는 생각의 모습 (즉, 상象)이 크고도 큰 것이어서 혹은 중하고도 중한 것이어서 말과 뜻으로는 그 생각을 다 퍼 담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쉽게 말하자면, 생각이란 최우선적으로 모습을 세우며 가벼운 듯 흘러가는 물결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방금 ‘생각은 모습이다’는 말을 했다. 이를 거꾸로 표현하자면, 모습이 사라지게 될 때 그때는 즉시 생각이 소멸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습의 소멸은 생각의 소멸. 생각의 소멸은 시의 소멸. 아니다. 생각의 소멸은 시의 탄생인 것. 시는 생각으로 써지는 동시에 그 생각을 지워버리는 행위인 것. 나는 이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 움직임의 모습을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이라고 달리 명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생각이 생각을 지우는 힘. 큰 생각인 것. 이를 이해하고나면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더욱 쉽게 귀에 들어온다. ; “성인은 모습을 세움으로써 생각을 다 보여주고, 괘(卦)를 지어줌으로써 실질과 거짓을 다 보여주며, 말을 걸어둠으로써 그 말을 다하고, 변하고 통하는 것을 가지고 이로움을 다 보여주며,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춤으로써 신명을 다하느니라.’ (성인입상이진의, 설괘 이진정위, 계사언이진기언, 변이통지이진리, 고지무지이진신 聖人立象以盡意, 設卦 以盡情僞, 繫辭焉以盡其言 變而通之以盡利 鼓之舞之以盡神)<『주역周易』「계사상전繫辭上傳」제12장>. ‘모습을 세움으로써 생각을 다 보여준다. ’입상이진의 (立象以盡意)’는 이 말씀을 나는 주목한다. 이것이 곧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인 것. 생각이 열리게 되면, 뜻은 저절로 그 생각을 좇아 달려가는 것.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시인 심상운은 다음과 같은 시「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쓴다 ;
폭염 한낮
산간도로 위에 말라붙어 있는 그 끈 같은 것은
숲에서 나와 끈적이는 아스팔트 도로를 횡단하기 위해
스르르 미끄러지던 뱀 한 마리가 한 순간 화물차 바퀴에 깔려
남겨 놓은 생의 흔적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도로 한가운데
한 오리 길게 늘어져 있던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지울 수 없다
그 푸르스름한 끈이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
-심상운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전문
시인은 끝내 ‘그 푸르스름한 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해석을 극도로 자제하려고 한다. 다만, “한 오리 길게 늘어져 있던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 쉽게 지울 수 없다” 라고만 고백할 따름이다. ‘한 오리 길게’의 그 ‘오리’마저도 길고 가늘게 오린 조각 strip이라는「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 실질로서의 수치가 아닌 아무런 뜻도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읽히고 있을 정도다. 발화의 양화(量化 quantification)를 벗어던진 이 시의 화법으로 볼 때 낱말 (즉, 명사)의 단계화 (differentiation of types)가 지워지는 순간이다. 생각의 지움이 진행되는 순간이다. 시인은 말한다. ; “그 푸르스름한 끈에 대한 기억을 / 쉽게 지울 수 없다”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는 나와는 /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 이 발화의 의미 내용에 대한 사족 한 마디. ‘푸르스름한 끈’의 소재는 ‘산간도로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의 기억 속’이라는 것. 생명에 대한 경외감의 활로는 비로소 그렇게 열리게 되었던 것. 좋은 시는 주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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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에서 잠깐 낱말 (즉, 명사)의 단계화라는 말을 썼다. 생각의 지움을 나타낼 때는 꼭 낱말의 단계화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와 같은 표현을 썼던 것. 명사와 동사의 관계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자. 명사는 정신이든 사물이든 그것들의 표상(表象)을 두고 하는 말. 동사는 그 표상들의 움직임을 두고 하는 말. 명사는 명사의 명사인 것 [즉, (명사)2 ]. 표상의 이름인 것. 동사는 동사의 동사인 것 [즉, (동사)2 ]. 표상의 움직임인 것. 명사가 이름인 반면, 동사는 관련인 것. 명사는 ‘지칭되는’ 몸이며, 동사는 ‘주장(assertion) 하는’ 힘이다. 시인과 사물 (즉, 대상) 사이에 있는 주장이 소거(消去)된 다음에는 바로 이 순간 멍텅구리 생각이 드러난다. 낱말 (즉, 명사)의 질화(質化 qualification)가 나타날 때는 그 명사가 동사와 제휴할 때다. 말문이 열리고 말문이 닫힐 때 낱말의 질화는 출렁거린다. 시인의 생각은 이 낱말의 질화를 따라 출렁거린다.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깊은 것이어서 어떤 의중 (즉, 지志)으로도 그의 말을 규정할 수 없다. 멍텅구리 생각이 그의 의중을 대신하는 것.『주역周易』에서 말하는 태극(太極) <즉,20=1>, 양의(兩儀) <즉 , 21=2>, 사상(四象) <즉,22=4>, 팔괘(八卦) <즉, 23=8>, 육십사괘(六十四卦) <즉, 23×2=26=64> 등의 진행은 바로 이 생각의 진전도(進展圖)인 것. 1, 2, 4, 8은 1의 태극(太極)과 2의 음(陰)과 양(陽), 4의 태양(太陽) 소음(小陰) 소양(小陽) 태음(太陰), 그리고 8의 건(乾)⋅태(兌)⋅리(离)⋅진(辰)⋅손(巽)⋅감(坎)⋅간(艮)⋅곤(坤)의 문자(文字)로 드러난다. ‘-과 ������’, ‘������와������와������과������’, 그리고 ‘☰⋅☱⋅☲⋅☳⋅☴⋅☵⋅☶⋅☷’ 등의 상의(象意)가 그것들이다. 앞에서 내가 말한 생각이란 이 상의(象意)를 보여주는 흔들림 (즉, 괘卦 혹은 효爻)인 것. 효라고 하는 것은 천하가 움직이는 것을 본뜨고 있는 것 (효야자, 효천하지동자야 爻也者 效天下之動者也).<『주역周易』「계사하전繫辭下傳」제3장>. 효는 천하에 움직이는 율동을 표기함인 것. 좀 비약해서 말해보자. 시인은 천하에 움직이는 율동 즉, 괘(卦)와 효(爻)를 보고 시를 쓴다. 시인은 시를 쓰되 명사를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동사를 가지고 시를 쓴다. 시인은 효의 움직임을 보고 시를 쓴다. 효의 움직임은 ‘위(位)’와 ‘응(應)’과 ‘비(比)’의 모습으로 짜여진 것. 위(位)는 효의 등차(等差)인 것. 제1위 (즉, 서민)와 제2위 (즉, 선비)와 제3위 (즉, 대부)와 제4위 (즉, 제후)와 제5위 (즉, 천자)와 제6위 (즉, 황상)가 그것이다. 응(應)은 상(上)의 세 효와 하(下)의 세 효를 음과 양으로 바라보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주목한다. 비(比)는 서로 가까이 닿아 있는 효의 대립관계를 응시한다. 음효는 위에 놓인 양효 (즉, ‘ ▬ ’)와 대응되어야 하며, 양효는 아래에 놓인 음효 (즉 ‘������’)와 대응되어야 한다. 음상행(陰上行), 양종하(陽從下)인 것. 음은 위로 올라가고, 양은 아래로 좇아온다. 음상행과 양종하는 움직이는 방향의 본성인 것. 말하자면, 천하의 움직임이란, 육효의 등위(等位) 응비(應比)에 의한 율동인 것. 육십사괘는 이 율동의 대집합인 것. 이 율동의 움직임이 불순할 때 시인은 가슴 아파 하고, 이 율동의 움직임이 화창할 때 시인은 즐겁게 춤을 춘다. 춤추는 시간과 춤추는 공간을 바라보고 시인은 춤을 추는 것이다. 춤추는 시간과 춤추는 공간 이것이 생각의 전모(全貌)인 것. 생각의 생각인 것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시인 임보는 다음과 같은 시「우리들의 생애」를 쓴다. ;
가을 한나절 햇볕같이
은사시 가지 흔들다 간 바람같이
잠시 끓었다 식은 주전자 속의 맹물같이
풀잎에 매달린 달팽이 같이
시인은, 이 시를 쓰는 동안 자신의 생각을 다른 벗들에게 몽땅 넘겨 준 듯이 보인다. 그런 다음 ‘햇볕’이 이 시를 쓰도록 기다렸던 것. ‘바람’이 이 시를 쓰도록 기다렸던 것, ‘맹물’이 이 시를 쓰도록 기다렸던 것. ‘달팽이’가 이 시를 쓰도록 기다렸던 것.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
앞에서 내가 누누이 말하고 있는 생각이란, 그러니까 그것은 하늘의 생각 (즉, 천위天爲)이었던 것이다. 생각의 본류(本流)는 자연에 있었던 것. 시는 자연이 쓰는 것이었다. 시는 하늘이 쓴다. 시는 모래가 쓴다. 시는 먼지가 쓴다. 시는 멀고먼 밤하늘의 별자리가 쓴다. 시인의 주장은 그것이 타당하다거나 타당하지 않다는 두 가지 관점만을 이야기할 뿐인데, 지혜로운 청자라고 한다면 그 주장의 지루함 때문에 그는 시를 외면해버린다. 모래는 주장하지 않는다. 먼지는 주장하지 않는다. 하늘은 주장하지 않는다. 밤하늘의 별자리는 주장하지 않고 슬쩍슬쩍 시를 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먼 옛날 노자가 말한 하늘의 길 (즉, 천지도天之道)인 것. 말하지 않는데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는데도 저절로 다가오는 것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노자老子』73장>이었다. 노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 “크나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대상무형大象無形).<『노자老子』41장>. 모래는 큰 것이고, 먼지는 큰 것이고, 멀고먼 밤하늘의 별자리는 큰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큰 것은 큰 것 그때부터 벌써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큰 것은 불언(不言), 곧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부터 비로소 큰 것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행위와 사물로써 그 뜻을 보여줄 뿐이다” (천불언, 이행여사 시지이이의 天不言, 以行與事 示之而已矣).<맹자孟子』「만장장구⦁상 萬章章句⦁上」제5장>. 행위와 사물. 그것이 모습인 것. 모래는 모래를 보여줄 뿐이다. 먼지는 먼지를 보여줄 뿐이다. 하늘은 하늘을 보여줄 뿐이다.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천불언(天不言). 그러므로 생각이 모습을 담는 것. 생각이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의 생각인 것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시인 유재영은 다음과 같은 시「소리」를 쓴다.
벌써
몇 번째
어둠을 뚫고,
고요에
이마를
부딪치는
열매가
있다
시인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지우고 있다. 그의 이야기의 순차(順次)는 ‘소리 = 어둠 → 고요 ← 열매’의 모습으로 따라가고 있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둠’이든 ‘고요’든 ‘열매’든 그것들에 대한 이름을 부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 <『노자老子』1장>의 그 입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모습의 경계(境界)만을 보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고요’를 ‘어둠 → 열매’로 바라보면서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의 구분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어둠’도 ‘열매’도 결국은 ‘고요’의 소재(所在> 즉, 모습으로 돌아와 하나로 뭉치게 된다는 것. 그렇게 시인은 그의 이야기 (즉, 생각)를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5
생각의 지움이란, 그러니까 그것은 이야기의 무르녹음인 것. 생각의 생각인 것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먼 옛날 석존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모든 상(相) (즉, 모습)이 상이 아님을 보게 되면 여래를 보리라.”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金剛經』제5품>. “여래는 어떤 상(相)이든 그것을 그것으로 충족된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여래불응이구족제상견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금강경金剛經』제20품>. 이는,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대상무형(大象無形)라고 말한 노자의 표현과도 빈틈없이 일치한다. 말은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 석존은 제자 수보리(須菩提)에게 또 이렇게 가르친다 ; “모든 먼지를 여래는 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비로소 먼지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여래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비로소 세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제미진 여래설비미진, 시명미진 여래설세계 비세계, 시명세계 諸微塵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금강경金剛經』제13품 >. 석존은 그러니까 먼지에게 먼지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 먼지라는 이름을 지워버렸던 것. 공자의 표현으로 달리 말하자면, “성인입상, 이진의 (聖人立象, 以盡意)”였던 것. 이는, “모습을 세움으로써 생각을 다 지워버린다”는 것.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으로 들어갈 때, 이때 생각은 큰 생각으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가령 죽으면 죽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우편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기독교의 역설적<逆說的>인 인지구조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공맹의 생각이든 노자의 생각이든『주역周易』의 생각이든 석존의 생각이든 예수의 생각이든 이분들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인지구조란 하나의 논리적 우주 안에 존재하는 두 대칭적인 요소의 진전도(進展圖) 그것이었던 것. 거꾸로 말하자면, 하찮은 생각은 ‘나’와 ‘너’라는 이분화(二分化)의 조작 즉, 이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들이다. 주관과 객관의 두 대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그러한 까닭에 시인은 ‘꽃’을 바라보더라도 그 꽃 건너편에 있는 ‘꽃 아닌 꽃’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것 [ 꽃 ⊃ (∼ 꽃) ]. 그것은 생각의 생각인 것 [즉, (생각)2 ].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그와 같은 생각의 입지에 관한 사족 한마디 더 ; 멍텅구리의 생각이란 예수의 표현으로는 ‘어린애의 마음’ (「마가복음」10:16 )이며, 맹자의 표현으로는 벌거숭이의 마음 (즉, 적자지심赤子之心)<맹자孟子』「이루장구⦁하 離婁章句⦁下」제12장>이다. 큰 비가 와서 세상은 온통 물에 잠겼다. 큰 물이 빠지지 않는 한 세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란 이 큰 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큰 물이란 물의 물인 것 [즉, (물)2 ]. 큰 물이 빠진 뒤에 세상은 잘 보인다. 생각이 빠질 때 (즉, 지워질 때) 시는 씌어진다. 공자의 주장 그대로라면, “말을 걸어둠으로써 그 말을 다하게 된다” (계사언, 이진기언 繫辭焉, 以盡其言)이라는 것. 다른 말로는 맹자의 ‘이의역지(以意逆志)’인 것. 생각을 가지고 뜻을 맞이하는 것. 생각이란 극수(極數)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극수의 극(極)은 궁리할 궁 (즉, 궁窮)으로써의 극이며, 극수의 수(數)는 모든 경우의 수 (즉, 력曆)를 두고 하는 말. 명실공히 생각은 극수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생각은 실질 (즉, 정情)과 거짓 (즉, 위僞)의 한계마저도 뛰어넘는다. 이제부터는 시인은 ‘말하는’ 시를 쓰지 않고, ‘생각하는’ 시를 쓰고 있다는 선언인 것. 그는 모습을 바라보고 시를 쓸 뿐, 뜻을 기다리며 시를 쓰지 않는다. 모습은 모습 이외의 어떠한 정보에도 정신을 팔지 않는다. 모습이 모습을 보여줄 때, 시는 그 찰나에 태어나는 것. 아니다. 모습이 모습을 지우는 순간, 시는 그 찰나에 태어나는 것. 그러니까 그것은 콰인(Quine 1908-2000)의 수리논리로 말하자면, 연접(連接 conjunction ;⦁)이 되는 셈. “한 명제를 부정함은 그 명제가 틀렸고 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p≡p↓p). 곧 이중부정 (↓)인 것. 이중부정은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 ∼p), 부정을 연접한 것 (∼p⦁∼p). 생각의 생각인 것 [즉, (생각)2 ]. 침묵의 침묵인 것 [즉, (침묵)2 ]. 침묵이 시를 쓴다. ‘침묵이 시를 쓴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침묵은 소이연(所以然)이다. 그렇게 된 까닭인 것. 큰 것 즉, 자연인 것. 자연은 언제나 그렇게 된 까닭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천불언(天不言)인 것. 침묵인 것. 이때의 상징은 위험하다. 상징이 위험한 까닭은 침묵하지 않고 언제든지 아무데서나 무엇인가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침묵은 상징이 아닌 함축(含蓄 implication ; ⊃) 인 것. 시인은 함축의 깨끗함 (즉, 침묵)을 바라보고 시를 쓴다. 함축의 문전. 가령 두 명제의 함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건(前件)을 부정한 부정과 후건(後件)을 부정한 부정을 또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p⊃q) ≡ ((p↓p) ↓q) ↓ ((p↓p) ↓q)]. 이 과정을 밟고 나면 시인은 마침내 생각의 생각 [즉, (생각)2 ]으로 돌아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된다. 그것은 생각 안에서 생각을 넘는 멍텅구리의 생각인 것. 시인 유재영은 또 다음과 같은 시「극락」을 쓴다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내설악 백담사 무설전 앞,
벗어 놓은 동자승 고무신 속으로 황급히 소나기 피해
뛰어든 개구리 한 마리 !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 그의 시를 쓴 것은 ‘개구리 한 마리’였던 것. 그는 다만 ‘개구리 한 마리’를 멍텅구리처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그때 그곳에 있는 ‘고무신 속’이 ‘개구리’의 극락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고무신 속’에서 극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진흙 구덩이에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는한, 혹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그 진흙 구덩이 혹은 ‘고무신 속’이 극락이라는 것이었다.
<시문학> 2012년 3월호 발표원고를 재수록함.
하이퍼시(hyper poetry)의 이해
최 진 연 (시인)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시문학>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하이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시문학>(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사물시→디지털시→하이퍼시>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창가(唱歌)와 그에 이어진 신체시(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시가(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장희, 정지용 등 순수시, 이상의 기호시나 조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상화, 김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금요포럼>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오감(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하이퍼시’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3.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아프로디테의 항아리>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화가와 모델>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퍼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게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진연, 「그래픽 ‧ 1」전문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e>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전문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 최진연,「아이스크림」전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상운의 표현을 빌자면‘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어떻게’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과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이 논문은 <창조문학>문학회의 하계 세미나 주제발표문 (2011,8.1)임
한국 현대시와 종교
오양호(문학평론가)
Ⅰ. 들어가며
이론물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스티브 호킹은 그의 저서『위대한 설계』(Grand design, 2010년)에서 ‘우주창조는 신의 작품 아니다. 빅뱅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발생했다.’라는 무신론을 주장함으로써 세계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또 한 번 논전을 벌릴 조짐을 보인 바 있다. 16, 17세기 근대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는 지식인들과 다소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과학적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그 전시대보다 더 커진 까닭이다. 이런 시대흐름에 입지가 약해진 종교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과학의 새로운 발견을 수용하면서 보다 진보적인 진리로 자신을 가다듬었지만 더러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관심과는 차이가 큰 현실영합의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20세기의 종교는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되는 과학적 진리를 외면하고, 편협한 도그마만을 고집하는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 존재로 인식된 감을 주는 점이 없지 않았다.
문화의 쓰나미라 할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계를 강타한 이후, 21세기 오늘의 종교는 마침내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은 호킹 교수의 무신론적 발언이 세상을 뒤흔드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호킹은 우주창조는 신성한 존재의 개입이 아니라 중력 같은 물리학 법칙에 따라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며 그 성역을 침범하고 있다. 이런 말은 그가 종전에 ‘만약 우리가 완전한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면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이성의 궁극적 승리가 될 것’이라는 논리를 배제한다.
불교는 이러한 논리 충돌에 직접 뛰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서로의 우열을 경쟁하며 반목을 한다면 이 세상은 말세의 환난을 맞을 것이니 서로 상생의 진리를 모색해야한다는 듯하다. 어떤 반응도 없이 여전히 묵묵히 무지몽매한 중생의 돈오(頓悟)를 기다리는 기도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가 문학, 특히 한국시문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야말로 시가 인생 속으로 들어가면 종교가 되고, 종교가 실제의 삶에 첨가되면 시가 된다는 말1)이 그대로 적용되는 예다. 조선조의 한국시가 문학에서 이 논리에 예외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가 공맹사상을 쫒는 실천도덕이라고 보면 유교에 있어서의 문학과 종교의 문제는 기독교와 불교의 그것과 다르다.
사실 문학과 종교의 문제는 너무나 크고, 깊고, 그 내력이 길기에 섣불리 운을 뗄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 현대문학, 그 중 한국의 현대 시문학’으로 문제를 좁혀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와 어떤 호응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고찰해 보려한다.
Ⅱ. 한국현대시에서 불교와 기독교.
한국문학에서 문학과 종교의 문제는 신라 향가까지 올라간다. 현대시에서 불교와 시의 만남은 한용운, 서정주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그리고 최남선, 오상순, 김동환, 조지훈, 김달진, 이은상, 이병기, 조종현, 박재삼, 이형기 등의 시에 이런 테마가 확대되어 나타났고, 지금은 조오현의 시조를 비롯한 일부 승려 시인, 그 외의 몇몇 시인의 작품으로 이 테마가 지속되고 있다.
선시(禪詩)는 깨달음의 시고2) 현대시의 구조와 불교존재론이 만나는 지점에 불교시가 생산된다고3) 할 때 한국현대시에서의 불교의 문제는 한용운, 서정주를 넘어 최남선의 시조집『백팔번뇌』,김구용의『頌 百八』(1982), 이성선의『시인의 병풍』(1974), 박희진의『연꽃 속의 부처님』(1993), 이승하의『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2010)에까지 확산된다.
현대시와 기독교의 만남은 불교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시와 기독교는 Ⅰ항에서 고찰한 것처럼 서로 모순 혹은 대립되는 것들의 조화 혹은 통일의 관계에 있다. 구조, 진술, 상상력에서 서로 대립, 모순되는 가치, 정서나 의미지향이 갈등을 이루다가 하나로 통일을 이룬다. 종교(기독교)와 시가 만나는 지역이다. 시가 세계를 반영하는 언어의 한 양식인데 종교가 거기에 진입한다.
불교시의 지속, 확산이 다소 저조한 것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영향 아래 쓰인 한국 현대시의 성과물들은 문학사의 한 축을 형성할 만큼 풍성하다. 우선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등의 작품이 있고, 그 뒤를 이어 구상, 김춘수, 박화목, 이상로, 임인수, 홍윤숙, 유안진, 김남조, 황금찬, 최은하, 박이도, 신규호, 유승우, 정호승, 고정희, 김정환 등의 시인들이 기독교 문학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많이 썼다.
N·드롭 프라이는 인간사회에서의 종교는 ‘질서의 신화’라고 했지만, 이 세상에 종교가 없으면 삶이 더 다양해지고 자유로워 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횡액을 당할지 모르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횡액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줄 절대적 존재를 찾는다. 늘 불안한 까닭이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큰 문명과 문화의 이면에는 이런 불안을 절대적 존재의 보호를 통해 해소하려는 흔적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실질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확실한 속에 아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생명의 유한성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절대자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허문다. 절대자의 교리 속에는 인간의 불안, 죽음의 공포를 제어하는 도그마가 있다. 그래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방종, 혼란, 무질서가 판을 친다. 인간을 정신적으로 관리할 장치가 없는 까닭이다. 과학과 종교가 갈등을 빚게 되는 지점이 여기다. 그러나 이 둘은 결국 화합한다.
일반적으로 절대자의 그림자가 문학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전쟁과 같은 대재앙, 혼란을 거친 다음이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패하고 절망에 빠진 세상을 향해 죽음의 문제를 ‘신비주의적 서정성’4)에 의해 생의 의식을 불교적 심상으로 묘사한 T·S 엘리엇의 <황무지>5) 같은 작품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실존주의문학이 세계를 뒤덮은 것 역시 그러하다.
Ⅲ. 한국현대시와 불교시
시 창작의 발상을 불교의 교리와 불교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시를 불교시라 한다면 한국현대시에서 불교시로 명명할 시는 아주 많다. 서정주 한 사람만 예로 들더라도 <서풍부> <부활> <귀촉도> <인연설화조> <내가 돌이 되면>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등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 중 하나를 보자.
짐(朕)의 무덤은 푸른 영 위의 욕계 제이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 잡는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지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柴糧)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 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六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 중 빛나는 황금팔찌를 그 가슴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1,2연
우리가 잘 아는 서정주의 『신라초』에 수록된 「선덕여왕의 말씀」(제1,2연)이다. 선덕여왕은 죽은 후 다시 인간세상으로 환생하려고 자신의 무덤을 욕계 제2천인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고 유언한다. 신성한 하늘이 아닌 희로애락의 즐거움이 피 끓는 바로 그 인간세상, 말로만 하늘일 뿐 사실은 사내의 육체가 꿈틀대는 현실이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마지막에 ‘내 못 떠난다.’고 소리친다.
이 시 속에는 불교의 윤회사상, 열반과 같은 신비한 대상과 자아, 그런 자아가 신비를 매개로 하여 우주와 만나는 서정적 신비가 일체감을 이루고 있다. 시가 종교의 세계관에 의지하고, 시가 종교의 인식론을 차용하여 상상력을 극대화한 형태이다. 종교(불교)의 신비성과 시의 신비주의적 미학의 만남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불교시의 이런 문학적 성취는 미당과 만해에 와서 꽃을 피웠고, 지금도 한국시의 한 자리를 단단히 지키고 있다. 지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시인의 작품을 하나만 보자.
누구에게도 길 묻지 않는구나
그대 다만 앞을 보고 걸어갈 뿐
불볕 쏟아지는 자갈 밭 길을 걸어도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중략)
옷은 헤지고 발은 온통 물집
신라의 학승 혜초여
그대 이 길을 정말 걸어갔단 말이냐
무엇을 바라 걷고 또 걸어갔단 말이냐
보이는 것은 그저 자갈밭
길이 끝나는 곳에서 펼쳐지는 사막
도시에서 꾸는 어지러운 꿈
이 한없는 욕망의 꿈에서 벗어나는 날
나 문득 말하리라
깨달음 하나 얻지 못하고......혜초여
-이승하「순례자의 꿈」6)
천이백년 전의 고승 혜초가 걸었던 길을 걷는 이 시의 퍼소나는 그 길에서 나타나고 사라져간 삶과 죽음을 불교사상에 담아 우리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곧 인간의 생명, 정신의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점이 불교의 법리와 만나 삶의 다양한 의미로 굴절되고 있다.
시인 이승하의 상상력이 고행의 일생을 살다간 혜초의 신비한 행적과 만나 신비한 서정적 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종교와 문학이 초월적 존재를 통해 호응하여 신비주의적 서정의 한 성채를 이룬다고 할까. 고승의 구도행이 오늘날 우리가 삶의 길을 걸으며 겪고 희구하는 생의 다양한 의미가 61편의 서정시로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Ⅳ.한국현대시와 기독교시7)
기독교의 한국유입은 구한말의 개화운동과 맞물리면서 한국현대문학에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한국시문학에서 기독교 정신과 기독교적 모티프를 차용한 시인이 많지만 그 중 이 모티프의 문학적 변용에 높은 성취도를 이룬 대표적인 시인은 정지용과 윤동주다. 이 두 시인은 일찍 일본 간사이지방(關西)을 대표하는 유명한 미션계 대학 도시샤(同志社)에 유학했고, 거기서 문학의 미적 자율성을 기독교적 상상력과 소통,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의 경우는 연희전문 시절부터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문학공부를 시작한 게 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시를 상당수 썼다.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눈감고 간다」 「팔복」과 같은 작품이 그런 예다. 이 중 우리가 잘 아는 시에 「십자가」가 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전문
예수의 가르침마저 부정하고 싶은 절망감이 시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에 절망하는 자포자기가 아니라 그 수난에 예수처럼 숭고한 희생으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각오다. 저항의식이 예수의 정신과 만나 그 의식이 역설적 긴장을 이루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간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처럼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며 순사함으로써 사랑받는, 그러니까 ‘행복한’ 존재가 되려한다.
195,60년대부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시인 김춘수, 김현승, 김남조 등의 작품 중 인구에 회자되는 기독교 시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대를 기다려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배갑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김현승 「가을의 기도」전문
가을과 애수, 삶의 경건성과 원망(怨望)이 기독교적인 신비감과 호응됨으로써 고독한 존재, 인간의 본질, 곧 현상(現象)에서 취한 소재가 형상적 사유에 의해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 다다르고 있다. 개인적 실존으로서의 나의 기도가 절대자를 향하는 간절한 톤으로 전이, 심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이 박두진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인간주의를 강조하면서 자신도 그 위대한 생애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갈보리의 노래」.「갈보리의 노래·2」등)으로, 김춘수에 와서는 이런 종교적 상상력이 그냥 시적 모티프로 차용된다. “맨발로 바다를 건너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지만/ 그의 젖은 발바닥을 나는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다.”(「처용단장」 제3부). 처용의 이미지와 예수의 이미지가 겹치는 이 시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체험을 거부하는 시의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타령조·2」에서부터 「겟세마네에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16편)에 예수를 등장 시키고 있다. 그의 이런 시 쓰기를 무의미 시와 연결시킬 것인가, 혹은 예수의 신비를 자신의 서정시에 차입한 비신자의 기독교 시로 볼 것인가는 하나의 과제가 될 듯하다.
현재 기독교 시를 쓰는 시인들은 시력이 무려 반세기에 이르는 여러 시인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시인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라는 점에서 김춘수와는 그 사정이 다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 시는 시인의 신앙과 무관한 시가 아닐까.
기독교에 대한 다른 하나의 접근은 구상(具常)의 여러 편의 시와 생애에 잘 나타나고, 이정우, 이해인 등의 성직자, 그 외 성찬경, 홍윤숙, 김남조, 유안진, 신달자, 김후란, 권국명 등의 시인들이 여러 편의 기독교 시를 썼다.
이상의 여러 시인들과 시적 발상이 다른 기독교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정호승이다. 정호승의 두 번째 시집이자 그의 시선집인 『서울의 예수』에서 예수가 시 제목에 나오거나 본문에 등장하는 시는 겨우 3편이다. 그런데 이 시인은 시집 이름을 ‘서울의 예수’로 하였다. 겨우 세 편 뿐인 기독교시에서 그 하나를 시집의 표제로 삼았다. 이것은 작가가 그 시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는 의미다.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정호승 「서울의 예수」전문
시 1)에 등장하는 예수는 구원의 존재가 아니다. 한강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왜 물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젖은 옷을 말리고,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우리 곁에 온 예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예수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 거대 도시 서울에서 살아가느라 지친 이웃 아저씨 모습을 하고 있다.
시 2)의 예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빵과 눈물,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이런 시민들의 불안한 삶을 목도하고 고통과 절망을 느낀다. 예수의 재림이 영광의 실현이 아니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를 어쩌지 못하고, 찬밥 한 덩이 얻어먹고 쓸쓸히 사라지는 불쌍한 존재로서의 예수다. 종교와 시가 만나 형성하는 신비한 서정 속에 구원과 평화와 행복을 기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시민, 한 패배자의 모습이다. 정호승의 이런 시 의식은 앞에서 논의한 여러 시인들의 기독교 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구원의 존재로서의 예수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김춘수의 기독교 시 뒤에 서 있다고 하겠다. 모든 기독교 시가 기독교적 교리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런 시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문학의 논리로서는 판단하기 힘 든다.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는 낯설다. 정호승 나름의 기독교적 인식이 기독교 시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까닭이다. ‘한국현대시와 종교’에 대한 문제는 한국 현대시를 떠받치는 큰 기둥의 하나다. 더 깊은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서평>
심상운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이 선(시인)
Ⅰ. 서론
심상운의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006년부터『시문학』에 실렸던 그의 시론과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놓은 것이다. 이 시론집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이론서로서 앞으로 한국현대시에서 의미 있는 준거(準據)의 역할을 할 것 같다.
‘디지털시’는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를 거부하고 차별화된 새로운 감각의 ‘탈관념 시’를 제시하는 시론이다. 이 시론집의 중심이 되는 <디지털시의 이해>는 오남구의 염사 접사의 디지털리즘의 시론에 과학적인 디지털의 기능을 도입하여 보완하고, 디지털시의 개념을 정립하여 한국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론집의 표제가 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디지털시의 시론과 하이퍼시의 시론을 결합시키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시의 모듈(module) 이론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을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하이퍼시의 핵심이론인 ‘다선구조’, ‘상상적 기능의 확대’를 이론만이 아닌 실제의 창작된 작품으로 제시함으로써 하이퍼시의 시론이 성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무의미와 사물성 이미지의 사물시(事物詩)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하이퍼시의 이론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객관화하여 정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이론의 전개에 문덕수의 시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하이브리드(잡종결합)가 들어간 ‘다선구조론’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는 시론에서 불교 교리를 응용하고 있다. 그 예로 불교의 기본사상 ‘제법무아(諸法無我)' ’는 디지털시의 언어를 설명하는데 중심개념으로 활용된다. 이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를 언어의 기호성으로 해석하는 핵심이론이 되고 있다. 불교의 ‘다르게 생각하기’와 ‘회의하기’는 사물의 본질적이며 확정적이지 않은 기표(記票)의 ‘무의미’성과 사물의 ‘불고정성(不固定性)’을 사유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디지털시론’과 ‘하이퍼시론’을 생산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시론의 묶음’이다. 이 시론집은 저자의 독창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문덕수의 시론, 김규화와의 대담 등은『시문학』을 중심축으로 한 집단적 사고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심도 있는 토의과정과 여러 편의 예시된 시 작품들 (오남구, 김규화, 신규호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문덕수의 장시『우체부』에 대한 평설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평설로 평가 된다. <한국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에서부터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까지 읽으면 현대시의 역동적(力動的)이며 다각적(多角的)인 모습을 조망(眺望)하게 된다. 이는 심상운의 탐구력과 열정과 열린 사유의 결과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인으로서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그는 하이퍼시는 가장 발전된 상태의 디지털시라고 정의한다.(217쪽) 그 이유는 디지털시의 모듈(module)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공통점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다. 모듈은 컴퓨터의 최소 단위(unit)의 결합과 단절로 이루어진다. 모듈이론은 시에서의 단어와 단어의 결합과 분리, 연과 연에서의 단절과 분리를 의미한다. 어떤 단어로 대체되어도 의미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단어로 교환 가능한 시의 구성 기법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최소 단위(unit)가 결합과 분리를 자유자재로 하여 새로운 모듈 체계로 합성된다. 이 합성된 단어나 이미지들은 분리와 결합, 교환, 삭제가 자유롭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연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로운 편집기능을 갖는다. 리좀은 사방으로의 링크의 기능을 의미한다. 병렬 배치하여 평면상에서 교체 가능한 이미지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Ⅲ. 하이퍼 시의 성립 조건
심상운은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에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형태인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아래와 같이 9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하이퍼시를 창작하여 시론의 중간에 인용 형식으로 발표함으로써 실험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듈과 리좀의 옴니버스적 구성형식은 기존의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시와 비교할 때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인과의 틀을 벗어난 연과 연의 불연속적인 관계가 열어주는 가상현실이 영화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성립조건을 수렴하고 필자가 하이퍼시를 쓰면서 현장에서 느낀 개인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5가지를 하이퍼시 성립조건으로 추가 제안해본다.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감각의 설명적이지 않은 제목과 내용
둘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셋째, 추상화 기법의 디자인과 구성
넷째, 환타지성
다섯째, 실험성
필자도 2004년「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속에 ‘환타지성’과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도입하였다. 환타지성은 분리와 결합, 디자인에서 새로운 감각의 추상화기법으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는 제목과 내용이 설명적이지 않아야 하며 새로운 감각의 구성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써 먹었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실험성이 하이퍼적 요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새롭고 감각적이며 실험적이어야 하지만, 무목적성의 단어 던지기 식으로 양산된 ‘무의미’와 구별된다. 그것은 치열한 작가정신에 의한 새로운 디자인과 구성의 신선함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는 고정적인 시의 성립조건을 제시하여 창의성에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고 감각적으로 바뀌어 가는 ‘창조성’이 하이퍼시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위의 시는 ‘먹는다’는 동사를 중심어로 하고 있다. 하이퍼시의 링크의 기능을 살려 1연은 3연을 링크하고, 4연을 계속 링크한다. ‘먹는다’는 중심어는 1연의 ‘나뭇가지를 먹고 있는 새벽안개’에서 3연의 ‘야채를 먹는다’를 링크하고, 4연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여자 리포터’를 링크한다. 각각 다른 사물과 사건을 링크하면서 ‘다시점’ 구조를 형성한다. 2연은 전혀 낯선 ‘행진하는 시위대’를 등장시켰다.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다른 연과 독립적이다. 그러나 ‘먹는다’는 행위를 직접 행동으로 취하지는 않지만, ‘행진하는 시위대의 구호’는 ‘먹고 살게 해 달라’는 1차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먹는다’와 포괄적으로 통합된다. 작가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의식의 자동기술 기법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의도성’을 가지고 디자인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와 차별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4연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상현실의 사건과 소설적인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각 연들이 결합하여 삶의 생생한 ‘현장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무생물과 사물에 ‘인식’과 ‘의식화’를 시켜 ‘행동성’과 ‘운동성’을 갖게 하였다. 1연의 ‘새벽안개’가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고 3연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리고’ 4연의 ‘여자 리포트의 붉은 입’은 ‘확대’ 된다. 사물에 ‘움직임’이라는 동작을 줌으로써 무생물에 생기와 운동감을 주어 시를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위의 시는 작가의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과 상황만을 그대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왜? 무엇을? 이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작가의 주관과 주제의식이 배제되었다. 아니 혹은 숨겼을지도 모르지만 현장을 객관적 ‘리포터’의 입장으로 전달할 뿐이다.
이 시는 4연의 시를 독립적으로 분리하여도 한 편의 시가 될 정도로 복합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뉴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성’이 있다. 이 시는 ‘먹는다’와 ‘뻗는다’의 중심어가 여러 상황을 ‘파생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상상력과 연상작용을 하여 공상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의 새로운 감각의 ‘보여주기‘ 하이퍼시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는 그가 주장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요건인 9가지 다선구조론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새로운 시가 먼저 탄생하고 후세에 비평가들이 ‘문예사조’와 '이즘(-주의)을 붙이는 것이 순서인데, 심상운은 자신이 쓴 시를 자신이 직접 분석하여 자신이 창안한 시창작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기법의 더 많은 하이퍼시들이 창작될 것이고, 그 시들은 또 새로운 ‘-이즘’으로 이름이 붙여질 것이 때문에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은 ‘과정 중’에 있고 말할 수 있다.
Ⅴ. 이슈-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은 ‘경계 허물기’와 ‘통합하기’를 통해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시는 문자(문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연극과 무용, 음악과 통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현상들은 형식이 내용을 만들고 변화시킨다고 한다.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으로 온몸으로 공연하여 ‘열린 시 운동’을 펴서 시를 표현예술로 승화시켜 종이에서 해방된 시는 뜨겁고 빛나는 행위예술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가 창안한 각색시(脚色詩)는 하이퍼시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와 연극을 결합한 독창적인 시 형태라는 점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신규호가 <남산 문학의 집>에서 <좋은시 공연회>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와 무용,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결합시켜 통합예술로 승격시켜 선각자로 공연시 보급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종각역 <반디앤루니스 서점> 전시실에서는 시와 사진의 만남인 <사진에 기대어 시를 보다>의 전시회를 세 번째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통합예술의 기회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필자도 <좋은시 공연회> 회원으로 <퍼포먼스 시>를 발표하며 시의 공연화에 고심하고 있다. 시의 낭송도 이제는 목소리만으로 전달하던 아날로그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연기와 무용, 서화, 미술, 노래, 퍼포먼스 등 자신의 끼와 재능을 하이퍼적으로 발휘하여 통합예술로 승격시켜야할 것이다. 가수의 무대공연처럼 조명과 무대장치, 백댄서까지 동원하여 버라이어티 쇼를 꾸밀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시인들도 펜을 몰고 다니며 공연할 날을 꿈꿔본다.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은 시의 사회적 영역을 확대하는데 큰 에너지를 주고 있다.
Ⅵ. 결론
심상운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 1960년대의 조향의 시와 문덕수의『선· 공간』의 시편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초현실적인 모더니즘의 시론이다. 2000년대 오남구와 심상운의 대화는 디지털시론을 생산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문덕수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하이퍼시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시문학 」출신 시인들의 집중적인 토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시론집에 실린 <김규화와 심상운의 대담-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문덕수와 심상운 대담-한국시의 동서남북 2>, <신진과 조명제의 대담-하이퍼시의 가능성> 등은 하이퍼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논의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상운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직접 실험시를 창작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성립조건 9가지를 제시하여 하이퍼시의 구조를 정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디지털시와 하이퍼시를 말하기 전에 <탈관념시의 이해>를 통해서 관념(의미)과 탈관념(무의미)의 경계선을 분명히그었으며, <하이퍼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에서는 하이퍼시의 바탕이 상상과 공상이라는 것과 정서의 표현 방법을 예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하이퍼시의 영역이 한국현대시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것을 상상해본다. 그 근거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감각과 자극을 주는 앞서가는 시 창작 기법이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생산하기 위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심상운의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시론집은 한국시사에서 ‘하이퍼시의 공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도전을 받을 것이다. 고정된 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하이퍼시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월간 <시문학> 2011년 4월호에 발표 후 일부 수정 보완한 글임
문덕수 시인과의 대담 (문화일보, 2012년 3월 9일자)
- 84세에 새 시집 ‘아라의 목걸이’ 펴낸 문덕수 前 한국펜클럽 회장 (문화일보/장재선기자)
"6·25전쟁서 살아남은 미안함… 80세 넘어서도 詩 쓰는 원동력”
문덕수 시인이 새 시집 '아라의 목걸이'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내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는 문학계의 원로다. 올해 만 84세인 그를 만나서 물었다."이 연세에도 시를 쓰고 새롭게 시집을 펴낼 것이라고 젊은 시절에 예상했나요?" 그는 "허허, 글쎄요"라며 숨을 고른 후에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말에 갑상선암이 퍼져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후에 김남조(85) 시인을 만났는데 '생애 마칠 때까지 시집 두 권만 냅시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어느 새 시집 두 권을 냈어요. 결과적으로 스스로 한 말을 어긴 셈이 됐어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문 시인의 목소리는 듣기에 얼핏 거칠었다. 악성종양으로 한 쪽 성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을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병과 싸우고 있는 노시인에게 많은 말을 시키는 게 저어됐지만, 그는 꼿꼿한 자세로 3시간여 동안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문단 실세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도 욕을 먹지 않고 언제나 점잖고 너그럽다는 평을 들었던 그의 인품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문 시인은 1971년 현대문학사에서 창간한 '시
문학'을 1973년에 인수해 40여년 동안 매달 출간하고 있다. '현대시학' 다음으로 오래된 이 잡지는 한국 문예지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문학'이 권위를 인정받고 있긴 하지만, 시 독자가 줄어든 시대에 수지 타산이 맞습니까.
"처음부터 적자였던 잡지를 인수했어요. 지난 40년간 수지를 맞춰본 적이 없어요. 계속 적자예요. 그것을 메우는 것은 발행인(김규화 시인)의 힘이에요."
―적자를 메우는 비결이 뭡니까.
(건너 편 책상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던 김규화 시인이 대신 답했다.) "전에는 정부 지원도 있었고, 기업들이 광고를 주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문 선생이 집필한 '문장 강의''오늘의 시작법' 등 대학 교재가 스테디셀러로 큰 힘이 됐어요. 시인들도 구독료 명의로 십시일반 도와줬고요. 이젠 그것도 희미해졌어요. 개인 돈을 보태 겨우 겨우 꾸려가지요."
―돈 안되는 잡지를 그만 두고 싶을 때는 없었습니까.
"많이 있었죠."(김규화)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문덕수)
―이번에 나온 새 시집 '아라의 목걸이'에는 운율을 맞춘 시조가 30여편이 들어 있더군요. 시조는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시조도 시라는 시각으로 써 본 것입니다. 보통은 정형시의 시조를 통해 언어를 압축하는 훈련을 한 후에 자유시로 오는 경로를 밟지요. 저는 역행한 셈입니다."
―고향에 관한 시 '마산에 가고파' 등이 눈길을 끌더군요. 고향에 관한 시를 전에도 썼습니까.
"예전에는 안 썼어요. 마산에서 문학 강의를 할 때 제 고향인 함안 출신의 한 여성 시인이 고향에 관한 시가 있느냐고 물어서 곤란했어요. 그 뒤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제목에 나오는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로, 제 고향 근처에 있었지요. 분명히 존재했던 나라인데 문헌 자료가 없는 탓에 우리 역사에서 쏙 빠졌어요. 그것을 최근에 알게 돼서 …."
―시인들은 대체로 고향에 관한 시를 많이 쓰지 않습니까.
"정서의 근원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바깥을 돌아다니다보니 과거를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중요했으니까요. 나이가 많아지니 고향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자연스럽게 …."
―서문에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했더군요.
"시는 자연발생적인 감정, 생각을 담는 것이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시는 의식적으로 써야 합니다. 도덕, 종교, 정치적인 것의 가치를 시 형식에 담아내야 하니까요. 도덕이 문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운 때에는 가치 면을 더 중시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6·25 때 국군으로 참전한 경험 때문에 시문학에 심취하게 됐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후에 바깥 세계보다는 내면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그는 통영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해 마산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불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입대했다. 1951년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2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철의삼각지대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군병원에서 후송돼 치료를 받다가 제대했다. 그는 "전쟁 때 온 산야를 뒤덮었던 신음과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고 했다.
"그때 전사한 동료 장병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도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문 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시조 '이 아픔'에 그 심정을 담았다.
―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등단했는데, 청마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나요.
"제가 고교 교사로 있던 통영에 청마의 집이 있었습니다. 정지용 시인이 여행을 하다가 청마를 만나러 왔을 때, 정 시인과 함께 청마를 뵈었지요.
('역사주의' 청마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문 시인의 시 세계가 정지용의 '형식주의' 영향을 더 받은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다.)
―1963년 '시단' 동인지에는 문 시인의 '선에 관한 소묘'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가 함께 발표됩니다. 정 반대 경향의 시 작품인데요.
"맞습니다. 전혀 반대죠.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 동인을 이뤘기 때문에 그렇게 됐죠. 신동엽 시인은 호리호리했는데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문 시인은 미당 서정주 시인과도 친했는데, 작품 세계로 보면 거리가 있지 않나요.
"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미당이 다른 시인과 달리 두 개의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저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현실의 세계에 천착하는 베타(β)의 눈, 그것을 초월하는 알파(α)의 눈을 미당은 다 갖고 있었어요. 보통 시인들은 하나의 눈만 갖고 보지요. 삼국유사를 다룬 미당의 시에 대해 신라 쪽을 편들었다고 하지만, 미당은 거기서 불교의 초월적 세계를 본 것이지요."
그는 199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 집행위원장을 했던 경험을 말할 때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지었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인데, 세계 각국에서 200여명의 시인이 와서 대대적으로 화려하게 치러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시인들이 개성적인 시낭송 무대를 펼쳤지요. 그것이 우리나라 시낭송에 퍼포먼스를 도입하는 역사적 계기가 됐지요."
그는 국제 앤솔러지(시선집) '시간 너머의 은유(Metaphor Beyond Time)'를 발행한 것을 대회의 큰 성과로 회고했다. 한국문학사상 유럽 작품을 포함한 국제 앤솔러지는 최초였다.
―시는 현실을 바꾸는 힘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아온 삶이 만족스럽습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존재가 결함이 많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가 싶어서 두렵습니다."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기자)
문덕수 시인은…
시인으로, 평론가로, 문학교수로, 시 잡지 편집자로, 또 문예 조직의 최고 관리자로 살아왔다. 이 모든 영역에서 이룬 성취가 우뚝우뚝 솟아 빛남은 새삼스럽게 말할 바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역시 시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김윤식)
그는 1966년 두 번째 시집 '선·공간'을 펴내면서 문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인간 내면 세계의 흐름을 조형적 이미지로 묘사한 작품들이었다. 영·미 문학의 모더니즘을 수용한 그의 작품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관념시의 틀을 벗어던진 전위적 작품으로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19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시는 문명 비판적인 요소를 담았다. 그는 이 시기의 시세계에 대해 "역사적 모더니즘쪽으로 기울었다"고 자평했다. 사물 존재의 진실을 추구하면서 역사적 논리나 관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문 시인은 2006년 시선집을 펴내며 반세기 이상 지속한 시작업 성과를 정리했다. 팔순을 넘긴 2009년에는 470행이나 되는 장시(長詩) '우체부'을 발표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정보통신이 발달한 21세기의 흐름에 천착, 지난 2004년부터 '하이퍼 시' 운동을 하고 있다"며 여전히 뜨거운 문학열정을 내보였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 세계 속의 이미지를 표현해서 역설적으로 사물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관념의 공허함을 극복하고 사물의 리얼리티를 드러내자는 것이지요.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는 시인들이 '하이퍼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인 시집도 나왔지요."
그의 새로운 시 운동은 1960년대부터 추구해 온 '내면세계의 진실 찾기' 연장선에 있다.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문학 열정은 그를 노년에도 영원한 문청(文靑)으로 살게 하고 있다.
▲1928년 경남 함안 출생 ▲홍익대 법정학부 졸업, 유치환 추천 등단(1955) ▲홍익대 국문학과 교수(1961~1994) ▲한국현대시인협회장(1981~1984),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1992),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1995),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1993~현재) ▲시집 '선·공간'(1966) '새벽바다'(1975) '문덕수시전집'(2006) 등, 논저 '한국모더니즘시 연구'(1981) '한국시의 동서남북'(2010) 등 다수 ▲서울시문화상, 예술원상 등 수상
하이퍼 시에 관한 나의 생각
신 규 호
1.
세계의 문학사를 회고해 보면, 시를 표현하고 감상하는 방법에 따라서 고대의 음유시, 중세의 음악시, 근대의 낭송시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읽는 시’로 달라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내용면에서는 고대의 영웅 서사시, 중세의 순정 연애시, 근대의 자연시, 그리고 현대의 ‘주지적 난해시’로 이어졌다. 20세기 현대시는 이전과 달리 주제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롭게 해체되었고, 과학과 산업기술의 급속한 발달, 양차 세계대전의 발발, 내면의식을 파헤친 정신분석학, 등의 영향으로 극도로 난해해졌다. 이것이 지난 20세기 말엽까지의 시 역사의 실상이다.
그러던 것이 IT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의 상황은 컴퓨터, 인터넷, 대형 TV, 핸드폰, DMB, UCC, Second Life, 스마트폰 등, 대중을 사로잡는 각종 전자매체들의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문화적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어, 대중은 이들 각종 전자매체가 제공하는 컨텐츠에 몰입되어 있다. 그 영향으로 현대시는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린 채 고사 직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매일같이 IT 전자매체가 쏟아내는 현란한 컨텐츠에 묻혀 사는 현대인(특히 젊은 세대)의 의식 구조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신인간’의 탄생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기존의 모든 가치관이나 도덕률과 상이한 의식구조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현대시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IT시대의 문화적 충격을 여하히 수용할 것이며, 이에 대응하는 어떤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으며,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고식적 관습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최근에 ‘한국시문학아카데미’ 회원들을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는 각종 실험시 운동(예를 들어 ‘하이퍼시’를 비롯해서 ‘디카시’, ‘공연시’, ‘디지털시’, 등)은 IT시대의 달라진 문학적 환경을 직시함으로써 21세기 시의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으로 나타난 것들이며, 특히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하이퍼시’ 운동은 그중에서도 전자매체의 영향을 수용하고자 시도하는 실험성이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하이퍼시’에 관한 나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므로, 다음에 하이퍼적 요소 중에서 문자시가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자작시를 예로 들어 그에 대한 견해의 일단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2.
‘하이퍼시’라는 용어에서, ‘하이퍼’는 ‘무엇’으로부터의 초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때, ‘무엇’에 해당하는 ‘텍스트(text)'의 개념으로는 주체, 중심, 이데올로기, 주제, 의미, 의식, 문맥 등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개념들은 모두 ‘언어’적이다. 하여, ‘하이퍼’는 궁극적으로 ‘언어’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하이퍼시’도 시인만큼,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인 시가 언어를 초월한다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이 모순은 ‘하이퍼시’가 궁극적으로 언어를 초월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언어의 대상인 사물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해명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하이퍼시는 ‘사물시’의 개념과 만나게 된다. 마치 19세기의 상징주의시가 시어, 즉 언어로써 존재 너머의 본질을 추구하였던 것처럼, 하이퍼시도 언어를 수단 삼아 사물 그 자체를 지향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으니, 그 까닭은 인간에게 세계를 인식하는 궁극적 수단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논의의 전제로 삼을 것은, 지난 한 세기를 주도해 온 현대시는 이제 필연적으로 오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IT시대의 새로운 생활 패턴과 무관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시문학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디 사이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하이퍼적 여러 기능 가운데에서 문자시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하이퍼적 요소 중에서 문자시에 원용될 수 있는 것은 ‘비쥬얼(visual)적 영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문자는 고착되어 있고, 따라서 전자적 하이퍼의 모든 기능을 다 수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그중에서 ‘영상’은 시어가 구축할 수 있는 이미지와 같은 시각적 요소와 상통하므로, 이 기능을 살려서 하이퍼적 영상성을 시에 수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IT 전자시대는 분명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영화, TV, 컴퓨터를 비롯한 모든 전자매체들이 모두가 영상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들 매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오늘 이 시대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21세기 현대인은 영상매체라는 ‘빅 브러더’(죠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독재자)에 의해 사고와 행동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좋든 싫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오늘의 삶이 지속되고 있고, 특히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 세대일수록 그 실상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화, 확산될 것이 분명하다.
주지하다시피, 영화적 기법에 의존하는 영상의 특징은 몽따쥬, 오버 랩과 같은 시공을 초월하는 화면의 배열에 있다. 영상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되돌릴 수 없었던 과거를 현장으로 이끌어 내어 현재화 해 보여 줄 수 있음은 물론, 미래의 모습조차 이끌어 와서 시각화 하여 상상이 아닌 실상을 실시간으로 제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공간의 배치조차 마음대로 조작하여 장면을 뒤섞어 눈앞에 현현함으로써, 공간의 질서를 초탈할 수도 있게 한다. 그것이 허상이지만, 허상이 의식을 지배할 때 허상이 실상의 기능으로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데에 이 시대의 특성이 내재한다.
그래픽 기술의 발달이 가져 온 ‘블록버스터’뿐만 아니라, 3D영화 ‘아바타’의 충격에서 볼 수 있듯이, 상상 속의 세계조차 리얼하게 현실처럼 조작하여 입체적으로 눈앞에 실현시킴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게 한다. 혼동할 뿐만 아니라 허구가 의식 속에서 현실이 된다. IT 기술의 발달이 가져 올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 지 실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수렵시대와 농경시대에 이어 산업시대를 거쳐 온 인류가 바야흐로 IT 정보화 시대를 맞아서 네 번째의 큰 역사적 격변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3.
‘하이퍼시’는 이처럼 영상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시에서 도외시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출발한 일군의 시인들이 전개하고 있는 시 운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선과 악, 미와 추, 질서와 무질서, 국가와 민족, 남과 여, 등, 기존의 양 가치나 양극화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정서적 감동과 도덕적 가치조차 변질된 이 영상시대의 문화적 현상을 목도할 때, 새로운 시적 구조 가운데 그 진실을 찾아 표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하이퍼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관한 나의 견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이퍼시’가 표현해야 하는 IT시대의 시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먼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이전 시대와 달라진 영상시대의 정서적 특징을 찾아서 그것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진실일진대, ‘하이퍼시’가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 ‘청각’이나 격렬한 동작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까지도 공유함으로써, 그 입체적 효과를 극대화 하는 영상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여 마음대로 조작함으로써 다시점, 다초점의 효과를 느끼게 하는 바, 하이퍼적 문자시가 바로 이 점을 중시하여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의 순서가 혼재해 있는 구절들을 뒤섞는다든가, 그러면서도 구와 연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점 가운데에서 나름대로 어떤 초점이 자리하고 있는 등, 그 결과로 ‘새로운 정서’가 환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퍼시’가 금기로 삼는 기존의 낡은 관념이 개입되지 않도록 장치하고 있으면서도, 작품 전체를 통어하는 어떤 초점과 함께 새로운 정서가 느껴지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초점’이란 기존의 고정관념과 상관이 없으며, 그것은 작품에서 영상적 수법인 몽따쥬나 오버 랩 등으로 처리된 표현을 통하여 새롭게 느껴지는 정서와 함께 느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정서’란 작품 속에 나열된 구와 연에 담긴 상이한 사실과 사실의 만남에서 유추되는 진실 때문에 느껴지는 감흥일 수 있겠다.
기존의 시적 문맥을 벗어나 IT 정보시대의 영상적 특징과 함께 복잡하게 해체된 현실상을 반영하고자 하면서도 시의 환정적 기능을 살릴 수 있도록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함으로써 ‘하이퍼시’조차도 시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살리고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본디, 하이퍼적 기능은 사이버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기능을 문자적 표현으로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하이퍼 시만의 형식상 특징을 지니게 할 수 있어야 기존의 시 형식과 차별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실험되고 있는 ‘하이퍼시’에 관한 견해의 일단을 언급해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실험은 실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문화적 격변기에 구태를 벗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실험한다는 것은 시사적으로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시 쓰기
함 동 선
1
우리시의 특성중 하나는 고향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박철희朴喆熙는 1920년대의 시를 “국권상실‧ 고향상실‧님상실”등 동일성을 상실한 비극적 시기라 말한다. 그런데 이 고향상실은 1920년대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전반에 걸친 실향성이라는 점이다. 정지용鄭池溶의 시「향수」는 고향의 향수가 국권상실의 조국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향수는 일제 강점기에 글을 쓴 “모든 문학가의 운명”(임철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고향상실은 8‧15광복과 분단 그리고 6‧25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 된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국토를 초토화한다. 뿐만 아니라 실향민은 760만 명, 국군 전사자는 13만 8천명, 실종자는 2만명, 부상자는 45만명, 민간인의 사상자는 24만 5천명, 실종자는 30만 3천명, 학살자는 12만 8천명, 부상자는 23만영이다. 북한군 전사자는 52만 명(부상자 포함),민간인 사망자는 200만 명(부상자 포함)으로 추정된다. 미군의 전사자는 5만 4천 246명이고, 부상자는 46만 4천 659명이다 (국방부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서)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희생자로 본다면, 베트남전(군인 120만 명과 민간인 200만 명 사망으로 추정)을 제외하고 가장 많다. 오늘도 휴전선은 남과 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6‧25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의 경우 6‧25전쟁이 일어나는 날 고향을 떠나 오늘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출향이 이러했으니 귀향은 6‧25전쟁이 끝나는 날인가 싶다. 내 고향은 38선 이남이면서 휴전 이후 미수복지구가 된 곳이다. 어머니께서 허리춤에 부적을 꿰매고 ‘잠깐일 게다’한 이 말이 62년의 이별 그만한 아픔이 되어 오늘도 어깨를 짓누른다. 이 아픔은 나 개인의 아픔만아 아니라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의 아픔이고 우리 역사의 아픔인 것이다. 강화도 인화리에서 내 고향은 몇 km밖에 안 된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마을 동쪽 끝에 있는 내 살던 집이 보인다. 이 고향을 62년간 가지 못하고 있다.
2
내가 8·15광복을 맞이한 것은 연백공립농업중학교(6년제) 2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독립이 다 된 것처럼 ‘대한독립만세’를 목 아프게 외쳤다. 그런데 슬그머니 해방이란 말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말의 혼란 속에 민심은 일본 사람의 집을 부수고 일본 책을 불 사를 때 나는 한글을 익히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때 동훈東勳 둘째 형한테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이시카와 다쿠보크를 배웠고, 우리말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이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니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 한다면서, 신조사新潮社 세계문학전집 36권과 일본문학전집을 생일 선물로 받는다. 그 형은 해주동중학교를 나온 수재로 등단은 못 했지만 시와 소설을 쓴 분이다. 오늘의 내 시적 재질은 그 형한테 받은 유산인 듯싶다. 그 형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한다. 시 「형님은 언제나 서른네 살」은 그 형을 노래한 시고, 동찬東贊 넷째 형은 일제 강점기 때 징병 1기였다. 일본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립운동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된다. 감옥에서 2년간 고생하다 8·15광복과 함께 풀려나온다. 이 형을 노래한 시가 「식민지」다.
나의 문학수업은 중학교 시절 세계문학전집과 일본문학전집을 3독, 5독하고, 형의 서재에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무정」, 「흙」, 「사랑」, <3인시가집>(이광수·주요한·김동환)을 탐독하면서다. 이 독서가 오늘의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문예반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은, 3학년 때 연백중, 연안중, 연안여중의 문예반이 모여 낸 <지우芝友>라는 동인지를 4호까지 낸 일이다. 시 「단장斷腸」 등이 발표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문예반 활동에서 기억나는 일은 강봉식康鳳植(현재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 선생의 특강이었다. 강 선생은 월남하는 길로 잠시 영어 선생으로 재직하였다. 그 특강은 김기림의 작품이었다. 그의 주지성, 회화성, 문명 비평적 태도에 대한 강의에 얼마나 가슴을 설렜는지 모른다. 이해는 못했지만 일종의 지적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다. 그 당시 창작과 모방이 분명하지 않았던 습작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 웃음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중학교 교지에 시 「비봉송飛鳳頌」, 을 발표한다. 시 「강화즉흥」은 1950년 피란시절에 쓴 작품 중의 하나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그 문예창작과는 작가 양성을 목표로 창작이론과 실기를 주로 가르쳤다. 교수진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집합체였다. 나는 스승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을 만난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문학의 수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개성이 강했다. 그중 다섯 사람이 미당 선생의 지도로 오시회午詩會를 만든다. 다섯의 음을 낮 오午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 6·25전쟁으로 이상과 꿈을 잃고 방황하던 때였다. 우리 동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치관에 절망하고 파리에 있던 헤밍웨이, 커밍즈, 포크너 등에게 미국의 작가 스타인(1874~1941) 여사가 “당신들은 모두 방황하는 세대의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이 말을 헤밍웨이가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 인용해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말을 유행시킨다. 우리 동인들은 6·25전쟁으로 기존의 이상과 가치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방황하는 세대」를 자처하고 명동 거리를 배회하면서 내일의 가치 발견에 고민을 한다.
문예창작과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시킴으로써 우리 문단의 큰 인맥을 만들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문인사관학교로 불린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이에 대한 밑그림은 초창기부터 야외 백일장, 문학의 밤, 문학특강을 주도한 오시회 및 여러 동인회의 정열, 오기, 패기, 치기, 꿈, 저항 등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특기할 일은 등단 추천제를 거부한 일이었다. 6·25 전쟁 후의 가난 속에서 시집을 내거나, 일본처럼 동인지로 등단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후배는 하나, 둘 추천을 받고 등단하기 시작한다. 미당은 만날 때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작품 가져오게” 한다. 나는 동인의 양해를 얻어 <현대문학>에 「봄비」(1958. 2), 「불여귀」(1959.2), 「학의 노래」(1959. 9)로 천료를 한다.
3
내 시는 많은 시인의 경우와 같이 센티멘탈리즘으로 출발한다. 또한 이 센티멘탈리즘을 극복하는 과정이 나의 문학수업시절이었다. 그 시절 중학교 문예반에서 받은 김기림 특강 및 서라벌예술대학에서 미당을 만난 것은, 내 시의 성장과정을 조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센티멘탈리즘의 시가 반자연, 주지성, 문명비판 등 서구지향이었다가 자연과 전통적 경험으로 회기하기 때문이다.
나의 초기시집 <우후개화> <꽃이 있던 자리><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등엔 “자연과 현실이 시적 구도의 특수성”이 된 시와 막연한 망향의식을 보여준다. 「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 「예성강하류」, 「예성강의 민들레」가 그 예이다. 이 망향의식이 차츰 「여행기」,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지난 봄 이야기」 등에서 고향상실 의식으로 바뀐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이 커지면서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감정이나 관념을 객관화하는 이미지즘 시를 가까이하게 된 게 이 무렵이었다.
이미지즘운동은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고전주의를 주장한다. 흄은 정서를 정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등가等價의 이미지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이에 미국의 파운드가 동조해서 1912년 이미지즘운동이 시작된다. 이 운동의 특징은 단순한 표현이었다.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빼고 대상을 직접으로 취급한다. 짧은 시형이 그것이다. 일본의 하이꾸의 영향이었다. 사실 일본의 하이꾸만큼 짧은 시형은 세계에 없다. 때문에 파운드는 의식적으로 그 하이꾸를 본떠 이미지즘의 근본 형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미지란 시각적 이미지다.
흄의 시 「가을」을 보자. 이 시는 시적자아가 ‘나’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시적 자아의 감정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만 있다. 농부의 얼굴을 “붉은 얼굴”로 비유하거나 별을 도회지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종래의 전통적인 시법과는 전혀 다르다. 농부는 가을걷이를 거리의 아이들은 일종의 가을의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가을의 싸늘한 감촉”만이 가을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보면 그렇게 놀랠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이미지즘의 물꼬를 튼 작품이라는 점에서 내가 애송하고 있다. 한편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에서」는 2행의 시다. 이 시의 자아는 등장하지 않고 그 자아가 본 이미지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적 자아의 감정과 주관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의 모습을 “촉촉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이라 표현한 시구에 시적자아의 주관이 표출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주관은 시각적 이미지로 바뀌어 안에 숨어들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시에 대해 “나는 30행의 시를 썼지만…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 길이의 시를 썼고 1년 후에 2행의 글귀를 지었다”고 퇴고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의 추상적이고 논리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을 배제한 그의 시작태도를 헤아려볼 수 있다. 흄과 파운드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엘리어트의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은 내가 시를 쓰는 중요한 교본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객관적 상관물은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이다. 개인의 감정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는 직접 관계없는 사물, 정황, 사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심상, 사건, 상징 등이 바로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이라는 낭만주의적 사고에 대립되는 이 개념은 개인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을 혹은 감정의 자유로운 유출을 예술로 본 낭만주의적 사고를 반성케 하는 개념이다. 개인감정은 언제나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는 주지주의자들의 입장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고 감정과 관념을 객관화한시에 대해 이유식은 말한다.
함동선은 센티멘털리즘을 싫어한다. 첫째로 시선의 55편 중 꼭 한 행을 제외하곤 ‘아…’ ‘오…’ 란 감탄사가 아예 거세되어 있다. 그리고 감탄문도 거의 없다. 명령문도 없으며 호격형의 문장도 없다. 이것은 단적으로 시인이 자기 심상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둘째 로 직접적으로 자기감정을 토로한 정감어도 없다. 감상벽이 심한 시인들의 시를 보면 무수히 발 견되는 단어가 ‘쓸쓸한’, ‘처량한’, ‘고독한’, ‘슬픈’등의 단어들이다. 그에게 ‘슬픈’, ‘쓸쓸한’이란 단어가 꼭 도 곳에서 보이고 있긴 하지만 시인 자신의 직접적인 심경이 아니라 ‘슬픈 역사’, ‘쓸 쓸한 옛날’처럼 어떤 사실을 수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센티멘털리즘을 기피했기 때문에 보 다 견고한 이미지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현란스론 수사도 피하고 조형적이고 회화 적인 이미지 그리고 묘사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특히 조형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이용은 정지용의 시세계와 연맥이 닿고 있는 듯하다.
중기 이후 고향상실의 시에 대해 오양호는 “고향”, “어머니”. “어린 시절”, “들”과 “산”이 기본항이라고 강조한다. 어머니는 내가 나은 근본이고 고향은 내가 나서 자란 곳이다. 나의 생명과 삶의 원형이 한 가지에 발원하듯이 어머니는 사랑을 잉태하고 고향은 어린 날의 푸른 하늘과 들과 산을 잉태한다.
김규동은 경셩고보(함경북도 경성)교사이었던 스승 김기림을 만나기 위해 김일성대학 조선문학과 2학년때 교복을 입고 38선을 넘어온다. 훗날 ‘후반기동인’이 되어 “우리는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안디. 우린 모더니스트이다.”라는 깃발을 들고 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을 계승한다. 이 모더니스트는 시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에서, 꿈속에 이별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한다. 「한 마디 말도 없이 /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는 이울음은, 그만의 울음이 아니라 실향민 모두의 울음인 것이다. 그리하여 꿈속의 어머니 말을 믿고 “다신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이 다짐은 우리 민족이 만나는 그날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의 귀향을 고무적이다. 고향상실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바로 고향회복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향이고, 고향은 어머니인 것이다. 이 어머니는 생명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에 주어진 가장 위대한 선물인 것이다.
시 「어머니 생신날의 기제사」의 경우 젊은 나이에 ‘잠깐일 게다’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난 지 60년, 그 아들은 어머니 생신날 기제사를 지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몰라 생신날 기제사를 지내는 이 불효, 자신의 도리를 기키지 못해 절만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옛날의 목소리로 “음복하라 음복하라 음복하라/ 이 밤 한줌의 재 남기지 않고 탈 때까지” ‘음복하라’고 한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실향민 모두가 불효라는 걸 확인시킨다.
함동선 시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담론을 펼치고 있다고 평가받는 민중시 계열의 고은, 신경림, 김지하 등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다. 민중시 계열의 시인들이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정치성, 운동성을 띠고 집단성을 드러내면서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결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 비하여, 함동선의 시적 담론은 매우 내재화되면서 정치성·운동성이 배제된 채, 소리 없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함동선이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민족적 체험의 정서는 분단의 역사적 상황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게 하지 않고, 시적 상상력을 부추기면서 지적 성찰의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 동인으로서 중요한 시적 모티브다. 이 비극적 모티브를 동력으로 삼아, 함동선은 느낌과 깊은 생각이 잘 어우러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슬픔, 고통, 그리움, 그리고 역사의식 등을 한결같이 형상화해왔던 것이다.
----------「분단시대와 함동선 시의 자리」에서
이상옥의 이 글은 내 고향상실의 시와 분단시대의 우리 시를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아진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향수라 한다. 이 향수는 타향에 사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욕망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주제는 “귀향”(이태수)이라 한다. 「오디세이아」는 아타카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중 해상에서의 여러 모험을 겪고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한 왕자를 살해하고 아내와 재회하는 내용을 노래한 서사시다. 이 귀향의 의미를 “자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이태수)로 해석한다. 채수영蔡洙永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정숙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명처럼 여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이끌려 그 고난의 여정을 겪으며 귀향한 것이다. 내가 수십년간 산에 들고 난 것은 귀향을 위한 잠재적 귀소본능의 표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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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는 나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한다. 엘리어튼는 『시의 세가지 목소리』에서 서정시 lyric를 “옥스퍼드사전에서 인용하면 ”짦은 시에 대한 명칭… 시인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제1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에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이고, 제2의 목소리는 청중에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이고, 그리고 제3의 목소리는 시인이 만들어낸 극중인물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목소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제1의 목소리는 시인 자신의 어떤 기분, 어떤 기쁨, 한숨 혹은 고통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진실하고 집중적이고 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서정시의 양식이다. 시가 독자에게 발언하면 서사시다. 서사시는 청중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이 서정시에 대해 미당은 말한다. 동양에서 ‘抒情詩’다 번역한 lyric는 ‘情을 抒하는 시’뿐만 아니라, 지혜로써 추구하는 사상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는 가슴으로 쓰느냐 머리로 쓰느냐 하는 물음은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논쟁에서 시작된다. 이 역사적 논쟁을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뇌와 심장이 중요한 기관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이 시도 머리와 가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머리와 가슴 어느 부분이 시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그 둘을 어떻게 하나로 구성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감정의 분출로 본 낭만주의 시는 지성의 절제가 부족하고, 지성 편중의 모더니즘 시는 감정을 배제하고 공허한 언어유희와 세계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시의 지성에는 심장이 뛰는 감정의 광맥이 있어야 하고, 시의 감정에는 풍자, 아이러니 등 주지적 사고가 받쳐주어야 한다. 이같이 시란 서로 다른 두 개의 경향이 생명의 전체성을 표현해야 한다. 풍요한 정신이란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경향이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풍요하게 개화시키는 정신이다. 때문에 나는「시」에서 시란 “가슴에서/머리로 가는 여행이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협회 및 회원 동정
탈북자 북송반대 성명서 발표 및 시낭송
2012.3.15. 오후 3시 경복궁역 앞 중국대사관
일부 언론매체에서도 집중취재
본 협회에서는 2012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 종로구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 큰길 건너편 옥인교회 출입계단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탈북자 강제북송반대’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참여한 시인은 심상운 신규호 손해일 최진연 정연덕 조명제 윤희선 여영미 안광태 정무수 나석중 이선 이솔 홍천안 정유준 민문자 강정화 이춘하 김진중 오양호 권희자 등 21명이다. 이날 현장에서 조선일보, 한국ngo신문, 뉴데일리, 통일신문, 문민자 기자 등 여러 사진기자와 편집기자들이 한국현대시인협회의 집회를 취재하였다.
상임이사 정유준의 사회로 부이사장 손해일이 성명서를 낭독했고, 이어 이사장 심상운이 한국현대시인협회의 비정치적인도주의의 입장을 표명했고, 강정화 이춘하 최진연 이선 시인이 탈북자 북송반대를 주제로 한 시를 발표했는데, 이선 시인의 포퍼먼스가 행인들과 기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취재 나온 <뉴데일리> 기자 윤성희는 종교단체의 집회보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면서 시인들의 관점이 들어 있는 성명서의 내용과 이선의 포퍼먼스를 주시하고 조명했다. 아래 기사는 2012년 3월 16일자 <한국ngo신문>에 실린 기사의 중요부분이다.
"탈북자 정치 범위 넘어 인도적으로 보호 받아야"
한국현대시인협회 '탈북자 북송 중국 정부의 인도주의적 해결 촉구'
중국내 탈북자 북송문제와 관련 시인들이 목소리를
내고 나섰다. 1200여명의 시인들이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현대시인협회>는 15일 성명서를 통해 중국내 탈북자들 문제와 관련 인도주의적 차원의 해결을 촉구했다.
한국현대시인협회는 이날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누릴 신성한 권리를 부여 받았다."면서, "그럼에도 세계 곳곳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고 있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고"고 강조했다. "특히 북한주민들은 자유가 제한된 환경 속에서 식량난 등으로 생존권조차 위협받고 있음은 국제사회가 이미 주지하는 바다. 그러므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거는 북한동포의 탈북은 정치적 범위를 넘어 인도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중대 현안이 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중국정부는 1960년 체결된 <조-중 탈주자 및 범죄인 상호인도 협정>을 앞세우지 말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인류 복지를 고려한 차원 높은 시각으로 “국내법과 국제협약이 상충될 때는 국제협약이 우선한다.”는 유엔헌장 103조 등을 준수해 주기 바란다.“는 것을 강조 했다.
<뉴데일리> (3월 16일자)에서는 ‘따듯한 봄, 탈북자도 느낄 수 있을까?’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집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부종교단체 위주에서 범종교적 집회 시도
일반 시민단체에서 문화단체까지 참가라는 표제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시인협회는 "한국 시인들은 중국이 두보, 이태백, 도연명 등을 낳은 시의 나라이며,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동양정신이 살아있는 나라라고 믿는다. 따라서 탈북자에 대한 중국정부의 인도주의적 해법을 기대한다. 이는 중국을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윤리의 대국으로 만드는 큰 길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시인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선 시인이 탈북자들을 생각하며 지은 '다리를 건너다'라는 시를 낭송하며 행위예술을 선보였다고 하면서 퍼포먼스 사진과 시의 일부를 인용보도 했다.
이날 시낭송은 강정화, 최진연, 이춘하, 이선 시인 순서로 이어졌다. 정치적인 목적을 전혀 배제한 만큼 시인은 시로 표현해야 한다는 기본철학을 실천한 것이다.
강정화 시인은 <나팔수 되세나> 시를 통하여 ‘우리 모두 나팔수가 되어 탈북자 강제북송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자고 했고, 탈북자 강제북송 문제를 가장 먼저 협회시인들에게 이메일로 제기한 최진연
시인은 <눈물의 강제 이별>에서 ‘임신한 언니와 형부가 각각 다른 감방에서 지내며 이별하는 눈물겨운 상황’을 시로 표현하여 중국대사관 앞에 함께 있던
다른 집회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춘하 시인은 <프리즈>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하였는데, ‘제발 살려 달라’는 절규가 짧지만 강도가 높은 의미를 던졌다.
이선 시인은 <다리를 건너다> 라는 제목으로 즉석 시낭송 퍼포먼스를 하였다. 긴 흰 광목 천 두 개를 길바닥에 깔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표현하면서 해와 달이 그려진 초록 머풀러를 나부끼며 거리를 달리며 공연을 시작하자, 참관하던 악사가 단소로 배경음악 반주를 넣어주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긴 초록 머풀러를 버리고 다시 흰 긴 머풀러로 탈북자의 희망
과 절망을 표현하면서 죽어서라도 ‘압록강에 오른발 걸치고, 백두산에 왼발 걸치고 징검다리 무지개’가 되어 조선 땅을 지키고 싶다는 탈북자들의 마음을 비장하게 표현할 때 거리의 행인들과 기자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인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 낭독과 퍼포먼스를 한 것은 정치목적을 모두 배제한, 죽음으로 끌려가는 북한동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에 대한 위해는 어떠한 이유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인들의 간곡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집회가 끝나고 이선 사무국장에게 조선일보, 엔지오 신문, 뉴델리 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 왜 시인이 집회에 나왔는가? 퍼포먼스는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 앞으로 탈북자 문제에 대한 현대시협의 방향은 어떻게 갈 것인가?” 등을 물었다. 그것은 집회를 보는 시선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탈북자 북송반대 성명서
“중국정부의 인도주의적 해결을 촉구한다”
사단법인 <한국현대시인협회> 1,220명 시인일동은 최근 강행되고 있는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 사태를 맞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를 중단해줄 것을 촉구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누릴 신성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고 있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특히 북한 동포들이 자유가 제한된 환경 속에서 식량난 등으로 생존권조차 위협받고 있음은 국제사회가 이미 주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북한동포의 탈북은 정치적 차원을 넘어 인도적 입장에서 보호받아야 할 현안이다.
중국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2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였으며, 1988년에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중국이 탈북자 문제를 정치적 이해득실보다 인도적 입장에서 해결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1960년 체결된 <조-중 탈주자 및 범죄인 상호인도 협정>을 앞세우지 말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인류 복지를 고려한 차원 높은 시각으로 “국내법과 국제협약이 상충될 때는 국제협약이 우선한다.”는 유엔헌장 103조 등을 준수해 주기 바란다.
한국 시인들은 중국이 두보, 이태백, 도연명 등을 낳은 시의 나라이며, 노자, 장자, 공자, 맹자의 동양정신이 살아있는 나라라고 믿는다. 따라서 탈북자에 대한 중국정부의 인도주의적 해법을 기대한다. 이는 중국을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윤리의 대국으로 만드는 큰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인들은 다른 사회단체들도 인권문제와 아울러 탈북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높여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망한다. 아울러 우리 정부가 외교적 노력과 해결책을 한층 강화해 주기를 촉구한다. 우리 국민들도 탈북자 문제의 심각성을 재인식하고, 국내외 여론 확산에 적극 협력해 주기를 기대한다.
2012년 3월 15일
사단법인 한국현대시인협회 시인일동
❀ 예천 봄 문학기행 성료
2012 한국현대시인협회 봄 문학기행(예천)이 4월28일(토)에 실시되었다. 서울 지역 85명의 회원들과 대구, 안동 등 지방 회원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용문사 보광명(普光明殿) 앞 계단에서>
휴일이라 차량 정체도 있었지만 서초구청 앞에서 8시 20분에 출발한 버스 2대는 12시에 회룡포의 안마을인 대은리로 들어섰다. 그러나 금당실 마을에서 이미 점심 만찬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아쉬운 발길을 돌려 금당실 전통마을로 달려가서 상임이사정유준의 사회로 심상운 이사장의 도서기증 행사와 점심식사를 마치고 마을관광을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상임이사 정유준 시인이 주선하여 예천군청의 지원과 예천문인협회의 협조로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시문학사>에서 기증한 도서와 회원들이 준비해 온 개인시집 등 600여권의 도서들을 예천군의 도서관에 기증했다.
예천지방의 안내는 예천이 고향인 최진연 시인(1호차)과 정유준 시인(2호차)이 맡아서 했는데, 개인적인 추억이 곁들인 이야기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관광은 금당실마을 뒤편 오미봉에 올라서 마을 전경조망 후에 용문사 윤장대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초간정에 잠시 들렀다가 출렁다리를 건너는 코스로 진행되었다. 양수발전소와 곤충박물관은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 기회로 넘기고 예천 관광의 중심이 되는 회룡포(回龍浦)로 달려가야 했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800m가 넘는 오르막길이어서 연로하신 시인님들께는 힘든 산행길이 었지만 회룡포의 물돌이 절경을
<전망대에서 본 회룡포 전경>
보게 되어서인지 다들 흐뭇한 표정이었다.
6시20분 돌아오는 차내에서는 막걸리로 목을 축여가며 회원들의 시 낭송과 달리는 노래방을 체험했다. 하루 코스로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봄기운을 피부로 흠뻑 느낄 수 있는, 그래서 시가 되고 노래가 될 수 있는 감성과 영감을 충전하는 하루였다.
❀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주최, 덕수궁에서 고교백일장 개최
-----엔지오신문에서
2012년 5월 19일, 고궁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덕수궁에서 (사)한국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8회 전국고교백일장이 열렸다. 전국고등학교에서 각 학교에서 3명씩 3편의 시 작품을 응모하여, 그중 예선에서 당선된 75명의 학생들이 재능을 겨룬 것이다.
아이돌가수와 가요에 밀려 문학과 시가 설 땅을 잃어버린 이즈음, 고등학생들이 열심히 고민하며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시를 창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시의 희망을 보았다.
구미고, 부산국제고, 울산중앙여고, 창원여고, 점촌고, 홍천여고 등 멀리 지방 학생들도 새벽부터 달려와 재능을 겨루었다. 심상운 이사장의 환영인사와 심사위원으로 손해일, 강정화, 이춘하 부이사장, 신규호 평의원, 오양호 지도위원, 최진연 심의위원장, 조명제 감사 이선 사무국장, 정호 사무차장, 양윤덕 간사 등을 소개하고 간단히 기념식을 마치고 바로 백일장으로 들어갔다. 심사위원장은 심상운 이사장이 맡고, 심사평은 조명제 시인이 맡았다.
공정한 평가를 위하여 핸드폰과 소지품은 협회에서 보관했다. 핸드폰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 학부모의 개입, 교사의 지도를 우려하여 감독에 긴장감을 높였다. 참가 학생들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3시간 동안 <제목: 햇빛, 그늘, 연못, 궁, 유리창, 휴대폰, 의자, 틀, 냉장고, 신록> 등 열 개의 시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시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시작한 지 20분만에 다 했다고 원고를 제출하고 가는 학생도 있었지만, 제대로 작품 한편이 나오려면 구상에서 퇴고까지 얼마나 고심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학생들이 많았다.
오후 4시에 작품수합을 하고 곧바로 심사에 들어갔다. 고궁의 아름다운 정취와 자유로운 분위기, 여러 개의 확장된 제목을 내준 덕분인지 예년보다 수준 높고 개성적인 시 작품이 많았다. 심사위원들은 검정볼펜으로 1차 심사를 하고 빨간 펜으로 2차, 3차, 4차 점수를 매겨가며 엄정한 심사를 하였다.
이번 고교백일장의 특징은, 우편으로 보낸 예선대회 작품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의 대거 탈락이다. 기성시인처럼 조사 하나도 틀린 것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냈던 학생들보다, 예선 때 보통성적이었던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장원을 한 구미고 2학년 이희수 군은 지방 문학교육의 우수성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수상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수상자와 수상작품은 다음과 같다.(정호/사무차장 글 )
장원/ 유리창: 구미고등학교 2학년 이희수
차상/ 연못: 부산국제고등학교 2학년 4반 정지윤
휴대폰: 화곡고등학교 2학년 5반 지수범
차하/ 유리창: 양재고등학교 2학년 6반 신희재
틀: 정신여자고등학교 3학년 신예은
궁: 울산중앙여자고등학교 3학년 변지운
장려상/ 그늘: 자양고등학교 2학년 조소은
그늘: 명덕여자고등학교 1학년 배승연
유리창: 보은고등학교 2학년 김성현
햇빛: 명일여자고등학교 2학년 정영현
시상식은 11월 1일 <문학의 집>에서 <시의 날> 행사장에서 여러 원로 시인들을 모신 자리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하기로 하였다. 당선작품과 심사평은 한국현대시인협회에서 발간하는 반년 간 문예지『한국 현대시』(2012년 전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다.
❤영주 <별밤 시낭송회> 스케치 -민문자
지난 5월 10일~11일, 영주 <별밤 시낭송회>에 다녀왔다. 이번 행사는 본 협회 발전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회장단을 비롯한 발전위원, 그리고 협회의 발전을 위해 찬조를 아끼시지 않은 분들을 중심으로 한 단합대회인데, 여영미 회원의 알선으로 선비촌에서 무료 숙식 제공도 받았다.
1. 순흥리 고분벽화와 선비촌
선비의 고장 영주는 마침 《2012. 영주 선비문화 축제》가 선비촌과 소수서원에서 5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기간이라 우리들 볼거리가 풍성하였다.
선비촌에 도착하기 전에 순흥리 고분벽화를 감상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우리가 하루 묵을 선비문화수련원에 도착하니 유등광장에는 ‘선비상’과 선비의 인품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유등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의 관심을 끌었다. 마침 어린이 선비체조 발표회가 열리고 있는 무대를 지나서 수련원에 각각 4~5명씩 나누어 입실하였는데 한식 방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 방은 8호실이었다.
2. 천연염색 체험
선비촌 문화체험의 하나로 류광순 강사의 지도로 천막 안 학습장에서 염색체험을 하였다.
류광순 강사는 천연염색은 나무, 열매, 흙 등의 재료로 자연 섬유에 물을 들이는 것이며 모든 염료로 모든 색을 다 표현해 낼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을 다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소목 : 자주색, 보라색, 붉은 색
치자 : 노란색, 치자 떡
염색 실습 : 흰 섬유(인조견, 면, 비단)를 염색한다.
문양 넣는 법은 홀치기 방법과 종이접기 식으로 접고 고무밴드로 묶어 문양이 생기게 한다.
선이 나오게 하려면 나무젓가락을 맞물리게 하고 묶는다.
3. 다례 체험
다례 체험을 맛보기 위하여 명경당(明鏡堂)으로 들어가 앉았다.
정갈해 보이는 적황색 자연섬유를 입은 지도교사는 행다(行茶)에는 첫째 청결과 온도를 유지해주는 예열과정과 둘째 떫지 않고 맛있게 차를 우리는 과정과 셋째 온도에 맞게, (오늘은 황차 70〬~90〬C) 넷째 설
<영주 선비촌에서의 다도체험)>
거지 과정이 있다고 하였다. 다관에 1인 1g 정도의 차를 넣고 우리는 시간은 1~2분, 뜨거운 물로 우리는 것은 세 번 우린다. 찻잔 받을 때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받쳐 들고 30초~2분까지 세 번에 나누어 마신다. 손에서 입으로 색과 맛을 음미한다. 마실 때 받침대는 놓고 잔만 들고 마신다. 손님께만 받침대 드리고 주인은 잔만 들고 마신다.
4. 별 밤 시낭송회
영주 선비촌 마당에서 열리는 2012 선비문화축제로 일곱 시부터 대금과 해금연주, 기타 치며 부르는 가수들의 가요를 감상하고 정유준 시인이 색소폰 연주, 이선 시인이 시극 퍼포먼스를 연출하여 감상하였다.
우리 <별 밤 시낭송회>는 2012년 5월 10일 밤 아홉 시, 애석하게도 구름 낀 밤인지라 별빛 없는 곳, 낮에 천연염색을 체험했던 천막 안에서 이선 사무국장의 사회로 정유준 상임이사의 감미로운 색소폰 서곡 연주로 시작되었다. 심상운 현대시협이사장은 인사말 서두에 정유준 상임이사가 낮에 나무 이름 역사 이야기 등을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해 주고 색소폰도 때에 맞추어 잘 불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오늘 <별 밤 시낭송회>는 마음껏 마시고 이야기 많이 하고 즐겁게 함께하는 시간되기를 바란다며 다 같이 ‘별 밤을 위하여’를 외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건배사를 겸해서 인사말을 하였다.
실컷 떡과 술, 다과 음료, 포도, 방울토마토 등으로 입을 즐겁게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끼를 발산하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낭만의 밤이었다.
5. 무섬마을
마지막 여정으로 무섬마을을 돌아보았다.
별나게 아름다운 자연환경 아래 고집스럽게 유학의 전통을 이어 가려는 숨은 뜻이 엿보이는가 하면 마을 깊숙이 들어가도 인적을 느낄 수 없는 모습은 젊은이들의 도시로의 탈출로 현대 우리 농촌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고장이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터전, 해방 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였던 인가가 이제 남아있는 43채에 사람이 사는 인가는 26채, 인구 40명이란다.
젊은 사람이라 칭하는 60대가 소년, 70대는 청년, 80대는 장년, 90대라야 노인 축에 든단다. 하회마을, 회룡포와 같이 태백산 줄기 끝자락 뒷산 끝에 집들이 형성된 마을에 아홉 골짜기의 물이 돌아서 내성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동네, 옛날에는 영주에서 가장 부자마을로 유학을 숭상하고 선비정신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며 아도서숙을 세워 농촌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산실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마을사람 사람들이 모두 친인척으로 연결된 곳이다. 이곳은 농토와 샘, 대문과 담이 없는 곳이었다. 물은 백사장을 파 자연 정수된 물을 먹는 곳이었다. 조지훈 선생의 처가마을이었다는 이 마을에 선생의 시비가 있어 우리는 사진으로 이곳 풍광을 담았다.
6. 포공영 시집 출판기념
이번에 『포공영 시집』을 출간한 포공영 시인이 함께하여 더욱 뜻있는 문학기행이 되었다. 본명은 도재욱, 평생 교사로 보내다 명예퇴직 후 시인이 되어 민들레같이 살
고 싶다고 포공영이라는 필명을 쓴단다.
누구에게 시 공부를 한적 없으며 오로지 홀로 깨우치려는 고집을 부려본다는 그에게서 시를 깨치려는, 도를 깨치려는 도인의 풍모를 느낀다.
우리 일행은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이선 사무국장의 사회로 『포공영 시집』에서 골라 모두 한 편씩 시 낭독을 하여 포공영 시인을 축하해 주었다. 시인은 답례로 맛난 경주빵 1상자씩 또 우리에게 선물해 주고…….
아름다운 계절 사람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답게 보낸 시간 영원히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하리라.
7. 그대 선비화를 보았는가.
부석사 위쪽 조사당은 국보 19호로 고려 우왕 3년에 건립되었다.
이 조사당 처마 밑에 있는 선비화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에 핀다고 한다.
올해는 윤달이 있어서인지 5월10일(음력 윤3월 20일)에 활짝 피었다.
가을에만 몇 차례 왔던 관계로 꽃을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황홀하게 핀 꽃을 보니 여간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시가 돋고 잎이 피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는 선비화는 골담초였다.
선비화(禪扉花) /이 황
옥 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켰는데
석장이 꽃부리로 화 하였다고 스님이 일러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禪扉花 /李 滉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擢玉森森依寺門(탁옥삼삼의사문)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장두자유조계수)
회원들의 발간 및 수상 소식
*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하이퍼 시』사화집 발간
2011년 11월 5일 대부분 본협회 시인들로 구성된 ‘한국하이퍼시클럽’의 사화집『하이퍼시』가 월간 <시문학사>에서 발간되었다. 2008년부터 월간『시문학』을 통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하이퍼시 운동’은 21세기 IT 시대를 배경으로 서구시론의 모방에서 벗어난 한국현대시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하이퍼 시론’을 바탕으로 한 시운동이라는 점에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물결’이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언론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아래 인용 기사는 2011년12월27일 <국민일보> 쿠키뉴스에 올라온 <동양일보> 문화면의『하이퍼시』기사다. 이외에 월간 문화잡지 <참좋은이들21> 2012년 1월호에서도 ‘하이퍼시 운동은 한국적 특성을 지닌 유니크한 현대시 운동의 물결’이란 타이틀로 3페이지에 걸쳐 집중 조명했다.
『하이퍼시』20인 사화집 발간-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물결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역시인 20인의 사화집 ‘하이퍼시(hyper poetry)가 최근 발간됐다. 이 사화집의 시편들은 IT 시대를 배경으로 한 현대인들의 복합의식(의식+무의식, 현실+가상현실)을 시로 표출하고 있다. 사화집의 시편들은 일상의 사실적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통해 기존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관념에서 해방된 이미지 세계의 밑바탕에는 한국현대시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관념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저항의식이 깔려 있다. 그것은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라는 ‘발간사’(편집발행인 김규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화집에서는 강영은·고종목·김규화·김금아·김기덕·김영찬·김은자·박이정·손해일·송시월·신규호·신진·심상운·안광태·위상진·이선·이솔·정연덕·조명제·최진연 시인의 시 100편을 만날 수 있다. 책에 담긴 시는 인습적인 사유와 관념을 거부하고 상상적이고 혁신적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사화집의 끝부분에는 「하이퍼시 개관’(문덕수)」「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심상운)라는 ‘하이퍼시론’이 함께 담겨 독자들에게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자생적인 시론인 하이퍼시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문학사, 235쪽, 1만7000원> 2011년12월27일 20시47분 동양일보 <김재옥 기자 >
* 김철기 제10시집 『노을 순백으로 웃다』(2011,10,5 한누리미디어) 발간. 김광기 시인은 <작품해설>에서 김철기 시인의 시를 ‘삶의 비의에 내재된 순명의식’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
* 서병진 시집 『고향은 어머니 강』(2011,10,27 문예춘추) 발간. 도창회(평론가)는 <평설>에서 서병진의 시를 “향수에로 향한 토속적 정서가 배인 서정시”라고 했다.
* 정유준 시집 『편백나무 숲에서』(2011, 10,30 시문학사) 발간. 문덕수시인은 서문에서 편백나무의 교류와 만남은 이 시인에게 뭔가 특이한 경지가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자연’에 있고, ‘자연의 도리’를 생각하고 터득하는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권숙월 시집 『가둔 말』(2011,11,11 시문학사) 발간. 장무령시인은 <해설>에서 “ 권숙월 시는 자명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언어이며, 이를 향해 전진하는 일관된 삶의 자세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이다.”라고 했다.
* 최진연 제10시집『하나님 할아버지와 환상 여행』(2011,11,12 좋은글배달부) 발간. 권말에 시인의 문학 평론「한국현대시와 기독교」를 수록하였다.
* 부산시문학시인회『부산 詩文學 사화집 18』(2011, 11,30 도서출판 푸름사) 발간. 수록시인 한경동, 탁영환, 최지인, 조영희, 조민자, 장동범, 장대규, 이혜화, 이병구, 이몽희, 윤정숙, 송인필, 백영희, 배기환, 김인권, 김지숙, 고훈실, 강정화, 강남주 등 19명
* 권희자 시집 『별빛으로 오시는 어머니』(2011, 12, 10 도서출판 천산) 발간. 이혜선 시인은 <시집평설>에서 “권 시인의 시에서 꿈꾸는 삶의 날갯짓 속에 미래지향적 시의식을 엿 볼 수 있으며, 자연과 자아를 동일화하는 우주적 사고가 깃들어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 맹숙영 시집 『꿈꾸는 날개』(2011,12,22 창조문학사) 발간. 홍문표시인은 <시평>에서 “무한한 생성과 꿈으로 출발하는 봄의 미토스를 날줄로 하고 자연 공간이 갖는 창조적 신비를 씨줄로하여 시적 상상력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고 했다.
* 경규희 시조집『햇살로 찍은 낙관』( 2012,1,5 고요아침) 발간. 채수영(시인, 평론가)은 <해설>에서 “경규희의 시조에는 투명한 정서로 길을 내는 감수성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깔끔한 인상을 자극한다. 이는 언어 운율의 기교가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꾸밈이 없어야하는 절제의 미감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 문덕수 시집 『아라의 목걸이』(2012,1,10 시문학사) 발간. 시인은 <자서>에서 “시조형식의 시 다수가 포함되었다. 수록 시가 모두 하이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관련이 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자연발생적인 부분도 있으나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안혜경 시집 『여기 아닌 어딘가에』(2012,1,25 시문학사) 발간. 양병호 시인은 <해설>에서 “시인의 시선은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그러나 시인은 눈에 포착되는 대상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세계 또는 사물들은 시인의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대리물로 복무한다.”라고 했다.
* 노유섭(부이사장)시인은 2012년 2월 25일 압구정동 세실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예술가곡연주회에 출연하여 자작시를 발표했다.
* 나석중 시집 『물의 혀』(2012,2,27 문학의 전당) 발간. 조혜옥(평론가)은 <해설>에서 “그는 새 시집『물의 혀』에서 불변의 사물들인 돌과 식물들을 매개로 하여 삶에 대한 성찰을 본격화하고 심화시킨다.”고 했다.
* 문덕수문학연구 .Ⅱ(글렌 에반스 외 지음 신규호 엮음) 2012년 3월 5일 <시문학사> 발간. 이 책은 주로 문덕수의 장시 『우체부』와 관련되는 평설과 문덕수의 시론에 대한 평설로 엮어졌다. 신규호(시인, 「우체부」평설 편집위원장)는 발간사에서 “이 책은 문덕수의 시론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나, 한국시의 높은 레벨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리고 문덕수의 주지주의의 시적 경향을 말하면서 “근자에는 「하이퍼시 개관」(『하이퍼시』에 수록)을 비롯한 하이퍼시에 관한 논문을 많이 발표하여 사물시⟶하이퍼시⟶주지시의 논리적 맥락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책의 구성은 1부와 2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는 미국의 저명시인 글렌 에반스(Glenn Evans), 미국의 시인이며 출판사 사장인 존 피터슨(John Peterson), 미국 시인 알리시아 그레고리(Alicia Gregory), 일본계 미국의 시인 애미 아이(Ame︠ Ai), 한상희(코리아 타임스 문화부기자), 최연홍(재미한국시인, 비평가) 이태동(서강대교수) 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의 영문 원고가 원문그대로 수록되었고, 2부에는 신규호(시인), 김유중(서울대교수), 유승우 (시인), 심상운(시인) 한영옥(시인, 성신대 교수),문혜원 (아주대교수), 진순애 (성균관대 교수)의 평설문이 한글로 수록되어 있다.
* 신현득 동시집 『째깍째깍, 너는 내 친구』(2012,3,15 대양미디어), 신현득 시집『우리를 하나의 나라고 하라』(2012,3,10 세손출판사) 발간. <책머리에/하고 싶은 말>에서 “나는 동시를 주업으로 삼는 시인으로서 일반시집으로는 이 책이 다섯 번째의 것이다. 온 국민이 시를 즐길 수 있도록, 일반시에서도 동시의 기법으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 정재호 시집 『그 말 한마디』(2012,3,15 도서출판 그루) 발간. 문덕수시인은 <해설>에서 “내가 본 정재호 씨의 작품은 두가지 방향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에 투철하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에의 방향이다.”라고 했다.
* 김시철 시집 『남의 밥그릇』(2012,3,30 시문학사), 『그때 그 사람들 』(2012, 3,30 마을) 발간.『그때 그 사람들 』은 한국문단에서 활동했던 문인을 대상으로 한 인물시집이라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시집이다.
* 최규철 시집 『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2012,3,30 시문학사) 발간. <시인의 말>에는「형이상학시의 주장」이라는 시인의 21세기 시론이 있다.
* 조명제(시인, 평론가)이 2012년 3월 25일 중앙대문인회(회장 권용태)에서 수여하는 제17회<중앙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시집은『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노래』다. 이 시집은 2010년에 발간되어 한국현대시의 영역을 확장한 문제 시집으로 평가되었다.
* 윤제철 제4시집 『가려지지않는 흠집』(2012,4,5 도서출판 천우) 발간. 시집의 앞 부분 <시집을 내면서>에 「부지런이 공부하고 반성하는 마음」이라는 ‘자작시의 해설’이 있다.
* 김형익 시선집 『未忘미망』(2012,4,15 월간문학 출판부) 발간. 시집의 뒤표지에 “나는 시를 성전(聖典)처럼 읽고 시 쓰기를 고해하듯 참된 마음으로 써 왔다”고 했다.
* 김시종 29시집 『영원한 모자(母子)』(2012, 4,19 보성출판사) 발간.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김시종 시인은 독특한 개성의 풍자시(諷刺詩)로 일가(一家)를 이룬 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 시집에는 1970년대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신석초, 백승철, 신경림, 김우창의 평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김시종 시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 이승용 시집 『춤추는 색연필』(2012,4,20 시문학사) 발간. 이 시집은 1990년 등단 후 첫 시집으로 20여년 변해온 시적 경향이나 작품성이 편차를 보이고 있어서 이승용 시인의 시적 성숙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 최규철 시집 『맹물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출판기념회를 2012년 5월 6일 고 김혜순 사모의 추모회와 겸하여 영신교회 본당(지하 2층)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목사의 인도로 추모예배가 먼저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행되었고, 이어서 홍문표 시인의 사회로 시집출판기념회가 진행되었다. 문덕수 시인은 축사를 겸해 평설을 했는데, 이 평설은 형이상학시를 지향하는 최규철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이해를 선명하게 부각했다. 이어 원응순 교수, 신규호 시인과 박진환 시인 등의 평설에 이어 후배시인들의 시의 낭송으로 출판기념회는 감동적인 절정을 이루었다.
* 포공영 시집 『금빛 메아리 눈 총총타, 귀 쟁쟁타』(2012,5,15 도서출판담장너머) 발간. 권말 <시인의 말>에서 포시인은 “시를 쓰면 작고 하찮은 것들의 귀중함을 본다”고 했다.
* 최은하(평위원)시인 <제 15회 한림문학상>수상. 2012년 5월 19일 광주시 동구문화예술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사)한림문학재단 이사장 박형철은 한국문단을 발전시키고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최은하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였다고 했다.
* 박재릉(평위원) 시인 『가야의 혼』으로 제13회 <청마문학상 > 본상수상. 시상식은 2012년 7월 6일 통영문학제 개막식에서 있을 예정이다. 청마문학상은 통영 출신인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제정됐으며, 수상자는 2천만 원, 신인상 수상자는 각 5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 이솔 시인 『수묵화 속 새는 날아오르네』로 제13회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 박희정 시인 시조시집 『들꽃사진』으로 제13회 <청마문학상) 신인상 수상.
* 진헌성 시 연구 3 (도서출판 한림) 발간. 필자 조남익 김규화외 12명. 진헌성 시인은 감성적인 시에서 벗어나 과학적 물성의 유물론적 사고를 시상화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펼쳐오고 있다.
*김미정 시인 <한국문인상> 시부 본상 수상. 수상시집 『흙은 만지다』
* 유회숙시인/ 한국편지가족 표창(편지쓰기 문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
* 윤희선 장편소설 /<눈꽃향기> 발간
* 김자현 제2시집 <앞치마를 두른 당나귀> 발간
* 자운영시인회시집/<풀빛예감>발간/ 권미오, 박성주, 손광세, 이남숙, 이애경, 최인경, 최진엽, 홍영숙
* 김점숙 시집 『꽃몸살』(문학의 전당 2012, 4,20) 발간. 지창영 시인은 <해설>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우리 시대의 아픈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김철교 시인 『영국문학의 오솔길』(시문학사 2012,5,10) 발간. 원응순 교수는 <감수의 글>에서 “저자의 섬세하고 탁월한 안목에서 나온 작품 평은 물론, 저자 나름으로 삶을 보는 예술적〮〮, 철학적 시각까지 가미되어 독자들에게 독서의 기쁨과 안식을 주기에 넉넉한 글이라고 확신한다.”고 하였다.
1) George Santayana: <Interpretation of Poetry & Religion>(N·Y Scribners,1900). 서문
2) 권기호, 『선시의 세계』(경북대 출판부, 1991) 참조
3) 오세영, 『현대시와 불교』(살림, 2006). <시의 구조와 불교 존재론> 참조
4) 모든 종교는 신비한 존재(신)와 자아의 일체감 또는 신비를 매개로한 자아와 우주의 합일을 본질로 하는데 이런 점은 서정시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예, <알 수 없어요>).
5) T·S Eliot(1888~1965)의 <황무지;The Waste Land>
허망한 도시/ 겨울 새벽 갈색의 안개 속을/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교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죽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해치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짧은 한숨을 쉬면서/ 사람들은 각기 제 발치만 보고 걸었다.(Unreal City,/ Under the brown fog of a winter dawn,/ A crowd flowed over the London Bridge, so many,/ I had not thought death had undone so many./Sighs, short and infrequent, were exhaled,/ and each man fixed his eyes before his feet....)
6) 이승하;『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혜초의 길』(서정시학,2010,6). pp,17~18
7) ‘기독교시’라는 용어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문학이 기독교신앙의 문제를 다루어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반영한 문학을 말하며, 좁게는 기독교의 신을 칭송하고 그 신비를 계시하여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할 목적으로 생겨난 문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시 라는 용어 역시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신규호가 쓰는 ‘기독교시’란 의미(『한국현대시와 종교』,국학자료원.2002,p427) 역시 이런 발상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