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징명(文徵明, Zhengming Wen, 1470~1559)
중국, 명대 중기의 문인, 서가, 화가. 초명은 벽(壁), 자는 징명(徵明), 후에 자를 징중(徵仲)이라 고쳤다. 호는 형산(衡山), 정운생(停雲生)등. 오현(장쑤성 소주)의 사람. 부친 문림(文林)은 성화8년(1472)의 진사로 온주지부(溫州知府)까지 이르렀다. 시문은 오관(吳寬)에게, 서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우고, 재능이 있어 ‘시화삼절’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는 10번이나 실패했었음. 가정2년(1523), 세공생(歲貢生)으로서 경사(京師)로 나아가 한림대조(翰林待詔)가 되어 『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집에 종사했으나 가정 5년 겨울에 귀향. 이듬해, 옥경산방(玉磬山房)을 지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서는 모든 체(體)에 능했으며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풍을, 만년에는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 그 주려(週麗)한 서풍은 일세를 풍미하고 만년에도 또 승두(蠅頭)의 소해(小楷)를 쓰고 정절(精絶)을 극했다. 『정운관법첩(停雲館法帖)』을 간행함. 대표작에 『이소구가권(離騷九歌卷)』, 『도연명시(陶淵明詩)』, 『초서천자문』, 『자객열전(刺客列傳)』등이 있다. 화는 심주(沈周)의 영향을 받아 산수 · 인물 · 화조 · 난죽화 등 폭이 넓었으며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조맹부(趙孟頫)와 원말4대가를 배우고, 차차로 예찬풍(倪瓚風)의 간결한 구도에 의한 담채(淡彩), 담묵(淡墨)의 세치(細緻)한 묘법을 추구해서 심주화와는 다른 양식에 도달하고, 가정기(1522~66)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畫)의 특색을 결정지었다. 고결(高潔), 온화하고 근직(謹直)한 성격은, 축윤명(祝축允明), 서정경(徐楨卿), 당인(唐寅), 왕수(王守), 왕총(王寵)동의 다채로운 문인 중의 중심 인물이 되어 많은 문인화가를 육성해냈다. 아들 문팽(文彭), 문가(文嘉)도 서화를 잘 하였다. (⇒문씨). 후세, 심주와 함께 심(沈) · 문(文)이라 병칭되어 남종화 중흥(中興)의 조(祖)라 일컬어졌다. 대표작은 『산수도권(山水圖卷)』(1502), 『춘심고수도(春深高樹圖)』(상하이박물관) 『강남춘도(江南春圖)』, 『절학고간도(絶壑高間圖)』, 『천암경수도(千巖競秀圖)』(타이페이, 고궁박물원)등. 저에 『보전집(甫田集)』이 있다.
명나라 소주부(蘇州府) 장주(長洲) 사람. 자는 징명(徵明) 또는 징중(徵仲)이고, 호는 형산(衡山)이며, 이름은 벽(璧)이다. 문림(文林)의 아들이다. 오관(吳寬)에게 문장을 배웠고, 이응정(李應楨)에게는 서예를, 심주(沈周)에게는 그림을 배웠다. 축윤명(祝允明), 당인(唐寅), 서정경(徐禎卿)과 함께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로 불린다. 또 심주와 당인, 구영(仇英)과 함께 그림으로 이름이 높아 ‘오문사가(吳門四家)’로 불린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급제하지 못했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꿋꿋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흠모해 초빙했지만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정덕(正德) 말기에 학문과 인덕이 알려져 세공생(歲貢生)으로 천거를 받아 이부(吏部)에서 시험을 보아 한림원대조(翰林院待詔)를 제수받았다.
권세가와 어울리지 않았고, 번왕(藩王)이나 내시(內侍)를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무종실록(武宗實錄)』 편수에 참여하고, 3년 뒤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시문서화(詩文書畵)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사방의 인사들이 그의 시문과 그림, 글씨를 구하려고 찾아와 길을 메울 정도였다. 행초(行草)를 잘 썼고, 소해(小楷)에 정교했다. 그림은 산수와 화훼, 난죽(蘭竹), 인물에 뛰어났고, 실명(室名)은 옥경산방(玉磬山房)이라 했다. 원말명초 고가유로(故家遺老)들의 일화에도 정통했다. 사시(私諡)는 정헌선생(貞獻先生)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서예가 겸 시인. 한림원시조(翰林院侍詔)를 제수 받아 《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수에 임했다. 그림은 심주와 함께 남종화 중흥의 중심인물이었다.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는데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超孟홰)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자 징명(徵明) ·징중(徵仲). 호 형산(衡山). 이름 벽(璧)·소주부(蘇州府). 장주(長州: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1495년부터 1522년까지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문과 인덕이 세상에 알려져 1523년 54세 때 한림원시조(翰林院侍詔)를 제수받아 《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수에 임하고, 3년 후인 1526년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시문서화(詩文書畵)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림은 동향 사람인 심주(沈周)에게 배운 외에도 곽희(郭熙)·이당(李唐)·왕몽(王蒙) 등 원(元)나라 말기 4대가를 사숙하여 그들의 화풍을 절충한 경향이 있으나, 본령은 남종(南宗)의 산수화에 있으며 심주와 함께 남종화 중흥의 중심인물이었다. 글씨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는데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超孟頫)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일족 중에는 문인·화가가 많았는데, 차남 가(嘉), 조카 백인(伯仁)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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