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서울 밤.
형사 강민준은 여의도 한강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손에는 구겨진 서류 한 장. 그것은 누군가 익명으로 경찰청 앞에 두고 간 것이었다. 봉투에는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열어보시오.
그 안에는 두 장의 문서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어. 하나는 영어. 같은 회사, 같은 날짜, 같은 서명. 그러나 전혀 다른 내용.
민준은 빗속에서 두 장을 나란히 들고 읽었다.
한국어 문서 — "당 그룹은 포용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며, 서민 대출을 지속 확대한다."
영어 문서 — "The expansion of inclusive finance may increase exposure to higher-risk borrowers, adversely affecting asset quality and profitability."
그는 오랫동안 두 문서를 바라보았다.
같은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형사의 촉이 살아났다. 이것은 단순한 금융 스캔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이것을 바깥으로 꺼냈다.
그는 서류를 접어 내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빗줄기가 세졌다.
사건은 지금부터였다.
다음 날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KBH 금융그룹 본사 34층.
민준은 로비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와 강철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모든 것이 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진짜로 투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민준은 오랜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비서가 그를 안내했다. 34층 집무실. 이한결 부행장.
한결은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머리는 단정히 넘겼고, 넥타이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민준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만년필을 한 번 쥐었다 놓는 것을 보았다.
작은 움직임. 그러나 형사는 작은 것을 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결이 말했다.
민준은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봉투를 꺼냈다. 두 장의 문서를 테이블 위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한결은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너무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놀라야 할 자리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 민준은 그런 사람을 수십 년째 봐왔다.
"금융감독원 제출 자료와 SEC 제출 자료입니다. 공식 문서입니다."
"같은 날, 같은 회사, 같은 서명인이 완전히 다른 내용을 두 기관에 제출했습니다."
"그것은 각 기관이 요구하는 공시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민준은 그를 보았다. 한결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법적으로는요."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는요?"
긴 침묵.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강은 말이 없었다.
민준이 사무실을 나서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직원증을 달고 있었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쪽지에는 주소 하나와 시간만 있었다.
오후 6시. 마포구 망원동 239-4. 1층 카페.
민준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혔다.
오후 6시. 망원동의 작은 카페.
그녀의 이름은 서지영이었다. KBH 금융그룹 리스크관리팀 선임 연구원. 입사 7년 차.
그녀는 양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쥐고 있었다. 떨고 있는 것인지, 추운 것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서를 이중으로 작성하도록 지시받은 건 2년 전부터라는 겁니다."
"누가 지시했습니까?"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위라는 게 어디까지인지는 저도 몰라요." 그녀가 잠깐 멈췄다. "정부에서 포용 금융 지표를 은행 평가 항목에 넣었을 때부터 시작됐어요. 실적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실적을 위해 위험을 감춘 거군요."
지영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위험을 감춘 게 아니에요. 국내에서는 감춘 거고, 해외에서는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그게 더 나쁜 거잖아요. 자국민한테는 거짓말하고, 외국 투자자한테는 진실을 말한 거니까."
민준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다가 멈췄다.
그것은 범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배신의 언어였다.
사건은 예상보다 깊었다.
민준의 파트너 형사 오진우는 국제 금융 네트워크 전담반 출신이었다. 그가 24시간 만에 새로운 단서를 들고 왔다.
"민준 씨, 이거 국내 사건이 아닙니다."
진우가 펼친 자료는 뉴욕 발 속보였다. 같은 날, 워싱턴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있었다. 호르무즈 해협 개방과 이란 핵무기 불허 합의. 세계는 환호했다. 그런데 진우가 찾은 것은 환호 속에 묻힌 한 줄이었다.
합의문 어디에도 대만은 없었다.
"이게 우리 사건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민준이 물었다.
진우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KBH 금융그룹의 최대 해외 기관 투자자, 아십니까?"
"모릅니다."
"홍콩 소재 민영 펀드입니다. 그 펀드의 실질 지배 구조를 추적하면, 대만 해협 건너편으로 이어집니다."
민준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한국 금융지주가 해외 이중 공시로 자국민을 속이는 동안,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외국 자본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는 겁니다. 채권을 팔고, 헤지 포지션을 잡고."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민준은 오랫동안 천장을 보았다.
사건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국내의 금융 왜곡, 해외의 지정학적 불안정. 두 세계는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같은 실로 꿰어져 있었다.
민준은 용의자 목록을 작성했다.
첫 번째. 이한결 부행장. 이중 공시의 직접 책임자. 그러나 그는 지시를 받은 자인가, 지시를 내린 자인가.
두 번째.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 포용 금융 정책을 설계하고 은행에 할당량을 부과한 인물. 법적 책임은 없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의 진원지.
세 번째. 홍콩 펀드 매니저 캐서린 장. 내부 정보를 기반으로 한국 금융주를 공매도한 정황. 현재 소재 불명.
그리고 네 번째. 민준은 이름을 쓰다가 멈췄다.
익명의 제보자.
서류를 경찰청 앞에 두고 간 사람. 모든 것을 시작한 사람. 그가 왜 익명을 택했는지. 왜 언론이 아닌 경찰을 택했는지. 그것이 민준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제보자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은, 언제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킨다.
국회 청문회장.
경제학자 박수진이 마이크 앞에 앉았다. 의원들은 졸린 눈으로 서류를 뒤적였다.
민준은 방청석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는 청문회가 끝난 뒤 그녀를 만날 것이었다.
수진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포용 금융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민간 금융을 정책 수단으로 동원하면서 그 비용을 누가 지는지를 설계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민을 돕겠다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서민의 이자 부담을 높입니다. 고신용자의 역차별이 심화됩니다. 그리고 은행은 그 위험을 국내에는 숨기고 해외에는 공시합니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발언 시간을 지켜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수진이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습니다. 그러나 포장지를 걷어내는 것도 우리의 일입니다."
청문회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청문회가 끝난 뒤.
민준은 국회 뒷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서지영이었다. 그녀는 코트 깃을 세우고 있었다.
"당신이었군요." 민준이 말했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왜 경찰에 가져왔습니까. 언론에 줬으면 더 빨랐을 텐데."
지영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언론은 하루짜리 뉴스를 만듭니다. 저는 기록을 원했어요. 누군가의 파일 서랍 안에 남아 있는 기록. 나중에 역사가 이 시대를 들여다볼 때 꺼내볼 수 있는 것."
민준은 그녀를 보았다. 떨리는 눈.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눈.
"당신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못 돌아가겠죠."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탰다면, 그걸로 됐어요."
민준은 그날 밤 강변에 다시 나갔다.
비는 그쳐 있었다. 한강이 도시의 불빛을 반사하며 조용히 흘렀다. 서울은 잠들지 않았다. 수백만 개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수첩을 꺼냈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 썼다.
사건 요약.
피해자 — 전 국민.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피해자인 줄 모른다.
범인 — 한 사람이 아니다. 시스템이 범인이다. 선의로 설계된 시스템이, 왜곡된 인센티브 구조 안에서, 천천히 모두를 해치고 있다.
해결 — 미결.
그는 수첩을 닫았다.
멀리서 뉴스 속보 알림이 울렸다. 워싱턴발. 미중 합의 이후 동북아 긴장 관련 후속 협의 개시. 대만 문제는 별도 채널로 논의 예정.
민준은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세계는 쉬지 않았다.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강물은 흘렀다.
그리고 형사는 내일 아침, 다시 여의도로 향할 것이었다.
"진실이란, 두 장의 문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이다."
— 강민준 형사의 수첩, 마지막 줄